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이병 환자들이 자주 찾는 레퍼토리인 건 일단 인정한다.
학문적 가치는 없지만 옛날부터 대중적 철학적 담론의 중심에는 인간은 왜 사는가 라는 의문이 있었다. 사람이 왜 사는지에 대한 확답이 없다면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도출하기도 어려워진다.
결론을 미리 말하자면 사람이 사는데는 이유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만에 하나 이유가 있더라도 그리 중요하지 않다.
네스호의 괴물이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니 좀 더 뻔해 보이는 문제를 제기하겠다.
지리산에 호랑이가 살고 있을까?
나는 지리산에서 호랑이를 본 적이 없다. 다른 모든 사람들도 아직은 호랑이를 본 적이 없다. 모든 사람이 지리산에서 호랑이를 본 적이 없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그게 논리적으로 호랑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증이 될 수는 없다. 호랑이가 등산로와 떨어진 곳만 돌아다니고 사람들은 등산로로만 다닌다면 사람 눈에 호랑이가 보이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리산에 호랑이가 없다는 주장을 진리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철저한 조사가 필요할 것이다. TV 애니메이션 심슨가족에서 네스호의 물을 전부 빼고서 괴물을 찾아내는 에피소드를 본 적이 있다.
열감지 카메라가 달린 드론 수십만 대를 띄워 지리산의 모든 공간을 탐색한다든지, 10여만명 사람들이 손에 손 잡고 지리산을 둘러싸서 점점 포위하는 식으로 수색하지 않는 한 호랑이가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결함이 있다. 그리고 아무리 극단적으로 철저히 조사를 해서 호랑이가 없다고 결론을 내린 후라도 어디선가 갑자기 호랑이 한 마리가 나오면 호랑이가 없다는 주장은 깨진다.(반증)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렇게까지 철저한 조사를 하지 않고도 지리산에는 호랑이가 없다는 확신을 가진다. 여러 사람들이 한번도 본 적이 없다는 경험 누적으로 생긴 믿음 때문이다. 그런 경험 누적 말고도 지리산에는 최상위 포식자인 호랑이가 먹고 살기에 충분한 양의 야생동물이 없다는 점, 호랑이 배설물을 본 사람이 없다는 점도 호랑이가 없을 거라는 믿음의 간접적인 증거가 된다. 지리산 호랑이는 아무도 본 적 없다. 나는 지리산을 등산하는 도중 호랑이와 마주칠 일이 없을 것이라 믿는다. 내가 존재 자체를 인식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인식할 가능성이 없는 호랑이는 내 입장에선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호랑이는 실제로 존재한다면 위와 같은 극단적인 탐사활동으로 찾아낼 수는 있다. 그런데 지리산 산신령은 아무리 탐색을 해도 찾아낼 수가 없다. 산신령은 물적 실체가 없고, 호랑이처럼 존재를 추정할만한 간접적인 증거나 정황도 없기 때문에 산신령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는 논리적으로 어떤 결론도 내릴 수 없다. 그러나 사람들의 누적된 경험으로 인해 지리산에 산신령이 없다는 확신을 할 수는 있다.
인간이 왜 사는지에 대한 의문은 역사가 시작되면서부터 인류가 항상 품어왔던 의문이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서 산다'라고 하는 종교인을 제외하고는 아직도 확실한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다.
지리산에는 호랑이나 산신령이 존재하지 않는데(일단 없다고 가정하자) 찾을 때까지 계속 탐사하는 건 헛된 일이다. 탐사를 아무리 오래 하더라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는 건 논리적으로는 틀리기 때문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계속 찾으려할 때는 어떠한 지식도 새로 얻을 수 없다.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추측을 할 수 있을 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사는 이유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찾으려는 끊임없는 노력은 모두 헛된 일일 뿐이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할아버지, 할머니가 차례대로 돌아가셨다. 지나놓고 그분들의 삶을 평가하자면, 평범한 사람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는 특별한 목적이 있었거나 필요했던 것 같지는 않았다. 그 분들의 직계 후손인 나 역시 다르지 않을 거라고 본다. 하루에도 많은 사람들이 죽는다. 나보다 어린 사람들도 매일 죽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특별한 이유 없이 살다가 간다.
인류사 발전에 공헌을 하여 역사에 이름을 남긴 극히 소수의 사람 역시 엄밀히 따지고 보면 사는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선천적으로 그에게 주어진 '이유'가 아니라 그가 스스로 결정하고 만든 삶의 목적(왜 사는가가 아닌,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에 충실하여 그것을 큰 성취로 이뤄냈을 뿐이다.
아직 발견하지는 못했을 뿐 사는 이유라는 게 어쩌면 실제로 존재할 수도 있다. 그런데 지리산의 산신령을 본 사람이 없듯 사람이 사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발견했다는 사람은 없다. 지리산에 혹시 산신령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내게 금도끼 은도끼를 주지 않는다면 그 산신령은 내 입장에서는 없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설령 사람이 사는데 이유가 있더라도 그것이 현실에서 나에게 미치는 영향은 없는거나 다름없다. 때문에 나에게 있어 사는 이유의 존재 여부나 내용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사람이 사는데 이유가 없다고 확증할 수는 없다. 다만, 지리산 산신령이 없을 가능성이 높은 것 처럼 '사는 이유'는 없을 가능성이 훨씬 크다고 할 수는 있다. 그리고 설령 그 이유가 있더라도 중요하지는 않다.
때문에, 사람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신념이나 기준은 절대적인 가치라기보다는 사회적 합의 또는 개인적 선호 문제로 보는 것이 맞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