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동권 (2005.12.27)

낙서 2016. 4. 24. 02:52

꽤 오래 전에 노트에 끄적였던 글인데 발굴해서 약간 다듬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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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오락실은 어린 아이들이 탈선을 시작하는 장소라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었다. 오락실 출입은 불량한 행위로 간주되었고 선생님들은 학생은 오락실에 가면 안된다는 훈시를 하곤 했었다. 그래서 아주 어렸을 때는 오락실에 가지 않았지만 스트리트 파이터 2가 전례없는 인기를 누렸던 92, 93년 쯤 잠시 발을 들였던 적이 있다.


스트리트 파이터 2를 처음 접했을 때는 류를 선택했다. 게임에는 비호감인 캐릭터들이 너무 많았다. 달심, 혼다, 장기에프, 블랑카는 정상인 같지 않은 외모 때문에 손이 가지 않았고 춘리는 다루기가 어렵고 파워가 약해 보였다. 고를만한 캐릭터는 류, 켄, 가일인데 가일은 헤어스타일이 날나리 같아서 마음에 들지 않았고, 동양인인 류에 호감이 갔다. 주인공 같이 생기기도 했고 류를 고르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도 류의 성능이 기본 이상은 될 거라는 확신을 갖게 하여 류를 선택하게 되었다.

게임을 좋아하긴 했지만 소질은 없었다. 날라차기와 하단공격 정도의 단조로운 공격과 앉아서 강펀치을 누르면 나가는 어퍼컷으로 상대의 공중 공격을 견제하는 정도 밖에 하지 못했다. 커맨드가 복잡한 승룡권은 꿈도 못꿨다. 100원짜리 하나를 넣고 플레이 하다보면 잘해봐야 3번째 스테이지 쯤에는 높아진 난이도를 극복하지 못하고 KO를 당하곤 했다.


오락실엔 돈이 떨어진 꼬마들이 어슬렁대곤 했다. 돈은 없지만 남이 하는 게임을 구경하기도 하고 가끔 나처럼 잘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게임을 대신 해 주기도 했다.

한번은 3번째 스테이지 첫라운드에서 형편없이 얻어맞다가  KO를 당했는데 녀석이 나타나서 옆에서 "대신 깨 줄까?" 라고 물었다. 그 때는 나도 어렸지만 녀석은 나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말 그대로 꼬마였다. 좋다고 하니 녀석은 나를 때려 눕힌 상대 캐릭터를 어렵지 않게 제압했고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가게 해 줬다. 그래서 나는 오랜만에 자동차를 때려 부수는 보너스 스테이지를 즐길 수 있었다. 다음 스테이지가 되니 난이도가 더 높아져서 당연히 나는 몇 번 때려보지도 못하고 처참하게 얻어맞았다. 그러니 녀석은 다시 2라운드부터 대타로 나서서 컴퓨터를 제압했다 그런식으로 나는 첫라운드에서 두들겨 맞고 나머지 라운드는 녀석이 수습하는 패턴이 이어졌다. 보너스 스테이지는 잘하든 못하든 게임오버가 되지는 않으니 당연히 내 몫이었다.


그러다가 스테이지가 높아지니까 녀석은 이제부터는 어려워져서 자기가 실수로 한라운드를 질 수 있고 그러면 곧 게임오버가 되니까 자기가 첫라운드부터 플레이하는게 좋겠다고 했고, 나는 그렇게 하자고 허락했다. 녀석은 결국 보스를 물리치고 엔딩을 봤다. 중간 중간 패배했던 라운드도 있었으니 내가 첫라운드부터 양보하지 않았더라면 녀석도 보스를 물리칠 수는 없었을 거다.

내가 넣은 100원이 엔딩으로 이어졌으니 기뻐해야 했을까, 아니면 내 돈으로 저 녀석이 공짜 게임을 즐겼고 특히 후반부는 전적으로 녀석만 플레이 했으니 찜찜해야 했을까. 따져보면, 어차피 죽을 목숨이었는데 녀석의 도움으로 몇 라운드 더 즐겼으니 이익이었다. 찜찜함을 누르고, 윈윈이라고 좋게 생각했지만 마음 속이 완전히 편하지만은 않았다.


녀석은 파동권을 효과적으로 발사하면서 적을 제압했다. 파동권은 류를 대표하는 기술이다. 파동권은 적의 모든 공격보다 우선권이 있어서 매우 유용한 공격법이다. 맞장풍으로 상쇄시키거나 점프로 피하지 않는다면 방어를 해도 데미지가 약간은 생긴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게임에 소질이 없다. 조이스틱으로는 필살기 커맨드를 아무리 정확히 입력하려고 해도 이상할 정도로 파동권이 나가지 않고 헛손질만 나왔다. 녀석의 플레이를 보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100원을 내고 류를 선택했으면 100원에는 파동권을 발사할 권리도 포함이 되어 있다. 나는 파동권을 쓰지 못하고 단조롭게 싸우다가 패배를 하곤 하니 실력이 부족하여 100원의 가치를 완전히 누리지 못한 셈이다. 류를 골랐으면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적을 제압해야 하고 그 수단으로 화면을 횡단하는 파란 덩어리를 볼 권리가 있다. 류는 모든 적을 제압할 잠재력이 있는 캐릭터다. 녀석은 그 잠재력을 발휘해서 손쉽게 승리를 거뒀지만 나는 승리는커녕 기본적인 기술인 파동권도 제대로 쏘지 못하고 두들겨 맞기만 했다.

같은 성능인 캐릭터를 사용하는데도 실제로 발휘한 능력은 녀석과 하늘과 땅 차이다. 류는 파동권을 발사할 능력이 있었으나 내가 조종한 류는 파동권을 발사할 수 없었다.


캡콤이 부여한 모든 수단을 발휘하여 제대로 게임을 즐기려면 실력 향상을 위한 노력을 해야 하는데 오락실에서 노력을 하는 건 돈이 많이 들고 별로 유익한 일도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류는 파동권을 쏠 수 있기 때문에 제작사는 장풍을 쏘지 못하는 캐릭터에 비해 속도나 파워를 불리하게 하여 성능 밸런스를 맞춘 듯 보였다. 따라서 어차피 쏘지도 못하는 장풍을 포기하는 대신 파워나 스피드가 뛰어난, 기본기가 탄탄한 캐릭터를 고르는게 낫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나중에 생각해보면 혼다가 더 적합한 캐릭터였지만 당시에 게임을 몇 번 했을 때는 혼다보다는 블랑카를 상대하기가 까다로웠고 강하게 느껴져서 그 이후 블랑카로 플레이하게 되었다. 블랑카는 스피드가 좋으면서 파워도 딸리지 않았고 기본기 자체가 탄탄해서 류를 선택하여 플레이할 때 보다 결과가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블랑카로 류를 상대할 때는 항상 파동권 때문에 적당한 공격 루트를 찾지 못하고 패하곤 했다.


요즘은 예감이 좋다. 지루하고 피곤하고 걱정스럽기만 했던 지금까지의 삶이었지만 곧 내 인생에 잠재되어 있던 파동권을 쏘는 날이 조만간 올 것 같다.









출처는 다른 글인데 써 놓고 보니 이 글의 뒷자리가 더 어울릴 것 같아서 아랫글을 덧붙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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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8. 12

그건 마치 세계 3대 미식이라는 캐비어나 송로버섯 샤프란 같은 거예요. 맛있다고들 하고 나도 그것들의 맛이 궁금하기는 해요. 그런데 너무 비싸서 굳이 내 돈을 내고 먹고 싶지 않아요. 직접 재료를 산다면 돈을 아낄 수는 있겠지만 어떤 요리에 넣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맛을 살릴 수 있는 조리법도 몰라요. 그 돈을 먹는 데 꼭 써야 한다면 차라리 맛이 확실히 보장되고 상대적으로 저렴한 한우 갈비찜을 여러 번 먹을래요.

캐비어는 고급 뷔페에서 만찬을 벌이는 누군가에게 초대를 받는다면 먹을 가능성이 없지만은 않고, 샤프란은 세제에서 나는 냄새로 본래 향기를 추정해 볼 수는 있을 것 같아요. 아마도 평생 송로버섯 맛을 모르는 채로 살다가 죽을 수도 있겠지요. 태어났기 때문에 비로소 그 맛을 알 수 있는 기회가 생겼어요. 그리고 송로버섯을 맛보지 못한다는 것은 인생에서 향유할 수 있는 잠재적 경험 중에서 송로버섯 맛 만큼 누려보지 못하고 죽는다는 셈이에요. 놀이 공원에 갔다가 기다리는 줄이 긴, 인기 있는 놀이기구를 타보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과 비교할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그렇다는게 스스로 그다지 애석하지는 않아요. 너무 줄이 길어서 오래 기다리는 게 싫다면 줄이 짧은 다른 놀이기구를 탈 수도 있는데 그런게 꼭 아쉬워해야 할만한 일은 아니잖아요.


그것 또한 마찬가지에요.



출처: http://b-613.tistory.com/313?category=451842 [노트]

2018. 8. 12

그건 마치 세계 3대 미식이라는 캐비어나 송로버섯 사프란 같은 거예요. 맛있다고들 하고 나도 그것들의 맛이 궁금하기는 해요. 그런데 너무 비싸서 굳이 내 돈을 내고 먹고 싶지 않아요. 직접 재료를 산다면 돈을 아낄 수는 있겠지만 어떤 요리에 넣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맛을 살릴 수 있는 조리법도 몰라요. 그 돈을 먹는 데 꼭 써야 한다면 차라리 맛이 확실히 보장되고 상대적으로 저렴한 한우 갈비찜을 여러 번 먹을래요.

캐비어는 고급 뷔페에서 만찬을 벌이는 누군가에게 초대를 받는다면 먹을 가능성이 없지만은 않고, 사프란은 비슷한 이름 세제에서 나는 냄새로 본래 향기를 추정해 볼 수는 있을 것 같아요. 아마도 평생 송로버섯 맛을 모르는 채로 살다가 죽을 수도 있겠지요. 태어났기 때문에 비로소 그 맛을 알 수 있는 기회가 생겼어요. 그리고 송로버섯을 맛보지 못한다는 것은 인생에서 향유할 수 있는 잠재적 경험 중에서 송로버섯 맛 만큼 누려보지 못하고 죽는다는 셈이에요. 놀이 공원에 갔다가 기다리는 줄이 긴, 인기 있는 놀이기구를 타보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과 비교할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그렇다는게 스스로 그다지 애석하지는 않아요. 너무 줄이 길어서 오래 기다리는 게 싫다면 줄이 짧은 다른 놀이기구를 탈 수도 있는데 그런게 꼭 아쉬워해야 할만한 일은 아니잖아요.


그것 또한 마찬가지에요.



2020.9.16

한참 전에 생각하곤 해던 것이긴 한데 요즘 들어 글로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남겨 본다.

5년에서 10년 전 쯤 메주 콩을 수 십 킬로 샀다. 용도는 청국장 제조용이었는데 청국장으로 소모되는 콩은 양이 많이 않아서 아직 절반도 먹지 못한 상태다. 콩비지 콩국수를 한때 열심히 만들어 먹어봐도 마찬가지였다.

오래된만큼 벌레들의 침입도 많았던 것 같다. 삶기 전에 불리려고 물을 부어보면 물에 뜨는 것들이 있는데 그것들은 대개는 벌레가 먹은 것이었다. 콩 알맹이 대신 벌레 똥으로 보이는 연노란 가루가 껍질에 가득 들어있다. 콩을 사고 한 해 정도 지났을 때는 애벌레의 사체와 함께 발견되곤 했는데 요즘은 세월이 너무 오래되어 단지 노란 가루만 남아있을 뿐이다.

출구가 발견되지 않는 콩 속에서 애벌레 흔적을 보고는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저 벌레에게 세상이란 지름 5밀리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콩 껍질 안쪽 만한 크기였구나.

Posted by 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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