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호프 감상문

낙서 2026. 8. 2. 13:19

호불호가 갈린다는 나홍진의 신작 호프를 봤다.  

영화에 대한 사전 정보는 하나도 없는 상태로 봤다. 몇 년 전에 마이클 패스벤더가 나홍진의 영화에 출연한다는 기사를 봤던 기억이 났을 뿐이다. 그래서 해외가 배경이고 자막을 읽는 영화일 줄 알았는데 생뚱맞게 1980년대 최전방 어촌 마을이 나왔다. 그래서 마이클 패스벤더가 주한 미군으로 출연하나보다 정도로 짐작해볼 정도였다.  

 

영화는 서사라고 할만한게 없어서 이야기 자체가 재미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딱히 할 말은 없다. 

다만 몰입을 방해했던 요소가 제법 있어서 남겨본다.

 

첫째, 주인공의 행동에 전혀 공감이 가지 않았다.

황정민이라는 배우 말고, 극중 이름이 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 주인공은 호포(읍?면?) 파출소장이다. 이 사람은 경찰관으로서 샷건을 가지고 다니는데, 시골 동네 경찰이 왜 제압용 권총이 아닌 살상용 샷건을 가지고 있는지부터 이상해 보였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이 총격을 퍼부어도 끄떡없는 괴물을 향해서 그깟 샷건을 들고 잡겠다고 왜 달려드는지 전혀 공감이 가질 않았다. 그리즐리 베어가 난동을 부리는데 bb탄 소프트건을 들고 잡아보겠다고 설치는 것처럼 보였다. 반드시 지켜야 할 소중한 사람이 제시된 것도 아니고, 그런 상황에서 일개 경찰 한 사람이 도망간다고 아무도 욕할 수 없을텐데 참 대단한 사명감으로만 보였다.

 

둘째, 공권력이 너무 이상하다.

아무리 시골 동네고 옆 동네에 산불이 나서 바쁘다지만 최전방 마을에서 사람이 수십 명 죽어나가고 있는데 아무도 지원을 하지 않는다. 남침이거나 테러일 수도 있다는 우려 자체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동네 사람들은 어디 군부대라도 털었는지 돌격소총을 들고 돌아다닌다. 트럭을 집어던지고 자동차처럼 빠르게 달리면서 지치지도 않는 괴물이 나타났다면 코브라 공격헬기(아파치는 영화의 배경으로 보이는 1980년대에는 국내에 없었음)를 띄우거나 GTA 시리즈처럼 탱크가 출동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게다가 외계인을 잡았다고 하니까 어디선가 과학자 같은 아줌마가 오는데 외계인 사체를 연구소에 가져가서 부검을 하지 않고 마을 창고 같은 곳에 상온으로 방치하면서 피부가 단단해서 칼도 톱도 안들어간다면서 혼자서 전기톱으로 난도질을 한다. 괴생명체가 최전방 동네에서 주민 수십 명을 죽인 전시에 준하는 상황인데도 군부대는 보내지 않고 딸랑 과학자 한사람만 보내는 이상한 정부다. 사실상 포스트 아포칼립스물에 가까워 보인다. 혹시 호포읍 말고도 전국적으로 외계인이 출몰해서 거기까지는 지원 병력을 보낼 여력이 없었을까?

 

셋째, 사냥꾼 '성기'(조인성)의 무한 hp

성기는 외계인의 직접적인 타격을 여러 차례 당해 본 사람이다. 다른 사람은 외계인과 닿으면 오체분시가 되는데 성기는 절대로 다치지 않는다. 외계인이 때리면 30미터쯤 날아가다가 나무에 부딪쳐서 10미터 정도 높이에서 추락한다. 그러고 아프다고 기침 몇 번 쿨럭거리다가 일어난다. 다친 곳이 무한히 재생되는 엑스맨의 울버린 같다. 심지어 극 중에서 달려가던 자동차에서 몸을 밖으로 내밀다가 표지판과 부딪쳐서 차 옆면에 피칠갑을 하고 죽은 줄 알았는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멀쩡히 다시 살아난다. 이쯤 되면 노골적으로 성기에게 수퍼히어로의 유전자가 있다는 떡밥을 제시한 걸로 볼 수가 있다.

 

넷째, 외계인의 신체스펙과 외계인의 전투력 사이에 물리적인 핍진성 문제가 보인다.

초반 한시간 정도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든 외계인의 키가 3미터 정도다. 마을 창고 같은 곳에서 해부해서 장기를 꺼내서 손으로 들어보는 장면을 보면 딱히 사람 몸을 이루는 단백질과 지방에 비해 훨씬 밀도가 높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170센치미터쯤 되는 사람 체중의 5.5배 정도인 360킬로그램 정도로 보면 될 것 같다. 그런데 360킬로그램짜리 생명체가 공차 중량으로만 2톤 가까이 되는 소형 트럭을 던져버린다. 아무리 힘이 좋아도 물건을 던질때는 작용과 반작용 법칙이 적용된다. 외계인이 단단한 벽에 기대거나 발을 땅에 단단히 박아넣지 않는 한, 트럭이 던져진 거리의 5배 이상 반대 방향으로 튕겨져 나가야 하는데 딱히 그런 모습이 보이질 않는다. 물론 이런 건 다른 영화였다면 장르적 허용이라고 여기면서 관대하게 넘어갈 수 있겠지만 이 특히 영화에서만은 유난히 거슬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영화에선 초반 수십 분 정도 괴물의 실체를 철저하게 숨긴다. 관객의 시각에서는 괴물을 볼 수 없는데 화면 밖으로부터 괴물이 던진 트럭이 날아온다. 그렇다면 관객은 트럭을 던질만한 사이즈의 괴물을 상상하게 된다. 하지만 모습을 드러낸 괴물은 상상했던 체급에 비해 지나치게 왜소해서 저게 맞나?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다섯째, 후반부 카 체이싱의 합리성 문제다.

영화가 끝날 때 쯤에는 이 외계인들은 리들리 스콧의 에일리언 같은 무지성 살상 괴물이 아니라 나름의 품격이 있고 고도의 문명을 이룬 지성체임이 밝혀진다. 그렇다면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 똑똑한 외계인들이 도대체 왜 총 맞고 폭탄 맞아가면서 주인공 일행의 자동차를 따라잡으려고 그 먼 거리를 달려야 했던 걸까? 주인공 일행을 끝까지 따라가서 죽였을 때 그들이 얻는 게 그런 수고를 기울일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을까? 그들이 높은 지능을 가진 종족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까 오히려, 자기 몸을 물고 도망간 모기 한마리를 잡기 위해서 집 밖에서 몇 백 미터를 뛰어다니는 광기에 빠진 개체로 보였다.

 

이 영화는 내내 화끈한 액션과 함께 이렇게 현실성 없는 로어와 인과관계를 보여준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가 현실의 대한민국이 아니라 한글과 한국어를 쓰는 다른 차원의 세상에서 일어난 사건을 다룬 것이라고 봤다.

 

극중 대사에 따르면 마을 근처에 철책과 지뢰밭이 있는 최전방 바닷가 마을이다. 최전방 바닷가 마을이라면 강화도 아니면 강원도 거진읍이다. 친구들이 "DMZ 호랑이가 내려온 거 아니냐"는 농담을 하는 장면이 있는데, DMZ 호랑이가 강화도에 오려면 바다를 건너야 하고, 강화도와 본토 사이의 해협은 유속 때문에 짐승이 헤엄쳐서 건너기 어렵다. 강화도를 소거하면 거진이다.  

 

주인공 일행은 경찰차를 타고 신호등이나 교차로 같은 방해 요소가 없는 4차선 자동차 전용도로를 꽤 빠른 속도로 10분 넘게 달린다. 그런데 영화의 배경인 1980년대에는 거진에는 그런 도로가 없었다. 4차선인 동해대로 고성 구간은 2000년대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영화의 배경이 이세계라는 증거가 하나 추가된다.

 

내가 제기한 둘째(이상한 공권력)와 세번째(무한hp) 포인트는 후편을 위한 떡밥일 수 있을 것 같다. 다른 우주라면 어쩌면 작용과 반작용 법칙이 약하게 적용될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총을 발사할 때 반동이 작아서 총을 쏘기가 훨씬 편할 거다. 할머니들이 안정적으로 m16 연발 모드를 갈기는 걸 보면, 어쩌면 진짜로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어쩌면 자신을 공격한 하등한 존재를 끝까지 따라가서 응징하지 않으면 처형되거나 명예를 잃고 사회적 죽음을 당하는 문화를 가진 외계인일지도 모르겠다.

 

영화 막바지에는 외계인의 거대 전함이 추락하고 영화 내내 살육을 벌였던 외계인들은 자기들끼리만 알만한 말들을 주고 받는다. 아마도 후속작에 대한 떡밥 같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이 영화 자체는 서사성이 제로에 가까워서 나는 그 외계인들에게 어떤 사연이 있는지 하나도 안 궁금했다. 과연 제대로 투자를 받고서 후속작이 만들어질 수 있을지 나는 잘 모르겠다. 감독은 전작처럼 기독교 관련 상징을 쓰고 싶었는지 장면 곳곳에 물고기들을 배치했고 외계인의 입을 통해서 '보지 않고 믿으면 더 좋다'는 식의 성경 구절 같은 말을 떠들었지만 영화의 전반적인 내용하고는 겉돌고, 그냥 자기 멋으로 욱여 넣었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이렇게 불만 일변도의 감상을 남겼지만 영상 자체는 잘 만들어져서 보는 내내 절대로 지루하진 않았고 2시간 반이 넘는 러닝타임은 금방 지나가 버렸다. 그래서 별점을 준다면 의외로 3개 반.

Posted by 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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