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에 만년필이 없었다. "시험장에 만년필을 데려가서(?) 시험장의 기운을 받아오는" 혼자만의 의식을 치르느라 만년필은 가방에 들어있었다.
글씨 연습을 하려고 했는데 책상에서 손에 집히는게 볼펜 뿐이라 그냥 볼펜으로 글씨를 써 봤다.
글씨 모양이 상당히 좋았다. 스스로 엄청나게 만족하고 있다. 답안지에 이 정도 필체로만 쓴다면 글씨 걱정은 안해도 될 듯 하다. 다만 아쉬운건 속도다.
글씨를 연습하기 전에는 볼펜보다는 만년필 글씨체가 그나마 보기가 나았다. 만년필로 연습을 해서 모양은 좀 나아졌는데 그래도 크게 자신은 없었다. 그러나 막상 볼펜으로 글씨를 써 보니 만년필보다 볼펜 글씨체가 훨씬 나았다.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봤는데, 아마도 필압 때문인 듯 하다.
만년필은 종이에 펜 촉이 닿기만 해도 글씨가 진하게 써 진다. 손에 힘을 빼니 획을 그어도 삐뚤삐둘 그어진다.
반면 볼펜은 손에 힘을 주지 않으면 잉크가 잘 나오지 않는다. 글씨를 쓰려면 펜에 힘을 약간 줘야 한다.
그 동안 글씨 쓸 때 힘을 주지 않는게 좋다고 생각해 왔었다.
일단 하루에 30장을 써 내려가야 하는 시험이기 때문에 손에 힘을 너무 많이 주면 나중에 손이 아프다.
10여년 전에 "호기심 천국"에서 글씨 못쓰는 사람의 특징 중 하나가 펜을 너무 눌러쓴다는 내용을 방영하는걸 봤었다.
당시 전교적인 수준의 악필이었던 나 역시 글씨 쓸 때는 연필에 힘을 많이 주고 썼었기 때문에 그 주장이 더 믿을 만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었다.
유노크 같은 중성펜을 쓰면서 부터 필압이 많이 낮아졌고 만년필은 거의 힘을 주지 않고 쓰고 있다. 글씨 모양이 좋아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글씨 못 쓰는 사람의 전형적인 습관에서 벗어났으니 다행이라 생각하면서 약간의 위안을 삼았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글씨 잘 쓰는 사람이 꼭 손에 힘을 안 주고 쓰는건 아니다.
최연순 평가사는 눌러 쓰다보니 만년필 펜촉이 벌어져서 일 년에 한번 씩 펜촉을 갈았다고 한다. 답안지를 보면 글씨가 인쇄한 듯 정말 깨끗하다.
성식이 형은 플러스펜만 썼는데 플러스펜을 하도 눌러 써서 몇 번 쓰다 보면 펜 끝이 붓펜처럼 변형된다. 답안 써 놓은 걸 봐도 붓펜으로 쓴 것 같아 보였다.
그리 잘 쓰는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나보단 잘 썼으니, 기열이형 커플도 생각난다. 그 커플은 하도 눌러쓰는 바람에 펠리칸 M400을 몇 번 써 보지도 못하고 펜촉을 망가뜨려버렸다.
성민군도 생각이 난다. 글씨가 정말 좋았고, 속도도 정말 빨랐다. 실제 시험에서 그 잘난 글씨로 110점을 썼는데 이론 68점을 받았다고 한다. 공부를 그리 열심히 한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에 글씨의 위력을 실감하게 한 사례다. 그 역시 글씨 쓸 때 너무 눌러 써서 볼펜 볼이 빠진 적도 있다고 한다.
별로 안 눌러 쓰고도 잘 쓴 분은 선주 누님이 생각난다. 만년필을 제법 오랫동안 쓰셨는데 펜촉 굵기는 전혀 두꺼워지지 않았다.그래도 모양 만큼은 또박또박 균일한 게 컴퓨터 손 글씨 폰트 같았다.
당분간 글씨 연습은 볼펜으로 해서 또박또박 쓰는 습관을 손에 익힐 필요가 있을 듯 하다.
그래도 결국 시험장에선 만년필로 가야 한다. 손에 힘을 계속 주고 쓰려다 보면 법규 3번문제 부터는 손가락에 마비 증세가 올 것 같다. 또박또박 쓰는 모양은 볼펜으로 잡고, 모양을 잡고 나서 실전에선 만년필로 가는게 현명할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