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 쇼츠를 넘기던 중, 구원파로 의심받는 어느 목회자의 영상이 나왔다. 그는 한 나이 든 성도의 고민을 들어주고 있었다. 내용은 이랬다. 예전에는 분명 구원받았다는 확신이 들었던 순간이 있었는데, 세월이 흐르며 그 생생했던 감격이 흐릿해져 '그게 진짜 구원이 맞았을까' 하는 의심이 든다는 고백이었다. 그러자 목회자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인자한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구원을 받았다면 몇 년, 몇 월, 며칠, 몇 시였는지 뚜렷한 기억이 있어야 합니다. 성도님은 그게 없으시니 흐릿해지신 것이고, 안타깝지만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하신 겁니다. 하지만 좌절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죽기 전까지만 깨달으시면 되니, 앞으로 더 정진해 봅시다."
나는 이 대답을 명백한 궤변이라고 느꼈다. 그리고 이런 의문이 스쳤다. 그 사람들은 예수가 십자가 사건으로 대속을 해서 사람들은 모두 구원을 받은 상태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미 모든 죄가 대속되었는데, '그걸 내가 몇 시에 깨달았는가' 따위가 대체 구원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참고로 아래 이어지는 이런 생각들을 한 것은 2026년 9월 23일 새벽 3시다. 안타깝게도 분초까지 기록해두지는 않았다. 자정을 넘긴 시점에 정확한 시각을 아는 건 기계식 시계가 보급되고 난 이후일테니 예수의 대속과 구원의 순간을 깨달은 중세인들도 잘해봤자 이정도까지만 기억했을 것이다.
자신이 구원 받았음을 깨달았는지 여부가 실제 그의 구원에 있어 얼마나 의미없는 조건인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어떤 가난한 사람이 벌금형 받은 상황을 상상해보겠다. 그는 도저히 벌금을 납부할 여력이 없어서 검찰청에 자진출두를 해서 노역장에 가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사실은 그를 불쌍하게 여긴 친구가 그의 벌금 납부용 가상계좌에 벌금액을 이미 입금했다. 그렇다면 그는 벌금이 이미 완납되었음을 알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노역장에 가게 될까? 그런 일은 일어날 수가 없다. 검찰청은 그에게 이미 벌금이 완납되었다고 그를 돌려보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친구의 대납을 알고 모르고가 그에게 어떤 실질적인 영향을 미쳤을까? 검찰청에 자진출두 여부에 국한될 뿐, 노역장 수감 여부에는 아무런 차이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완납 사실을 알게 될 때까지 마음고생은 하고 불필요하게 검찰청까지 출두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지만 그는 직접 옥살이를 하는 몸고생은 겪지는 않았다.
여기서 구원파 계열 사람들은 조악한 비유를 제시한다. 사형수에게 대통령이 사면장을 내어줬는데 죄인이 그것을 믿지 못하고 억지를 부려서 사형을 당한다는 것이다. 그게 마치 미국에서 실제 있었던 일인것처럼 말하기까지 한다.
19세기에 앤드류 잭슨 대통령의 사면장을 받는 조지 윌슨이라는 사형수가 자기는 사면을 받지 않겠다고 우기다가 처형을 당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그 사람은 실제로 처형을 당하지 않았고 감옥에서 몇 년 더 살다가 마틴 반 뷰런 대통령의 사면장을 수락하고 무사히 출소했다. 사형은 자살이 아니다. 처형장에 가서 누군가가 목에 줄을 걸어주고 버튼을 누르든, 총을 쏘든 전기 스위치를 올려줘야 한다. 사형은 국가권력으로 집행하는 것이지 죄수의 명령으로 조력자살을 하는 게 아니다. 대통령이 사면장을 발급해준 사람인데 그가 자청한다고 해서 그를 감방에서 끌어내서 조력자살을 집행해 줄 정신나간 교도관은 없다.
1927년에 페로비치라는 사람이 태프트 대통령으로부터 사형을 사면받고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자 사면을 거부하겠다고 하면서 처형을 하거나 석방을 하라고 요구했다. 평생을 감방에서 지내기는 싫었던 사람이라 무기징역은 그에게 사면이나 감형이 아니라 증형이었던 것 같다. 그의 요구에 연방 대법원은 이런 판결을 내렸다. 사면은 죄수 개인에게 주는 '선물(개인적 은혜)'이 아니다. 그것은 공공의 이익을 위한 국가 통치 행위 즉 헌법적 권한의 행사다. 따라서 죄수가 그것을 원하든 원하지 않든, 국가의 결정에 따라 구속되는 것이며 죄수의 동의 따위는 필요 없다. 그깟 인간들의 모임일 뿐인 세속의 국가조차도 이렇게 굴러가는데 감히 피조물 따위의 은총 거부가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무나 구원받을 수 없다며 엄숙을 떨다가, 정작 신의 절대적인 주권마저 제멋대로 제한해 버리는 꼴이다.
친구가 대납을 했음에도 몸까지 고생을 하려면 다른 상황을 상상해보는 게 낫다. 형법상 죄인은 아니고 사채업자에게 돈을 빌린 채무자를 생각해보자. 그는 돈을 갚지 못해서 악덕 사채업자의 협박을 당하고 있다. 그가 곧 자살이라도 할것처럼 심하게 괴로워하자 이를 안타깝게 여긴 부유한 친구가 사채업자에게 대신 변제를 해준다. 그런데 이 사채업자는 근본이 양아치라서 친구로부터 돈을 변제받았음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채무자에게 돈을 갚으라고 넌지시 찔러본다. 마침 친구로부터 자기가 대납을 했다는 문자를 받았다. 여기서 친구를 믿지 못한다면 사채업자에게 있지도 않은 빚을 인정하고 다시 끌려다니게 된다. 친구를 믿는다면 사채업자에게 이미 돈을 다 변제했는데 무슨 헛소릴 하냐고 쌍욕을 하고 자리를 떠난다.
어쩌면 죽음 이후 마주할 풍경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지 모른다. 악마들은 죽은 자를 향해서 도덕적인 비난을 한다. 너는 구제불능의 죄인이니 너의 영원한 처소인 지옥으로 가자고. 신에 대한 믿음이란 신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믿음보다는 신이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을 위해서 죄를 대속해주기까지 한 선의를 가졌다는 것을 신뢰하는지 여부다. "나는 내 배우자를 믿어" 라고 말하는 것은 그의 배우자가 세상에 존재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배우자가 자신을 사랑하고 끝까지 서로에 대한 의리를 지킬지에 대한 신뢰를 뜻한다. 신에 대한 믿음도 마찬가지다. 험악한 악마 또는 엄격해 보이는 재판관이 "너는 지옥행이다" 라고 선언을 했을 때, 공포에 사로잡혀 위축되거나 순응해서 지옥으로 가지 않고 "사기 치지 마라. 내 죄는 이미 예수께서 대속을 하셨다. 천국의 문은 어디냐? 그리로 나를 안내해라." 라고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결기, 그게 진정한 믿음의 본질에 가깝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