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사는 이유와 살아야 하는 이유

누미 2013. 8. 4. 13:54

며칠 전에 사는 이유에 대해 그림까지 그려가며 뻘 글을 하나 썼었다. 며칠동안 곰곰히 생각하다가 잠정적으로 결론을 낸 거라서 나름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는데 곧 지워버리게 되었다. 생각을 시작했을 당시 메모했던 글을 보니 논의 방향이 많이 왜곡되었다는걸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좀 더 고민을 하다보니 보다 포괄적인 관점이 떠오르게 되었다.


사람이 사는 이유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종종 사는 이유와 살아야 하는 이유를 두루뭉실하게 섞어서 생각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영화 추격자에서 연쇄살인마는 망치를 들고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희생자에게 '네가 왜 살아야 하는지 말해봐'라고 묻는다. 숨이 막히는 장면이었다. 저 상황에서 난 뭐라고 대답했을까? 그리고 저 여자는 어떤 대사를 하게 될까 순간적으로 너무 궁금했다.

희생자는 '딸이 있어요'라고 대답한다. 말로 표현하기 애매한 여운이 한참 동안 남았다.

사는 이유와 살아야 하는 이유를 구분짓는 예로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극적인 장면이었다.


지워 버린 뻘글에서 썼던 그림을 약간 바꿔서 재활용해 보겠다.

사람들은 뭔가 긍정적이고 삶을 풍성하게 하는 이유를 살아가는 원동력으로 삼는다. 예를 들어 부자가 된다든지, 진리를 탐구한다든지, 사회적인 존경을 받는다든지 등 자아실현에 대한 욕구는 사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점선으로 표시한 이유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절대적인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는 이유는 예를 든 종류에 국한되지 않고, 매우 다양할 것이다.

http://b-613.tistory.com/6

http://b-613.tistory.com/356



반면 사는 이유를 잃어버린 사람은 살아야 하는 이유 때문에 살게 된다. 사는 이유를 잃는 이유는 허무감, 절망, 삶 자체에 대한 회의 등 극심한 스트레스와 정신적 충격 그리고 의욕상실, 무력감 등 때문일 것이다.

살아야 하는 이유는 생존 본능, 의무감 같은 부정적인 덕목들이다. 이런 이유들은 삶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하거나 기쁨을 주거나 삶을 풍성하게 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마침 예전에 썼던 글이 하나 있다. 지금 말하는 내용과 완벽히 맞아 떨어지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는 비슷한 취지인 글이다.

http://b-613.tistory.com/181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에게 자살하지 말 것을 설득할때는 '살아야 하는 이유'를 말해주는 경우가 흔하다. 예를 들어, '가족을 생각하십시오', '자살하면 지옥갑니다' 류의 말은 의무감 내지 죄책감을 자극할 뿐이다. 그런 설득은 성공하더라도 당장의 죽음을 연기할 수는 있겠지만 잠재적인 자살 위험을 제거하는데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삶은 단단한 기반 위에 올라오지 못하고 대롱대롱 매달린 불안한 상태를 지속하게 될 뿐이다. 좋은 의도로 말렸더라도 '당신이 내 눈 앞에서 죽으면 당신 시체를 내가 치워야 하니까 나중에 죽으라'고 말하는 것과 결과적으로는 다르지 않다.



혼란과 고통에서 벗어나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는게 아니라 사는 이유를 찾아야 한다.



두가지 개념을 혼동하는 경우 '사람이 사는데는 이유가 없다 다만 살아갈 뿐이다' 라는 안일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삶의 궁극적 무의미성

http://b-613.tistory.com/9

은 어쩔 수 없지만 그런 종류의 결론을 내버리는 것은 험난한 풍파를 해쳐나가야 하는 고단한 인생을 살아가는데 별 도움은 되지 않는 것 같다.


'다만 살아갈 뿐'이란 사는 데는 이유가 없기 때문에 그 이유를 찾기 보다는 그 순간 순간을 충실하게 살아가면 그 뿐이라는 자세이다. 산을 오를 때 정상쪽 을 바라보지 않아도 등산로를 따라 묵묵히 땅만 보고 올라가면 생각지도 않는 사이에 어느덧 정상에 도달할 수 있다. 일견 타당해 보이지만 중요한 문제점이 있다.


그 관점에서 삶을 충실히 꾸려나간다는 것은 탑을 쌓는 것과 같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는 속담이 있다. 튼튼하고 아름다운 재료로 안정된 구도로 정성들여 쌓아올리면 훌륭한 탑을 완성할 수 있다.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1층을 쌓는다. 그리고 1층을 밟고 올라가서 그 위에 2층을 올린다. 그리고 그 위에 올라가서 3층을 올린다......그렇게 탑이 완성되었다. 그런데 바닥이 모래밭이다. 공들여 쌓은 탑은 바람이 세게 불기만 해도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인다.

사는 이유를 정하지 않고 다만 살아가는 것은 사상누각도 되지 못하고, 다만 공중에 떠 있는 탑일 뿐이다. 바닥이 없다는 것을 자각하는 순간 무너져 버릴 수 있다.


'다만 살아갈 뿐'을 넘어서, 사는 이유를 만드는 것은 삶을 풍성하게 가꾸어 나갈 튼튼한 바닥을 만드는 일이다. 안 만들어도 '살아야 할 이유' 때문에 생존 자체에는 지장이 없으나 혼란을 피하고 평온을 얻기 위해서 바닥 만들기는 필수적이다.


전에 썼던 그림을 조금 고쳐서 재활용해 보겠다.

삶 자체는 근본적으로 무의미하다. 바닥으로 삼을만한 고정적인 것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각자의 신념에 따라 닻을 내릴만한 믿음은 있을 수 있다.


확고한 믿음으로 삶의 이유를 의지할 수 있을 기반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이를 확신이라고 부르겠다. 가장 흔하고 확고한 확신은 종교다. 혹은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같은걸 확신으로 삼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삶의 이유로 삼을만한 기반은 '왜?'라는 의문을 갖지 않는 맹신으로 만들어낸 허상이기 때문에 그것 자체는 어디에도 기반하지 않고 스스로 그 위치에 고정되어 있을 뿐이다.

확신을 만들어 내는것은 사람의 성격에 따라서 쉽지 않을 수 있다. '확신'은 가치 명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으로 인해 사는 이유를 도출해 낼 수만 있다면 사실 명제일 수도 있다. 데카르트 같이 극단적인 사람이라면 '코기토'에서 시작할 수도 있다. 삶의 근본적인 무의미성에 대한 자각 때문에 삶은 최종적 맹신으로 만들어낸 바닥(확신)에 안착하지 못하고 아직 공중에 떠 있는 형태다.



맹목적 믿음으로 만들어낸 기반이 삶의 이유로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삶의 이유로 연결시키는 연결고리가 필요하다. 그림처럼 널빤지를 대고 못질을 해서 삶을 고정된 바닥에 안착시킬 수 있다. '확신'이 사실명제라면 이를 가치명제로 전환시키는 대못과 널판지를 다루는 솜씨가 매우 좋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고정시킨 바닥이 '사는 이유'다.




하지만 단 한가지의 확신만으로는 삶의 무게를 견뎌나가는 것이 버겁다. 그래서 확신을 사는 이유의 기반으로 삼기 위해서는 확신 자체를 거룩한 대의명분처럼 거대하게 키우는 방법도 있고, 역설적으로 자기의 삶 자체를 가볍게 보는 세계관을 가질 수도 있다. 사는 이유를 한가지 확신 위에 올려 놓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고 이것은 한가지 예시에 불과하다.






한편, 여러가지 확신을 기반으로 한 '사는 이유'는 내가 생각해 본 것 중에서는 가장 안정적으로 삶에 이유를 부여하는 방법이다.

다리가 10개 달린 침대에서 다리 한두개 쯤 빠져도 쓰러지지는 않는다. 다리가 여러개 달린 침대처럼 사는 이유를 지지해 주는 확신을 여러 개 만들어 놓고 각각의 확신이 상호보완적으로 사는 이유를 유기적으로 지지하는 세계관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여러 개의 확신을 만들어 내는 것은 사람의 성격에 따라서 매우 어려운 일이 될 수도 있다. 유클리드의 공리들이 5가지 명제에서 파생되었듯 자기만의 근원적 확신을 여러가지 공리로 파생시켜서 사는 이유를 얹어놓을 기반으로 삼아 보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 될 수 있을 듯 하다.

다만, 그 공리를 파생시키는 논리 전개 및 근원적 확신을 찾거나 만들어내는 과정은 만만치 않을거라고 본다. 심지어 끝내 찾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런 시도도 없이 '다만 살아갈 뿐'으로 살아간다면 최종적인 평안을 찾아낼 가능성과 가까워지기는 어려울거라는 생각이 든다.









철 저하게 관념적인 소재로 글을 쓰다보니 매우 단순한 내용인데도 점점 복잡하게 쓰여진다. 나 혼자 볼 목적으로 쓴 글도 이 모양인걸 보면, 관념적 내용을 독자와 공유할 목적인 철학서가 실제 내용에 비해 난해한 것은 당연한 듯 하다. 철학자들이 그래서 자기만의 용어를 만들어내는것 같다.

글을 쓰면서 표현력 부족으로 많이 답답했지만 일단 잠정적인 결론은 낸 것 같아서 홀가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