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리고의 성문이 닫히고 아합은 그곳을 이스라엘의 영토로 굳히기 위해서 백성들을 강제로 이주시켰다. 그렇게 도시는 점차 번성해갔다. 하지만 이주해 온 젊은 부부들의 배는 여리고의 흙처럼 메말랐다. 잉태를 해도 아이는 달을 채우지 못하고 흘러내렸다. 오래지 않아 산파들 사이에서 은밀한 소문이 돌았다. 여리고의 맑고 달콤한 물이, 사람의 씨만 골라 죽인다는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날, 히엘은 무너져 내렸다. 여호수아의 저주나 닫힌 태의 형벌이 아니었다. 빈손으로 여리고에 들어와 그 물을 퍼 마시며 땅을 일구던 자신의 젊은 날들이, 아내 타마르의 태를 말려 죽이고 있었던 것이다.
강제로 성문이 달린 지 삼 년째 되던 해, 사마리아에서 전령이 당도했다. 아람을 침공한 아합 왕이 전사했다는 소식이었다. 왕은 적을 교란하기 위해 평복으로 변장까지 했으나, 이름 모를 병졸이 무심코 쏜 화살 하나가 갑옷의 비늘 틈새를 정확히 파고들었다고 했다.
전령을 돌려보낸 히엘은 남쪽 성벽 위로 올라갔다. 발아래 청동 성문이 무겁게 빛나고 있었다. 변장을 하고도 피하지 못한 화살. 히엘은 뼈저리게 깨달았다. 인간이 제아무리 높은 성벽을 쌓고 쇳덩어리로 문을 닫아걸어도, 주님의 저주는 기어코 제자리를 찾아가 꽂힌다는 것을. 두 아들을 잃은 자신도, 이 육중한 성문을 하사했던 왕도 예외일 수 없었다.
'저주받은 종려나무 성읍을 점령했던 에글론도, 그 성읍에 성문을 다셨던 폐하께서도 모두 비명에 가셨군요. 부디 영면하십시오.'
히엘은 텅 빈 서재에서 오래된 보관함을 열었다. 십여 년 전, 유월절 밤에 아내 타마르가 정성스레 천으로 싸서 넣어두었던 솔로몬의 전도서였다. 젊은 날의 그는 다 가진 왕의 배부른 투정이라며 첫 장만 읽고 내팽개쳤었다. 늙고 앙상해진 손으로 두루마리를 펼치자, 메마른 양피지 냄새가 훅 끼쳐왔다.
"헛되고 헛되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것이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도다."
히엘의 시선이 그 문장 위에서 오래도록 멈췄다. 바람을 잡으려는 것. 여리고의 성벽을 쌓으며 자신이 한 일이 정확히 그것이었다. 핏줄이라는 바람을 잡으려다 아비람을 죽였고, 영원한 이름이라는 바람을 잡으려다 스굽을 쇳덩어리 아래 밀어 넣었다.
"살아 있는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나으니, 살아 있는 자는 죽을 줄이라도 알지만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며, 다시는 보상도 없고, 그들에 대한 기억도 잊혀진다."
'기억도 잊혀진다.'
이름을 남기겠다고 발악한 히엘이었다. 그가 두 아들의 목숨을 성벽에 바친 이유가 '기억'이었는데, 솔로몬은 죽은 자의 기억은 어차피 잊혀진다고 말하고 있었다. 성벽에 새긴 '히엘'이라는 이름도, 돌이 풍화되면 지워질 것이다. 남는 것은 이름이 아니라 저주뿐이었다. 히엘은 두루마리를 놓고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숨이 거칠어졌다. 예전에는 한 줄도 공감하지 못했던 이 글이, 지금은 한 줄 한 줄이 형틀 위의 채찍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통스러운 것은, 솔로몬의 말이 모두 맞다는 것이었다.
'이 사람은 다 가진 자의 푸념을 한 게 아니었구나. 다 가져봤기 때문에, 다 가져도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다는 걸 안 것이었다. 나는 다 가져보지도 못하고, 가진 것마저 잃었으니, 이 사람보다도 못한 바보였구나.'
"하느님을 경외하라. 그가 모든 것을 심판하시리라."
두루마리의 마지막 문장을 읽어 내리던 히엘의 입술 사이로 바람 빠지는 듯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심판. 내 탐욕이 죄라면 내 목을 치시지, 왜 뱀을 씹어 먹으며 살아남았던 첫째와, 동생을 껴안고 떨던 둘째를 치셨는가. 아비가 죄를 짓고 자식이 피를 쏟는 것이 주님의 심판이라면, 나는 결코 당신을 사랑할 수 없다.'
그러나 원망할 곳조차 당신밖에 없다는 사실이 히엘을 더욱 철저히 무너뜨렸다. 그것은 굴복이 아니었다. 야곱이 천사와 씨름했듯, 히엘은 자신을 짓밟고 지나간 신의 옷자락을 이빨로 피가 나도록 물고 늘어지는 중이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양피지를 말아, 타마르가 그랬던 것처럼 천으로 꼼꼼히 싸서 다시 보관함 깊은 곳에 내려놓았다.
***
세월이 흘러 히엘의 머리는 하얗게 세었고, 타마르는 깊은 침묵 속에 갇혔다. 어느 봄날, 승천한 스승의 겉옷을 물려받은 대머리 선지자가 여리고에 당도했다. 그는 물이 나빠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는 사람들의 호소에, 새 그릇에 담긴 소금을 여리고의 가장 깊은 샘에 던졌다.
"주님께서 이 물을 고치셨으니, 다시는 죽음이나 열매를 잃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날 저녁, 아히노암이 부산스러운 발걸음으로 타마르의 방문을 열었다. 자유민이 된지도 십여 년, 이제는 원숙한 아낙의 태가 나건만, 타마르 앞에서는 영락없이 친정어머니를 찾은 여식의 얼굴이었다. 그녀의 두 손에는 맑은 물이 찰랑이는 대접이 소중하게 들려 있었다.
"어머니. 어서 이 물을 한 모금 드셔보세요."
평소 차분하던 아히노암이었지만, 지금은 상기된 뺨과 가쁘게 내쉬는 숨을 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타마르에게 물그릇을 내밀었다.
"선지자께서 샘에 소금을 던지셨다기에 그저 짠 물일 줄만 알았어요. 한데, 방금 한 모금 삼키고 나니, 제 평생 알지 못했던 기운이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것 같았어요. 그저 목을 축이는 느낌이 아니에요. 바싹 말라 갈라진 고목 뿌리 깊은 곳까지, 무언가 뜨겁고 벅찬 것이 굽이치며 차오르는 것 같아요."
아히노암의 붉어진 눈시울에 기어이 물기가 맺혔다.
"어쩌면, 평생 돌덩이 같았던 제 배 속에도 무언가 맺힐 수 있을 것 같다는, 그런 무서운 생각이 들 만큼요. 그러니 어머니도 어서 마셔보셔요."
그 벅찬 예감은, 십수 년의 세월을 함께 메말라가며 깊은 슬픔을 나누었던 두 여인만이 온전히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였다. 타마르는 아히노암의 흔들리는 눈빛을 마주하며, 홀린 듯 대접을 받아 들고 물을 삼켰다. 순간, 그녀의 굽은 등이 흠칫 굳었다. 흐릿하던 눈동자가 커지며 숨을 들이켰다. 그녀는 물그릇을 들고 급하게 남편의 집무실을 찾아갔다.
"여보, 선지자가 정화한 물이래요. 당신도 마셔봐요."
떨리는 아내의 목소리에 히엘도 잔을 받아 들었다. 혀끝에 닿은 짭짤한 소금기가 가시자, 투명하고 서늘한 감각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가슴 가장 깊은 곳의 텅 빈 자리를 묵직하게 채우는 낯선 감각이었다.
'아.'
히엘의 손이 떨리며 그릇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목이 말랐던 것이다. 평생을 독이 든 줄도 모르고 달콤한 물을 들이켜며 살았기에, 자신이 목마른 존재라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채워지지 않는 그 지독한 갈증을 달래보려고 성벽을 쌓고, 부를 긁어모으고, 남의 자식의 피와 뼈까지 성벽 기초에 묻어버렸던 것이다. 히엘의 주름진 뺨 위로, 수십 년 만에 뜨거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독을 게워낸 메마른 그릇에 마침내 진짜 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이튿날 이른 아침, 히엘은 지팡이를 짚고 저택을 나섰다. 종려나무 그늘 아래, 여리고의 가장 깊은 샘으로 향했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샘가에는 아히노암이 먼저 와 물동이를 채우고 있었다. 늙은 영주가 다가와 허리를 숙이자, 아히노암은 말없이 맑은 물을 한 바가지 퍼서 그에게 건넸다. 히엘은 굳은살 박인 두 손으로 물을 받아 길게 들이켰다.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고 그저 목마름을 조용히 적셔주는, 진짜 생명수였다. 히엘이 소매로 입가를 닦으며 입을 열었다.
"자네는 스굽이 동생이지?"
그녀는 멈칫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오빠를 제물로 삼았던 늙은 영주가, 그녀를 부른 것은 처음이었다.
"오늘 저녁, 자네 아비와 어미, 그리고 남은 형제들과 남편을 모두 내 집으로 데리고 와 주겠는가? 자네 집안 사람들이 자유민이 된지도 이제는 꽤 오래되었구나. 종과 주인이 아니라, 같은 아들을 둔 손님으로 초대하는 걸세."
아히노암의 눈시울이 붉어지며, 물동이 위로 맑은 눈물이 툭 떨어졌다. 그녀는 말없이, 그러나 깊게 고개를 끄덕였다.
히엘은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시선이 아비람이 묻힌 성벽의 기초를 지나, 스굽의 피가 스며든 거대한 청동 성문으로 향했다. 차가운 돌과 쇳덩어리로 만든 저 거대한 성벽은 웅장했지만, 생명 없이 죽어 있었다.
그러나 성벽 너머에서, 아침 바람을 타고 기분 좋은 마찰음이 들려왔다. 돌 성벽을 짓느라 수백 그루를 베어냈지만, 밖으로 살아남은 종려나무들이 일제히 잎사귀를 부딪치며 바람에 몸을 흔들고 있었다. 잘려 나간 밑동에서도 기어이 푸른 새순이 돋아나 빈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죽은 돌은 한 번 깨지면 끝이지만, 살아있는 나무들은 상처를 입어도 다시 자라나 기어코 서로의 틈을 메우며 거대한 숲을 이룬다.
종려나무(타마르). 바람에 흔들릴지언정 결코 무너지지 않는 그것이 여리고를 지키는 진짜 성벽이었다. 백발의 히엘은 그 푸르고 단단한 생명의 성벽을 오래도록 바라보며, 굽은 등을 펴고 조용히 미소 지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