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80살 먹은 불교 재가신자가 있다. 그는 무상과 무아를 깨달았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탐미적으로 살고 있다. 언젠가 어느 사미승이 그를 찾아와서 왜 그렇게 사느냐고 물어보니까 이런 대답을 한다.
노인
음... 자네에게는 방장 스님일 내 친구가 나를 만나보라고 시키던가? 자네가 아주 올곧고 충실한 수행자라는 말을 전해 들었어. 내 친구는 자네의 잠재력을 높게 평가한다고 말했다네. 나와의 만남으로 자네가 뭔가 얻어가길 바라고 나에게 보낸 것 같군. 나에 대해 궁금한 점이 많을 거야. 대답해 주겠네.
불교에 대한 어설픈 지식을 가지고 피상적으로만 접근하는 사람들, 특히 잘 모르면서도 억지 교훈이라도 쥐어짜 내려는 사람들은 모든 것을 '색즉시공'의 관점에서만 접근하는 경향이 있지. 나 역시 한때는 그렇게 살았었고. 그러나 나의 현재 태도는 그와 대구를 이루는 '공즉시색'을 반영하는 것이라네.
사미승
공즉시색과 어르신 같은 쾌락 지향적 생활 방식이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노인
나라는 존재는 실체가 없고 내가 추구하는 쾌락도 실체가 없이 항상 변하곤 해. 그런데 실체가 없는 놈들 즉 0으로 수렴하는 극소값끼리의 비율을 내면 정수 분의 정수의 형태가 되어 실체가 도출돼. 시각적으로 표현하면 무상을 무아로 나눈 분수의 형태로 묘사할 수 있겠지. 나는 그래서 쾌락을 추구하는 삶에서도 충만함을 느껴. 조금 더 쉽게 설명해 줄까? 만약 어떤 사람이 밥을 먹다가 밥알을 하나 흘렸다고 치자고. 그 쌀알 하나에도 영양소가 존재한다면서 그걸 찾아내서 굳이 먹으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에 집착하는 미친 사람으로 보일 거야. 색즉시공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무상만을 내세우며 이런 비유들을 하면서 헛된 것에 집착하는 건 어리석다고들 말하곤 하지.
하지만 그 떨어진 쌀알을 마주친 개미의 입장에서도 봐야 해. 개미에게 그 밥알은 버려도 상관없는 부질없는 것이 아니라 자기 체중 정도 되는 상당히 중요한 식량이야. 무아를 받아들이면 나 자신이 그 개미와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지. 세상 만물이 무상한 건 사실이야. 그러나 무아인 내가 거기서 지나쳐도 될 만할 것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네.
사미승
그렇지만 무상한 것이기 때문에 어르신이 꾀하시는 것들은 곧 변해버립니다. 오래 사셨으니까 그런 점들을 남들보다 더 많이 겪어보지 않으셨습니까?
노인
나는 무상함을 이렇게 받아들여. 인생은 무상하고 예쁜 아가씨도 언젠가는 할머니가 되지. 그래서 나는 5년에 한 번씩 애인을 바꿔서 평생 젊은 애인과 사귀었어. 아름다운 젊은 여자와 친해져 가는 그 과정에서의 가슴 떨림은 늙어서도 변하질 않더군. 마음에 드는 아가씨를 보면서 호감을 표현할 엄두도 내지 못하면서 가슴앓이하며 나의 늙음을 한탄하지도 않았고,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붙들거나 설득하려 애를 쓴 적도 없어. 나는 중도를 실천한 셈이지. 그러다가 15년 전부터는 힘도 빠지고 욕구도 없어져서 더 이상 그러지 않고 마지막 애인에게 청혼을 했어. 아내를 처음 만난 날로부터 20년이나 지났군. 그땐 참 귀엽고 상큼한 아가씨였어. 비록 이젠 아줌마가 되었지만 그래도 나보다 40살 어려. 현명하고 아름다운 과분한 여자지. 새로운 연애를 시작할 기력이 떨어진 상황에서 사귀던 김에 겸사겸사 결혼한 건 아니고 그녀 정도면 평생을 함께 해도 좋겠다는 확신이 들었달까? 내 아내는 젊음의 아름다움만을 쫒던 내 취향이 다소 편협한 게 아니었을까라는 신선한 물음을 가져다주기도 했어. 불교에서는 무상이 고통의 원인인 것처럼 말하곤 하지만 무상은 이렇게 내 인생의 시간들을 변화무쌍한 즐거움으로 채워줬어. 이게 내가 무상을 깨닫고 그에 대처하는 방식이지.
사미승
일시적 즐거움에 대한 말씀 잘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즐거움은 공의 관점에서 보자면 허망한 것입니다. 저는 어르신의 의견에 동조하기 어렵습니다.
노인
물론 제행무상, 제법무아니까 인생은 꿈처럼 덧없는 것일 수 있어. 그런데 만약 자네에게 어떤 꿈을 꿀지 선택할 능력이 있다고 치자고. 자네는 꿈이 실체가 없고 허망한 것이라는 이유로 이상형의 여인을 안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꿈 대신에 중요한 시험을 망치거나 고객에게 시달리거나 악당에게 쫓기는 악몽을 굳이 선택할 필요가 있을까? 꿈속에서 비싸고 귀한 술을 얻게 되었는데 건강이 걱정되어 주저하다가 그 술을 맛보지 못하고 잠에서 깨어난다고 치자고. 꿈속에서 그 술을 원하는 만큼 잔에 따라서 마셔버렸더라면 귀하고 비싼 술의 환상적인 맛과 향기를 즐기면서도 현실의 건강도 지키는 최고의 선택이 아니었을까? 허망하기 때문에 의미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이런 식으로 오히려 가벼워서 좋을 수도 있다는 점을 자네는 아직 이해하지 못하겠나?
사미승
하지만 쾌락 끝에는 고통이 온다고들 합니다. 그런 고통을 어떻게 감당하십니까?
노인
쾌락 끝에는 고통이 올 거라고? 반드시 그렇진 않는다네.
내가 젊었던 시절 어느 날,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 꿈에 나타났어. 현실처럼 정말 생생했지. 그 여인과 즐거운 대화를 나누며 마을을 거닐었지. 꿈속의 여인과 함께 걸었던 마을 오솔길을 실제로 산책하면 그 꿈의 기억이 떠올라서 한동안 좋은 여운을 느끼기도 했었지. 마찬가지로 나의 세 번째 애인이었던 미슈티는 바나나를 차파티에 싸서 버터에 찍어먹으면서 귀여운 미소를 짓곤 했었는데 요즘도 차파디와 바나나, 버터를 보면 그 사랑스런 표정이 떠올라서 기분이 좋아. 쾌락 끝에 고통이 올지 좋은 여운이 올지는 쾌락의 종류와 받아들이는 사람의 태도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네.
나는 쾌락의 끝에 찾아올 고통을 걱정해서 쾌락을 포기하기보다는 쾌락이 끝난 후에도 이어지는 좋은 여운을 만드는 법에 집중한다네. 한 가지 비결을 알려주자면, 나는 집착하질 않아. 나는 그 꿈속의 여인을 다시 보고 싶다든지 미슈티와 다시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 단지 때때로 찾아오는 은은하게 재생되는 기쁨을 청정한 마음으로 음미할 뿐이지.
부처님께서 생전에 탁발하실 때 아마 이런 경험을 한 번쯤은 하신 적도 있지 않을까라고 상상해 봤어.
음식을 드린 사람은 부처님을 진심으로 존경해서 최고의 식사를 대접하고 싶었어. 그래서 공양으로 얻은 음식이 기대보다 엄청나게 맛있었어.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하시는 거지.
"음식이란 생존에 필요한 정도면 족하다고 생각해 왔지만 이건 정말 최고의 요리 솜씨다. 자극적이지 않은 향신료에 간이 적절하고 좋은 원재료를 쓴 느낌은 확실하군. 부드러우면서도 쫄깃하고 한편으로는 바삭하기까지 한 독특한 식감과 오미의 향연에 나의 미각과 후각, 촉각은 기대하지도 못했던 극한의 쾌락을 느끼고 있어. 이 정도면 천상의 음식이라고 칭하기에도 손색이 없겠어."
이렇게 구구절절하게 음식으로부터 오는 즐거움을 생생하게 느끼는 게 그분답지 않다고 보일 수도 있어. 그러나 부처님은 항상 정념 수행을 하시기 때문에 감각적 자극에 민감하게 열려 있으셔서 그렇게 반응하실 수 있지. 식사를 마치고는 이렇게 생각하셨어.
"정말 행복한 식사였다. 음식의 맛에 대해 분별심을 가지는 것이 딱히 바람직한 태도는 아니지만 별다른 사고의 과정 없이 미각적으로 맛있다고 느껴지는 것조차도 부정하는 것은 오히려 거짓이고 무명이다. 나를 위해서 대단한 정성을 들여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준 그에게 행복이 가득하길. 그러나 나는 다음 끼니에도 이런 음식을 다시 접하게 될 거라고 바라지도 기대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나중에도 가끔씩 그 행복했던 식사의 기억이 떠오르면 평화롭게 미소 지으시는 거지.
사미승
그런 감각적 쾌락은 영속적이지 않고 일시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흘러가버리는 것들에 대한 갈애에서 벗어나야 영원한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노인
내 인생은 항상 행복했어. 쾌락은 일시적이라지만 인생의 시간은 한도가 있고 나는 그 한도를 모두 일시적이라고 평가절하되는 그 기쁨들로 가득 채워 넣은 셈이지. 거기에는 번뇌가 침투할 틈이 없었어. 밥을 먹는 것도 일시적인 포만감을 주는 거잖아. 그게 일시적이라고 굳이 식사를 거부하는 건 건강을 해칠 뿐이지. 탐욕을 쫒지 않는 것은 번뇌를 버리기 위한 수단일 뿐 그것 자체가 목적은 아닌데 사람들이 본말을 전도해서 탐욕 자체를 죄악인 것 마냥 오해하더군. 그런 것도 일종의 무명이야.
사미승
그러나 쾌락에 대한 집착은 번뇌의 원인이 됩니다.
노인
나는 집착하지 않는다고 앞서 말했었다네. 자네가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것 같으니 조금 더 설명하겠네. 집착이란 내 뜻대로 안 되는 것을 쫒다가 생기는 거야. 때로는 현실성 없는 욕망을 스스로 억제한 적도 없지는 않았어. 예를 들어 나는 나의 영원한 젊음과 건강함, 아름다움 유지 같은 현실성 없는 바람을 가지지 않아. 그래서 나는 늙어감에 대해서는 신체적 불편을 느낄지언정 거기서 번뇌를 느끼지는 않지. 늙기 싫다는 헛된 마음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야. 나는 그것을 중도의 실천이라 생각해. 나는 내가 가질 수 있는 것들을 원했고 대체로 그것들을 얻으며 살아왔어. 그러니 당연히 번뇌도 없었지. 내가 앞으로 몇 년이나 더 살 것 같나? 여태껏 아무 번뇌 없이 잘 살아왔는데 그 얼마 남지 않은 기간에 뭔 놈의 번뇌가 생기겠어? 젊고 아름다움을 상대와의 사랑을 추구하는 것이 반드시 번뇌의 원인이 될 수는 없어. 내가 그 산 증인이지.
어떤 호랑이가 소를 사냥할 때 성공률이 100%라고 치자고. 배고플 때 잠깐 움직이면 수 백 킬로그램짜리 고기가 당연한 듯이 생기는데도 그 호랑이가 지나가는 소떼를 보고 집착이나 번뇌가 생기겠어? 물론 날아다니는 까마귀나 커다란 코끼리를 잡겠다고 날뛰다가 끝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면 번뇌가 생길 수도 있겠지. 다만 그 호랑이는 쇠고기만으로도 크게 만족하면서 코끼리에게 덤비는 무모한 짓은 하지 않았어.
물론 모든 사람이 나처럼 살 수 있는 건 아니야.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석가모니의 말씀대로 욕심을 버리고 슴슴하고 담백하게 살아가는 게 번뇌를 소멸하는 거의 유일한 길일 거야. 아마 자네도 그렇게 살아야 할 테고. 그러니 무작정 날 따라 하지는 말게. 나의 삶이 자네에게는 까마귀나 코끼리일 수 있으니까.
사미승
그렇게 쾌락을 좇으며 사시면서 어떻게 윤회에서 벗어났다고 자신하십니까? 어르신의 깨달음은 단지 주장일 뿐 검증된 것이 없어 보입니다. 해탈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보이는 삶의 자세와 차이가 너무 커 보입니다. 혹시 어르신 스스로 느끼신 깨달음과 해탈이 착각이었을 가능성에 대해 의심하면서 다음 생을 걱정하신 적이 단 한번도 없었습니까?
노인
다음 생애에는 어떡하냐고? 재미있는 질문이군. 그런데 그런 건 없어. 자네의 눈빛에 '저런 이상한 노인이 윤회를 벗어났다는 걸 믿을 수 없다'라는 의심이 비치는군. 그럴 리 없겠지만 자네의 의심대로 혹시 내가 해탈하지 못했다고 치자. 그러나 내가 걱정할 건 아무것도 없어. 무아론에 의하면 윤회하는 건 나와 동일성 있는 실체가 아니라 업의 승계일 뿐이라서 나하곤 상관없는 일이야.
이건 무아를 깨닫든 말든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일어나. 중력을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중력이 똑같이 작용하듯 말이지. 그래서 따지고 보면 나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든 내세를 걱정할 필요는 없어. 석가모니께서도 내세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는 태도를 보이셨지. 그분은 업보가 많은 사람에 대해서도 이번 생은 업보를 줄이는데 집중하고 다음 생에 깨달음을 얻자는 식으로 내세를 염두에 둔 주장을 하신 적이 없어. 오직 현세의 일만 생각하셨지.
혹시 자네 의심처럼 내가 거짓된 깨달음으로 인해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했더라도 내 업을 이어받은 내가 아닌 그 존재에 대한 책임감이나 연민은 전혀 없어. 그 존재가 내 카르마를 이어받았다면 나의 영성과 재능과 외모, 삶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 타인에 대한 연민과 자비심을 닮았을 테고 그로 인해 나처럼 번뇌 없이 행복으로만 가득 찬 인생을 선물 받게 될 거니까. 다시 말하지만 불교의 최종 목적은 번뇌의 소멸이야. 해탈과 열반을 통해 윤회를 끊으려는 이유는 윤회 자체가 나쁜 게 아니라 윤회로 이어지는 삶이란 영원한 고통이기 때문이야. 그런데 나의 삶은 고통이라기보단 축복이었기 때문에 굳이 윤회를 끊겠다는 집착을 할 필요가 없어. 그래서 나는 윤회를 하든 말든 개의치 않아. 윤회가 끊어졌다면 깨달았다는 증거이니 그것대로 좋고, 끊어지지 않았다면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또다시 이런 식으로 행복하게 살면 되거든. 그래서 나는 그런 문제에 전혀 연연하지 않아. 부처님은 절대로 고리타분한 도덕주의자는 아니셨어. 번뇌의 소멸이란 최종적 가치에 집중하셨을 뿐이지.
사미승
어르신의 말씀들에 논리적인 반박이 쉽지 않지만 심정적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어르신께서 잠시 즐기다가 버린 젊은 여인들을 생각해 보세요. 너무 이기적이지 않으셨나요? 여자, 아니 사람은 싫증 나면 버려도 되는 장난감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게 살아오신 여정이 과연 깨달은 사람의 자세인지 저는 의심스럽습니다.
노인
5년에 한 번씩 바꾼 그 애인들을 생각하면 내가 잘못을 저지른 게 아니냐고? "버렸다"라는 표현을 보니 자네가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군. 나는 5년마다 결혼을 새로 한 게 아니라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을 뿐이야. 그리고 그건 자네 말대로 "잠시"가 아니야. 자네도 알겠지만 결혼하지 않으면서 한 여자랑 연애하는 기간으로 5년은 꽤 긴 시간이야. 볼 것 못 볼 것 다 겪으며 단물이 완전히 빠진 상태가 되는 거지. 그런 상황에서 늙어가는 애인의 모습을 보면서 사랑이나 설렘을 느끼기보다는 오히려 일종의 책임감에 빠져서 그녀와 영원히 함께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면 그게 오히려 번뇌를 부르는 집착이었을 것 같아.
게다가 그녀들은 나와 헤어질 때에도 충분히 젊었어. 오히려 너무 오래 데리고 있었으면 나이가 차서 다른 사람과 만나기 어려웠을 거야. 그리고 그녀들과 헤어질 때 그녀들 시각에서 나는 처음 만났을 때보다 5년 더 늙어서 매력과 생기가 줄어든 남자가 되어 있었지. 그래서인지 대체로 결별은 상대 쪽에서 요구했었어. 그동안 즐거웠고 고마웠지만 이제는 자기도 결혼할 나이가 가까워졌다면서 말이지.
그녀들은 나와 함께 했던 5년이란 세월 동안 나와 삶을 공유하면서 자연스럽게 삶에 대한 나의 태도에 공감하고 나에 대한 집착을 쉽게 내려놓더군. 나 같은 사람과 5년이나 사귀면 어떻게 변하게 될지 생각해 보게.
나와 헤어지고 나서 그녀들은 내가 가르쳐 준 인생의 지혜와 내가 나누어준 재산을 가지고 좋은 남자와 결혼해서 각각 행복한 가정을 꾸렸어. 때때로 우정과 감사의 편지를 주고받기도 하면서 친구로서 좋은 관계를 이어 나가고 있어. 그녀들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나의 한정된 일생 중 특정한 기간 동안을 충만하게 채워준 그녀들 각각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어.
사미승
저의 공부가 아직 부족하여 어르신의 말씀들은 제 능력으로는 교리적인 반박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불교에 대한 깊은 지식을 자의적으로 악용하신 자기 합리화에 불과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의심이 듭니다.
노인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처음 보는 자네에게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구구절절 말하는 것 같나? 다소 특이한 나의 삶에 대해 타인에게 정당하다는 인정을 받아야 할 이유 같은 게 있을 것 같아? 아니야. 자네 같은 중생에게 인정 받든 비난당하든 그게 무슨 대수겠어. 그리고 그건 부처님 앞에서라도 다를 건 없어. 이건 내 문제이고 누군가의 판단에 좌우될 일은 아니기 때문이지.
다만 나는 자네에게 법보시를 하고 있는 거야. 깨달은 자라면 보살도를 실천하는 건 당연하고 일종의 의무감에서 하는 거지. 어느 정도 배움이 쌓이고 나서는 널리 알려진 고정된 길만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깨달음을 위한 사고의 폭을 넓혀보게. 그리고 다시 생각해 보게. 자네가 납득하기 어려워하는 나의 이러한 삶이 팔정도에서 벗어난 점이 있는지.
물론 자네처럼 아직 배우는 단계에 있는 사람은 정석적인 방법을 엄격하게 따르는게 좋아. 내 친구가 자네를 칭찬한 이유를 알 수 있었던 만남이었어. 하지만 꼭 기억하게. 무상과 무아, 공, 중도 이외의 모든 것은 방편이야. 널리 알려진 교리들도, 까다로운 계율들도, 그리고 내 이야기도 모두.
속세의 자극을 견디지 못하고 산속으로 도망가서 욕망을 억압하는 것만이 옳은 방법은 아니라네. 그런 사람들은 깨닫고 나서도 자신의 청정심이 세파에 흔들릴까 봐 하산하질 않아. 나는 그런 걸 중도가 아닌 극단이라고 봐. 아미타 부처님의 법장 보살 시절 서원으로 건립된 극락정토에서는 번뇌가 없지. 거기는 공덕을 많이 쌓은 사람들이 번뇌의 방해 없이 수행을 해서 깨닫는 곳이야. 번뇌와 속세의 유혹을 피해서 산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아미타 부처님의 초대를 받지 못해서 자신이 스스로 구축한 극락정토로 피신하여 수행을 하고 있는 셈이야. 번뇌와 유혹으로부터의 자유를 그것의 극복이 아닌 도피로 이룬 셈이지.
그래서 속세의 생활을 유지하면서도 깨달음을 얻고 번뇌를 다스리는 게 오히려 더 높은 경지일 수도 있어. 자네가 내 방법을 따라 할 수는 없겠지만 자네가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을 거야. 자네는 아직 젊잖아. 그러다 안되면 남들이 모두 하는 방법을 따르면 되는 거고.
중도에 따라 정정진해서 이번 생에 성불하시게. 말했다시피 다음 생은 큰 의미가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