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야기를 굳이 쓴 이유.
성경 이야기는 더이상 쓰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3달 전쯤에 썼던 '뱀 이야기'도 별로 쓰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가 어떤 유튜브 영상을 보고서 쓰고 싶다는 욕구의 씨앗이 발생한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이번 이야기 역시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쓰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지 못하고 만들어졌다.
요즘 성경 2회독을 하고 있다. 처음처럼 화면을 통해서 활자를 읽는 게 아니라 TTS로 듣는다. evie라는 안드로이드 어플로 성경 txt 파일을 읽게 하고 이어폰으로 들으면서 걸어다닌다. 고맙게도 카톨릭 성경을 손수 타이핑한 독실한 신자가 있었다. 스스로 밝히길 타자 속도가 1600타라고 한다. 카톨릭 성경은 번역이 이해하기 쉽고, 공신력이 있다는 장점이 있다. 장점이자 단점은 지명이나 인물명이 원어에 가깝게 표기된다는 점이다. 원어에 가까운 표기가 단점인 이유는 개신교식 표현이 사실상 표준인 현실에서 카톨릭 성경을 읽으면 누가 누구인지 헷갈리는 경우도 생기기 때문이다.
그 고마운 신앙인 덕분에 옛날 이야기 듣듯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이야기를 들었다. 2회차다보니까 처음에 안보이던 것들도 들리곤 했다. 특히 출애굽기의 후반부, 레위기 등 율법 파트들도 별로 지루하지가 않았다. 소설의 소재나 배경으로 쓰이곤 했기 때문이다. 나에겐 일종의 로어북이었다. 예를 들어 이런 생각도 해봤다.
내가 쓴 '입다와 라헬'에서 입다는 딸을 바치기 위한 서원을 무르기 위해서 은 30세겔만 납부하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제사는 누가 지냈을까? 제사장이 지냈다면 율법 전문가인 그는 그 규정을 알았을테고 그는 속전을 받을지언정 사람을 죽이는 제사를 진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입다가 직접 제사를 진행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제사장이 아닌 사람이 제사를 지내면 무슨 일이 생기는지는 사무엘기상12장에서 사울이 된통 당한 걸 보면 알 수가 있다. 하지만 입다는 에브라임 사람들까지 학살해가며 승승장구했다. 신은 왜 울면서 비는 사울에게만 그렇게까지 지랄맞게 굴었을까? 성내기를 더디한다는 자기소개랑은 상반된 태도다. 신이 입다를 버리거나 말거나 워낙 싸움을 잘하니까 상관없이 자력으로 다 패고 다는걸까? 이도저도 안되니까 신이 입다를 6년 후에 수습하듯 세상 밖으로 데리고 나간걸까? 2회독으로 안보이던 게 보이니까 잡념이 많아진다. 이런 생각은 '입다와 라헬'에 또다른 평행우주 이야기인 부록 2를 추가하게 만들었다.
어쨌든 꾸역꾸역 TTS로 성경을 듣다가 갑자기 응?? 하는 부분이 들렸다. 민수기 31장에서 생뚱맞게 모세가 미디안이라는 종족을 원수라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미디안족 사람들 입장에선 뭔가 억울할 것 같았다. 미디안이 뭘 그렇게까지 잘못했길래 원수일까? 그자리에서 오디오를 멈추고 인공지능에게 물어보니 민수기 25장에서 미디안 여인들과 히브리 젊은이들이 어울렸기 때문에 신이 징벌로 염병을 돌게했고 히브리인 2만4천 명이 죽었기 때문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여담으로 나라면 그 상황에서는 미디안보다는 신을 원수로 생각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어쨌든 26에서 30장까지 인구조사 이야기가 길게 이어졌기 때문에 앞내용을 잊어먹었던 거였다. 25장의 말미에서 모세는 틀림없이 미디안을 원수라고 선언했었는데 지루하게 이어진 인구조사 내용으로 모세의 육성은 31장에 가서야 현실화가 된 것이었다.
원수에 대한 처분은 역시나 구약답게 잔인했다. 히브리인들은 미디안 남자들을 모두 죽였다. 여자와 아이들을 전리품으로 잡아오는데 모세가 화를 내면서 포로중에서 처녀만 남기고 다 죽이라고 했다. 남자라면 아이까지. 1회독 때는 그냥 '모세가 모세했구나'정도로 받아들이고 별생각 없이 지나간 구절이었는데 미디안의 억울함에 대한 의문을 한번 느껴본 상태에서 받아들이니 그 안에서 있었을 지옥도가 떠올랐다. 누가 처녀인지 처녀가 아닌지를 도대체 어떻게 아는거지? 그러다보니 더더욱 끔찍한 상상이 떠올랐다. 3-2, 3-3, 3-4 챕터는 그런 상상력에서 시작되었다. 그것들은 이 이야기에서 가장 먼저 쓰인 파트였고 이야기를 끌고 가는 구심점이 되었다.
2. 이야기의 요소들에 대해서
1) 발람
민수기 31장에서는 미디안족에 대한 헤렘이 나오면서 사망자 명단에 다섯명의 미디안 왕 이외에 발람도 있었다. 동명이인인가 다시 찾아봤는데 22-24장에서 당나귀의 말을 듣고 여호와에게 순종했던 그 발람이 맞았다. 그는 신의 뜻을 따랐고 이스라엘을 축복했기 때문에 의인 카테고리에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상당히 의외였다. 사도들의 서신문들에서 악인으로 묘사된,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지나쳤던 그 발람이 이 발람이었다는 인공지능의 답변을 들었을 때는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아는 만큼 보이고, 2회독의 매력은 이런 데서 나오는 것 같다.
민수기는 미디안 여인들의 유혹이 발람의 계략에서 나왔기 때문에 발람이 죽었다는 시각이다. 난전 중에 의인이 죽었고 나중에 히브리인들이 구실을 붙였을 가능성도 있지만 일단은 텍스트를 존중하기로 했다. 미디안 여인을 유혹을 기획한건 발람이 맞다는 걸 받아들이고서 그가 왜 그런 계획을 세웠을까를 상상해봤다.
미디안족 입장에서 히브리인들은 공포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히브리 병력은 60만명이 넘는데 예비군까지 합친 현대 이스라엘의 가용 병력과 별 차이가 없는 규모다. 그 무서운 군사 집단이 지나는 곳마다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약탈해왔다. 미디안은 살기 위해 뭐라도 했어야 했다. 그나마 가장 가능성이 있는 방법은 그들과 피를 섞고 히브리의 일부가 되는 길이었을 것이다. 그 아이디어를 발람이 제공하는 것으로 설정했다.
발람의 최후는 그런 생명 존중 사상가이자 평화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보이고자 했다. 말라기 3:6에서 신은 변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토라와 역사서의 신과 예언서 시대의 신은 다른 존재처럼 보였다. 어쩌면 선한 신의 뜻을 인간이 제멋대로 참칭한 건 아닐까라는 비판의식을 발람의 입을 빌려서 표현해봤다. 발람에게 비록 탐욕스러운 이미지는 있지만 내가 상상한 면모들과 양립이 불가능한 건 아니다. 돈 좋아하는 생명 존중 사상가라는 캐릭터가 낯설 수는 있지만 딱히 모순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으니까.
2) 통혼과 시므온 지파
발람의 통혼 계획을 짜놓고나니 비느하스에게 살해당한 족장이 시므온 지파였다는 점이 흥미롭게 보였다. 창세기에서 시므온은 레위와 함께 통혼을 기회로 세겜 사람들을 몰살한 전적이 있었다. 르우벤은 무기력한 맏형이고 실질적인 리더는 사실상 둘째 셋째인 시므온과 레위로 보였다. 마침 리더십을 모세가 속한 레위지파가 가져간 점에 대해서 시므온이 불만을 가졌을 것으로 상상했다. 마침 모세에 대한 반역을 했다가 땅꺼짐으로 죽어버린 다단, 아비람, 온이 맏형인 르우벤 지파 출신이었다는 점 역시 그 아이디어를 연상시켰다. 반역 멤버 중 한명인 레위 지파 고핫 자손인 고라는 바지사장으로 보였다. 이건 개신교 새번역(RNKSV) 민수기 16:1에서 온만 르우벤 자손인것처럼 기술되어서 좀 헷갈릴 수 있다.
성경 번역문제는 쉽게 읽는 성경(KOREV)에서도 발견되는데 시므온 족장 시므리를 마치 족장 아들처럼 설명한다.
민수기 25:14 KOERV
미디안 여자와 같이 죽임을 당한 이스라엘 남자의 이름은 시므리였다. 그는 살루의 아들이었고 살루는 시므온 가문의 지도자였다.
이렇게 개신교 성경 중 두가지 번역본에서 혼란스러운 부분을 봤기 때문에, 애매하면 카톨릭 성경을 보는 게 정확할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다만 코라, 크핫, 시메온, 코즈비, 지므리, 추르 같이 인물명이 익숙하지가 않다는 점이 거슬린다. 개신교에서 한자어를 번역하면서 만들어진 이상한 이름 표기법을 이제는 포기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타마르라고 하면 가냘프고 고혹적인 근동 여인이 연상되는데 다말이라고 하면 덩치가 말 만한 말괄량이가 연상된다.
3) 염병과 내부 숙청
염병이 뭔지를 국어사전에 찾아보니 장티푸스다. 장티푸스는 환자의 분변을 매개로 퍼지는 수인성 전염병이고 주된 증상은 발열이다. 떠돌이 난민 캠프 비슷한 집단생활에서 전염병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직전의 전염병은 38년 전 고라의 반란때 쯤이었으니 병이 다시 한번 돌만한 시기가 되었다고 보기에도 무리는 없어 보였다. 그게 반드시 신의 심판일 이유는 없었다.
여기서 미디안의 악의를 추가하기로 했다. 일방적인 피해자라기보다는 가해자로서의 측면도 넣어서 양면적인 모습으로 구축해 본 것이다. 장티푸스가 그 지역의 풍토병이고 원주민인 그들이 거기에 대한 대비가 있다면 히브리인들만 선택적으로 죽게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염병이 발생하고 환자의 오물을 우물에 풀고 자신들은 물을 끓여서 감염에 대비하는 플롯을 만들어봤다. 물을 끓여서 살균을 하는 건 현대 의학적인 측면이라 시대착오적인 구상일 수는 있지만 수천 년 동안 거기서 살아온 사람들이라면 경험칙 측면에서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미디안 여인들이 시므온 사람들에게 물을 끓여 먹도록 유도하기 위해서는 차 문화가 필요했다. 그런데 차는 중국에서 온 것이고 3400년 전에 그 지역에 차는 없었다. 그래서 인공지능에게 그 지역에서 끓여 마실만한 허브가 뭐가 있을지 물었는데 우슬초와 박하를 추천받았다.
내부 숙청은 염병과 관계가 깊었다. 민수기 26장을 보면 시므온 지파의 장정 수가 종전 조사에 비해 3만 7천 명 가량 줄어 있었다. 이는 염병으로 죽었다는 2만 4천명보다 1만 3천명이나 큰 손실이다. 이는 시므온만 특별한 인명 피해를 입었다는 뜻으로 보였다. 마침 민수기 25장에 모세의 처형 명령이 있었다. 신은 모세에게 지도자들을 처형하라고 명령(25:4)했는데 모세는 한술 더 떠서 판관들에게 '어울렸던 모든 사람'을 찾아내서 처형하라고 지시(25:5)했다. 이 구절은 이번 이야기에서는 잔혹한 모세라는 캐릭터 구축의 원동력이 되었다. 시므온의 인구 감소를 염병이 아닌 모세의 처형 명령에 뒤따른 대규모 숙청으로 해석해봤다.
4) 추수
민수기 31장에서 잡혀온 처녀는 3만 2천명이다. 처녀의 숫자가 그정도면 전체 인구는 10만 명보다 훨씬 큰 수이지 않았을까? 싸울 수 있는 장정의 수도 10만명에 가까웠을 거라고 봤다. 그런데 정작 이스라엘은 1만 2천명의 병사로 그들을 몰살시키고 자신들은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민수기 31:49) 기적 아니면 기습인데 기습으로 처리했다. 왜 그렇게 소수 병력만 투입했는지는 좀 억지스럽지만 모세의 입으로 말하게 했다. 그게 '추수'논리였다. 히브리측이 아무런 피해 없이 그들을 멸절시키려면 자기들끼리 싸워야 했다. 그래서 미디안 사람들이 혼란에 빠지고 내분을 일으켜서 스스로 무너지게 되는 상황을 다소 억지스럽게 가져갈 수밖에 없었다.
5) 두쌍의 연인들
의외로 디르사와 이스할은 나중에 끼워넣은 캐릭터였다. 이스할은 이런 잔인한 상상에서 만들어졌다. 처녀 여부를 감별하는 병사가 미디안 여인을 사랑했었는데 하필 그녀의 처녀성을 깨뜨린 장본인이 자기 자신이었다면? 그리고 자신은 운 좋게 모세의 처형 명령을 피한 상태라면? 그가 자신이 사랑한 미디안 여인의 처녀성을 감별하고 그녀의 생사를 결정하는 위치에 있게 된다면?
나는 러브라인 구축이 확실히 약하다. 하지만 그래도 병적으로 꾸역꾸역 넣는 편이다. 성경은 '새번역'을 중심으로 봤기 때문에 시므리가 족장이 아니라 족장의 아들이라고 오해했었고 선남선녀의 사랑이라고 받아들였었다. 그래서 시므리와 고스비의 러브라인은 처음에는 영화 색,계 같은 느낌으로 갈까 해봤는데 플롯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고맙게도 다른 번역판들에서 시므리가 족장임을 알 수 있었다. 이쪽 사람들은 아직 성씨가 없었기 때문에 누구의 아들 누구라는 식으로 이름을 부르는게 스텐다드인데 새번역판에 그 점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것 같다. 노인네와 젊은 여자의 색,계는 어울리지 않고 내 상상력을 크게 상회하기 때문에 깔끔하게 놓아줄 수가 있었다. 대신에 아버지를 대신해서 보호해주는 이미지를 시므리에게 붙여서 상남자스러운 매력을 부여해보기로 했다.
이스할이라는 캐릭터를 비느하스의 친척이자 절친으로 설정한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처녀성 검사를 할때 피를 담은 주머니로 트릭을 쓰는 건 마술사 같은 손기술이 필요할 것 같다. 평범한 히브리 병사가 그런 기술을 부리는 것도, 그리고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디르사와 특정 병사가 엮이는 것도 각각 개연성 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스할은 어디든 난입하고 다른 사람의 시선을 차단할 권력이 있는 지위여야 했다. 비느하스의 친척이자 절친이면 고핫 자손이라는 귀족 비슷한 지위가 인정되기 때문에 이스할에게 그런 정체성을 부여해봤다.
이스할이 비느하스의 심복 역할을 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왜 레위 사람이 미디안 여자랑 어울렸고 그러고도 살아남았는지에 대한 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되었다. 그가 시므온과 미디안을 정탐하는 역할을 했고 그 와중에 미디안 여자와 거부할 수 없는 사랑으로 빨려 들어가게 하면 되었다. 디르사와 이스할은 색,계 유사 플롯을 붙이기에 적합한 커플이었다. 그런데 여전히 내 역량 초과였다. 안그래도 연애파트가 자신 없는데 색계라니... 그래서 그냥 순수하게 사랑을 하는 밋밋한 이야기로 가져갔다. 대신에 이스할에게 디르사의 생명에 대한 책임감이 쌓이게 하는 구도를 만들어봤다.
6) 길르앗 야베스 헤렘
처녀만 살리고 나머지는 다 죽이는 헤렘은 민수기31장의 미디안 이외에 또 있는지를 인공지능에 물어봤다. 인공지능은 사사기21장의 길르앗 야베스 사례만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귀가 솔깃한 지식을 알려줬다. 베냐민 전쟁이 한창이었던 사사기 20장에서 당시의 대제사장은 민수기 25장의 그 비느하스였다는 것이다. 그는 아론의 손자이자 엘리아살의 아들이다.(사사기 20:28) 길르앗 야베스의 진멸과 처녀만 잡아오는 결정은 회중에서 내렸는데 아마도 대제사장에게 큰 결정권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에서는 그 결정을 비느하스가 내리는 걸로 상상해봤다.
다만 사사기의 그 파트를 보면 이런 의문이 든다. 길르앗 야베스에서 잡아온 400명으로는 처녀가 200명 모자라서 실로에서 축제를 열고 거기에 춤추러 온 여자를 납치한다. 그리고 여자들의 아버지에게는 베냐민을 위해서 참으라고 회중에서 중재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출애굽기 22:16,17로는 아버지는 강간 당한 딸과 남자의 결혼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 그리고 신명기 22:28,29로는 결혼 여부랑 상관없이 아버지는 은 50세겔을 받을 수 있었다. 실로 축제에서 딸을 빼앗긴 아버지들은 사회적 압력으로 돈을 받고 딸을 팔아넘긴 것일까? 소설을 쓸 것도 아니면서 이런 식으로 파고 들면 얻는 건 없이 머리만 복잡해진다.
3. 작성 기법에 대해서
1) 역시나 반복된 고질적인 투머치 토크
성경 기반으로 이야기를 만들다보면 성경의 세계관을 전제로 한 이야기를 전개해야 한다. 그런데 그게 상식적이지 않은 경우가 많다. 게다가 성경을 그렇게 샅샅이 읽는 사람도 드물다. 따라서 이야기 속 당사자들이라면 누구나 상식일 배경을 굳이 그들의 입으로 해설을 해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 물론 각주로 처리할 수도 있지만, 각주를 덕지덕지 단 움베르코 에코식 서술방법을 극혐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대사와 지문으로 처리하는게 읽는 사람의 부담을 덜어주는 방법이라고 판단했다.
3천년 쯤 후의 사람들이 이런 대사를 보게 되는 셈이다.
"구글(3천년 후에도 구글은 안 망했다고 가정 ㅋㅋ)에서 운영하는 동영상 사이트 유튜브 있잖아. 거기서 개인 방송을 해서 구글에서 분배해주는 광고 수입으로 먹고 사는 어떤 사람이 있어. 그 사람이 자기 요리 비결을 유튜브를 통해서 동영상으로 공개했어."
어색한 표현인건 인정하지만 각주를 달기가 싫었다. 딱히 대안이 없으니 앞으로도 이런 병맛나는 대사들을 피하긴 어렵다고 본다.
2) 메인작가식 글쓰기
아비삭 이야기 후기에서 밝혔던 조영남 화백이 그림 그리듯 글쓰는 방식은 이번 이야기에서는 더욱 본격화되었다. 대부분의 아이디어와 뼈대는 내가 구상한 게 맞다. 그래서 어떤 파트에 대한 아이디어 구상을 러프한 문체로 제미나이 3 프로에 입력하고 이런식으로 진행하는 거 괜찮을까라고 점검을 맡겨보면 인공지능은 고증과 핍진성 문제에 대해서 점검을 하고, 그 부분을 직접 옮겨도 될 정도로 글을 써준다. 그대로 복사해서 붙여넣고 전체 맥락에 맞게 다듬으면 하나의 시퀀스가 만들어지는 식이다.
고증이나 핍진성에 대한 점검은 예를 들어 이런식으로 일어난다. 나는 이스할이 피를 가져올 그릇을 뭘 쓸지 고민했다. 토기 같은데 담으면 숨기기도 어렵고 금방 굳어버린다. 조그만 비닐봉지 같은 게 있으면 좋을텐데 그 시절에 그런 물건이 있을리가 없으니 물고기의 부레를 상상해봤다. 그런데 부레에 어떻게 피를 넣을 수 있을까? 주사기? 그 시절에 그런게 있을리가.. 스포이트? 고무가 없다. 빨대 정도면 가능할 것 같다. 플라스틱 빨대는 없던 시대지만 마침 갈대를 이용하면 가능할 것 같다. 마침 토라에는 '갈대바다'라는 말도 간간이 나왔으니 갈대 수급은 무리가 없다고 봤다. 그렇게 이야기를 만들어보니 ai가 태클을 걸었다. 싯딤평원은 사막인데 물고기 부레를 어디서 구하나?라는 문제다. 그러면서 차라리 양의 내장 같은 게 현실적이라는 조언을 했다. 부레에 비해 부피감이 있는 물건이라 그게 적합할까 잠시 망설였지만 옛날 사람들이 양의 창자로 콘돔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기억났다. 콘돔으로 쓸 정도로 얇게 가공을 할 수 있다면 비닐 봉지 비슷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이스할이 아침저녁으로 양을 도살해서 바치는 고핫 자손이라는 설정까지 연상해보니 적합한 소품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도 처음에는 죽어가는 소년의 피가 아니었다. 레위인으로서 매일 제사를 지내면 남아도는 게 소와 양의 피니까 그걸 이용하는 설정이었다. 그러나 다른 레위인들이 매일 맡는 양의 피 냄새와 사람 피 냄새를 구분하지 못할리가 있겠느냐는 인공지능의 지적에 사람의 피로 바꿨고 더 독한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이스할이 자기 손에 상처를 내서 피를 만드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건 나중에 티가 날 수밖에 없어서 채택하지 못했다. 그래서 방금 헤렘 당했지만 아직 맥박이 남아있는 소년을 활용하기로 했다.
이런식으로 짜낸 내용을 입력하고서 점검을 시켜보면 그대로 가도 괜찮은 아이디어라는 평가와 함께 직접 복사 + 붙여넣기 해도 될만한 시퀀스가 출력된다. 이렇게 쓰다보니 내가 직접 작성한 문장의 비율이 상당히 작다. 기왕이면 죽은자와 죽은자의 피를 접하는 걸 금지하는 율법을 피하기 위해서 죽어가는 소년을 이용해보기로 했다. 인공지능이 쓸만한 문장들을 뱉어냈다. 이야기가 더 기괴하고 절박해졌다.
조영남 화백식 글쓰기의 진가는 고증에서 나타난다. 민수기에는 각 지파들이 어디에 위치한지가 구체적으로 적혀있다. 그걸 일일이 읽어가면서 시므온 지파가 어떻게 포위공격을 당했는가 구도를 짜는건 딱히 재미있는 일은 아니다. 그 점은 과감하게 외주를 줘도 좋다. 그러면 이런식의 대답을 볼 수 있다.
좋은 접근입니다. 성경의 진영 배치(민수기 2장) 지식을 활용하면, 단순한 학살이 아니라 아주 치밀한 '군사 작전' 같은 장면을 연출할 수 있습니다.
먼저 지리적 팩트부터 정리해 드리고, 이를 활용한 소설적 구상을 보여드릴게요.
팩트 체크: 광야의 진영 배치도
성막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세 지파씩 배치되었습니다.
남쪽 진영 (오염 구역): 르우벤, 시므온, 갓.
이들은 서로 붙어 지냈습니다. 시므리(시므온)가 사고를 칠 때, 옆집인 르우벤과 갓 지파도 이미 미디안 문화에 상당히 물들어 있었거나, 최소한 방관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토벌대로 쓰면 안 됩니다.)
북쪽 진영 (최장거리, 심판자): 단, 아셀, 납달리.
시므온과 정반대 편(가장 먼 곳)에 있습니다. 물리적 거리가 멀어서 미디안의 유혹(남쪽에서 접근)에 가장 덜 노출되었을 것이고, 시므온 사람들과의 친밀도도 가장 낮습니다. 특히 **'단 지파'**는 행군의 맨 후미를 맡는, 군기가 센 부대입니다.
동쪽 진영 (최정예): 유다, 잇사, 스불론.
모세와 아론(성막 입구) 바로 앞에 있는 선봉 부대입니다. 가장 충성심이 강하고 전투력이 높습니다(갈렙의 유다 지파).
이야기 구상: [포위망을 좁혀라]
이 지식을 활용하면, **"남쪽(시므온)이 썩었으니, 북쪽(단)과 동쪽(유다)의 칼을 빌려 도려낸다"**는 전략이 나옵니다.
ai가 만들어준 이 정도의 상황을 놓고서 이걸로 구체적인 상황을 묘사해달라고 하면 그럴듯한 학살 시퀀스가 만들어진다. 무조건 믿고 쓰면 안되고 전체 스토리상 개연성이 어긋나거나 유리잔이 깨진다거나 철제 무기 같은 소품이 나오는 것처럼 시대착오적인 요소들은 내가 스스로 점검하고 다듬어야 한다. 조영남 화백도 라스트 터치는 스스로 한다고 했다고 한다.
연애 파트인 1-8, 9는 대부분이 ai가 작성한 것이다. 3부에서 이스할이 디르사를 살리기 위해서 고군분투를 하려면 두 사람 사이에 사랑과 성관계가 필요했다. 그런데 이게 쉽지가 않은 퀘스트였다. 이스할과 관계하기 전까지 디르사는 처녀성을 유지해온 정숙한 여인이다. 이스할은 정탐이 목적라서 두사람 사이는 반복적인 만남에 따른 자연스러운 친밀감이 아니라 언제든 전쟁이 벌어질 수 있는 상황에서의 불안감 그리고 운명의 상대를 만난듯한 강렬하고 지속적인 끌림 같은 요소가 필요했다. 그런데 내가 그런 이야길 만들 능력이 없어서 ai에게 아이디어 자체까지도 위임을 했다. 그 전에는 내가 ai에게 아이디어를 넣고 ai의 점검을 받아봤다면 이 파트는 인공지능이 나에게 아이디어를 던지고 내가 점검을 하는 방식이었다. 수정할 요소들을 지적하면 내 의도에 맞게 수정본이 나왔다. 메인작가가 자기가 쓰기 곤란한 부분을 서브작가에게 완전히 위임하는 형태였다. 내가 직접 쓴 건 "젠장, 열병은 내가 걸렸구나."정도다. 딱 정확한 비유는 아니지만, 다른 파트들은 oem 이었는데 이 파트는 odm에 가깝다고 보면 될 것 같다. 그리 마음에 드는 부분은 아니지만 내가 특히 취약한 분야라서 나 혼자 썼다면 저 정도 퀄리티를 뽑아낼 수는 없었다.
3) 의외로 ai가 만든 표현들
통혼을 칼날을 품은 칼집이라고 비유한 것.
"칼로 뚫을 수 없는 갑옷도, 품 안으로 파고드는 온기에는 무력해지는 법이지."
피가 섞이고, 살이 이어졌다. 청동창은 그들의 생명을 끊는 도구였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들을 영원히 떨어지지 않게 묶어주는 기괴한 '결혼 서약'이 되었다.
히브리 군이 횃불을 항아리에 숨겼다가 깨뜨린 것.
"너희는 양을 잡으러 가서 독사를 주워왔구나!"
"여기가 네 취향을 찾는 자리인줄 아느냐?"
"고개를 돌려라. 고핫 자손의 거룩한 감찰에 부정한 시선을 섞는 자는 눈이 멀 것이다."
손톱 밑에 낀 검붉은 피가 말라가며 살을 조여오고 있었다.
피 냄새를 지우기 위해 태운 향 냄새가 진동했으나, 이스할은 밤새도록 자신의 손을 씻고 또 씻었다.
"역시 피는 닦아내는 게 아니야. 더 큰 피로 덮는 거지. 그것이 진정한 거룩함이다."
4. 올해 글쓰기를 마무리하는 소감.
이야기를 만드는건 돈이 들지 않으면서도 상당한 즐거움이 따르는 S급 취미다. 그러나 기쁨은 짧고 기다림은 길다. 뭔가를 쓰고싶다는 생각은 항상 드물게 찾아온다. 한번 찾아 온 소재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워버리면 다음에 언제 다시 기회가 생길지 기약이 없다. 이번 이야기는 그래서 아주 천천히 진행하려 했다. 생각이 난 만큼만 적어보고 오래 즐기기 위해서 억지로 쥐어짜지 않으려 했다. 처음에는 그게 어느 정도 먹혀들었다. 그러나 이야기가 궤도에 오르자 점점 가속이 붙었다. 혈기왕성하던 시절, 자전거를 타러 나설 때마다 이런 생각을 했었다. '오늘은 설렁설렁 바람이나 쐬야지.' 그러나 매번 토하기 직전까지 패달을 밟아댔다. 옛날 생각이 나는 것 같다. 처음에는 간만에 찾아온 손님을 여유있게 모시자. 그러나 어느샌가 나는 또다시 전력 질주를 하고 있었다. 운동할 시간까지 넘기면서 쓰기에 매달릴 정도로. 그렇게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스스로 다짐해봤지만 패달을 밟던 그시절처럼 막을 수가 없었다.
올해는 1월에 입다의 딸에 대한 단편을 시작으로 이야기 만들기라는 취미에 입문한 해였다. 올해 써본 5개의 단편과 3개의 중편은 대략 30만자 정도다. 그외에도 2개의 트리트먼트 2개의 시놉시스를 써봤으니 그 양이 적다고 할 수는 없지만 쓰는 날보다는 쓰지 않는 날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나는 항상 굶주려있었다.
쓴 글을 인공지능에게 피드백을 받으면서 기초적인 내용인 쇼 돈텔, 헤드 호핑 피하기 같은 걸 배웠다. 일단 하라고 하니까 따라보려고는 하는데 딱히 그런 걸 좋아하지는 않는다. 특히 이야기의 원천이 거의 다 성경이라 군상극 형태의 이야기를 많이 하다보니 시점 고정은 쉽지 않은 과제였다. 그리고 문장을 세공하기보다는 이야기의 구조를 설계하고 플롯을 쌓는 재미를 좋아하기에 말하기를 보여주기로 변환하는 데에는 별다른 재미를 느낄 수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조영남 화백의 작업 방식을 따르게 된다.
성경을 소재로 많이 삼는 이유는 쓰기가 쉽기 때문이다. 시작과 끝은 정해져 있고 나는 중간만 채우면 된다. 색칠놀이를 하는 느낌이랄까. 될 수 있으면 성경 이야기는 졸업하고 싶었지만 다른 분야에서는 딱히 글감이 잘 떠오르질 않았다. 3천년 전 이야기들이라 역사적 자료가 부족해서 오히려 고증 문제에서 자유로운 편이다. 게다가, 성경 이외에는 별다른 취재 대상 자체가 없다는 것도 편하게 즐기기에는 깔끔했다. 성경 세계관에 대해서 모르는 건 인공지능에게 물어보면 인공지능은 구체적인 구절을 제시하면서 명쾌하게 대답해준다. 그리고 성경에는 서사의 균열이나 상상을 요하는 빈틈이 많아서 이제는 그만 써야겠다고 매번 되뇌지만 결국은 빨려 들어가게 된다. 톨키니스트들이 그들의 놀이터에서 재미있게 상상력을 펼치듯 나는 성경이라는 세계관 안에서 자유롭게 노니는 셈이었다. 부디 내년에는 성경에서 탈출해서 더 참신한 이야길 쓰게 되면 좋겠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