기독교 신자들이 흔히 착각하는 중요한 문제가 있는데, 선악을 순종, 불순종 문제와 혼동하여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둘은 엄연히 별개다. 이를 알기 위해 가장 최초의 사례인 선악과 문제부터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하와는 선악과를 먹고 나서 아담에게도 먹으라고 권했다. 순종과 불순종이 선악과 동일한 의미를 가졌다면 하와가 선악을 구별할 수 있게 된 직후에 자신이 저지른 것이 악임을 즉시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하와는 아담에게 과일을 권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와는 뱀의 속임수에 속았을 뿐 악한 존재는 아니었던 걸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아담 역시 과일을 먹고 나서 선악을 구별하게 될 수 있었지만 선악과를 먹은 행위 자체에 대한 죄책감은 없었던 걸로 보인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나서 숨었던 이유는 창세기 3장 10절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가 대답하였다. “하나님께서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제가 들었습니다. 저는 벗은 몸인 것이 두려워서 숨었습니다.”
아담은 불순종한 사실이 들킬까 봐 숨은 게 아니라 벗은 몸을 드러내는 것이 두려워서 숨었던 것이 텍스트에 명백하게 제시되어 있다.
그런데 벗은 몸인 게 왜 두려웠을까? 신이라는 거룩한 존재 앞에서 벗은 몸을 드러내는 것을 불경한 행위로 보거나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선악을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텍스트에 충실한 해석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 '불순종을 들키는 것이 두려웠다'라고 보려면,
"벗은 몸인 게 두려워서 숨었다"라고 하는 게 아니라
"벗은 몸을 두려워하는 태도를 들키는 게 두려워서 숨었다"라고 말했어야 논리적이다.
현재 성경의 구절만으로 아담이 자신의 악행 또는 불순종을 신에게 들키는 걸 두려워했다고 보는 것은 텍스트에 충실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답을 미리 정해놓고 뜻을 붙이는 자의적 해석일 뿐이고 논리적 비약이다.
또 다른 사례로는 레위기에 등장하는 나답과 아비후의 비극, 그리고 사무엘기하의 웃사의 경우를 들 수 있다. 나답과 아비후는 모세의 형이자 제사장인 아론의 아들들이다. 그들은 부정한 불을 썼다는 이유로 신이 내린 불길에 산채로 잡아먹혔다. 부정한 불이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지만 불은 선악의 구도가 적용될 여지가 없는 대상으로 물질이 빛을 내며 타는 상태일 뿐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선악이 아니라 순종과 불순종이라는 관점으로 접근하는 건 가능하다. 불은 어떤 연료를 쓰는가와 어떤 방식으로 점화를 했는가로 그 정체성을 규정할 수 있다. 부정한 불이란 특정한 연료를 쓰지 않았다거나 불을 피우는 방식이 규정에서 어긋났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절차와 규정에 대한 문제일 뿐 그것이 본질적으로 악을 내포하지는 않을 것이다. 규정과 절차가 아니라 실제로 악과 불을 연관시키려면 불을 피우기 위해서 사람을 다치게 했다거나 연료를 도둑질해 왔다는 식의 과감한 상상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를 사실대로 정확히 기술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 점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웃사는 소가 끄는 수레에 성궤를 나르다가 수레가 덜컹거려서 성궤가 바닥에 떨어지려고 하자 손으로 잡다가 신에게 죽임을 당한 인물이다. 역시 선악의 관점으로 본다면 웃사는 선한 사람에 가깝다. 성궤가 바닥에 떨어지는 것보다는 자기가 손으로 잡는 게 바람직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불순종이었다. 민수기 4장 15절, 7장 9절에 따르면 성궤는 어깨에 메고 날라야 했고 소와 수레를 이용하면 안 되고 손으로 만져서도 안되었기 때문이다. 웃사는 여러 가지 율법들을 위반하여 본의 아니게 불순종을 저질렀던 것이다. 하지만 당대 사람들은 자신들이 불순종을 저지른지 조차 몰랐다. 그들은 웃사의 죽음을 보고 속내를 알 수 없는 난폭한 신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래서 더 이상 성궤를 나르지 못하고 오벳에돔이라는 사람의 집에 맡기게 되었다.
이 방면에서 가장 스케일이 큰 케이스는 단연 다윗의 인구조사다. 인구조사는 선악과 상관없이 가치중립적인 행정 업무다. 하지만 이것은 신의 뜻에 어긋난 결정이었고 불순종이었다. 신정론적인 관점에서는 이것을 무리하게 다윗의 악행인 것처럼 해석하려고 한다. 그런 의견에 따르면 인구조사 자체가 오만이라거나 전쟁준비 또는 신의 보호를 믿지 않는 의심 같은 이유들로 억지로 엮어보려고 한다. 그러나 무리하게 선악 구도로 엮는 것은 논리적이지도 않고, 선악에 대한 판단을 인간으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는 신만의 것으로 만들어서 도덕적 혼란을 일으키는 문제를 발생시킨다. 정말로 인구조사가 악행이라면 인류는 현재까지도 해마다 엄청난 죄악을 저질러왔고 통계청은 마귀의 소굴이라고 해야 할 텐데 이런 어깃장에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까? 신림동 고시촌에 있는 교회에서 이런 현수막을 본 적이 있다. "무얼 걱정하십니까? 기도하는데" 다윗의 인구조사가 신에 대한 믿음을 부정한듯한 죄악이라면 마찬가지로 합격을 위해 기도를 하면서 공부까지 하는 고시생도 죄인이다.
다윗의 인구조사가 불순종이고 큰 징벌이 따랐던 이유는 출애굽기 30장 12절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네가 이스라엘 자손의 수를 세어 인구를 조사할 때에, 그들은 각자 자기 목숨 값으로 속전을 주에게 바쳐야 한다. 그래야만 인구를 조사할 때에, 그들에게 재앙이 미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선악 여부 판단과 상관없이 신은 인구 조사 자체를 자신의 허락이나 양해가 필요한 일로 보았다. 그리고 그런 절차를 거치지 않은 다윗의 인구조사는 심각한 불순종이었다. 그래서 신은 천사를 시켜 7만 명이나 되는 사람을 살해하는 징벌을 시행했다.
다윗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울왕의 불순종도 같은 프레임을 적용할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사무엘이 약속한 시간에 도착하지 않은 상황에서 부하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서 자기가 직접 제사를 지낸 것이나 아멜렉의 재물을 모두 불태우지 않은 걸 인간적 잣대에서 악으로 치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명백하게 불순종이었다. 따라서 사울은 그 일 때문에 큰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이렇듯 순종 문제와 선악 문제는 별개임에도 사람들이 순종을 선으로, 불순종을 악으로 받아들이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신이 내려준 율법의 전반적인 내용이 선을 권하고 악을 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도둑질과 거짓말, 간음을 하지 말고, 효도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들 그 대표적인 내용들인데 그런 율법을 지키면 대체로 자연스럽게 선을 행하게 되고 어기는 것은 악행으로 이어지곤 한다. 하지만 나답과 아비후, 웃사의 죽음과 다윗의 인구조사, 사울의 불순종처럼 예외적인 경우에까지 불순종과 악을 동일한 것으로 받아들이면 도덕적인 혼란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사랑받는 피조물이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기준을 별개의 개념으로 받아들이고 신에게 순종하고 율법을 충실하게 지키는 것이 바람직했었다.
다만 구약 시대를 지나, 예수가 율법을 완성하고 나서는 둘을 구분할 실익이 크게 줄었다. 그 내용은 마태복음 22장 37-40절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정확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새번역)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 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으니,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 가는 계명이다.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
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예언서의 본 뜻이 달려 있다.”
완성된 새 율법에 따라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과 선을 행하는 것이 서로 모순되는 경우를 찾기는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과 선함의 경계가 모호해졌고 신자들이 그것을 같은 것으로 여기게 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