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처형

한편, 이스할의 보고를 받은 비느하스는 분노에 휩싸인 채 자신의 아버지, 대제사장 엘르아살을 찾아갔다.

"시므리. 그 미친 늙은이를 당장 멸하겠습니다. 그리고 미디안 그 부정한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놈들은 우리 동포들을 죽음으로 끌고 가고 있습니다."

엘르아살이 그를 제지하려 했다.

"아무 계획도 없이 뭘 어쩌겠다는 거냐?"

"계획이 없기는 저쪽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습은 빠를수록 좋습니다. 일단 저지르고 그들의 죄상을 낱낱이 밝히면 아무도 우리에게 뭐라고 할 수가 없을 겁니다. 당장 몸이 날래고 경험이 많은 병사들을 서른 명 정도만 모아 주십시오. 그리고 모든 지파들에게 지금부터는 반드시 물을 끓여서 먹어야 한다고 지시해 주십시오."

"시므온은 사나운 사람들이다. 어떻게 뒷감당을 하려고 그러느냐?"

"우리에겐 모세님의 후원이 있습니다. 시므리의 편을 드는 자들은 모두 처단당해 마땅한 죄인들입니다. 그들이 불만을 표출한다면 색출해서 제거할 절호의 기회가 될 것입니다. 여호수아님도 도우실 겁니다. 나답, 아비후 백부님들은 주님께 씻을 수 없는 죄악을 지으셨습니다. 이번 기회에 그 오명을 털어내면 우리 집안은 떳떳하게 주님을 모시는 일에 매진할 수 있게 될 겁니다."

"내가 너무 약해져 있었구나. 고맙게도 네가 안일해진 날 깨우쳐줬구나. 맞다. 모세님께서는 주님의 계시를 받들어 판관들에게 이미 은밀히 시므온 지도자들에 대한 사형 판결을 내리신 적이 있다. 우리는 그걸 집행할 뿐이지."

그날 밤 비느하스의 결사대는 시므리의 장막을 급습했다. 시므리를 호위하는 정예병들은 미디안 여인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느라 족장의 천막은 예상보다 허술했다.

막사 밖의 비명 소리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시므리는 천천히 잔을 비우고, 떨고 있는 고스비를 바라보았다.

"공주. 그대의 눈에는 내가 그대의 치마폭으로 휘두를 수 있는 늙은이로 보였겠지. 실제로 그러기도 했지. 미디안을 살리고 그들을 나의 백성으로 삼으려던 계획은 물거품이 될 것 같소. 그래도 레위 놈들이 이렇게 과감하게 움직일 줄이야... 염병을 퍼뜨리는 당신네들의 그 고약한 계략만은 내가 아무리 모세가 미웠다 한들 역하긴 했소. 이제 그 값을 치를 때인가 보오."

고스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녀가 변명하려 입을 열자, 시므리가 거친 손으로 그녀의 입술을 막았다.

"상관 없소. 모세 그 위선자 밑에서 40년을 죄인처럼 기어 다니느니, 단 하루라도 당신의 왕으로 대접받다 죽는 게 나으니까. 당신이 가져온 게 독이 든 술잔이라 해도, 내게는 지난 40년의 세월보다 달콤했소. 이렇게 되길 바라진 않았지만 이제 갈 때가 되었나보군."

시므리는 창을 집어 들며 고스비의 앞을 막아섰다. 그의 등은 늙고 구부정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거대한 성벽처럼 보였다. 고스비는 멍하니 시므리의 등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친아버지 수르조차 살기 위해 딸인 자신을 사지로 내몰았다. 그런데 이 늙은 적장은, 자신이 이용하다 버릴 장기말에 불과했음을 알면서도 기꺼이 방패가 되려 하고 있었다.

"내 뒤에 숨으시오. 여자의 등 뒤에 숨는 왕은 없소."

그 순간, 고스비의 머릿속에 울면서 자신을 떠밀던 아버지 수르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아버지는 나를 사랑한다며 울었지만, 결국 나를 사지로 보냈다. 하지만 이 남자는 적장임에도 나를 위해 죽음을 마주하고 있구나.'

사랑한다는 말만 하고 지켜주지 못한 아버지와, 사랑한다는 말 대신 피를 흘려 지켜주려는 적장. 자신이 그리워했던 '아버지의 보호'가,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의 적이었던 이 늙은이의 등에 있었다. 그녀는 도망치는 대신 시므리의 허리를 뒤에서 꽉 끌어안았다. 끝까지 자신을 밀어내지 않고 지키려는 남자에 대한 예우였다.

"혼자 가지 마세요. 저도 같이 가겠어요. 당신이 나를 지키려 했으니, 나도 당신 곁에서 죽겠어요. 당신이 나의 왕이라면, 나는 죽어서도 당신의 여왕이에요."

시므리가 헛웃음을 지으며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허리를 감싼 고스비의 손을 겹쳐 잡았다.

"헛소리 그만 하고 내가 시간을 벌어줄 동안 얼른 도망이나 가."

'찌이익-!'

고스비의 등뒤로 천막의 장막이 찢겨나갔다. 시므리가 뒤로 돌아보니 창을 든 비느하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창끝에는 신의 분노가 서려 있었다.

푸욱-!

창은 잔인할 정도로 정확했다. 고스비의 등을 뚫고 들어온 날카로운 날붙이는 시므리의 복부까지 단숨에 관통했다.
두 사람은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피가 섞이고, 살이 이어졌다. 청동창은 그들의 생명을 끊는 도구였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들을 영원히 떨어지지 않게 묶어주는 기괴한 '결혼 서약'이 되었다.

고스비의 동공이 흐릿해지며 그녀는 피 섞인 웃음을 흘렸다.

"기어코 우리 피와 살이 이어졌네요. 제가 그토록 바랐던 대로."

고스비는 그 말을 남기고 시므리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눈을 감았다.  자신을 지켜주지 못한 미디안의 왕궁보다, 피 냄새나는 이 늙은 반역자의 품안이 더 따뜻했다.

"이제 아무도 우리를 떼어놓지 못하겠군."

시므리의 이 중얼거림이 그들의 마지막이었다.




2-2. 독안에 든 쥐

시므리가 창에 꿰뚫린 직후, 모세의 장막에는 긴급 지휘관 회의가 소집되었다. 분위기는 살얼음판 같았다. 밖에서는 여전히 시므온 진영의 곡소리와 혼란스러운 고함이 들려오고 있었다.

"시므온 놈들이 폭동을 일으킬 조짐이 보입니다. 시므리가 죽자 이성을 잃고 칼을 찾고 있습니다."

비느하스의 보고에 모세는 침통하게 눈을 감았다. 하지만 옆에 앉은 여호수아가 지도를 탁자에 거칠게 펼쳤다.

"폭동? 오합지졸일 뿐입니다. 그들은 술과 계집질에 취해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합니다. 지금이 기회입니다. 해가 뜨기 전에 고름을 짜내야 합니다."

"어느 지파를 보내겠느냐?"

모세의 물음에 여호수아는 지도의 남쪽, 시므온과 르우벤이 있는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가 X자를 그렸다.

"남쪽 진영은 안 됩니다. 르우벤과 갓 지파 놈들은 시므온과 한통속이나 다름없습니다. 시므온 놈들이 미디안 계집들을 끼고 놀 때 그들은 옆에서 구경하며 침을 흘리던 자들입니다. 칼을 쥐여줘 봤자 형제들에게 칼을 겨누지 못하고 주저할 겁니다."

여호수아의 손가락이 지도의 정반대 편, 북쪽으로 미끄러져 올라갔다.

"단(Dan) 지파를 부르십시오. 그들은 진영의 가장 북쪽, 시므온과 가장 먼 곳에 있습니다. 미디안의 향락이 닿지 않은, 가장 춥고 군기가 바짝 든 후방 부대입니다. 그들은 시므온 놈들에게 털끝만큼의 동정심도 없을 겁니다."

그리고 그의 손가락은 다시 동쪽, 유다 지파를 찍었다.

"그리고 선봉인 유다가 정면을 막아야 합니다. 갈렙 장군이라면 망설임 없이 반역자들을 벨 수 있습니다."

비느하스가 여호수아에게 말했다.

"단과 유다는 강력하지만, 시므온의 병력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저항하면 우리 쪽 피해도 막심할 겁니다. 게다가 서쪽이 비어있군요."

"서쪽은 내 휘하의 에브라임 병사들로 직접 치겠네.

"시므온은 독안에 든 쥐가 되겠군요."

"유다 지파가 성막 앞에서 시므온의 퇴로를 차단하고, 북쪽의 단 지파가 뒤를 돌아 남쪽을 급습하여 포위망을 좁힐걸세. 내가 에브라임 병사들까지 동원하면 갓과 르우벤은 공포에 질려 자기 장막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게 할 것이고. 맞네. 시므온은 독 안에 든 쥐가 될 것일세."

"제가 레위인 별동대를 르우벤과 갓 진영 사이사이에 배치하겠습니다. 그들은 시므온을 돕는 순간 자신들도 '공범'으로 몰려 처형될 거라는 공포에 짓눌려 방관자가 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모세는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결단을 내렸다.

"동, 서, 북, 그리고 내부. 완벽한 포위망이군. 즉시 정화를 개시하라."




2-3. 피로 씻긴 죄악

시므리가 창에 꿰어진 직후, 시므온 지파의 진영은 혼란의 도가니였다. 지도자를 잃은 분노와 갑작스러운 피바람에 대한 공포가 뒤섞여, 술 취한 병사들은 우왕좌왕하며 칼을 찾았다.

"레위 놈들이 우리 족장님을 죽였다! 쳐라! 성막으로 가자!"

선동꾼들이 소리를 질렀지만, 그들의 고함은 곧 싸늘한 침묵에 부딪혔다.

모세의 지팡이가 높이 들렸다. 그것은 홍해를 가르던 구원의 지팡이가 아니라, 썩은 살을 도려내라는 칼의 외침이었다.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중앙 성막을 지키던 레위의 칼잡이들이었다. 그들은 40년 전, 금송아지 사건 때 형제 3천 명을 하룻밤에 베어 넘겼던 도살자의 후예들이었다. 비느하스가 이끄는 레위 병력은 신속하게 남쪽 진영과 성막 사이의 완충지대를 점거했다. 시므온 지파가 모세에게 살려달라고 엎드릴 수 있는 유일한 통로, '성막 뜰'로 가는 길이 차단되었다.

시므온 지파의 장로들은 당황했다. 족장 시므리가 죽고 지휘 체계가 무너진 상태였다. 그들은 다급하게 옆 텐트를 바라보았다.

"르우벤 형님들. 갓 지파의 용사들이여. 우리 족장이 살해당했소. 게다가 레위 놈들이 우리를 포위하려 하오. 우리 남쪽 진영이 뭉쳐서 저들에게 대항합시다."

새벽의 여명이 밝아오면서, 시므온 지파 사람들은 자신들의 진영이 고립된 섬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바로 옆, 지난 40년 동안 밥그릇을 나누며 형님 동생 하던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의 천막들이 굳게 닫혀 있었다. 그들은 장막의 입구를 끈으로 단단히 동여매고, 마치 시체처럼 숨죽이고 있었다. 시므온의 장로가 르우벤의 진영을 향해 목이 터져라 외쳤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르우벤 진영 경계선에 박힌 팻말 하나뿐이었다.

'넘어오는 자는 반역에 동참한 것으로 간주하여 멸한다 - 모세'

믿었던 이웃들에게 버림받은 시므온 지파가 고립되자, 저 멀리 동쪽에서 흙먼지가 일었다. 가장 강력한 선봉, 유다 지파의 깃발이었다.
지축을 울리는 발소리가 동쪽과 북쪽에서 동시에 들려왔다. 동쪽에서는 떠오르는 태양을 등지고 유다 지파의 사자 깃발이 황금빛으로 번뜩이며 다가왔다. 갈렙이 이끄는 7만의 선봉대였다. 그들은 미디안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은 가장 충성스러운 주력군이자, 훗날의 권력을 약속받은 맹수들이었다. 유다 지파는 시므온과 혈연적으로는 가깝지만, 진영 배치상으로는 정반대 편에 있어 교류가 적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왕의 규(Scepter)'를 약속받은, 모세 체제의 가장 강력한 수호자들이었다.

"주님의 진노다. 반역자들을 쓸어버려라. 역적 시므온을 쳐라! 음행의 씨앗을 남기지 마라."

갈렙의 호령과 함께 유다의 방패벽이 시므온의 정면을 압박해 들어왔다. 유다 지파의 궁수들이 쏘아 올린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그것은 전투라기보다는 사냥이었다.
술이 덜 깬 시므온의 용사들은 갑옷도 입지 못한 채 뛰쳐나왔다가 고슴도치가 되어 쓰러졌다.

"형제여! 우리다! 시므온이다! 칼을 거두라!"

시므온의 병사가 피를 토하며 유다 지파의 병사에게 매달렸지만, 유다 병사의 눈은 차가웠다.

"여호와를 버린 자는 내 형제가 아니다."

더욱 끔찍한 것은 북쪽이었다. 시므온 지파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단(Dan) 지파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배후를 덮쳤다. 행군의 맨 후미를 맡아 항상 흙먼지만 뒤집어쓰고 소외감을 느끼던 단 지파였다. 그들은 남쪽 진영에 위치한 시므온이 미디안 여자들과 질펀하게 놀아날 때, 가장 큰 박탈감과 분노를 축적해 온 이들이었다.

"우리가 땡볕에서 행군할 때, 너희는 계집질이나 하고 있었더냐!"

단 지파의 병사들은 자비가 없었다. 그들은 시므온의 막사에 횃불을 던지고, 뛰쳐나오는 자들을 독수리가 채가듯 사냥했다. 그것은 전투가 아니라 토끼몰이였다.

"이건 전투가 아니라 처형이다."

살아남은 시므온의 한 장수가 절망적으로 중얼거렸다.
퇴로는 서쪽의 에브라임 지파가 막아섰고, 내부는 이미 잠입해 있던 비느하스의 레위 결사대가 장악했다. 혼란에 빠진 시므온 지휘관들이 급하게 갑옷을 찾으려 막사로 들어갔을 때,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어둠 속에 숨어 있던 레위의 자객들이었다.

"커헉...!"

명령을 내려야 할 지휘관들이 자기 침소에서, 혹은 미디안 여자를 숨겨둔 벽장 안에서 레위인들의 단검에 목이 그어졌다. 시므온 지파는 '독 안에 든 쥐'가 아니라 '불타는 독 안의 쥐'였다.

"살려주시오! 우리는 꼬임에 넘어갔을 뿐이오! 우리가 같은 야곱의 자손이 아닙니까!"

피 섞인 호소가 터져 나왔지만, 포위망은 무자비하게 좁혀졌다. 미디안의 여인들을 숨겨주었던 침상은 이제 그들과 그들을 탐했던 남자들의 선혈로 흥건히 젖어 들었다. 시므온 지파의 남자들은 무기를 들려고 했으나, 좁은 공간에 갇혀 서로 엉키고 밟히며, 이웃의 외면 속에 처절하게 찢겨 나갔다. 비느하스는 높은 바위 위에 서서 그 아비규환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썩은 살을 도려내지 않으면 몸 전체가 죽는다. 이것은 살인이 아니라 치유다. 보아라. 이것이 죄의 무게다."

바로 옆, 남쪽 진영의 르우벤과 갓 지파 사람들은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하고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동쪽에서는 사자(유다)가, 서쪽에서는 황소(에브라임)가, 북쪽에서는 독수리(단)가 시므온을 갈기갈기 찢어발기고 있었다. 시므온 진영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 소리와 피비린내가 바람을 타고 그들의 코끝을 스쳤다.

"도... 도와야 하지 않나? 우리랑 40년을 붙어 살았는데..."

르우벤의 한 장로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갓 지파의 족장이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미쳤소? 저기 보시오."

그가 가리킨 곳에는 피 묻은 칼을 든 비느하스가 레위 청년들을 거느리고 르우벤과 시므온의 경계선에 서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너희도 움직이면 다음은 너희 차례다'라고 경고하는 듯한 서늘한 눈빛이었다.

"문 걸어 잠그시오. 오늘 밤엔 아무것도 못 본 거요. 살고 싶으면 귀를 막으시오!"

결국 르우벤과 갓 지파는 형제의 죽음을 외면하고 장막의 커튼을 내렸다. 그 비겁한 침묵 속에서 시므온 지파는 고립무원의 섬이 되어 처참하게 지워져 갔다.

해가 중천에 떴을 때, 시므온 지파의 진영은 붉은 늪으로 변해 있었다. 그날 밤, 시므온 지파의 장정 6만 명 중 절반이 넘는 숫자가 증발했다. 성경의 인구 조사가 말해주듯, 5만 9천 명이었던 그들의 숫자는 이 숙청으로 인해 2만 2천 명으로 쪼그라들었다. 가장 용맹하고 혈기 왕성했던 시므온 지파는, 형제들의 묵인과 연합군의 칼날 아래서 멸족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다. 40년 전 시내산에서 금송아지를 숭배하던 형제들을 베었던 레위의 칼날은, 이번에도 형제들의 피로 거룩함을 증명했다. 그들은 익숙한 솜씨로 시체들을 구덩이에 던져 넣었다.

살아남은 2만여 명의 시므온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모세의 발아래 엎드렸다. 그들은 더 이상 이스라엘의 용맹한 둘째 지파가 아니었다. 훗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독립된 땅을 얻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져, 유다 지파의 땅 한귀퉁이에 얹혀살아야 할 처량한 '셋방살이' 신세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2-4. 소박한 수확 계획

12지파의 족장들이 모세의 장막에 모였다. 다른 족장들은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앉아 있었으나, 구석에 앉은 한 노인은 죄인처럼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시므리가 죽은 후, 피바다가 된 시므온 지파를 수습하기 위해 급히 추대된 새 족장, 느무엘이었다. 그의 옷은 찢겨 있었고, 눈은 지난밤의 학살로 인해 퉁퉁 부어 있었다. 그는 모세가 자신을 부른 이유가 남은 시므온 사람들마저 진멸하기 위함일까 봐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천막 안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모세가 입을 열었다.

"이제 염병이 거의 진정되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제 우리가 그놈들에게 되돌려 줄 차례다. 각 지파에서 날랜 병사들 천 명씩을 준비하라.

12지파의 족장들은 여전히 불안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모세시여, 적은 10만이 넘습니다. 고작 1만 2천 명이라니요? 우리 병력의 50분의 1도 안 됩니다. 너무 위험하지 않습니까?"

모세는 지팡이를 무릎에 놓고, 노쇠하지만 형형한 눈빛으로 족장들을 둘러보았다.

"너희는 이것을 전쟁이라 생각하느냐? 착각하지 마라. 이것은 추수다."

모세가 지도 위에 놓인 미디안의 영토를 가리켰다.

"60만 대군이 몰려가면 어떻게 되겠느냐? 그 많은 발이 포도원을 짓밟고, 그 많은 입이 양 떼를 그 자리에서 먹어 치울 것이다. 우리가 얻어야 할 금붙이들은 병사들의 주머니 속으로 사라지거나 흙바닥에 묻힐 것이다. 우리는 지금 빈손이다. 광야 40년을 보상받으려면, 전리품에 흠집을 내지 않고 가져와야 한다."

모세는 족장들의 눈을 하나하나 맞추며, 그들을 안심시켰다.

"저들은 살만 뒤룩뒤룩 찐 양 떼다. 반면 우리 아이들은 40년을 굶주린 사자들이다. 양 떼를 잡는 데 사자 60만 마리를 풀면 고기가 남아나겠느냐? 양의 숨통을 끊는 데는 각 지파에서 가장 빠르고 잔인한 사자 1,000마리씩이면 충분하다."

"시므온의 족장, 느무엘이여. 앞으로 나오라."

모세의 부름에 장막 안에 침묵이 흘렀다. 유다의 갈렙이나 에브라임의 족장들이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느무엘은 무릎걸음으로 모세의 앞으로 기어 나와 이마를 땅에 찧었다.

"모세시여,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부디 남은 여자와 아이들만이라도 살려주십시오. 저희가 광야의 가장자리로 물러나 죽은 듯이 살겠습니다."

모세는 지팡이를 짚고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는 엎드린 느무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예상외로 따뜻하고 묵직한 손길이었다.

"느무엘이여. 고개를 들어라."

"감히 얼굴을 뵐 면목이 없습니다."

"나는 너를 벌하러 부른 것이 아니다. 너희는 이미 충분한 피를 흘렸다. 이제 그 피를 닦아내고, 다시 야곱의 이름 아래로 돌아와야 하지 않겠느냐?"

느무엘이 떨리는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모세의 눈에는 분노 대신 깊은 연민과 단호함이 서려 있었다.

"다른 형제들과 똑같이, 너희 시므온 지파에서도 가장 날래고 용맹한 용사 1천 명을 차출하라."

주변의 족장들이 웅성거렸다. 칼을 겨눴던 반역자들에게 다시 칼을 쥐여주라는 말인가? 느무엘조차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저희에게 다시 칼을 쥐여주시는 겁니까? 저희 같은 죄인들을 믿으십니까?"

모세가 장막 안에 모인 모든 족장들이 듣도록 크고 엄숙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죄는 시므리가 지었으나, 속죄는 너희 모두의 몫이다. 이번 전쟁은 단순한 정복이 아니다. 이것은 너희 시므온이 다시 이스라엘의 형제로 받아들여지기 위한 정결 예식이다."

모세는 느무엘의 손을 잡아일으켜 세웠다.

"가서 너희의 젊은이들에게 전하라. 이것은 형벌 부대로 끌려가는 죽음의 길이 아니다. 미디안의 피로 너희에게 씌워진 오명을 씻어내라. 그리고 당당하게 승리하여, 죄인이 아닌 떳떳한 형제로서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오라."

그 말은 시므온 지파에게 내려진 그 어떤 축복보다 값진 것이었다. 그것은 용서였고, 소속감의 회복이었다. 느무엘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명심하겠습니다. 모세시여! 반드시, 반드시 그 천 명의 용기로 맹세를 지키고 형제들의 곁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여호수아가 옆에서 칼집을 어루만지며 거들었다.

"군더더기는 필요 없습니다. 발소리를 죽이고 놈들의 목줄만 끊어놓을, 진짜 사냥꾼들만 뽑겠습니다."

시므온을 향한 내부 숙청의 공포는 실로 엄청났다. 모세가 "미디안을 치라"고 명령했을 때, 감히 "힘들다"거나 "숫자가 부족하다"고 토를 달 지언정 대놓고 거부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2지파에서 차출된 1만 2천 명의 결사대는, 적군인 미디안보다 등 뒤에 있는 여호수아와 비느하스의 눈빛을 더 두려워했다. 그것이 그 말도 안 되는 '사상자 0명'의 성경 속의 신화를 만들어낸 진짜 동력이었다.




2-5. 수확제

미디안의 국경 수비대장은 눈을 의심했다. 지평선 너머로 흙먼지가 일긴 했지만, 그 규모가 너무나 초라했기 때문이다.

"왕이시여. 히브리 놈들이 오고 있습니다."

"얼마나 되느냐? 60만이라던 그 거지 떼가 다 몰려오더냐?"

수르 왕이 긴장하며 물었다. 수비대장은 헛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기껏해야 1만 명? 아니, 그 정도도 안 되어 보입니다. 진형도 없습니다. 그냥 떼를 지어 오고 있습니다."

막사 안의 왕들이 폭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염병이 돌아서 다 죽고, 남은 놈들도 오합지졸이라더니, 60만이 1만이 되어 나타났어. 수르 그대의 계획이 성공했군."

수비대장이 거드름을 피우면서 말했다.

"저것들은 군대가 아닙니다. 아마 배가 고파서 이탈한 무리가 투항하러 왔나 봅니다. 놈들이 염병으로 앓아 누운 걸 기회로 싹 쓸어버리면 어떻겠습니까?"

"그 계획은 일단 확실하게 정찰을 해보고 나서 결정하자. 저자들은 일단은 받아주지 말고 내버려 둬라. 가까이 오면 기병대로 밟아주면 된다. 우리 군사가 10만이다. 저 한 줌도 안 되는 놈들이 무서워서 성문을 걸어 잠그면 세상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다른 왕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볼 수 없는 내 딸, 고스비를 생각하면 마음이 찢어지지만 어쨌든 이건 다 그 아이의 희생 덕분이군. 우리 모두 우리를 위해 떠나버린 고스비를 위해 바알브올께 기도합시다."

그날 밤, 달이 구름 뒤로 숨었다. 술에 취해 곯아떨어진 미디안 진영의 외곽. 보초병들은 멀리 보이는 이스라엘 진영의 모닥불만 감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닥불은 기만용이었고 진짜 '사자' 1만 2천 마리는 이미 어둠을 타고 미디안 진영의 심장부까지 기어 들어와 있었다. 그들의 목표는 일반 병사가 아니었다. 화려한 깃발이 펄럭이는 다섯 왕의 막사, 오직 그곳뿐이었다.

"지금이다."

여호수아의 수신호와 함께, 어둠 속에서 12지파의 깃발이 동시에 솟구쳤다.

"와아아악!"

함성이 터지기도 전에, 왕의 막사를 지키던 호위병들의 목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히브리 결사대는 전투를 하지 않고 암살과 사냥을 했다.
막사 안에서 술에 취해 자고 있던 수르 왕은 바깥의 소란에 눈을 떴다.

"무슨 일이냐! 시끄럽게... 컥!"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천막을 찢고 들어온 시므온 자객의 칼이 수르의 목을 관통했다. 옆 텐트의 레겜 왕, 레바 왕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갑옷은커녕 속옷 바람으로 목이 잘렸다. 불과 두시간도 지나지 않아 미디안의 다섯 왕과 사령관들의 목이 장대 높이 걸렸다.

"왕들이 죽었다! 적들이 진영 한가운데 있다!"

히브리 군은 어둠 속에서 횃불을 항아리에 숨겼다가 일제히 깨뜨리며 고함을 쳤다. 쨍그랑거리는 파열음과 횃불의 불기둥은 잠에서 깬 10만의 미디안 군사들에게 마치 수십만 대군이 이미 막사 안까지 들이닥친 듯한 공포를 심어주었다. 머리가 잘린 뱀은 몸통이 아무리 거대해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도망쳐! 왕들이 다 죽었어!"
"우리는 다 죽은 목숨이야!"

극도의 공포 속에서 미디안 병사가 칼을 휘둘렀다. 푹- 하는 소리와 함께 비명이 들렸다. 하지만 쓰러진 것은 적이 아니었다.

"이 놈들이 배신했다! 다른 부족 놈들이 우릴 친다!"

지휘 계통이 무너진 상태에서, 서로 다른 부족이 연합해 있던 10만 대군은 섞이지 않는 기름과 물처럼 분열했다. 어둠 속에서 아군의 갑옷과 적군의 갑옷은 구별되지 않았고, 공포에 질린 그들은 움직이는 모든 것을 적으로 간주했다.

"아군이다! 쏘지 마라!"
"닥쳐라! 죽어라 이 배신자 놈들!"

미디안의 칼이 미디안의 심장을 찔렀다. 이스라엘 군은 그저 외곽을 빙 둘러싸고 퇴로를 차단한 채, 안에서 들려오는 비명과 칼부림 소리를 감상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들의 숫자가 너무 많은 것이 오히려 독이 되어, 서로가 서로의 발을 걸고 칼을 겨누는 아비규환의 지옥도가 펼쳐졌다. 어둠과 혼란으로 그들은 서로 얽혀서 넘어지며 도망가기에 바빴다. 히브리 1만 2천 결사대는 그저 뒤를 쫓으며 등 돌린 적들의 허벅지를 베고, 넘어지면 찌르기만 하면 되었다. 그것은 모세의 말대로 전쟁이 아니었다. 잘 익은, 아니 공포에 질려 안에서부터 터저버린 달콤한 석류를 따는 흥겨운 수확제였다.




2-6. 발람의 최후

비느하스가 발람의 막사에 들어섰을 때, 발람은 도망칠 준비를 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무표정하게 탁자에 앉아 포도주를 기울이고 있었다. 비느하스의 서슬 퍼런 칼날이 목을 겨누었지만, 발람은 잔을 내려놓으며 묘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꼭 이래야 했는가? 젊은 사제여."

발람은 비느하스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차분하게 말했다.

"나는 그대들의 민족을 축복해줬네. 그것도 세 번이나, 거룩한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서 말이야. 내 입에서 나온 축복은 아직도 유효하네. 나는 그 축복을 단 한 번도 철회한 적이 없어."

"네가 뿌린 음란한 꾀가 그 축복을 더럽혔다."

비느하스가 으르렁거렸다. 발람은 어깨를 으쓱했다.

"더럽혀? 아니지. 나는 미디안 사람들도 축복했을 뿐이네. 그들이 살 방법을 물어보기에 답해주었지. '서로 사랑하고 섞이라'고. 그게 죄인가?"

그는 밖에서 들려오는 미디안 병사들의 죽음의 비명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하지만 보게. 여호와의 권능이 실리지 않은 내 개인적인 축복은, 이렇게 그대들의 칼끝에 허무하게 무너져 버리는군. 거룩하신 여호와의 뜻이 없으면 인간의 지혜란 이토록 가벼운 것이야."

"축복? 그게 얼마나 많은 우리 동포들을 죽음으로 몰고갔는지는 모르나?"

"물론 수르 왕께서 쓸데 없는 일을 벌이시긴 했네. 하지만 그는 겁에 질려 있었어. 그대들이 저지른 과거의 학살들을 전해 듣고 이성을 잃을 정도로 공포에 떨었지. 살기 위해서는 무엇이라도 해야 할 만큼 절박했단 말일세.  나는 비록 히브리인은 아니지만 영광스럽게도 그대들의 창조주와는 몇 번 정도 이야기를 나눴지. 그 분은 피는 심장과 혈관 안에서 머무르며 몸을 따뜻하게 덥혀주는 생명 그 자체라고 생각하셨네. 하지만 그대들은 사람의 몸 안에 있어야 할 피를 흙바닥 위에서 보는 걸 훨씬 좋아하지 않아왔던가? 마침 지금처럼."

"닥쳐라"

"그분께서는 빛과 생명을 말씀하시는데, 그대들은 어둠과 죽음을 좋아하는 것 같군. 그게 정말 그 분의 뜻인가? 아니면 여호와께서 비추어 주신 모든 걸 포괄하는 빛에 그대들의 어두운 욕망을 투과시킨 건가? 한때 나는 내 나귀도 보았던 천사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영적으로 어두운 반푼이 점쟁이였어. 내 나귀는 길을 막아선 칼 든 천사를 보고 멈춰 섰는데, 명색이 선지자라는 나는 그 짐승이 사람처럼 입을 열어 항의할 때까지 영문도 모르고 채찍질이나 해댔지. 지금 자네들이 여기 사람들에게 칼을 휘두르는 것처럼 말이야. 하지만 그대들의 신과 교제를 나누고 나서 비로소 눈을 뜰 수가 있었네."

비느하스의 표정은 분노와 당혹감으로 일그러졌다.
발람은 마치 남의 일처럼 말을 이어갔다.

"보람은 없지만 그래도 참 재미있는 마지막 해였네. 신의 목소리를 듣고, 여러 왕들에게 추앙을 받으면서, 두 민족의 운명을 저울질했지."

그는 비느하스의 칼끝을 손가락으로 살짝 밀어내려다, 비느하스의 요지부동인 태도를 보고는 피식 웃었다.

"내가 꼭 죽어야 하나? 나는 그대들에게 해를 끼친 게 없는데도? 여호와께서 미디안 사람들 뿐만 아니라 내 피까지 요구하셨나? 말해보게. 그대들의 신은 쓰임이 끝나면 사람을 깨진 질그릇처럼 내던지시는 분인가?"

비느하스의 눈에서 살기가 번득였다.

"너는 신의 뜻을 빙자하여 인간을 시험에 들게 했다. 그것이 네 죄다."

발람은 웃음을 거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체념이라기보다는, 운명을 받아들이는 현자의 제스처 같았다.

"이제 와서 목숨을 구걸한다고 자네를 멈출수는 없겠지. 그대들의 신이 원하신다면 따르겠네. 어차피 나의 죽음 또한 그분이 자네들에게 보여주신 환상의 일부일 테니."

그는 눈을 감고 고개를 들어 목을 내밀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는 자신의 존엄과 영적인 우월감을 지키려 했다.

휘익.

비느하스의 칼이 망설임 없이 브올의 아들 발람의 목을 내리쳤다. 목에서 솟구친 붉은 피는 바닥을 적셨다. 그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으나 입가에는 묘한 미소가 남아 있었다. 마치 '이것조차 내가 예견한 바였다'라고 비웃는 듯한, 오만한 미소였다.

비느하스는 칼날에 묻은 피를 발람의 옷자락에 닦아내며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네 놈의 궤변은 스올에 가서나 떠들어라."

Posted by 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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