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란 찍먹 실패기

낙서 2026. 4. 7. 21:55

성경을 2차례 읽고 유튜브와 인공지능 등을 이용해서 유대교와 기독교 교리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익숙해지다 보니 이슬람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유대교와 기독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읽는 것이 우선이듯 나는 쿠란을 찾게 되었다. 성경은 검색창에 성경이라고만 적어 넣어도 10여 가지 이상의 번역본들이 나오는데 반해서 쿠란의 한국어판은 그리 다양하질 못했다. 어플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인터넷에서 찾아볼 수 있는 한국어판 쿠란은 PDF버전이었는데, 문체가 개역개정 성경 느낌이 진하게 나서 읽기에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쿠란은 신의 말씀이고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일점 일획의 더함과 뺌도 없다는 글인데도 무슨 변명거리가 그렇게 많은지 주석이 한가득이었다.  

 

한국어 쿠란 앱은 2000년대 초반 웹페이지의 향수를 자극하는 듯한 디자인이었다. 그 앱으로 들어 본 한국어 낭송은 목소리 자체는 멋진데, 너무 느리고 장엄해서 잠이 왔다. 옆에 있던 아랍어 버전 버튼을 누르면 쿠란 낭송을 들을 수 있었다. 어딘지 진정한 신앙심이 우러나오는 노랫소리 같았는데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으니 무용지물이었다. 두 버전 다 tts가 아니라 사람 육성을 녹음한 것 같았는데 걸어 다니면서 들으려면 데이터 소모가 부담스러울 것 같았다.

 

그래도 내용이 재미있기라도 하면, 꾹 참고 PDF파일로라도 읽어 보겠는데 쿠란은 시편과 율법서를 뭉쳐놓은 듯한 개역개정 어투의 고문 도구처럼 보였다. 신앙심이 없이 교양으로 성경을 읽는 사람에게 레위기는 판타지 세계관의 로어북 같은 느낌이라도 주는데, 시편은 쉽지가 않다. 시편은 신에게 직접적으로 어마어마한 편애를 받은 행운아, 다윗의 신앙 고백이다. 별다른 은혜를 체감하지 못한 사람에게 찬양 일색의 시편은 읽어내기에 참으로 도전적인 파트다. 게다가 개역개정 문체라니 산 넘어 산이다.  

 

아무튼 내 눈에 보인 쿠란에 대한 인상은 구약의 서사를 모두 안다는 것을 전제로 한, 신에 대한 맹목적 찬양과 구약의 그 신답게 인간의 생활 방식을 좁쌀영감처럼 간섭하는 율법들 그게 전부였다. '1학년은 화장 금지', '상병 미만은 입수 보행 금지' 같은 똥군기가 연상되었다. 좀 더 아래로 생각해 보자면 '앉아', '일어서', '엎드려', '기다려' 같은 자기만족적인 명령에 잘 따르는 강아지를 영리하거나 착하다고 칭찬하는 견주도 떠올랐다. 명령에 따르는 객체의 필요에 봉사하는 필연적 규칙이 아니라 명령을 내리는 주체의 지배 욕구를 충족시키는 임의적 규칙에 불과하다는 공통점이 보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 강아지는 아무 의미도 없는 '앉아'라는 주인의 명령에 복종함으로써 주인과 더 깊은 교제를 하고 주인의 더 큰 사랑을 받게 되었으니, 복종이 나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쿠란을 읽는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 종교 이름을 이슬람(복종)이라는 키워드로 정리해 준 배려는 나름 괜찮았다. 그 이름만으로도 쿠란의 지루한 모든 구절들이 압축되니까.  

 

쿠란 찍먹으로 살펴본 이슬람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단점을 모아놓은 종교로 보였다. 

 

1. 일단 율법이 복잡하고 강박적이다. 그 율법을 지키는 것을 공의라고 부른다.  

 

2. 공의는 있지만 사랑이 없다. 신이 자비롭고 관대하다는 선언이 매장 반복되기는 한다. 그런데 쿠란은 신이 무함마드에게 직통으로 읽어 준 계시를 옮겨 적은 것이다. 즉 신이 자비롭고 관대하다는 선언은 자화자찬이다. 사실은 나도 나 자신을 자비롭고 관대하다고 생각한다. 생각은 자유니까. 다만 얼굴이 두껍질 못해서 남에게 차마 말하지는 못한다. 신이 경정맥보다 가까이에서 나와 함께한다는 말은, 사랑보다는 언제나 감시하면서 언제든 목덜미를 조를 수 있는 섬뜩함으로 느껴진다. 정작 자신의 신자들이 다른 사람의 경정맥을 잘 드는 칼날로 잘라버릴 때, 신은 피해자가 느낀 고통을 함께 나눴을까? 아니면 남의 일처럼 구경만 했을까? 신의 사랑을 더욱 강조한 수피즘이 있다는 변명이 예상되지만, 수피즘은 쿠란의 핵심이 아니라 쿠란의 결핍을 해소하기 위한 독자적 선언에 가깝다. 비슷한 테마를 담은 유대교와 성경의 아가서는 정경으로 채택되었지만, 수피즘은 실제로 역사적으로도 정죄된 바 있다. 납작 엎드려서 복종해야 할 대상에게 연애 감정 비슷한 걸 느끼는 건 충분히 불경스러울만한 도발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수피즘이 근근이 명맥을 이어오는 이유는 성마른 쿠란만으로는 도저히 해소될 수 없는 사랑에 대한 갈망 때문일 것이다. 수피즘은 쿠란에 적힌 경직된 문자들만으로 지탱하기 어려운 신앙의 난점들과 신과의 인격적 교제와 피부에 와 닿는 사랑을 강구하는 인간의 욕망을 힘겹게 지탱해 온 가느다란 버팀목처럼 보였다.  

 

3. 이슬람은 유대교와 달리 신의 말과 행동에 대해 논박하는 게 원천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신과 겨루는 자(이스라엘)라는 개념이 있을 수 없는 교리다. 유대인들이 홀로코스트에 대해서 신에게 유죄 판결을 내린 후 다시 예배를 보러 갈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과는 크게 대조적이다.   

 

4. 지하드처럼 공의를 위한 폭력이 권장된다. 지하드는 원래는 내적인 개념이었다. 마음속 악과 투쟁하며 정신을 수양하는 것을 큰 지하드, 침략자와의 전투를 작은 지하드라고 불렀다. 작은 지하드는 큰 지하드의 연장선이다. 지하드를 통해서 그들이 내적으로 투쟁하는 대상은 악이다. 이를 외부로 확장한 작은 지하드 역시 악에 대한 투쟁이 된다. 지하드라는 개념에서는 나는 옳고 상대는 악하고 소멸시켜야 한다는 흑백논리가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반면 예수가 가르친 영적 투쟁은 그것이 자신의 내면을 벗어나 외부로 향하면 원수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진다. 게다가 지하드가 믿음을 위한 방어적 개념이라고 주장하지만 정작 역사적으로 지하드라는 개념은 무력으로 주변국을 공격하고 점령하는 데에 이용되지 않았던가.

 

5. 영원할 수 있는 것과 시대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것을 구별하지 못한다. 종교를 만들던 시대의 인간들은 자기 당대에 종말이 올 것이라 믿었기에 그런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세상이 너무 오래 지속되는 바람에, 초기 기독교인들의 종말에 대한 인식과 마찬가지로 결과적으로 그들의 믿음이 틀렸음이 자연스럽게 입증되고 말았다. 영원할 수 있는 율법의 예시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 정도다. 만약 30세기쯤 다른 항성계로 이주한 사람이 일생에 한번 메카를 방문해야 하는 율법을 지키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무슬림들은 신의 선함과 은혜의 근거로 창조, 유지, 계시, 응답, 심판, 용서로 드러난다고 본다.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은혜는 양계업자가 닭에게 베푸는 은혜랑 비슷하다. 닭을 키우기 위해서 병아리를 부화시킨다. 그리고 닭으로 자라날 수 있게 모이를 주고 적절한 온도를 맞춘다. 난폭한 개체는 무리와 분리하거나 부리와 발톱을 살짝 잘라낸다. 시름시름 앓는 닭이 있으면 치료해 준다. 심판은 뭘까? 도축을 마치고 무게를 달아서 몇 호 닭인지 판정하는 거? 양계업자는 돈을 벌기 위해서 병아리를 부화시킨다. 무슬림들의 신은 무엇을 위해서 굳이 인간을 만든 다음에 계시하고 응답하고 심판하고 용서를 한다는 걸까? 이건 아브라함 계열의 종교에서 고질적으로 드러나는 문제이긴 하다.

 

그리고 쿠란은 매 장마다 신은 인간을 사랑한다고 강조한다. 사랑한다고 선언하는 걸로 사랑이 이루어진다면 김정일과 김정은 부자야말로 인민에 대한 지구 최고의 사랑꾼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슬람의 신은 구약에서 보여줬던 나르시시스틱 한 잔악 행위까지 제시하지는 않으면서 사랑을 주장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구약의 거대한 부채를 떠안은 기독교에 비해서 신정론의 부담이 크게 줄었다는 건 이슬람만의 장점이다. 

 

 종교는 강요하지 않는다는 쿠란 구절이 있지만 샤리아에서는 신앙을 등지는 무슬림은 살해하라고 규정되어 있다. 상위법 우선보다는 신법 우선이 존중받는 기묘한 법체계다.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태어나면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자동적으로 신자가 된다. 그에게 종교를 강요받지 않고 선택할 여지는 없다. 모태 신앙인이 신앙의 자유를 찾은 결과는 오로지 죽음뿐이다. 엄격한 문자주의와 그것을 조금이라도 완화하고자 하는 신학적 노력과 공동체의 독특한 전통들의 누적 같은 걸 보면 중세 카톨릭의 매운맛 버전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아무튼 슬쩍 훑어봤을 때 느낀 문제는 대충 그 정도였고 쿠란을 완독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졌다. 개역개정 문체로 시편을 읽는 정신적 고통은 크지만 신에 대한 맹목적 복종과 찬양만 쓰여있는 거기서 특별한 통찰이나 새로운 서사를 감상하는 즐거움을 찾을 수 없을 게 뻔해 보였으니까. 성경의 시편은 그래도 핸드폰 TTS를 동원해서 쓴 약을 목구멍으로 넘기듯 꾸역꾸역 억지로 삼킬 수는 있었는데 쿠란은 형편없는 인프라 덕분에 그 방법마저도 막혀 있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다.  

 

뿐만 아니라 이슬람 교리만의 독자적인 실책도 있다. 이슬람은 사후 세계관이 너무 천박하다. 불교는 해탈하는 사람처럼 살면 해탈을 하게 되고 천상에서 사는 사람처럼 살면 천상에서 윤회한다. 기독교 역시 천국에서 사는 사람처럼 행동하면 천국에 간다. 천국이란 그가 살아온 삶에 대한 연장이다. 반면에 이슬람은 그들의 천국에서 지내는 사람처럼 산다고 천국에 가는 게 아니다. 무슬림들에게 천국이란 신에게 강요당한 율법을 지키느라 억눌러왔던 욕망을 죽고 나서야 보상받는 곳이다. 견주의 '기다려'에 순종한 강아지에게 주어지는 간식답게 이슬람의 천국인 '잔나'는 물질주의와 육체적 욕망 그 자체다.  

 

모든 인간적 욕망을 통제하며 신에게 납작 엎드려 복종했던 무슬림은 죽어서 잔나에 간다. 잔나의 컨텐츠는 타 종교들의 천국과 비교하면 유치하기가 짝이 없다. 금은보화가 가득한 궁전 같은 집에서 '후룬'('후리'라는 여성형 천사의 복수형)라고 불리는 극도로 아름다운 생물학적 처녀들에게 둘러싸여서 취하지 않는 술을 마신다. 후리의 처녀막은 그가 파괴하더라도 무한 재생성되는 것으로 보인다.

 

무함마드의 경험담을 전승한 '하디스'에 따르면 1인당 배정되는 후룸은 72명이라고 한다. 다만 72명 설은 하디스 중에서 신뢰성이 높지는 않은 등급이라고 한다. 아무튼 후룬은 단수가 아닌 복수형이고 수많은 후룬에게 둘러싸인다는 게 일점일획의 왜곡도 없는 쿠란의 내용이다.   

 

이렇듯 수많은 후룬들에 둘러싸이게 되므로 평생을 함께 보냈던 조강지처에 대한 사랑은 잔나에선 보류하는 게 나을 것 같다. 게이는 이슬람 율법에 불순종한 사람들이라 모두 지옥에 갔을 테니 잔나에서 미녀들이 반겨주는 건 매우 자연스럽다. 그렇지만 남편을 후룬에게 빼앗긴 아내들은 어떻게 소외감을 달랠까? 다행히 '길만'이라는 시중드는 미소년들이 도처에 깔려있다고 한다. 수염이 수북한 근육질 마초남을 좋아하는 여성들은 영원한 사후세계를 대비하기 위해 남성 취향을 미소년 계열로 바꾸는 게 좋다. 혹여 여자들이 자신에게 배정된 후리의 압도적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뽀뽀라도 했다가는 동성애를 금지한 율법을 어긴 셈이 되므로 후리가 여자에게 아무리 살갑게 굴어도 여자의 관심은 침실의 후룬보다는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서 시중을 들며 심부름을 하는 존재인 길만에게 집중하는 게 바람직하다. 이승에서나 저승에서나 무슬림 여성의 삶은 도전적이다.  

 

잔나에서는 술이 냇물로 흐른다고 한다. 무함마드는 아직 증류를 모르던 시대 사람이니까 거기서 흐르는 술은 아마 포도주일 거다. 나는 잔나에 가더라도 그곳의 포도주를 별로 마시고 싶지는 않다. 중동 사람이 생각한 포도주라면 오크통에 숙성을 하지 않고 가죽부대나 토기에 숙성을 했을 거다. 오크향이 누락된 포도주는 얼마나 단순 무식한 맛이 날까? 게다가 냇물에서 흐르다 보면 그나마 남아 있던 술다운 풍미는 모두 사라지고 시금털털한 식초 같은 맛이 나는 액체만 남을 거다. 취하지 않는다니 15도 내외의 알콜은 쓴 맛만 나는 거슬리는 성분일 뿐이다. 율법에 짓눌린 불쌍한 무슬림들은 얼마나 술이 마시고 싶었으면 저런 천국이 필요했을까? 육체적 쾌락에 억압적인 율법이 사람을 미치게 한 것 같다. 마셔도 취하지 않는, 가죽부대 안에서 숙성시킨, 땅바닥을 흐르는 포도주는 지옥에서나 어울린다. 그런 걸 마시는 곳을 천국이라고 믿는다면 차라리 웰치스를 한 캔 따서 진짜 천국을 미리 체험해 보는 건 어떨까?

 

나의 이런 조롱 섞인 비아냥은 바로 쿠란의 구조적인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쿠란은 신이 무함마드에게 직접 계시한 것이라서 일점 일획도 틀린 것이 없다고 한다. 따라서 후리가 72명이라는 무함마드의 가물가물한 기억력에서 나온 하디즈 빼더라도 후리의 복수형 후룬과 길만의 존재 자체는 모두 비유가 아니라 움직일 수 없는 진리 그 자체다. 명색이 경전인데 너무 저차원적인 이야기를 많이 적은 게 사후 세계 파트의 패착이라고 본다. 또한 고대 중동인의 욕망을 비유적으로 보였다고 하기에도 문제가 크다. 무함마드는 이것이 시대적 상황에 따른 것이 아닌 변경될 수 없는 최종적 계시라고 선언을 했기 때문이다. 쿠란에는 비유로 설명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어리석다고 경고한 구절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사후세계의 환락에 대한 구체적인 기술은 전지전능하고 거룩한 존재인 신이 내려준 비유 치고는 지나치게 경박하고 어리석다는 생각을 거두기가 어렵다. 세상에는 다양한 성향의 사람들이 있는데 신은 왜 고상하고 아름다운 버전의 천국은 제시하지는 않았을까?  

 

이승에선 즐기지 못했던 다채로운 신의 선물을 잔나에서 만끽한다면 아무리 비관적인 인간이라도 신의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할 수가 있을 것이다. 무슬림의 관점이라면 반출생주의자 들은 고통스러운 삶은 짧게 끝나고 이후 영원한 환락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애처로운 자들일뿐일 것 같다. 배가 고파봐야 음식의 귀중함을 알듯 신이 세상을 살아기기 힘든 곳으로 설계한 것은 천국에서 신의 사랑을 더 맛있게 느끼게 하기 위한 신의 계획이 아니었을까? 인간이 태어나자마자 이 세상이 아니라 잔나에 풀어놨다면 그것이 좋은 줄도 몰랐을 테니까. 창조의 규모 면에서도 본무대는 세상이 아니라 잔나다. 세상은 인간이 불과 백 년 미만 정도를 보내는 신병 훈련소 같은 곳이고 사후 세계가 영원히 지내는 자대에 해당하는 장소니까. 논리적으로 따져본다면 신에 대한 감사는 현세보다는 사후에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무함마드는 예수를 '이사'로 부르면서 깊은 공경을 보였다. 예수의 복음을 '인질'이라고 칭했으나 그 내용이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왜곡이 되었기 때문에 최종 계시인 쿠란을 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 이사는 동정녀에게서 태어났고, 신의 명령에 순종하며 기적을 일으킨 선지자다. 이사가 존경받을 이유는 그가 말한 윤리적 권면, 예를 들어 "원수를 사랑하라" 같은 가르침이 아니다. 신의 선택을 받아 기적을 일으키고 순종을 했기 때문이다. 예수의 수많은 가르침은 쿠란에 전해지지 않는다. 예수에 대한 태도는 윤리적 영성에 대한 존중보다는 다분히 존재론적 공경에 불과하다. 이 점은 신의 선택을 받은 무함마드에 대한 존재론적 공경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기도 한다.  

 

무함마드는 자신이 신으로부터 받은 계시인 쿠란이 최종적인 계시이고 이후 수정은 없다고 선언했다. 그가 한 말이 실제로 신의 음성이었는지는 딱히 교차검증이 되지는 않았다. 그가 받은 계시는 7세기 아라바이아라는 가혹한 환경에서나 어울릴법한 율법과 유치한 찬양 일색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최종적인 계시로서 아라비아를 넘어 전 세계를 대상으로 천 년이 넘게 지속되고 있다. 정말 신의 목소리에서 한점 한 획도 바꾼 게 없는 계시의 내용이 겨우 그 정도라면 신은 지나치게 경솔한 존재가 된다. 고대 중동사람인 무함마드의 필터를 한번 거친 것이라면 그가 지나치게 오만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나는 신이 경솔해지는 것보다는 특정시대 특정 지역에서 겁나게 운 좋았던, 오만하고 부정직한 수다쟁이가 살았었다고 받아들이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이슬람권에서도 나름의 신학이 존재한다. 그런 것들을 공부해보지도 않고 경전을 문자적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은 악의적 해석이라고 비판받을 수도 있다. 그런데 정작 그 경전을 받아 쓴 사람이 그건 신의 목소리 그 자체이므로 경전을 자의적으로 왜곡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다. 창시자가 그렇게까지 말했는데도 왜 그렇게 난해한 신학의 도움을 받아야만 종교로서의 거룩함이 유지될 수가 있을까? 그건 원전이 별로라는 또 다른 방증에 불과하다. 기독교의 히브리서는 사사 삼손과 입다를 믿음의 모범으로 선언했다. 그런데 입다는 신앙을 이유로 딸을 불태워 죽인 아버지이고 레위기 27장에 따라서 은 30세겔을 속전으로 내고 딸을 살릴 수 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옷 30벌이 필요하다고 사람 30명을 살해한 연쇄 살인마 삼손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 자들을 믿음의 모범으로 본 것이 합당한 일인지를 해명하기 위해 기독교 신학자들은 진땀을 흘려야 했을 것 같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아닌 건 아닌 거라고 받아들이는 게 지적으로 정직하고 정신적으로 건강한 태도일 것 같다.  

 

어떤 레디컬 페미니스트가 모든 남성은 잠재적 성범죄자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 그렇지 않다고 반박하는 상황을 떠올려보자. 그 페미니스트는 모르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라고 공부를 하라면서 방대한 페미니즘 서적 목록을 들이민다. 그렇다면 남성이 잠재적 성범죄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가 제시받은 모든 책을 '공부'해야만 반박할 자격이 생기는가? 그렇지 않다. 자신의 양심과 상식에 근거하면 된다. 설득의 책임은 주장하는 자에게 있다. 그리고 그 책을 공부하라는 것은 자신의 주장을 논의의 전제로 치환하는 속임수에 불과하다. 2500페이지에 이르는 난해한 자본론을 완독 해야만 막시즘을 비판할 수 있는 면허증이 발급되는 건 아니다. 완독 전보다 아주 조금 더 잘 비판할 수 있게 될 수 있을 뿐이다. 중요한 비판 포인트들은 완독 하지 않더라도 요약본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나있기 때문이다. 덩치가 크면 때릴 곳이 많을 가능성이 오히려 크지 않을까? 이미 충분히 취약성이 드러난 특정한 사상을 더 잘 때리기 위해서 일생을 낭비할 의사는 없다. 세상에는 더 재미있고 가치 있는 일이 넘치고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인생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또한 이슬람 신학에 대해서는 반대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이슬람 신학자들은 왜 그렇게까지 쿠란과 샤리아의 독성을 완화하는 이론을 개발하는 데 평생을 바쳤어야만 했을까? 이슬람이 그들의 삶에서 분리할 수 없는 공기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버릴 수 있었으면 버렸을 텐데 그럴 수가 없는 상황이었으니 그 독성을 정화를 하고자 했던 몸부림이 바로 그들의 신학이 아니었을까? 교리에 대해서 별로 따질 게 없다 보니 종교 내에서 가장 크게 나눈 분파는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것도 아니고 1400년 전에 누가 칼리프 자리를 계승하는 게 정당했는지가 주요 논점이 되었다. 이란 사람 중에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무함마드는 신이 선택한 평범한 인간일 뿐 그의 혈통에 다른 사람에 비해 고귀하다고 볼만한 존재론적 의미가 깃들었다고 볼만한 근거는 없다." 그러나 그가 그런 의견을 제시할 기회는 원천적으로 차단된다. 그런 말을 입밖에 꺼냈다가는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거나 종교경찰에 연행될 수도 있다. 그런 신학은 현실의 모순을 정당화하는 수단이자 자신이 속한 진영이 옳다는 확증편향을 강화시키는 도구로 남을 뿐이다.

 

무슬림은 자신의 신념이 아니라 자기가 태어난 곳에 의해서 어떤 분파를 믿을지가 결정되고 다른 분파나 다른 종교를 믿는 집단에 대한 증오를 학습당한다. 조지 오웰의 1984에 나오는 분노의 시간을 연상시킨다. 안타깝지만 이슬람 신학은 이렇게 수니와 시아가 정해진 답으로 고정된 상태에서 각각의 사유를 뻗어나갔을 뿐이다. 앞선 예시와 반대로 이번에는 어떤 수니파 신학자가 오랜 신학적 고찰 끝에 이런 결정을 내렸다고 쳐보자.

"무함마드는 신의 계시를 받고 신과 직접 소통하면서 유전자에 엄청난 변형을 겪었다. 따라서 그의 혈통을 따라서는 고귀함이 유전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는 자기가 태어나고 성장한 집단에서 학습받은 도그마에 의해서 그것을 마귀의 유혹으로 믿으면서 자신의 사유를 폐기할 수밖에 없다. 최종적 계시는 이미 정해져 있으니 종교의 현실적 모순에 반발하여 내세우는 개혁은 지옥행 확정인 불경한 반역일 뿐이다.  

 

상당히 오만해 보일 수는 있지만 이게 이슬람을 먼발치에서 바라본 나의 시각이다. 가장 큰 논쟁은 진정한 신앙의 의미는 무엇일까? 신의 실체는 무엇일까 같은 고차원적인 것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1,400년 전 정치적 사건에서 모든 것이 시작될 정도로 세속에 찌들어있고, 그마저도 자신의 진영에 봉사하는 사유만이 선택적으로 채택되는 질식할 듯한 구조.  

 

이 글이 시대적 맥락을 반영하지 않고 세속주의가 판치는 21세기 현대인의 합리적 관점에서 7세가 아랍인의 세계관을 정죄하는 편협함으로 보일 수 있음은 당연히 인지하고 있다. 다만 그것은 내가 아니라 쿠란이 스스로 자초한 일이다. 일점일획의 더함과 뺌도 없는 최종적인 계시라고 주장하라고 누구도 신과 무함마드에게 강요한 적이 없다. 쿠란 스스로 문자주의를 따르도록 강요해 놓고는 이제 와서 그것은 비유였고 시대를 반영해야 한다는 식의 변명은 궁색할 뿐이다.  

 

모든 내용을 직접 적용하다가 생길 부작용이 염려스러웠는지, 쿠란 3장 7절에서 "명백한 구절(무흐캄)"과 "비유적 구절(무타샤비흐)"이 섞여 있음을 명시한다. 문제는 무엇이 명백하고 무엇이 비유인지를 해석할 권한이 전적으로 권력자들에게 속했다는 점이다. 이는 종교를 이용하여 도구로서 특화된 구조이기 때문에 창시자의 무책임이 더욱 도드라지게 된다. 즉 권력자에게 유리한 내용은 무흐캄으로 지키고 권력자를 견제하는 내용은 무타샤비흐라고 해석하면 그만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선택적으로 하루에 5번 경배를 해야 한다는 것, 돼지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는 것도 언제나 신의 거룩함과 은혜를 잊으면 안 된다는 비유이고, 음식을 먹을 때는 정결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둘러대며 회피하는 게 논리적으로 가능해야 한다. 무엇이 비유적 구절인지를 명확히 지정하지 않은 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내로남불의 수많은 다른 버전 중 하나에 불과할 뿐이다. 할 말이 없으면 그것은 비유일 뿐이라고 변명하고 도망치면 그만이다.  

 

이슬람이 보이는 모든 이론적 문제는 모세(토라), 다윗(시편), 예수(복음) 같은 과거 선지자들의 전승은 왜곡된 것이고 오직 내 입을 통해서 나온 가르침만이 신과 직통한 변경될 수 없는 절대적이고 최종적인 계시라는 무함마드의 오만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무슬림들은 완벽한 최종 계시인 쿠란에서 다루지 않은 것을 판단하기 위해 이즈티하드를 채택했다. 하지만 10세기경에는 이제는 다룰만한 것은 모두 다뤘다고 판단하고는 그것을 폐지했다. 뭐든 자기 시대 이후로는 더 이상 변할 게 없다고 여기는 오만이 교리의 핵심을 이루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곧 종말이 올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을까?   

 

이 글은 쿠란을 완독하지도 않고 섣부르게 내린 결론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들은 도서관에서 빌릴 책을 고르거나 서점에서 책을 살 때 이미 이런 방법을 쓰고 있다. 목차를 훑어보고 본문을 조금 읽은 다음에 따분하면서 별다른 통찰을 느낄 수 없는 문장들만 보인다면 다시 책꽂이에 꽂는다. 성경의 시편을 읽은 경험은 그 방법이 틀리지 않음을 입증했었다. 1장은 지루했고 150장도 지루했고 비 신앙인 입장에서 그것을 견뎌내는 동안 아무런 통찰과 재미를 느낄 수 없었다. 쿠란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또한 이 글은 쿠란의 극단적인 측면에서 비롯된 일부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에 불과할 뿐일 수 있다. 이슬람은 1400년 동안 번성하고 수많은 신자들의 동의를 얻은 지극히 상식적인 종교다. 대부분의 선량하고 상식적인 무슬림들은 경건한 마음으로 신을 경배하며 평화롭게 소소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히잡 안 쓰고 외출한 여자를 손가락질하고 가끔은 굳이 잡아다가 매질해서 바른길로 인도까지 해주면서.  

 

상식적이고 선량한 무슬림이라고 지칭되는 사람들은 대체로 세속주의를 채택한 지역에 거주한다고 알고 있다. 세속주의자란 쿠란을 문자 그대로 따르지 않고 현실에 타협한 사람들이다. 즉 상식적이고 선량해지기 위해서는 쿠란이나 샤리아와 현실적인 거리를 둘 필요가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호기심을 가지고 관찰하는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인 것 같다. 혹여 내가 깊이 존경할 만한, 지혜롭고 관대한 무슬림이 나타나서 나의 오해를 해소해 주지 않는다면 이슬람에 대해 내가 받은 인상은 이 정도에서 정리가 끝날 것 같다.

 

일반적으로 유대교의 꽉 막힌 율법서를 보고 유대인을 평가하지는 않는다. 유대인들은 더 이상 안식일에 나무를 주운 사람이나 성읍 안에서 강간당하면서 비명을 지르지 않은 여자를 돌로 쳐 죽이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진짜 무슬림을 이해하기 위해서 쿠란을 읽는 게 잘못된 방법론이었을 것도 같다. 그러나 유대교 율법이 확고부동한 진리라고 반드시 모든 조항을 지키겠다는 하레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율법서에 대한 평가를 해볼 수 있다. 무슬림도 마찬가지다. 쿠란과 샤리아에 문자적으로 얽매인 근본주의자에 대해서라면 문자주의적 엄격함을 기준으로 이슬람을 판단해 보는 게 맞지 않을까? 쿠란은 태생적으로 신 또는 무함마드의 성급한 선언에 의해서 근본주의에 친화적인 경전이 되었다. 근본주의가 교리적 우위를 점하고, 쿠란은 삶에서 종교의 지분을 상당히 크게 요구한다는 점이 다른 문화와의 충돌을 만드는 게 아닐까라고 생각해 본다.  

Posted by 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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