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사에의 카지노 팰리스가 품은 함의

 

페르소나 5에 대한 사람들의 흔한 감상은 '초반부 몰입도는 엄청난데 뒤로 갈수록 힘이 빠지고 결국에는 엔딩을 보려고 꾸역꾸역 하게 된다'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과 반대로 느꼈다. 초반부에는 중이병 컨셉에 '저게 맞나?' 싶은 억지스러운 상황 설정과 캐릭터들의 행동방식이 거슬렸었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앞에서 뿌려진 그런 무리수들이 알고보니 떡밥이었고 아틀러스는 이것을 나름 충실히 회수해가고 있다는 걸 발견하면서 서사가 개연성있게 맞춰지는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사에의 팰리스는 그 시작점이 되는 파트이다.

 

법원을 카지노로 여기고 있는 사에의 인지는 이 글에서 챕터를 따로 뽑아야 할만한 다층적인 영역이다. 카모시다가 학교를 자신의 성으로 여겼듯이 사에는 법원을 카지노로 여긴 것이다. 여기서 사에가 생각하는 카지노란 모든 걸 운에 맡기는 한탕주의 도박판이 아니라 하우스가 이길 수밖에 없도록 조작을 하는 것이다. 괴도단은 위층으로 올라가기 위해서 도박을 하지만 하우스의 조작에 막혀서 항상 돈을 잃는다. 괴도단은 백스테이지에 잠입해서 하우스 시스템을 해킹해서 코인을 딴다. 괴도단이 돈을 따야 하는 이유는 보물이 있는 위층으로 올라가기 위해서이다. 위층은 고위층을 뜻하는데 별다른 배경이 없는 평검사인 사에 입장에서 위층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더 많은 코인이 필요하다.

 

게임내에서 아케치 등이 말하는 바로는 사에는 출세를 위해서 수사를 무리하게 추진해서 없던 죄도 만들어 내는 악덕 검사인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게임 내내 사에가 보였던 모습은 사회 정의를 추구한 정직한 검사였다. 이게 카지노라는 화려한 배경을 게이머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억지 설정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일본 사법시스템의 또다른 측면이 연상되기도 했다.

 

일본 법원은 형사사건에서 유죄율이 99.9%라고 한다. 이건 없는 죄를 만들어내는 식으로는 달성하기 어려운 수치다. 유죄율이 높다는게 언뜻 생각하기에는 엄청나게 가혹한 시스템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유죄율이란 모든 사건에 대한 유죄의 비율이 아니라 기소된 사건 중 유죄의 비율이다. 달리 말하자면 검찰은 어지간하면 기소를 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유죄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억울한 사람을 감옥에 보내는 게 아니라 무죄 판결을 피하기 위해서 애매한 사람은 기소조차 하지 않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언뜻 관대한 조치일 것 같지만 피해자 입장에서는 억장이 무너지는 상황이다.

 

예컨데 고소 사건이 1000건 있다고 쳐보자. 이 중에서 700건은 유죄판결이 유력할 정도로 명백한 사건인다. 200건은 판단이 쉽지 않아서 보강수사가 필요하다. 100건은 누가 봐도 죄를 묻기가 어렵다고 가정하자. 능력있는 검사가 나서야 할 영역은 200건의 영역이다. 하지만 그러면 무죄율이 높아진다. 여기서 유죄율을 높이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유죄판결이 유력한 700개의 사건 중에서 그래도 자신이 없는 200건을 기소유예로 돌리고 500건만 기소를 한다. 그러면 유죄율 99.9%는 쉽게 달성될 수 있다. 높은 유죄율이 검사를 평가하는 지표가 된다면 어지간하면 기소 안하는 검사가 출세하기 쉬운 토양이 된다. 따라서 사에가 출세지향적이라서 없던 죄를 만들어서 씌우는 검사라는 식의 설명은 게임이 그동안 보였던 서사와 일본의 사법 시스템과도 잘 맞지 않는 설정인 것 같다.

 

그렇다면 사에의 팰리스는 왜 생겼을까? 사에는 특수부 부장의 지시를 받는 평검사다. 부장은 시도 마사요시의 하수인인데 사에에게 괴도단 사건을 수사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승진을 위해서는 이 사건에서 괴도단에게 유죄판결이 내려져야 한다. 그런데 사에는 괴도단이 어떤 사람들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그들이 한 행위가 범죄인지도 모르는 상태다. 즉 반드시 유죄 판결을 받아내야 한다는 목적이 생기게 되었고 그것이 사건을 조작해서라도 달성해야 한다는 왜곡된 인지를 형성한 것이다. 그것이 사에의 보물이고 팰리스의 핵심이 된다.

 

물론 경찰이었던 아버지의 순직 이후, 홀로 동생을 부양하며 남성 중심의 검찰 조직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사에의 짓눌린 스트레스가 팰리스의 '터(부지)'를 닦아두긴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위에 카지노라는 거대한 왜곡의 성을 단숨에 쌓아 올린 결정적 계기는 바로 윗선(특수부 부장)의 무리한 지시였다. 즉, 사에의 팰리스는 본성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부당한 시스템의 압박이 급조해 낸 신축건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최상층부까지 올라간 괴도단은 마지막 관문을 맞이한다. 보물이 있는 방으로 건너가는 다리를 개방하는 것이다. 그 다리는 거대한 양팔 저울 위에 놓여있는데, 10만 코인을 가지고 와야 개방된다고 해서 주인공 일행은 10만 코인을 어렵게 모아왔다. ​하지만 카지노 측은 갑자기 규칙이 바뀌었다며 100만 코인을 요구했다. 100만을 모으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기껏 모아오더라도 제멋대로 규칙을 바꿀 수 있었기에 괴도단은 경악했다.

 

​그때 동행 중이던 아케치가 자기가 뒷주머니로 코인을 벌어놨다며 100만 코인을 선뜻 지급해 버린다. 어차피 팰리스가 무너지면 사라질 돈이라는 걸 노리고, 카지노에서 대출까지 끌어다 조커의 승리에 올인하는 '레버리지 도박'으로 돈을 복사해 둔 것이었다. ​예상치 못한 아케치의 100만 코인 폭격에 하우스는 핑계도 못 대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어 저울 한쪽에 엄청난 수의 칩이 쏟아져 내리고, 그 무게로 다리가 위로 상쇄되어 올려지며 보물이 있는 방으로 통하는 길이 열리게 된다.

 

​이 저울은 두 가지 층위를 가지는 상징으로 보인다. 우선 저울은 정의와 법원의 상징이다. 원래 저울은 양쪽의 무게를 공정하게 달 때 존재 가치가 있다. 하지만 사에의 인지 속 카지노에서는 거액의 돈(칩)만 퍼부으면 저울의 기울기를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다.

 

​게다가 다리를 내리기 위해 10만 코인을 내야 한다는 명확한 규칙이 있었음에도, 법원(카지노)이 자신들의 입맛대로 규칙을 100만 코인으로 바꿀 수 있는 절대적인 권한을 쥐고 있다. 법이 공정한 기준이 아니라, 기득권의 권력과 돈에 의해 얼마든지 주물러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씁쓸한 상징이다.

 

사에 팰리스는 찜찜한 구석이 많은 곳이다. 일단 이건 액자식 구조 스토리인 게임의 오프닝 구간이기도 했다. 게임이 어떤 내용인지 모르는 상태에서는 카지노 괴도 활동이 정신세계 안에서의 활동이 아니라 현실의 괴도로 보이게 한 연출인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나중에 그것이 사에의 정신세계 안의 팰리스라는 걸 밝히면서 장르적 쾌감이 터지게 하려는 목적인 것 같기도 하다. 실제로 나는 오프닝 시퀀스가 끝나고 심문실에 잡혀왔을 때는 괴도 활동이 현실이고 와타나베가 실제로 몇몇 경찰과 난투를 벌인 것이 게임적으로 표현된 것이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다가 게임이 진행되면서 팰리스라는 존재를 알게 되면서 혼란에 빠졌었다. 팰리스 안에서 어떻게 현실의 경찰이 와타나베를 체포해서 심문실로 끌고 올 수가 있었을까? 어쩌면 심문실의 니지마 사에 검사는 섀도이고 와타나베가 섀도를 잘 설득해서 팰리스를 공략하려는 괴도단의 공작이 반전처럼 나오는 걸까라는 가설도 한때 세워봤었다. 하지만 이 가설은 카지노 팰리스에서 사에의 섀도가 빌런같은 복장과 메이크업을 하고 등장한 것을 보자마자 폐기되었다.

Posted by 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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