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으로 접할 때 가장 먼저 탄식하게 되는 부분은 에덴동산에서의 추방이다. 순진무구한 어린아이라도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왜 사람의 손이 닿는 곳에 선악과를 두었어?"
이건 언뜻 곤란해 보일 수 있는 날카로운 질문이지만 워낙 많이 제기되었기 때문에 모범답안이 있다.
"선악과가 없었다면 사람은 신을 따를지 말지 선택할 기회 자체가 없었을 거야. 신께서는 강제로 따르게 하는 것보다, 아담과 하와가 스스로 신을 사랑하고 신뢰해서 따르기를 원하셨어. 그래서 '신의 말씀을 따를게요' 하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기회'로 선악과를 두신 거야."라고 답하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신명기 30장 19절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에서도 나타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자유의지란 아메리카노를 마실까 라테를 마실까 같은 선택의 자유가 아니다. 그런 선택은 강아지도 할 수 있고 심지어 모기도 할 수 있다. 모기는 나란히 누워있는 부부를 보고 누구의 피를 빨지 자유롭게 선택한다. 그런 자유는 어느 생명체에게나 있는 것일 뿐 인간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자유의지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유의지가 없는 존재들의 행태를 대조해 보는 게 좋다.
무생물은 당연히 자유의지가 없다. 물은 중력에 따라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갈 뿐이다. 모든 것을 휩쓸어가는 급류를 보면 마치 물에도 파괴의 의지가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일관된 중력과 유체역학의 상호작용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짐승도 자유의지가 없다. 배가 고프면 본능에 의해서 먹을 것을 찾아 나서고, 포식자가 보이면 두려움을 느끼고 도망갈 뿐이다. 물리법칙에 따르는 물처럼 본능에 의해 움직일 뿐이다.
사람도 동물이기 때문에 짐승들이 가지는 본능에 따라 움직인다. 하지만 인간은 자유의지를 부여받았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자유의지의 방점은 '자유'가 아닌 '의지'에 찍혀있다. 그 자유란 본능에 얽매인 채로 그 안에서 선택하는 자유가 아니라 그것을 초월한 의지로 선택할 자유이다. 그 의지로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선택은, 바로 신의 뜻에 자발적으로 순종할 자유다. 신의 명령은 대체로 본능에 거스르는 것들이많다. 자유의지가 없으면 인간의 행동은 끊임없이 본능에 따라 불순종과 방종으로 이어질 뿐이다. 악의 권세에서 자유로워지고 신의 명령에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자유의지의 핵심이다. 그리고 그 자유의지로 인해 사람들은 불순종에 대한 책임도 지게 된다.
참고로, 칼뱅주의자들처럼 인간의 자유의지 자체에 회의적인 시각을 가진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이 글은 자유의지의 의미와 역할을 설명하는 것으로 범위를 한정했으므로, 이외의 주제들에 관련한 논의는 다루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