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오염된 전리품
개선 행렬은 화려했다. 1만 2천의 결사대가 돌아오는 길 뒤로, 끝이 보이지 않는 양 떼와 소 떼, 그리고 포로로 잡힌 미디안의 여인들과 아이들이 줄을 이었다. 병사들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보십시오! 우리 형제는 단 한 명도 죽지 않았습니다."
"미디안을 지웠습니다. 그리고 이 막대한 전리품을 보십시오."
지휘관들은 모세와 엘르아살 제사장 앞에서 허리를 굽히며 보고했다. 그들은 칭찬을 기대했다. 적의 씨를 말렸고, 아군의 피해는 없었으며, 가져온 재물은 이스라엘이 몇 년을 먹고살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이것보다 완벽한 승리는 없었다. 그러나 진영 밖으로 마중 나온 모세의 표정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그의 시선은 금덩어리가 아니라, 포로들의 행렬에 꽂혀 있었다. 화려한 옷을 입고 두려움에 떠는 미디안 여인들. 그들 중에는 바알브올의 축제 때 이스라엘 남자들을 홀렸던 그 얼굴들이 그대로 섞여 있었다.
"칭찬을 바라는 것이냐?"
모세의 낮고 갈라진 목소리가 환호성을 갈랐다.
"내가 이것들을 수확해 오라고 보냈더냐?"
지휘관 중 한 명이 당황하며 대답했다.
"예? 하지만 모세시여, 전리품을 상하게 하지 말라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이 여자들은 노동력으로도, 첩으로도 가치가..."
"이 미련스런 놈들!"
모세가 지팡이를 들어 여인들을 가리켰다.
"저것들이 바로 2만 4천 명의 네 형제를 염병으로 죽게 만든 그 '올무'다. 칼로 적을 이기고 돌아와서, 다시 적의 씨앗을 품 안으로 끌어들이겠다는 것이냐? 너희는 양을 잡으러 가서 독사를 주워왔구나!"
병사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너희가 가져온 것은 재물이 아니라 저주다. 이스라엘의 진영을 다시 음행으로 더럽힐 셈이냐?"
모세의 호령은 서릿발 같았다. 그는 떨고 있는 미디안의 소년들과, 남자를 아는 여인들을 가리키며 역사상 가장 비정하고 잔혹한 명령을 내렸다.
"아이들 중 남자는 다 죽여라. 그리고 남자와 동침하여 사내를 아는 여자도 다 죽여라. 그것들은 사람이 아니라, 걸어 다니는 바알브올의 씨앗이다."
병사들이 동요했다. 방금 전까지 전리품으로 계산했던 재산들을 폐기하라는 명령, 그것도 저항 능력이 없는 여자와 아이를 베라는 명령이었다. 하지만 모세의 눈은 타협을 허락하지 않았다.
"단."
모세의 시선이 공포에 질려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앳된 처녀들에게 머물렀다.
"남자를 알지 못하여 사내와 동침하지 아니한 여자들은... 너희를 위하여 살려두라. 그것만이 정화된 전리품이다."
3-2. 친절한 지옥의 안내자
이스할은 전리품을 가지고 오는 군대의 행렬을 거슬러서 달렸다. 디르사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었다.
'내가 디르사를 죽게 만들줄이야... 반드시 살려내고 말겠어."
숨가쁘게 달려온 이스할은 드디어 포로로 끌려 온 미디안 여자들의 행렬을 찾아냈다.
피 냄새가 진동하는 협곡 위의 벌판에, 울음소리조차 말라버린 수천 명의 미디안 여인들 앞에 병사들의 호위를 받은 젊은 레위인 한 명이 섰다. 이스할에게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는 스스로는 엄격하게 율법을 지키면서도 히브리 형제들에게는 헌신적인 삶을 실천하는, 이스할에게도 큰 귀감이 되는 인물이었다. 그는 흙먼지 묻은 자신의 옷매를 가볍게 털어내더니, 마치 예배를 인도하듯 온화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목도 마르고 많이 지치셨을 텐데, 이런 말씀을 전하게 되어 심히 유감입니다."
그는 손에 든 양피지 두루마리를 톡톡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위대한 지도자 모세께서 조금 전, 전후 처리에 관한 새로운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만이 우리와 함께 갈 자격을 얻게 되었습니다."
여인들 사이에서 낮은 신음과 동요가 일었지만, 레위인은 개의치 않고 친절한 미소를 유지했다. 히브리 병사들은 여자들을 둘러싸고 창을 겨눠 들었다.
그는 손을 들어 왼쪽과 오른쪽을 우아하게 가리켰다.
"자, 지금부터 분류 작업을 시작하겠습니다. 처녀이신 분은 제 기준 왼쪽으로, 남자를 아시는 분은 오른쪽으로 이동해 주십시오."
여인들이 주저하며 움직이지 않자, 레위인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는 마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아이를 타이르듯, 목소리에 진심 어린 걱정을 담았다.
"노파심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무작정 왼쪽에 선다고 살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저희가 꽤 엄격하고 구체적인 신체 검진을 준비해 두었거든요."
그의 시선이 여인들의 하복부를 훑고 지나갔다.
"거짓말을 하셨다가 발각되면, 그 과정이 몹시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울 수 있습니다. 목숨을 부지하지 못하는건 당연하고요. 그래서 말인데요, 이건 제 개인적인 연민을 담은 조언입니다."
여인들 몇몇은 손으로 자기 입을 틀어막고 주저앉아버렸다. 협곡에는 흐느끼는 소리가 가득했다.
그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머뭇거리면서 말했다.
"어차피 결과가 같다면, 굳이 마지막 가시는 길에 옷이 벗겨지고 속살이 헤집어지는 수모까지 겪으실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고 싶으신 분들은... 처음부터 오른쪽으로 가시는 걸 진심으로 권합니다. 오른쪽으로 가시면 저희 병사들이 여러분들을 절벽으로 안내해 드릴 겁니다. 칼이나 돌을 맞을 염려는 절대로 없으니 안심하세요. 오른쪽을 선택하신 분들은 스스로 절벽에서 뛰어내리게 되실 겁니다. 저희는 명예를 지킨 분들의 시신에서 옷을 빼앗지는 않습니다. 여러분들도 알고 계시지만 저희는 처음에는 여러분들을 살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종으로서 지금은 단지 명령에 따를 뿐입니다. 어쩌면 우리 가족이 될 수 있었던 분들에 대한 저의 간절한 배려를, 부디 가볍게 여기지 말아 주십시오. 저는 오른쪽으로 가시는 모든 분들이 부정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평생 한 지아비만을 섬기며 정절을 지켜온 아내의 삶이, 어찌 처녀보다 더럽다고 하겠습니까. 제 눈에 여러분은 누구보다 고귀하고 정결한 여인들입니다."
아직 젖도 떼지 못한 여자 아이를 안고 있던 한 아낙이 소리를 쳤다.
"꼭 그렇게 해야만 하나요? 제가 없으면 이 아이는 어떻게 하라고요? 저와 제 아이를 그냥 보내 주시면 안되나요? 아무도 모르는 먼 곳으로 가서 죽은 듯이 살게요. 제발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겨우 스물이나 되었을까 싶어 보이는 앳된 엄마는 울부짖었다. 레위인은 연민을 담은 표정을 지으며, 하지만 단호하게 대답했다.
"미안합니다. 그렇게는 안됩니다. 주님의 명령은 절대적입니다. 우리의 지도자 모세께서도 몇 번 정도 인간적인 결정을 내리신 적이 있지만 그 때마다 우리 민족은 큰 징벌을 받았습니다. 그 아기는 제가 특별히 더 정성껏 키우라고 지시해 두겠습니다. 어머님께서는 아기를 옆에 있는 병사에게 넘기시고 오른쪽으로 나와 주십시오."
병사들이 억지로 아이를 떼어내자 여인의 처절한 비명이 협곡을 찢었다. 이스할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지금 저 여인을 돕다가 지체하면 디르사를 놓친다. 딱히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죄책감을 억누르며 다시 인파 속으로 뛰어들었다.
'어디 있는 거야, 제발 살아만 있어다오.'
3-3. 지켜지지 않은 약속
이스할은 군중 틈을 비집고 들어가며 계속해서 디르사를 찾았다. 분류 대기열의 끝자락, 이스할은 끔찍한 광경을 목격하고 얼어붙었다. 한 여자가 필사적으로 병사들의 손을 뿌리치며 오른쪽, 즉 죽음의 줄로 가려고 발버둥 치고 있었다.
"비키시오. 나는 창녀요. 짐승만도 못한 더럽고 음탕한 여자란 말이오! 그냥 내가 죽게 내버려 두시오, 제발!"
살려달라는 비명이 가득한 곳에서 죽여달라고 외치는 여자. 그녀는 마지막 남은 존엄이라도 지키려는 듯 필사적이었다. 하지만 병사들은 킬킬거리며 그녀를 강제로 검사대 위로 끌고 갔다.
"우리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거나 백치인것 같다. 확인도 안하고 죽이기에는 아까운 미색이다. 일단 검사대 위로 올려."
"딱 봐도 남자는 구경도 못 해본 거 같은데? 검사해 봐. 아깝잖아."
이스할은 숨을 헐떡이며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결국 그녀는 강제로 검사대 위에 눕혀졌다. 사지가 결박당하고, 병사의 투박한 손이 치마 끈을 잡았을 때, 여자는 모든 저항을 멈추고 병사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광란에 차 있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잠깐."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서늘했다. 병사가 멈칫했다.
"나는 처녀가 맞소."
여자는 숨을 깊게 들이쉬며, 마지막 남은 존엄을 담아 속삭였다.
"하지만, 당신이 내 몸에서 무엇을 보든, 입 밖으로 소리 내지 마시오. 아무것도 못 본 것처럼, 그저 '통과'라고만 말해주시오."
"...뭐?"
"그게 순결한 처녀의 가장 깊은 곳을 침범한 사내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예의요. 당신들의 신이 정말 자비롭다면, 당신도 그 정도 자비는 베풀 수 있을 거 아니오?"
병사는 여자의 기백에 눌려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았어. 젠장, 빨리 끝내기나 하자고."
병사는 약속했다. 여자는 그제야 눈을 질끈 감고 힘을 뺐다. 병사가 치마를 확 걷어 올렸다. 이스할은 차마 그 광경을 볼 수 없어 시선을 돌리려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들려온 병사의 목소리가 이스할의 뇌리에 박혔다.
"이게 뭐야? 제기랄."
병사는 약속 따위는 까맣게 잊은 채,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나며 소리쳤다. 그의 눈은 혐오와 호기심으로 반쯤 감은 상태였다. 그는 십부장을 불렀다.
"이래서야 누가 데려가겠습니까? 이 여자를 배정 받은 사람은 무슨 죄입니까? 마침 자기도 죽겠다고 했으니 지금이라도 오른쪽으로 보내줄까요?"
"여기가 네 취향을 찾는 자리인줄 아느냐? 규칙대로만 해라. 너는 단지 막이 있는지 없는지만 알아내면 된다."
십부장은 여자에게 말했다.
"걱정 마시오. 그대가 순결하다면 아무도 당신을 해치지 않습니다."
병사는 헛구역질이 치미는 듯, 입안에 고인 침조차 삼키기 역겹다는 듯, 인상을 구기며 바닥에 걸쭉한 타액을 뱉어냈다.
"퉤!"
흙바닥에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가 배경처럼 들리는 다른 여자들의 비명보다 크게 여자의 귓가에 박혔다.
주변의 다른 병사들과 대기하던 포로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의 하반신으로 쏠렸다. 적막을 깨는 병사의 고함은 칼날보다 더 날카롭게 여자의 심장을 후벼팠다. 그 광경을 보던 사람들의 수근대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병사는 고개를 돌리고 마치 더러운 것이라도 만지는 듯, 오만상을 써가며 십부장이 명령한 의무를 감당했다. 그리고 여자는 죽지 않았다. 처녀임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병사는 여전히 불쾌감이 가시지 않는 듯 입가를 거칠게 훔쳐냈다. 하지만 그는 곧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의 눈빛에 서린 혐오감은 여전했지만, 목소리에는 기계적인 엄숙함이 깃들었다.
"흐음. 어쨌든, 그대가 처녀임이 확인되었소."
그는 시선을 여자의 얼굴이 아닌 먼 허공에 둔 채, 마치 외운 문장을 읊조리듯 딱딱하게 말했다.
"규정에 따라 당신은 정결하오. 이제 당신은 이방인이 아니라 우리의 자매요. 방금의 무례는 율법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니, 주님의 이름으로 양해를 구하겠소. 어서 가서 새로운 자매들과 합류하시오."
사과는 건조했고, 환영 인사는 차가웠다. 하지만 그 형식적인 절차가 여자에게는 더 큰 절망이었다. 저 혐오스러운 눈빛을 받으면서도, 단지 '처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들의 울타리 안에 갇혀 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선고였기 때문이다. 검사대에 멍하니 누워 맑은 하늘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는, 이미 그녀가 바라던 절벽 아래로 떨어진 뒤였다.
이스할은 마음이 급해졌다. 눈앞의 참상이 디르사의 미래처럼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저들은 짐승이다. 약속도, 예의도 없다.'
만약 디르사가 오른쪽에 선다면? 디르사의 아름다움은 그들의 호기심과 욕정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저 야수 같은 병사들에게 걸리면 그들은 디르사를 강제로 왼쪽으로 보내서 그녀를 비웃으며 발가벗겨 검사할지 모른다. 디르사는 사랑의 증표였던 순결 상실을 '음행의 증거'로 조롱받으며 처참하게 죽을 것이다. 이스할은 더 마음이 급해졌다. 그는 디르사를 찾기 위해 미친듯이 오른쪽에 줄을 선 포로들의 행렬을 따라 달렸다. 그때, 저 멀리 절벽 끝자락에 서 있는 익숙한 뒷모습이 이스할의 눈에 들어왔다.
'디르사!'
이스할은 마음속으로 울부짖으며 그녀를 향해 달려갔다. 이제 수단과 방법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율법이고 뭐고 일단 그녀를 살려야 했다.
3-4. 붉은 구원
디르사는 오른쪽 줄, 절벽을 향해 발을 떼려 했다. 그녀의 눈은 이미 죽어 있었다. 이스할과의 보냈던 단 한번의 달콤한 밤 그리고 그에게 바쳤던 순결의 대가를 이제 목숨으로 치러야 했다. 이스할이 그녀를 발견하고 숨을 헐떡이며 외쳤다.
"거기, 멈춰!"
익숙한, 그러나 짐승처럼 거친 목소리가 그녀의 귀를 때렸다. 이스할이었다. 그는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성큼성큼 다가와 디르사의 팔을 부러뜨리기라도 할 기세로 낚아챘다. 그의 눈빛은 광기에 가까웠다.
"이 여자는 정결하다. 내가 검사하겠다."
주변의 병사들이 웅성거렸다. 담당 레위 사제가 난색을 표했다.
"이스할 형제여, 절차는 우리가..."
"비켜라! 너희들이 음흉한 눈으로 이 여자의 몸을 훑는 꼴을 더는 못 봐주겠으니. 검사를 구실로 음욕을 품는 건, 간음을 저지르는 거나 다름이 없다는 걸 모르느냐?"
이스할은 대답도 듣지 않고 디르사를 검사대 위로 거칠게 밀어 눕혔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등이 바닥에 닿았지만 그녀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대신 디르사는 눈물을 가득 머금은 채, 이스할을 올려다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죽음은 각오했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차라리 당신 손에 끝날 수 있어 다행이에요. 고마워요."
그녀는 이스할이 자신을 죽이러 왔다고 믿고 있었다. 그 처연한 감사가 이스할의 심장을 난도질했다. 그는 울컥 치솟는 감정을 억누르며 그녀의 위로 몸을 겹쳤다.
"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겪지 않았을 일이다."
이스할은 그녀의 귓속에 꽂아넣듯, 그러나 아주 작게 속삭였다.
"그러니 가만히 있어. 내 죄가 널 살릴 테니."
그는 주변의 병사들을 향해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고개를 돌려라. 고핫 자손의 거룩한 감찰에 부정한 시선을 섞는 자는 눈이 멀 것이다."
병사들이 찔끔하며 시선을 피하거나 뒤로 물러섰다. 그 틈을 타 이스할은 품 속에서 무언가가 들어있는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그날 아침, 그가 직접 신께 제물로 바치기 위해 도축했던 어린 양의 창자 중 가장 얇은 부분으로 급조한 것이었다. 막 안에서 출렁이는 것은 짐승의 피가 아니었다. 아까 전장을 돌며, 아직 맥박이 남아 있던 미디안 소년의 상처에 갈대를 꽂아 빨아들인, 살아있던 사람의 붉은 피였다. 피는 이스할의 체온 덕분에 여전히 따뜻했다. 모세의 진멸 명령을 가장 먼저 전해 들은 고핫 자손의 비정하고도 처절한 준비였다.
'미안하다, 아이야. 네 피가 산 자를 구하리라. 그 때, 분명히 그 아이는 아직 숨이 붙어 있었어. 시신에서 나온 게 아니니까 이건 절대로 부정한 피가 아니야.'
그는 주머니를 손아귀 안에서 터뜨렸다. 미지근하고 끈적한 액체가 손바닥을 적셨다. 그는 피에 젖은 손을 망설임 없이 디르사의 치마 속으로 찔러 넣었다. 디르사가 흠칫 놀라 숨을 들이켰지만, 이스할의 손놀림은 신속하고도 냉혹했다. 그는 피를 그녀의 허벅지 안쪽과 속옷에 거칠게 문질렀다. 그러고는 가지고 있던 아마포 조각으로 그 피를 닦아냈다.
그는 검붉은 색의 피가 묻은 천조각을 레위 사제에게 내밀었다.
"이 여자의 문이 얼마나 굳게 닫혀 있었는지 보라. 손가락 하나를 허락하는 것만으로도 이토록 선명한 정결의 증거가 터져 나오지 않았느냐."
그는 붉게 물든 아마포를 병사들의 눈앞에 들이밀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선언했다.
"이 피가 증명한다. 이 여자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 순결한 처녀다. 외간 남자에게 치부를 보이면서까지 연명하길 거부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정도로, 누구보다도 정결한 여자다. 그리고 이제, 이 여자의 순결을 취한 첫 번째 남자는 나 이스할이 되었다. 율법에 따라 내가 이 여자를 책임지고 아내로 맞이하겠다. 이의가 있는가?"
피 냄새와 이스할의 서슬 퍼런 기세에 눌린 레위 사제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습니다. 증거가 확실하군요. 통과요. 왼쪽으로 가시오."
이스할은 디르사를 일으켜 세워 생명의 줄로 거칠게 떠밀었다. 디르사는 떨리는 다리로 걸음을 옮기며, 자신의 하얀 치마폭에 묻은 붉은 얼룩을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죽은 소년의 원한 서린 피였으나, 동시에 그녀에게 허락된 유일한 구원의 밧줄이었고, 그 어떤 보석보다 값진 생명의 빛깔이었다.
이스할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옷소매에 손을 숨겼다. 손톱 밑에 낀 검붉은 피가 말라가며 살을 조여오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방금 여호와의 명령을 어겼음을 알았다. 하지만 지옥 같은 이곳에서 그녀를 살릴 수만 있다면, 그는 기꺼이 그 저주를 감내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이스할은 심장이 터질 듯 쿵쾅거렸지만, 겉으로는 오만할 정도로 당당한 표정을 유지했다.
이스할은 입가에 남은 소년의 비릿한 피 맛을 삼키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 맛은 평생 그를 따라다닐 죄악의 맛이자, 사랑의 맛이었다.
3-5. 침묵의 무게
전쟁은 끝났다. 승전보는 요란했으나, 귀환 길은 기이할 정도로 조용했다.
약탈한 금붙이들이 부딪치는 소리와, 끌려가는 3만 2천 명의 처녀들이 내는 억눌린 흐느낌만이 광야의 바람에 실려 흩어졌다.
이스할은 대열의 후미에서 걷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디르사가 있었다.
그녀는 이스할의 옷자락을 잡고 있었지만, 그것은 연인의 손길이 아니었다. 벼랑 끝에서 동아줄을 잡은 조난자의, 하얗게 질린 손아귀였다.
저 멀리 선두에는 비느하스가 걷고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창은 석양을 받아 붉게 번들거렸다. 사람들은 그 창이 하나님의 질투를 대변했다고 환호했지만, 이스할의 눈에는 그저 피가 덜 마른 쇠꼬챙이로 보일 뿐이었다.
"이스할."
디르사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갈라진 목소리였다.
"누구의 피였나요?"
이스할은 앞만 보고 걸었다. 그의 등 뒤로 미디안의 마을들이 태워지는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 밑에 낀 검은 때가 씻겨지지 않은 핏자국처럼 느껴졌다.
"미디안의 피였어."
이스할의 대답은 짧고 건조했다.
디르사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는 그 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자신의 목숨은 적군인 이스할의 자비가 아니라, 이름 모를 내 형제, 내 이웃, 내 동족 아이의 죽음으로 샀다는 것을. 그녀는 입술을 깨물어 울음을 삼켰다. 살아남았다는 안도감보다, 홀로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이 더 무겁게 어깨를 짓눌렀다.
"우리는 이제 어디로 가요?"
디르사가 다시 물었다. 이스할은 대답하려 했으나, 혀가 입천장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그가 밟고 있는 땅은 꿀 대신 핏물이 고여 질척거렸다. 그가 방금 불태운 마을의 연기가 아직도 등 뒤에서 검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불그스름하게 혈색이 좋아보였지만 그의 눈에 그것은 소년의 핏빛으로 들어왔다.
"여호와께서 주시겠다는 땅으로."
이스할은 힘겹게 입을 뗐다. 그것은 희망찬 약속이 아니라 형벌의 선고 같았다.
"죽지 못해서, 기억을 안고 살아가야 할 곳으로."
디르사는 아직 깨끗하게 피를 씻지 못해 뻣뻣한 이스할의 손을 꼭 쥐었다.
그날 밤, 이스라엘 진영에는 감사 제사가 드려졌다.
피 냄새를 지우기 위해 태운 향 냄새가 진동했으나, 이스할은 밤새도록 자신의 손을 씻고 또 씻었다.
사막의 밤은 추웠고, 역사는 승자의 기록대로 조용히, 그리고 비겁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3-6. 에필로그
수 십년 후, 이스라엘의 열하나의 지파 연합군은 베냐민 지파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베냐민은 궤멸적인 타격을 입고 겨우 남자 600명 만이 생존하게 된다. 베냐민 전쟁의 전후처리를 두고, 백발이 성성한 대제사장 비느하스는 잘 닦여서 날이 반짝이는 창을 지팡이처럼 짚고 미스바 광장에 섰다. 이스라엘 장로들은 자신들이 입고 있는 옷을 찢으며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아이고! 분노에 차서 베냐민 형제들을 다 죽여버렸는데, 이제 이스라엘의 하나의 지파가 영영 사라지게 생겼으니 어찌합니까?"
"우리가 우리 딸을 그들에게 주지 않기로 맹세까지 했으니, 남은 600명은 꼼짝없이 대가 끊기게 생겼소."
그들의 위선적인 통곡을 듣던 비느하스는 콧방귀를 뀌었다. 젊은 시절, 시므온 지파를 도려낼 때 보았던 그 겁쟁이들의 눈빛과 똑같았다.
'저들은 피를 볼 때는 광분하다가, 피가 마르기도 전에 책임을 회피하려 든다.'
"울지들 마시오. 방법이 있으니."
비느하스의 갈라진 목소리에 장로들이 조용해졌다.
"이 총회에 참석하지 않은 놈들이 누구냐?"
"요단 건너편,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한 명도 오지 않았습니다."
비느하스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번졌다. 40여 년 전, 모세와 함께 싯딤 평원에서 내렸던 그 명령, 그리고 시므온 지파를 숙청할 때 썼던 그 방식이 그의 머릿속에서 다시 가동되었다.
"군대 1만 2천을 보내라. 길르앗 야베스로 가서 남자와 아이, 그리고 남자를 아는 여자는 모조리 진멸해라."
장로들이 기겁했다.
"아니, 대제사장님! 형제를 살리자고 또 다른 형제를 죽이라니요?"
"그들은 총회에 불참했으니 반역자다. 그리고, 오직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만 살려와라. 그녀들을 전리품으로 가져와 베냐민의 남은 놈들에게 던져주면 된다. 그러면 너희 맹세도 지키고, 베냐민의 대도 이을 수 있다. 아주 깔끔한 계산이지."
"그래도 되는 겁니까? 그 여자들은 하루아침에 부모 형제를 잃고 납치당하는 건데."
비느하스는 창자루의 끝으로 바닥을 쿵 찍었다.
"된다. 거룩하신 주님의 총회를 위해서라면, 그것은 납치가 아니라 구원이고, 학살이 아니라 헤렘이다. 나는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고, 내 칼끝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군대가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비느하스는 중얼거렸다.
"역시 피는 닦아내는 게 아니야. 더 큰 피로 덮는 거지. 그것이 진정한 거룩함이다. 그 미친 늙은이 시므리가 날뛰던 때나 지금이나, 변한 건 아무것도 없어."
사막의 모래는 신에게 바쳐진 피를 흔적 없이 집어삼켰다. 하지만 건조한 양피지는 그 새빨간 피비린내를 사람들이 수천 년 동안 떠올릴 수 있게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