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유심조란 “모든 것은 오직 마음에서 지어내는 것”이라는 뜻이고 우리나라에서는 원효대사의 해골물 설화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를 잘못 이해하면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따라 달렸다"라고 잘못 해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더러운 물을 보고서 "더러운지 깨끗한지는 우리의 마음이 만들어낸 허상"이라고 말하면서 그 물을 마시고 병에 걸리거나, 불편한 자세로 하루에 12시간 이상 좌선 자세를 수년간 유지하면서, '불편함은 마음에서 만들어 낸 허상을 뿐 별 것 아니다'라고 생각하면서 억지로 버티다가 연골과 인대를 다쳐서 만성적인 다리 통증에 시달리게 되는 것은 일체유심조를 잘못 이해하고 중도에서 벗어나 극단을 저지른 것이다. 

 

원효대사가 해골물을 마시고 아무 탈 없이 '더러움은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느낀 것은 종교적 측면에서 극적인 교훈을 주는 효과는 있지만 그것이 과연 마음이 지어내는 것을 설명하는 가장 적절한 사례로 볼만한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더러움과 깨끗함은 관념적이거나 감성의 문제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위험과 안전의 문제일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가 마신 물에 해골이 부패하면서 발생한 해로운 세균들이 우글거렸다면 그가 사실을 어떻게 인식했든 상관없이 감염되어 고생을 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는 더러움은 마음이 지어낸 것이라고 깨닫기보다는 더러움은 실제로 해로울 수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을 것이다. 원효대사의 설화에 비해서 인상적이지는 않지만 아래와 같은 사례를 제시하는 게 '마음이 지어내는 것'이라는 의미를 명확하게 설명하기에는 오히려 적합할 것 같다.

어떤 사람이 오디오샵을 어러 번 방문해서 수 차례의 청음과 망설임 끝에 한 앰프를 구입했다. 자신이 오랜 시간과 열정을 거쳐서 고른 만큼 애착이 갔고 그 소리가 너무나 좋게 들렸다. 자랑을 하기 위해서 오디오 애호가 친구에게 보여줬더니 소리를 듣고는 갸우뚱하다가 특정 음역에 디스토션이 있고 전반적인 밸런스가 무너져있다는 평가를 했다. 그 의견을 접한 후 검색을 해보니 그 앰프는 그런 고질적인 단점이 있는 제품이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소리를 다시 들어보니 실제로 거슬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 이후 천상의 소리를 들려주던 그 오디오는 껄끄러운 소리를 내는 애물단지로 변해버렸다.

 

팔정도 중 정견은 일체유심조와 대립적으로 보인다. 정견이란 사물이나 현상을 있는 그대로, 즉 객관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마음의 착각이나 편견 없이 현실을 바르게 인식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일체유심조를 근거로 대면서 외부 세계를 내 마음대로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것은 정견에 어긋나므로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그러나 정견과 일체유심조는 대립적이기만 하지 않고 오히려 상호보완적이다.

정견은 석가모니가 직접 가르침을 내린 수행법이다. 올바르게 세상을 보기 위해서는 착각이나 편견 없는 객관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한편 일체유심조에 따르면 모든 것은 오직 마음에서 지어내는 것이다. 때문에 사람은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기 어렵고 착각이나 편견에 빠지기 십상이다. 사물이나 현상을 객관적으로 보려는 노력은 마음이 만들어낸다. 따라서 마음에 의한 왜곡 가능성을 내포한 일체유심조의 존재를 염두에 두고 자신의 마음이 객관적 관점을 유지하고 있는지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 그 과정에서 자기의 마음과 외부세계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정념 수행과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사유하는 정정 수행을 병행하여 자신의 편견과 착각을 깨닫게 된다면 객관적 관점을 유지하는데 효과적이다.

 

이해하기 쉽게 논리 구조를 정리해 보면 이렇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다.

모든 것은 마음에서 지어낸다.

따라서 마음에 휘둘리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있는 그대로 보는 것 역시 마음에 휘둘리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내 시각이 과연 객관적인지도 수행을 통해서 되돌아봐야 한다.

 

정견 없이 단지 '모든 것은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생각에 머무는 것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중심이 나의 마음일 뿐'이라는 자기의 마음에 집착하는 아상을 키워서 무아의 깨달음에서 멀어지게 될 위험이 있다.

 

'마음'이라는 쉬운 표현을 사용하면 메시지 전달 자체는 쉽지만 정확한 의미가 오해받을 가능성이 있다

불교에서 '식(識)'은 외부 대상을 인식하고 판단하는 마음의 작용을, '상(相)'은 그렇게 인식된 대상의 모습이나 형태를 뜻한다. 따라서 일체유심조, 즉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다'는 의미는 단순히 '마음이 지어낸다'기보다 '식'이라는 마음 작용을 통해 '상'이라는 현실 세계가 만들어진다는 '식이 상을 만든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고 부작용이 적을 것이다.

 

과거에 썼던 이런 글들은 이 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 나온 생각이다.

https://b-613.tistory.com/266
https://b-613.tistory.com/346

Posted by 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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