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하루 죽어가고 있는 느낌을 받는다. 몇 십년 후가 될지 얼마 남지 않은지는 모르겠지만 오늘도 죽을 날로 부터 하루 더 가까워졌다.

요즘은 살아있다고 느낄 수 없는 날들이 지나간다. 그런 느낌은 시간이 지날 수록 무감각해 지는게 아니라 점점 더 뚜렷해진다. 그런 느낌을 받는 가장 큰 이유는 삶의 진도가 빠지지 않고 계속 제자리 걸음만 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과거와 똑같은 일을 하면서 지내고 있다. 학교 생활로 비교한다면 공부를 못하거나 사고를 쳐서 유급이 된 느낌이다.과거에는 무리없이 진도를 나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삶에 열정과 목표 의식이 강했으나 지금은 그 때 같지가 않다.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자고, 기분이 울적해져서 견디기 어려우면 이렇게 글로나마 배설을 시도해본다. 남들이 일 할 시간에 기계적으로 책을보고 글씨를 쓴다. 먹고 살려고, 못 죽어서 억지로 일하는 사람들처럼 못 죽어서 책을 본다.잡생각이 많아서인지 공부 진도도 잘 안나간다.

그러다 보면 원초적 질문이 떠오른다. 이러면서도 왜 사나?

모든 생물이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안 것은 4살때였다. 그 때 당시 기억으로는 별로 충격적이지않았다. 일년이 지나고 5살이된 어느날 죽기 싫어도 죽게된다는 것을 알게 되고는 충격에 빠졌었다. 언젠가는 죽는다는게 무서워서 밤새도록 울었던 기억이 난다. 다음 날 제법 심각한 의문을 갖게 되었다. (어차피 죽을거면서) 왜 사나?

열정과 목적 의식을 잃은 삶은 죽음과 다르지 않다. 중학교도덕 교과서나 천편일률적인 처세서에서읽어 볼 수 있을 법한 뻔한 문장이다. 활자에 의해 세뇌되거나 주입된 문자열이 아니라 스스로 깨닫고 절실히 느끼고 있는 명제이기 때문에 적어도내게서 만큼은뻔하고 식상한 문장이 아니다.

못 죽어서 사는 사람들이나를 포함해서 제법 많은 듯 하다. 죽으면 인간사 하고는 완벽히 무관해지게 된다. 자살을 금기시 하는 종교적 교리를 통한 위협을 제외하고는자살에 대한 실효성 있는 제약은 사실상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 죽고 일단 목적 없는 삶을 버텨보는 사람이 훨씬 많다. 말 뜻 그대로 연명을 하는 것이다.

사는게 재미없고 괴롭기만 하면서도 왜 굳이 연명을 할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자신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3가지 이유를 생각해 낼 수 있었다.

첫번째는 의무감, 두번재는 희망, 세번재는 고통의 할부 결제 효과다.

1.

의무감은 가장 일반적이고 강력한 이유이다. 내가 없으면 우리 애들은 어떻게 될까?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을 알게 된다면 가족들, 친구들이 얼마나 슬퍼할까?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경험이 많을수록, 나에게 의지하는 사람이 많을수록의무감은 크다.

2.

희망이 좋은것인지 나쁜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판도라가 상자를 열었을 때 세상의 모든 죄악과 질병, 고통들이 상자밖으로 빠져나가 인간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판도라가 깜짝 놀라 상자를 닫았는데 상자 속에는 희망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희망을 좋은 것이라고 단정한다면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신화다. 나쁜 것들을 모두 모아 놓은 상자에 좋은 것인 희망이 같이 들어있었다는 점 때문이다. 또 다른 문제점은 다른 것들은 상자 밖으로 나와서 힘을 발휘하는데 희망은 상자에 봉인된 채로 힘을 발휘한다는 점이다.

희망을 무조건 좋은 것이라고 단정한다면 논리를 중시한 그리스 사람들의 신화로는 어울리지 않는다.

희망은 의무감보다는 약하지만 은근한 중독성이 있다. 막연하지만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거다. 그런 내일을 겪어보지 않고 삶을 마친다는건 억울한 일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속여서 생존 본능을 충족시킨다.

3.

고통의 할부 결제 효과란 이런 뜻이다.

자동차는 비싸서 일시불로 구입하기가 어렵고 할부로 구입할 때가 많다. 그런데 할부 이자는 시중 금리에 비해서 상당히 높다. 합리적으로 판단한다면 돈을 몇 년 모아서 사거나 대출을 받는게 훨씬 비용이 적게 든다. 그러나 일시불보다는 할부로 사는게 당장 지출되는 현금이 작다.실제 비용은 크지만 심적 부담은 훨씬 덜하기 때문에 할부로 구입하기 쉽다.

일시불과 할부를 선택하는 것처럼 죽을 것인지 살 것인지를 선택한다. 합리적으로 결정하자면 살면서 앞으로 겪게 될 고통의 합계와 지금 죽음을 맞이할 고통을 비교해서 선택해야 한다. 할부 결재시 합리적 의사결정을 막는 요인은 첫째가 희망, 둘째가 고통을 유예하고자 하는 나약한 심성이다.

우선은 희망 때문에 장래 도래할 고통을 과소평가하게 된다.

다소 억지스럽고 조잡하지만 숫자를 이용해서 간단히 설명해 본다면 이렇다.

지금 당장 죽는다면 고통은 100이다. 힘들게 살면서 1년간 겪을 고통의 평균 예상치는 10이다.

여기에 희망이 더해진다면 1년간 겪을 평균 고통 예상치는 10이 아닌 1로 왜곡된다 앞으로 30년을 산다면 30이 된다. 원래는 100과 300을 비교해야 하는데 100과 30을 비교하게 된다. 착각에 빠지긴 했지만 100과 30중 선택을 해야 하기 때문에 30을 선택하는게 합리적이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1년간 고통의 평균 예상치를 10으로 본다고 했을 때 선택의 시점에서 생각한다면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은 10/365로서 대략 0.03이다.

앞으로 30년을 더 산다면 앞으로 300의 고통을 겪어야 하기 때문에 지금 죽는게 합리적이지만 오늘 당장 결정하는문제이기 때문에 100과 0.03을 비교하게 된다. 당연히 그냥 참고 살아 보겠다고 결정하기 쉽다. 할부 계산과 비슷한 면이 있다.

죽지 못하고 살게 하는 이유는 이렇게 3가지가 있는데

이런 세가지 요인들을 충족히시키 못하는 상황이 절묘하게 조합되었을 때는 죽음을 선택하기 쉽게 된다.

1. 가족이나 친구가 없는 사람은 의무감이 없어서 삶을 포기하기가 쉽고 그것에 대한 명분을 만들기도 쉽다.

2. 희망을 잃은사람 역시 할부 총액을 보다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게 되어 삶을 포기함으로써 고통을 회피하게 된다.

3. 가까운 장래에 죽음보다 큰 고통이 예정되어 있는 사람은 그 고통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죽음을 선택하게 된다. 고통이란건 상당히 주관적인 것이다.자존감이 강한 사람은 자신의 존엄성이 훼손되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 남들 눈에 사소해 보이는 일에도 극단적인 행동을 선택할 수가 있다.

2, 3중 하나만으로도 죽을 수 있지만, 1~3이 동시에 충족된다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을 회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Posted by 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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