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다와 라헬처럼 긴 제작노트를 쓰지는 않겠다고 다짐하며 글을 시작해 본다.
이 글에 대한 후기다.
https://b-613.tistory.com/638
구약성경의 열왕기상을 처음 읽었을 때는 별 생각이 없었다. 도입부 에피소드는 아도니야라는 멍청하고 탐욕스런 왕자가 예전에 죽은 형 압살롬 흉내를 내다가 신세를 망치고, 나중에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아버지 후궁을 달라고 조르다가 죽는 한심한 이야기였다. 솔로몬의 즉위를 화려하게 장식해 준 이름도 기억나지 않을 법한 "최단기 퇴물" 빌런일 뿐이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그건 단지 승자의 기록일 뿐이었다. 심금을 울릴법한 사랑 이야기도 가족법 교과서로 접하면 건조하고 난잡한 판례 1이 되어버린다. 실세 중 실세인 요압의 지지까지 얻어냈던 나름 똑똑했음직한 아도니야가 왜 그런 멍청한 요구를 했을까? 그의 총기를 흐린 것은 다름 아닌 사랑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되었다.
소설로 이야기를 확장하기 위해서 일단은 자기가 원하는 여자는 웬만해서는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아도니야조차도 죽음을 무릅쓰게 만든 여인, 아비삭의 캐릭터를 구축해야 했다. 최대한 매력적이고 아름답게 묘사하고자 했지만 필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그래서 인공지능에게 의뢰를 했더니 깜짝 놀랄만한 문장들을 만들어줬다. 시작부에 나온 햇살이 가마의 닫집 틈새로 들어온다는 표현부터 놀랐다. 일단 그 부분을 읽자마자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가 아름다웠다. 그리고 닫집이 뭐지?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게 실제로 있는 단어인지를 찾아봤고, 미국산 인공지능이 네이티브 한국인보다 훨씬 멋진 한국어 단어를 찾아냈다는 점에 감탄했다. 표현 자체가 다소 장황한 면이 없진 않았지만 아비삭의 아름다움이 소설에서 인물들의 움직임을 이끌어나가는 동력이기 때문에 그대로 채택했다.
그리고 솔로몬이 아비삭을 달라는 요청을 받고 화를 내고서 아도니야를 죽인 것에 대해 좀 더 낭만적인 이유를 붙이고 싶었다. 성서를 해석하는 사람들은 선왕의 후궁을 가지는 것이 당시 사람들의 눈에는 왕위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을 상징하기 때문이란 이유를 찾았지만 나는 솔로몬 역시 아비삭을 사랑했다는 설정을 만들어보려 했다. 사랑하는 아비삭에 대한 요구에 분노한 솔로몬이 형을 죽인 것으로 초기 설정을 잡았다. 아비삭의 아름다움을 과도할 정도로 설정한 것은 이런 솔로몬의 애정과 형에 대한 질투에 대한 개연성을 부여하게 되었다.
다윗이 가장 사랑했던 왕비 밧세바는 이 이야기에서 상당히 중요한 축을 담당하게 했다. 그녀는 성경에서는 표면적으로 착하고 순진하고 왠지 가련해 보이는 여자처럼 나온다. 하지만 그녀는 틀림없이 과감하게 움직여서 솔로몬을 왕으로 만든 책략가 다운 면모가 있다. 그 점을 모티프로 삼아서 겉과 속이 다른 팜므파탈 캐릭터를 씌웠다.
다윗은 열왕기상에서 총기를 잃은 할아버지 역할이었기 때문에 영웅적인 모습 대신에 인자하고 배려심이 크지만 기억이 오락가락하는 노인으로 설정했다.
처음에는 이 정도로 인물들만 넣고 싶었고 그렇게 만들었다. 등장인물이 너무 많아서 역학관계를 하나씩 만들어내는게 다소 힘들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원래 하고 싶었던 말도 아도니야가 그렇게 바보는 아니었고 단지 사랑했을 뿐이었다라는 점이었기 때문에 왕위계승 경쟁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쓰고 싶은 부분만 쓰는 걸로 시작했다.
우선 아비삭의 입궁, 아비삭에게 반한 두명의 왕자, 성숙한 아도니야와 어린 솔로몬의 엇갈린 행보, 팜므파탈 밧세바 등장과 솔로몬에 대한 가정교육, 다윗의 배려심과 다윗 사후 아비삭에게 자유를 주겠다는 약속, 왕위경쟁 및 솔로몬 즉위는 관심사 아니라서 제외하고 밧세바에게 아비삭을 달라고 아도니야가 부탁하는 장면 넣음. 아도니야가 죽고 아비삭이 절규하는 장면 및 비극적 엔딩. 여기까지가 처음에 작성한 파트들이었다.
성경의 내용에 맞추기 위해서 아도니야가 밧세바에게 아비삭을 달라고 요청하는 장면을 넣어야 했다. 그런데 밧세바는 솔로몬의 왕위계승의 일등공신이다. 아도니야가 밧세바에게 부탁을 하는 합리적인 이유를 찾기가 어려워서 밧세바에게 겉으로는 수십 년간 일관되게 인자한 새어머니를 연기한 철두철미한 캐릭터를 부여했다. 그러기 위해 밧세바는 솔로몬 이외의 모든 사람에게 본심을 보여주지 않고 순진하고 자애로운 사람으로 보이게 하는 철저하게 기만적인 인물로 보이게 앞부분 내용들을 대폭 수정해야 했다. 하지만 밧세바가 텍스트에서 직접 등장해서 직접 보여준 모습들은 대체로 마키아벨리즘에 빠진 책략가적인 것들이라 인공지능은 그 캐릭터성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아도니야가 교활한 밧세바에게 부탁을 한 것이 일관성이 없다는 비판을 했다. 설정과 전체적 맥락이 아닌 표현된 부분의 양적인 면에 영향을 받는 한계가 아직은 있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재미있었으니 그만이라고 생각했지만 다 써놓고 읽어보니 완성을 하지 않은 찜찜함이 마음에 걸렸다. 다소 의무감을 느끼고 별 흥미가 안 가는 빈 부분을 채워 넣어야 했다. 모자란 부분은
1. 아도니야가 조력자를 모으는 과정
2. 밧세바가 나단을 동원해서 다윗으로부터 솔로몬에 대한 왕위계승권을 얻어내는 장면이었다.
일단은 아도니야가 세력을 규합하는 과정이 필요했는데 가장 큰 우군이었던 요압의 포섭 시퀀스만 있으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아도니야가 요압을 포섭할 만한 미끼가 뭐가 있을까 상상하고서 그 내용대로 플롯을 대충 써봤다. 그러고는 먼저 잠정적으로 완성한 에피소드 모음을 인공지능에 입력하고서 그다음에 요압 포섭 플롯을 입력하고 이걸 넣어보면 어떨까?라고 물어봤다. 그러자 인공지능은 내용은 좋은데 이렇게 고치면 좋겠다고 완성품을 띄워줬다. 인공지능이 쓴 문장을 다시 이전 프롬프트 자리에 넣고 리런을 돌려보니 인공지능이 더 개선된 글을 뱉어냈다. 그런 식으로 3~4번 정도 재귀적으로 개선을 해보니 더 이상 고치지 못할 수준에 다다랐는데 좀 길기는 했지만 읽을만해서 그대로 가져다가 썼다. 특히 높은 철문, 난공불락의 요새, 늙은 사자, 덮쳐 오는 그림자 같은 표현은 내 기대 이상이었다. 다만 중간에 요압이 밧세바를 경멸하는 이유와 구체적인 모습, 솔로몬을 경계하는 이유는 내가 직접 써서 넣었다. 그 부분을 해결하고 나니 더 쓰는 게 귀찮기도 하고 중요하지 않은 부분의 분량이 너무 길어지는 게 싫어서 또 다른 조력자인 아비아달은 요압이 데려온 걸로 처리했다.
요압 포섭 장면 대부분은 인공지능에게 맡겼지만 구체적인 플롯을 제공해야 했기 때문에 나 역시 상상력을 발휘해야 했다. 반면에 밧세바와 나단의 활약은 성경에 그 과정이 충분히 적혀있기 때문에 내가 굳이 플롯을 짤 필요가 없었다. 다만 나단이 밧세바의 말에 협조해야 할만한 동기부여가 필요했는데 그건 내가 만들어줬다. 인공지능에게 여태껏 쓴 글을 모두 입력한 다음에 밧세바가 나단을 이용해서 솔로몬의 왕위를 얻어가는 과정을 두 파트로 나눈 후에 인공지능에게 성경의 내용에 맞춰서 써달라고 하니까 각각 한 번에 그대로 써도 될만한 글이 나와버렸다. 별로 흥미가 가는 부분이 아니라서 리런으로 개선을 시도하지 않고 그냥 가져다 썼다. 분량이 꽤 많지만, 시간은 거의 들지 않았다. 이 부분은 요즘 유행어로 '딸깍'으로 처리한 셈이다.
인공지능은 투머치토커다. 써 준 글들이 너무 길다. 한땀 한 땀 힘들여 쓴 내 글들을 별 내용도 없는 파트가 분량으로 압도해 버리는 느낌이다. 그러다 보니 각 파트 분량에 대한 배분 문제가 생기고 글 전체의 주제가 흐릿해지는 듯한 부작용이 생긴다. 다만 퀄리티가 나쁘지 않아서 억지로 줄이기도 애매하고, 술술 읽히는 편이라 읽는 재미 면에서라면 썩 나쁘지는 않았다.
내용을 전부 다 쓰고 나니까 나이도 먹을만큼 먹은 아도니야가 수년간 플라토닉 러브만 했던 걸로 보이는 게 어색해서 두 사람의 육체적 사랑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두 사람 사이에서 만들어진 아기의 존재도 넣었다. 양의 맹장으로 만든 피임기구가 벗겨졌다는 식의 묘사를 넣어볼까하다가 글 전체 느낌과 어울리지 않고 추잡해질 것 같아서 참았다. 성애 장면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 역시 야설 작가가 되고픈 마음도 없고 쓸 능력도 부족하고 인공지능에게 그런것까지 외주를 주기도 싫어서 넘어갔다. 그 아기의 등장은 결말을 좀 더 먹먹하게 만드는 효과도 가져왔다. 그 아기가 솔로몬의 소생이 아닌 아도니야의 딸이라는 점을 보여줘야 했기 때문에 아도니야의 딸일 수밖에 없는 출산 시점을 부여했다. 아비삭이 겨우 열흘 만에 웃으며 돌아온 이유 중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열어주는 장치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아기가 다윗의 눈매를 닮았다고 쓰고서 중간중간 아도니야의 눈은 다윗을 닮았고 솔로몬의 눈은 밧세바를 닮았다는 구절을 서너 번씩 반복해서 끼워 넣는 걸로 놓치지 않게 복선을 줬다. 리뷰 과정에서 인공지능들은 아직 성능이 부족한지 이런 복선과 회수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을 해야 겨우 이해했다.
그리고 인물들의 행동에 대해 논리적이거나 명확한 이유를 명시적으로 달아주지 않으면 개연성 부족으로 받아들였다. 예를 들어 등장인물이 '오늘은 안성탕면 먹고 싶다'라는 생각으로 편의점에 갔다가 불닭 볶음면을 들고 나오는 장면을 보여준다면 개연성이 없다고 지적을 하는 셈이다. 갑자기 매운 게 끌려서 혹은 광고 모델이 예뻐서 안성탕면이 하나밖에 남지 않았는데 매운 걸 못 먹는 다른 사람을 위한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배려심 그 외에도 언어화하기 어려운 오묘한 기분 등등 실제 삶에서의 행동은 논리와는 별 상관없는 다양한 이유들로 이뤄지지만 이런 진행에 대해 인공지능은 명확한 동기가 제시되어있지 않아 개연성이 떨어진다고 비판하는 경향이 있다.
다 쓰고 보니 선후 연결이 매끄럽지 않은 문단들이 보였다. 그래서 적당한 위치마다 소제목을 붙여서 흐름이 끊김을 어색하지 않게 처리했다.
글을 완성하고 느낀 건, 인공지능은 점차 발전해서 화려한 문장으로는 차별화를 만들기가 점차 어려워질 것 같다는 점이다. 인공지능이 메밀꽃 필 무렵 정도의 예쁜 문장들을 무한정 뿜어낸다면 아름다운 표현을 만드는 게 앞으로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글쓰기는 앞으로 화가 겸 가수 조영남이 붓을 놀려 줄 사람을 고용해서 "화투장을 여기에 이렇게 그려라"라고 구체적으로 지시하고 나중에 스스로 마감을 하는 것 같이 인공지능에게 글의 플롯을 주고 쓰게 한 후에 다듬고 배치해서 완성하는 형태가 될 것 같다. 언젠가는 플롯도 인공지능이 만들게 될 텐데 그때가 되면 글쓰기는 철저하게 자기만족의 영역으로 남게 될 것 같다.
"입다와 라헬"과 "아비삭 이야기"를 다양한 인공지능에게 둘 다 입력하고 어떤 쪽이 나은지를 물어보니 일관되게 입다와 라헬이 더 좋다는 평가가 나왔다.
나쁘게 보면, 먼저 쓴 것보다 평가가 향상되지 못했으니 발전을 하지 못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좋게 보자면, 내가 쓴 부분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던 글이 높은 평가를 받은 셈이라 아직은 사람 냄새의 가치가 인정받은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어쩌면 복잡한 플롯과 이야기 전반에 깔아놓은 복선과 상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1년인 줄 알았던 퍼플렉시티 무료구독이 3개월만에 강제 중지 되어서 입다와 라헬처럼 인공지능의 피드백을 다양하게 받아보지는 못했다.
아레나도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다양한 인공지능이 있지만 12000자까지만 입력이 가능한 데다가 딥식과 췐 2025-01-25 맥스(읽는 법 맞나? qwen) 같은 중국 ai와 o3 mini 이외에는 성경과 관련된 이야기를 넣으면 검열을 걸어버리기 때문이다.
아레나의 o3 mini는 퍼플렉시티에서 경험한 o3 mini보다 훨씬 멍청했는데 마치 챗지피티 원래 사이트에서 만나본 그 멍청한 o3 mini를 연상시켰다.
챗지피티나 클로드의 본래 사이트 역시 이렇게 많은 글자를 입력 받지 못해서 사용이 제한적이었다. 다양한 인공지능들 중에서는 전적으로 제미니에게 의존한 글이 되었다. 의외로 제미니 2.0 프로보다는 2.0 플래시 씽킹이 더 똑똑하고 글도 더 잘 쓴다는 느낌을 받았다.
'딸깍'으로 해결한 부분이 많지만 쓰는 동안 아주 즐거웠고, 생각보다 애정이 남는 글이다. 이전 글보다 구조적으로 복잡해서 플롯을 짜고 수정하는데는 오히려 입다와 라헬보다 손이 많이 갔기 때문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