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원래 10월 초순에 작성되었다. 즉 자신이 해탈했다고 자처하는 이상한 노인에 대한 사이비 우화(https://b-613.tistory.com/613) 이전에 작성된 것이다. 어쩌다보니 지워져서 다시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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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번뇌의 소멸을 목표로 한다. 그런데 불교가 다루는 번뇌란 외부 요인에 의한 것이기보다는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즉 스스로의 탐진치(탐욕, 성냄, 어리석음)로부터 만들어지는 번뇌를 소멸시키는 것이 불교의 목적이다.
그러나 이는 석가모니가 출가를 결심하게 된 이야기와 섞이면 굉장히 일관성이 떨어지게 된다.
그는 왕자 시절에 성 안에서 좋은 것만 보고 고통을 모르고 즐겁게 지내다가 어느 날 성 밖에 처음 나가보게 되었다. 그가 본 성 밖 사람들이 겪는 물리적이고 신체적인 고통과 절대적 빈곤에 그는 충격을 받았고 이를 해결해야겠다는 문제의식을 가졌었다. 그런데 그가 최종적으로 만들어낸 해결책은 욕심, 성냄, 어리석음을 버리고 무아와 무상을 깨닫는 것이다. 이는 처음에 그가 느꼈던 문제를 정확히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이고 상대적인 고통을 해소한 것에 불과하다. 악의적으로 해석하자면 그에게 문제를 느끼게 한 것들을 해결했다기보단 다른 문제를 해결하는 길로 도망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어떤 사람이 탐진치를 버리더라도 가난해서 밥을 먹지 못하면 배고픈 고통을 피할 수 없고 병이 걸리면 몸 아픈 건 여전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태생적으로 낙천적인 어떤 사람은 밥만 잘 먹으면 딱히 고통스러울 게 없지만 현재 굶주려서 괴로운데 이런 사람에게 불교의 가르침만으로는 별다른 해결책을 주지 못한다. 하층민 특유의 물리적 고통을 접해서 각성을 하고는 왕족과 귀족에게 절실한 정신적 고통을 해결하는 방법을 찾아낸 셈이다. 즉 일종의 동문서답으로 보일 수 있는 해결책이다. 고통을 보고 문제의식을 가졌지만 그것을 완전히 해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나마 해결이 가능한 마음의 고통이라도 줄여보고자 한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정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석가모니의 출가 계기를 보고서 그가 신체적 고통까지 해결했다고 오해를 할 위험이 있다. 그러면 고행과 삼매수행을 하면서 고통을 극복하는듯한 경험에 집중할 수 있다. 어떤 수행자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삼매수행을 하면서 하루 종일 좌선을 하다가 다리가 비틀어지거나 뜨거운 구들장에 엉덩이가 짓무르기까지 하면서 자신은 고통을 초월했다고 믿는다.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드는 것이라는 셈이다. 그러나 석가모니는 수행의 일환으로 고행을 경험했고 그것이 고통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이미 내린 바 있다. 그것들은 중도가 아니라 극단이고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왜곡한 것이다. 사마디(삼매)는 순간의 고통을 잊게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일시적 눈속임일 뿐 선정이 끝나면 후유증이 청구서처럼 돌아온다. 나쁘게 보면 마약 성분이 신경계에 작용할 때 일시적으로 경험하는 진통이나 환각과 본질적으로 다를 바가 없다. 영속적인 내면의 성장보다는 순간의 영적인 고양감에 무게가 실려있기 때문이다. 무리한 삼매 끝에 얻게 된 엉덩이의 화상은 다음 날 따가움과 가려움을 유발해서 잠들기 어렵게 하고 다음 번 참선을 방해하고 심하면 병원 신세를 지게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사실과의 단절 및 왜곡과 회피는 선망하고 본받을만하 게 아니라 오히려 석가모니의 가르침에 반하는 것이다.
달마 대사에 대한 전설 역시 수행에 대한 잘못된 관점을 심어주기 쉽다. 그는 참선을 할 때 졸려서 눈이 감기자 눈꺼풀을 잘라냈고 9 년 동안 동굴에서 면벽 수행을 했다. 깨달음을 향한 그의 열정 앞에서 육체적 고통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선종의 창시자로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고 그의 극단적 수행법이 마치 바람직한 방향인 것처럼 미화되고 있다. 그러나 석가모니가 만약 자신의 직계 제자가 그런 짓을 벌인 것을 봤다면 그것은 중도를 벗어난 것이라고 말렸을 것이다.
이렇게 육체적 고통에 연연하지 않는 수행에 대한 미화는 성 밖 사람들의 가난과 질병 등 육체적, 물리적 고통을 보고 출가를 결심했다는 석가모니의 일화와 어우러져서 마치 불교 수행이 모든 종류의 고통을 해소해 줄 수 있다는 오해를 만들게 한다. 이런 생각은 그 자체가 어리석음이자 무명이므로 또 다른 종류의 번뇌를 생산하게 될 위험이 있다.
따라서 불교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자기가 스스로 만들어낸 번뇌를 소멸하는 데 한정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석가모니가 출가한 사연이나 달마대사의 수행 내용은 종교적 위인에 대한 경외감을 가지게 할만한 흥미로운 옛날이야기일 수는 있지만 거기에 불교의 교리를 꿰뚫는 핵심이 있다는 오해는 피해야 한다. 석가모니를 각성시킨 하층민의 현실적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개인적 수행보다는 사회의 생산성을 개선하여 사람들을 풍요롭게 하고 복지 제도를 정비하여 그들의 생계를 해결해 주는 것이다. 공권력과 제도, 정치로 해결되지 않는 것은 보살과 중생들끼리 협력하여 자비와 보시를 실천함으로서 문제를 개선해 나갈 수 있다. 그런 과정을 거쳤음에도 제거될 수 없는 정신적 고통은 그가 고안한 수행법과 깨달음으로 극복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