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풍수와 선무당은 사람을 잡는다. 나 역시 어설픈 지식으로 무리한 결론에 도달한건 아닌가라는 걱정이 들긴 한다.
기독교 신약성경에는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밧줄(낙타)이 바늘구멍을 통과하는것과 같다는 구절과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는 구절이 있다. 기독교는 언뜻 가난한 자를 위한 종교인듯 보인다. 반면 불교의 교리를 분석해 보면 귀족을 위한 종교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마음을 비우고 욕심을 버리라는 부처의 가르침과는 대조적이라 느껴진다.
불교 교리에 의하면 세상은 무색계, 색계, 욕계로 나누어져 있고 욕계는 천상, 인간, 아수라, 축생, 아귀, 지옥으로 이루어져있다. 이 중에서 축생, 아귀, 지옥을 3악도라고 한다. 이는 반드시 인간계와 분리되어 있다고 볼 것 만이 아니라 인간이 겪는 고통을 형상화한 세계라고 볼 수도 있다.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나 무언가의 노예처럼 살아가는 삶을 축생이라고 볼 수도 있고, 극단적인 경제적 궁핍을 아귀라고 볼 수도 있다.
삼악도에서는 살아가는 고통이 너무 크기 때문에 공덕을 쌓고 도를 추구할만한 정신적 여유가 없다. 따라서 해탈에 이르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한다. 한편 인간계는 좋은 일과 고통이 적당히 섞여 있어서 도를 추구하는데 가장 적합하다고 한다.
불교의 가르침으로도 순수하게 마음만으로 발생한 문제가 아닌 현실적 고통은 극복할 수 없다고 보는 듯 하다.
불교는 인간의 해탈과 열반을 목표로 한다. 해탈이란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는 욕심과 어리석음과 업장에 가려져 있는 인간에게 내재된 불성을 발견하여 이를 실천함으로써 달성할 수 있다. 해탈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서 수 많은 윤회 과정을 거치면서 공덕을 쌓고 업식을 제거하여 겨우 달성할 수 있게 된다.
전생의 업장이 두터우면 현세에는 나쁜 조건에서 살게 된다. 현세에 나쁜 조건에 있더라도 공덕을 쌓고 업을 줄이면 내세에는 좋은 조건으로 살 수 있다. 지속적으로 공덕을 쌓으면서 점점 좋은 조건으로 윤회를 계속하다 보면 해탈에 이를 가능성은 커지게 된다.귀족이나 왕은 전생에 공덕을 많이 쌓은 사람들이고 앞으로 성불하게 될 가능성이 가장 큰 사람들이기도 하다. 불교는 보시를 권장한다. 보시를 하는 사람이 있으면 받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 보시를 하는 사람은 경제적 여력이 있는 사람이고 받는 사람은 없는 사람이다. 주는 사람은 공덕이 쌓인다. 귀족은 육체적, 경제적 고통이 적어서, 공덕을 쌓기 쉬운 조건이고 마음을 공부할 정신적, 경제적 여유가 많아서 하층민에 비해 정신수양을 통해 성불할 가능성이 높다. 인도에서 초기 불교는 평민이나 하층민보다는 크샤트리아 계급의 지지를 받았다. 우리나라의 불교는 처음에는 왕의 지지를 받다가 귀족층으로 옮겨졌고 원효의 정토종 보급으로 비로소 백성에게 전파되었다.
그렇다면 현실적 문제에서 고통을 겪고 공덕을 쌓기 어려운 계층인 사람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 그래서 생긴 개념이 염불이다. 염불이란 부처의 이름을 되뇌이며 부처의 공덕을 기리는 것이다. 마음 공부를 할만한 여유를 내기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은 염불을 하면 업장을 줄여서 내세에 좋은 조건으로 태어날 가능성을 키울 수 있다. 일단 이번 생은 염불에 전념하고 성불을 위한 본격적인 공부는 내세를 기약하는것이 좋지 않을까는 생각이 든다.
마음 비우기와 욕심 버리기는 그것이 가능할 정도로 여유가 있는 사람이 실천할 수 있는 수양 방법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 당장 굶고 있어서 비울만한 것이 전혀 없는데 비우려고 하면 굶어 죽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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