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더러운 계략
수르는 시므리의 천막에서 지내고 있는 고스비를 왕궁으로 불러들였다.
"아가. 네가 어련히 잘 하고 있겠지만, 계획대로 잘 진행되고 있느냐?"
"네. 광야에서 태어나서 집없이 평생 떠돌아 다니기만 한 사내들의 넋을 빼는 것만큼 쉬운 일은 없어요."
"몇 안되는 우리 처녀들로 어떻게 저 많은 히브리 사내들을 상대하고 있느냐? 비록 그 용하다는 발람의 계획을 따른다지만 나는 좀 불안하구나."
"다른 네 임금님의 백성들도 모두 동원 중이에요. 그리고 미색이 괜찮다 싶으면 지아비가 있는 아낙들까지 모두 나서고 있어요. 그 여자들은 비록 그게 정절을 잃는 일이지만 진정으로 자신과 남편을 구하는 일이라고 믿고 있거든요."
"우리가 살기 위해서 큰 죄를 짓고 있구나. 나도 네 아비이자 왕으로서 널 돕고 싶은데..."
"아버지와 다른 임금님들이 이미 맛있는 음식과 술을 지원해 주고 계시잖아요."
수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무겁게 입을 떼었다.
"얼마 전에 근처에서 염병 환자가 하나 나왔단다. 사람들이 물을 끓여먹기 시작해서 염병이 크게 번지지는 않았는데 어쩌면 그걸 이용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고스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번에도 그 발람이라는 점쟁이의 조언인가요?"
"그런 건 아니다. 선생은 그 이후 별다른 말 없이 여호와께 기도하는 걸로 소일하며 계신다. 이건 순전히 내가 독단적으로 계획한 일이야"
"기껏 시므온 사람들을 절반 가량이나 우리편으로 거의 만들고 있는데 그걸 옮기시려고요? 꼭 그러셔야 하나요?"
"걱정 말거라. 시므온 사람들이 마시는 우물은 건드리지 않을 거다. 그들과 멀리 떨어진 다른 지파의 우물들에만 환자의 오물을 풀 생각이다. 시므온은 멀쩡한데 모세의 주력군만 죽어나간다면, 시므온의 힘은 더 커지고 모세의 입지는 좁아질 게 아니냐."
수르의 눈빛에는 광기와 부정이 뒤섞여 있었다.
"그러니 너는 시므온 사람들에게 우슬초랑 박하를 끓인 물을 대접해라. 향기로운 차를 마시는 척하며 물을 끓여 먹는 습관을 들이게 해. 네 쪽에서 그 방비가 끝나면, 나는 나대로 더러운 일을 시작하마."
"그래도 저희랑 통혼하게 될 사람들인데 그런 방법을 쓴다는 게 마음이 편하지가 않아요. 하지만 아버지의 뜻을 따를게요. 이건 죽고 사는 문제잖아요. 우릴 보호해줄 시므온의 힘이 커지는 일이라면 해 보겠어요."
"시므리라는 늙은이 상대하랴 시므온 젊은이들 구슬리랴 네가 정말 할 일이 많구나. 고맙다. 아비로서 면목이 없다."
"히브리 청년들을 맞이하는 일은 당분간 제 시녀 디르사에게 맡겨야겠어요. 제가 아끼는, 예쁘장하고 말 한마디로 사람 마음을 얻는 그 아이요. 아버지도 아시죠?"
"그 아이라면 믿을 만하지. 네가 직접 키운 아이나 다름없으니. 하지만 조심해라. 히브리 놈들 중에는 레위 족속의 정탐꾼이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 더 좋아요. 디르사가 그들을 회유하면 되니까요. 어차피 우리 목적은 적을 친구로 만드는 거잖아요."
수르는 한숨을 쉬면서 대답했다.
"그래. 네 계획대로 해보거라."
고스비는 디르사를 만나서 시므온 사람들이 물을 끓여서 먹게 하는 습관을 들이게 만들라고 지시했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시므온의 진영으로 돌아갔다.
1-6. 염병
이스라엘 진영의 중앙, 회막 문 앞은 통곡 소리로 가득했다. 모세와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땅에 엎드려 여호와께 자비를 구하고 있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역병이 진영 외곽부터 돌기 시작해, 벌써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갔기 때문이었다.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모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고, 그의 등은 40년의 세월과 짊어진 짐의 무게로 인해 작게 떨리고 있었다.
그 뒤편, 어둠 속에 꼿꼿이 서 있는 한 청년이 있었다. 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였다. 그의 눈은 눈물 대신 서늘한 분노로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이 재앙의 원인이 신의 분노 때문이라 여기고 있었다.
바람을 타고 진영 밖에서 들려오는 저 역겨운 노랫소리. 바알브올의 축제 소리가 신성한 회막까지 침범하고 있었다.
"아버님, 그리고 모세 큰할아버님. 지금은 울고 계실 때가 아닙니다."
비느하스가 낮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밖에서 들려오는 교성의 소리가 들리지 않으십니까? 우리 형제들이 미디안의 계집들에게 홀려 영혼을 팔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어찌 진노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때였다. 죽음의 냄새가 진동하는 그곳에, 이질적인 향수 냄새가 끼어들었다. 회막 앞의 통곡 소리를 비웃기라도 하듯, 수만 명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시므리였다.
진영 입구가 갈라지며, 그는 죽어가는 형제들 사이를 마치 개선장군처럼 걸어왔다. 그의 옆에는 화려한 미디안 옷을 입은 여인이 그 허리를 감싸 안고 당당하게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미디안의 공주 고스비였다. 그녀는 시체의 산을 보며 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시므리는 고개를 쳐들고 모세가 있는 회막 쪽을 노려보았다. 그의 눈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광기와 정욕, 그리고 뒤틀린 승리감에 취해 있었다.
"울음을 그치시오!"
시므리의 목소리는 우렁찼다. 그는 병색 하나 없이 건강했고, 그의 뒤를 따르는 시므온 지파의 건장한 청년들도 마찬가지였다.
"당신들이 왜 죽어가는지 아시오? 꽉 막힌 모세와 엘르아살이, 우리를 돕겠다는 저 친절한 이웃들을 배척했기 때문이오! 보시오.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인 우리 시므온 지파 중에는 아픈 자가 단 한 명도 없소!"
시므리가 고스비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외쳤다.
"이 여인은 미디안 왕 수르의 딸이오. 그녀가 가져온 것은 저주가 아니라 생명이란 말이오. 이제 늙고 무능한 모세의 시대는 끝났소. 나와 함께 새로운 동맹의 시대로 갑시다."
시므리의 일갈에 회막 앞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고스비는 시므리의 품에 안긴 채, 모세를 향해 묘한 미소를 지었다. 모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벌렸다. 장로들은 경악하여 말을 잇지 못했다. 하나님의 성막 앞에서, 이방 신의 사제나 다름없는 여인을 데리고 들어와 행패를 부리는 것은 전례 없는 신성모독이었다.
그 순간, 비느하스의 손이 조용히 옆에 세워져 있던 호위병의 창을 움켜쥐었다. 손가락 관절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강한 악력이었다.비느하스의 눈에는 서슬 퍼런 살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는 시므리에게 외쳤다.
"경거망동 하지 마십시오. 그 이방 여자를 당장 내치십시오. 족장께서는 지금 주님께 대적하고 있습니다. 그 결말은 오직 죽음 뿐입니다."
시므리는 거들먹거리며 비느하스에게 빈정댔다.
"대적? 죽음이라... 자네 큰아버지들인 나답과 아비후 이야기를 하는 건가? 내 기억엔 그 양반들은 주님께 향불을 올리러 들어갔다가 그 자리에서 불타 죽었지. 자네 말 대로라면 그 거룩한 분들도 주님께 대적하다가 천벌을 받은 게 되는데? 이거 큰아버지들을 너무 욕보이는 거 아닌가? 뭐, 덕분에 자네 아버지가 그 대제사장 자리를 꿰찼으니, 자네에겐 그자들이 타 죽은 게 오히려 은총이었겠구만."
모욕을 당한 비느하스의 눈빛이 맹수처럼 번뜩였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아버지 엘르아살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었다.
"비느하스야, 명심해라. 주님의 거룩함을 침범하면, 그게 누구든 불타오른다. 네 백부님들의 실수는 우리 가문이 영원히 갚아야 할 빚이다. 너는 그분들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 너는 그 빚을 갚아야 할 의무가 있다."
비느하스에게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은 가문을 짓누르는 거대한 공포이자 채무였다. 그는 그 오명을 씻기 위해 평생을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감히 저 늙은 음탕한 반역자가, 그 두려운 신의 심판을 자신의 더러운 불륜과 비교하며 조롱거리로 삼고 있었다.
'감히 네놈들의 더러운 욕정을, 우리 가문의 비극과 비교해? 내 오늘 그 더러운 피로 우리 가문의 묵은 빚까지 다 갚아주마.'
창을 쥔 비느하스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역사는 피로 쓰일 준비를 마쳤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엘르아살이 창대를 붙잡고 고개를 저었다. 비느하스는 울분을 억누르며 이렇게 외쳤다.
"여러분들! 저것은 생명이 아닙니다! 저것은 우리를 썩게 만드는 달콤한 독일 뿐입니다."
비느하스는 군중들 앞에서 이렇게 선언하고 자기 진영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자신의 먼 친척이자 동갑 절친인 이스할을 은밀하게 불러서 지시했다.
"시므온 사람들에게서 뭔가가 있어. 자네가 그들 속에 숨어 들어가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조사를 해보게. 당분간 시므온 사람인 척 하고 저들이 이방인들과 어떤 음모를 꾸미고 있는 지를 알아내 봐."
"알겠네. 기왕이면 가장 많은 걸 알고 있을, 고스비의 시녀에게 접근해보는 게 좋겠군."
1-7. 가슴에 묻은 불씨
장막 안에서 한차례 격렬한 정사가 끝난 뒤, 고스비가 시므리의 가슴팍에 난 흉터를 손끝으로 훑으며 물었다.
"당신은 어쩌다 모세라는 노인을 그토록 증오하게 되셨나요? 단지 장자권을 뺏겨서라고 하기엔, 그 눈 속에 담긴 불길이 너무 깊고 어두워요."
시므리는 고스비의 손을 거칠게 잡아채며 쓴웃음을 지었다.
"장자권? 그건 명분일 뿐이오. 진짜 이유는 따로 있지."
그는 천막 밖, 저 멀리 보이는 성막 위로 피어오르는 구름 기둥을 노려보았다. 그의 눈빛은 과거의 공포로 흔들렸다.
"그날을 기억하오. 고라와 다단, 아비람, 온이 모세에게 대들었을 때였지. 우리 시므온 식구들은 르우벤 사람들과 바로 옆에 천막을 치고 살았소. 다단과 아비람, 온은 내 술친구였고, 고라는 레위 사람이지만 가끔 우리에게 와서 모세의 독선에 대해 토로하곤 했지. 그들의 말은 틀린 게 없었소."
시므리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그런데 모세 그 늙은이가 무슨 요술을 부렸는지, 땅이 입을 벌려 그들을 산 채로 삼켜버렸소. 내 눈앞에서, 내 친구들이, 그들의 아내와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땅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걸 봤소. 땅이 닫히고 나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조용해지더군."
"끔찍했겠군요."
"더 끔찍한 건 그 다음이었소. 사람들이 항의하자 모세는 전염병을 풀었다오. 염병이 도는데 순식간에 만 명도 넘는 사람들이 죽어나갔지. 시체 썩는 냄새가 진영을 뒤덮었소. 내 사촌 동생도, 내 부하들도 그때 거품을 물고 죽었다오. 아론이 향로를 들고 멈추게 했지만, 내 눈엔 보였소. 그건 신의 심판이 아니라, 공포로 우리를 찍어 누르려는 학살극이었소."
시므리가 이를 갈았다.
"그때 살루라는 이름의 위대한 족장이었던 내 아버지는 나와 함께 겁쟁이처럼 납작 엎드려 있었소. 땅에 삼켜질까 봐, 전염병에 걸릴까 봐, 모세에게 살려달라고 빌었지. 내 친구들이 죽어가는데도 말이오. 그 비굴함이 그날 이후로 매일 밤 나를 갉아먹었소."
그는 고스비를 끌어당겨 자신의 품에 가뒀다. 그의 심장박동이 분노로 격해져 있었다.
"그날의 나와 내 아버지처럼 앞으로 다시는 엎드리지 않을 것이오. 모세가 신의 이름을 빌려 두려움으로 우리를 지배한다면, 나는 미디안의 힘을 빌려 그 공포를 끝낼 것이오. 이번엔 내가 그 늙은이를 삼켜버릴 차례야. 1만 4천 명의 피 값을 받아내야지."
고스비는 시므리의 떨리는 등 뒤로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당신은 복수할 자격이 있어요. 저와 아버지가 당신의 칼이 되어 드릴게요. 이번엔 땅이 꺼지는 게 아니라, 모세의 목이 떨어질 거예요."
1-8. 열병
비느하스의 지시를 받은 이스할은 시므온의 비밀을 알기 위해서 그들이 모여있는 바알브올의 신전에 다가갔다. 비록 임무를 위해서 간 것이지만 이방 신의 신전에 들어가는 게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인가 그는 망설이고 있었다.바알브올의 신전은 거대한 향로이자, 동시에 도살장 같았다. 이스할은 숨을 쉴 때마다 폐가 썩어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평생 성막의 지성소에서 정제된 유향과 몰약 냄새만 맡아온 고핫 자손인 그에게, 이방 신전의 공기는 그 자체로 고문이었다. 짙은 사향, 태운 고기 비린내, 그리고 수백 명의 남녀가 뒤엉켜 뿜어내는 땀 냄새가 점액질처럼 달라붙었다.
'역겨운 놈들.'
그때, 고스비의 시녀 디르사가 그를 발견했다.
"처음 보는 얼굴이네요. 뭘 그렇게 망설이셨어요? 얼른 들어오세요."
그를 막아선 여자는 미디안의 복식을 했으나, 신전의 창기들처럼 노출이 심한 옷이 아니었다. 단정한 시녀복.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취해있지 않았다. 그녀는 이스할을 위아래로 훑더니 피식 웃었다.
"아니, 나는 그냥..."
"뭐가 그렇게 무서워요? 잠깐 들어와서 같이 놀아요. 히브리 새 친구는 항상 환영이에요."
"우리 민족은 이방 민족과 어울려선 안된다는 명령을 받은걸 당신은 알고있소?"
"얼핏 들은 것 같긴 한데, 당신네 노친네들은 뭘 그렇게 쭈뼛거리나 모르겠어요. 다 같이 사이좋게 지내는게 뭐가 나빠요? 당신이 말 잘듣는 착한 아이인건 알겠으니까 잠깐만 놀다가 가요. 꺼림칙하면 굳이 우리 신에게 절할 필요 없어요."
이스할은 비느하스의 지시로 디르사를 따라 들어갔지만, 긴장했던 것과 달리 신전의 분위기는 의외로 밝고 흥겨웠다. 음란한 행위가 벌어지는 깊숙한 곳과는 달리, 디르사가 안내한 곳은 젊은 남녀들이 춤추고 노래하며 놀이를 즐기는 앞쪽 뜰이었다.
"자, 여기 앉아요. 당신은 춤추는 게 쑥스럽죠?"
디르사는 이스할의 굳은 표정을 풀어주려는 듯, 재미있는 미디안의 옛이야기를 들려주거나 간단한 말판놀이를 제안했다. 이스할은 처음엔 경계했지만, 어느새 그녀의 맑은 웃음소리와 재치 있는 말솜씨에 빠져들었다. 그녀는 요염한 척했지만, 눈빛에는 순수함이 서려 있었다.
"이게 뭐요? 돌멩이?"
잔뜩 긴장한 채 천막 안으로 끌려온 이스할이 탁자 위의 물건을 보고 물었다.
"이집트에서 유행하는 '세네트'라는 놀이예요. 당신네 조상들도 이집트에 살았다면서요? 할 줄 몰라요?"
디르사가 장난기 어린 눈으로 물었다.
"우리는 노예였소. 귀족들의 놀이는 모르오."
"그럼 내가 가르쳐 줄게요. 아주 쉬워요. 주사위를 던져서 말을 먼저 통과시키는 사람이 이기는 거예요. 내가 이기면 당신이 노래를 한 곡 부르고, 당신이 이기면 어떡하지? 음, 내가 당신 어깨를 주물러 줄게요. 어때요? 공평하죠? 자 당신 차례."
이스할은 쭈뼛거렸지만, 디르사가 쥐여준 주사위를 굴렸다.
"어머! 5가 나왔네? 처음치곤 소질이 있는데요?"
그는 주사위를 던지며 넌지시 떠보았다.
"미디안은 여유가 넘치는군. 전쟁이 코앞인데 놀이판이나 벌이고."
디르사도 주사위를 던졌다.
"전쟁은 윗분들이 하는 거고, 우리는 그냥 시키는 대로 살다가 죽는 말판의 말일 뿐이잖아요. 와! 내가 이겼어요. 얼른 히브리 노래를 들려줘요."
디르사의 환호성과 칭찬은 40년 광야 생활 동안 들어본 적 없는 달콤함이었다. 이스할은 점차 내기에 몰입했다. 말이 잡히고 잡힐 때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웃음꽃이 피었다. 율법의 엄격함도, 정탐의 긴장감도 잠시 잊혀졌다. 다음 판은 디르사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줬다. 그것은 타락이 아니라, 잊고 살았던 유희의 회복이었다. 한참을 떠들고 나니 목이 탔다.
"물 좀 주시오. 목이 마르오."
"잠시만요."
디르사는 화로 위 주전자를 기울여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내왔다.
"이 더위에 웬 뜨거운 물이오?"
"요즘 물갈이 열병이 돌고 있거든요. 우리 공주님께서 시므온 지파 손님들은 귀하니 꼭 물을 끓여서 드리라고 엄명을 내리셨어요. 물을 끓이면 온몸에 열이 끓어 오르는 병을 막아준대요. 그냥 먹으면 뜨겁고 밍밍하기만 하니까 박하랑 우슬초를 넣었어요. 호호 불어서 마셔봐요. 향이 아주 좋아요."
디르사는 뜨거운 찻잔을 식혀주기 위해 자신의 입술을 모아 "후우- 후우-" 불어주었다. 그 모습이 이스할의 눈에는 묘하게 가슴 시리게 다가왔다.
"자, 여기 선물이에요."
그녀는 이스할이 돌아갈 때 말린 박하 잎과 우슬초가 든 주머니를 챙겨주었다.
"당신은 특별히 더 챙겨주는 거예요. 수싸움을 너무 잘해서 마음에 들었거든요. 가서 꼭 끓여 마셔요. 아프지 말고요."
천막을 나서는 이스할의 손에는 향기로운 약초 주머니가 들려 있었다. 그것은 적이 건넨 독이 아니라, 다정한 여인이 건넨 배려였다.
비느하스에게 '끓인 물'의 비밀을 보고한 후, 이스할은 막사 천장을 바라보며 밤을 지새웠다.
'시므온 놈들은 죽어 마땅한 배교자들이다. 하지만, 그 여자는?'
눈을 감으면 주사위를 던지며 까르르 웃던 디르사의 보조개가 떠올랐다. 뜨거운 차를 식혀주던 입술 모양이 아른거렸다. 비느하스의 분노가 정당하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았지만, 가슴은 자꾸만 그 '놀이판'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그는 비느하스에게 보고할 살생부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여자의 이름만큼은 지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박하 주머니를 코에 갖다 댔다. 바알브올 신전의 사향과 피비린내가 아니었다. 그녀가 건넨 이 작은 주머니에서는, 성막의 유향보다 더 달콤한 향이 났다. 그는 중얼거렸다.
"젠장. 열병은 내가 걸렸구나."
1-9 무너진 경계
진영으로 돌아온 이스할은 시름시름 앓았다. 비느하스에게 끓인 물 이외의 정보들에 대해서도 보고를 올려야 했지만, 펜을 들면 양피지 위에 디르사의 얼굴만 그려졌다. 성막의 향을 피우러 들어갔으나, 유향 냄새 대신 그녀가 불어주던 박하 차의 향기만이 코끝을 맴돌았다. 눈을 감으면 그녀의 웃음소리가 들렸고, 눈을 뜨면 그녀의 슬픈 눈이 천장에 박혀 있었다.
'미친 짓이다. 그 여자는 적이다. 이방인이다.'
머리로는 수천 번 되뇌었지만, 심장은 정반대로 뛰었다. 만나가 모래처럼 씹혔다. 그녀를 다시 보지 못한다면, 차라리 미디안의 칼에 맞아 죽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것은 율법으로도, 이성으로도 치료할 수 없는 지독한 상사병이었다. 결국 그는 다시 미디안족의 신전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는 정탐이 아니었다.
"잘 생긴 아저씨, 또 왔네요? 주사위 또 굴려 볼래요?"
디르사가 반갑게 맞이했지만, 이스할은 주사위 판을 옆으로 치웠다.
"그 세네트라는 놀이라면 됐소. 오늘은 그냥 당신 얼굴이 보고 싶어서 왔소."
이스할의 투박한 고백에 디르사의 손이 멈칫했다. 주사위가 데구르르 굴러 떨어졌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표정을 고쳐 잡고 차갑게 웃었다.
"순진한 소리 하시네요. 여긴 바알브올의 신전이에요. 남자가 여자를 찾아오는 이유는 딱 하나죠. 빙빙 돌리지 말고 말해요. 원하는 게 뭐예요? 내 몸?"
그녀는 일부러 옷깃을 흐트러트리며 도발적인 자세를 취했다. 이스할에게 정을 떼려는 듯한 태도였다.
"착각하지 마요. 나는 웃음을 파는 여자예요. 당신 같은 히브리 촌뜨기가 '진심' 같은 걸 운운할 상대가 아니라고요."
이스할은 그녀의 날 선 도발에 흔들리지 않았다. 그가 투박한 손을 뻗자, 디르사의 어깨가 반사적으로 흠칫 굳어지는 것이 보였다. 마치 매를 피하려는 작은 새처럼, 그녀의 눈에 순간적으로 방어적인 독기가 서렸다. 뻔한 수작질을 예상하고 잔뜩 긴장한 태도였다. 하지만 이스할의 손은 그녀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의 손길은 그녀의 살결을 파고드는 대신, 쇄골을 드러낸 채 흐트러져 있던 옷깃을 조심스럽게 끌어올려 단정하게 여며주었다. 욕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깨질 것 같은 귀한 그릇을 다루는 듯한 조심성만이 묻어 있는 손길이었다. 그 순간, 이스할은 맞닿은 손끝에서 그녀의 떨림이 거짓말처럼 멈추는 것을 보았다.
그녀가 만난 남자들은 모두 기회만 있으면 수작을 걸어보려는 속물들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마음을 주지 않으려 더 독한 척, 더 요염한 척 가시를 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이 남자는 달랐다. 자신의 살결을 탐하는 대신, 바보 같은 손길로 부끄러운 곳이 드러날까 그녀를 덮어주고 있었다. 준비했던 독한 말들이 혀끝에서 막힌 듯, 그녀는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이스할을 올려다보았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사내들이 옷을 벗기려 들 때, 유일하게 옷을 입혀주는 남자를 마주한 여자의 표정이었다. 그녀를 지탱하던 차가운 가면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내 눈엔 나처럼 당신도 울고 있는 게 보이오."
자신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이스할의 한마디에 디르사의 속눈썹이 떨렸다.
"억지로 교태 부리고 못된 척 하는 거, 힘겨워 보이오. 나도 그렇소. 거룩한 척, 강한 척하지만, 사실은 무섭고 외롭소. 그래서 당신 곁에 있으면 숨이 좀 쉬어지는 것 같아서 온 거요."
이스할은 주머니에서 작은 나무 조각 하나를 꺼냈다. 거칠게 깎아 만든, 어설픈 주사위였다.
"당신 주사위는 너무 낡아서 숫자가 잘 안 보이더군. 오다가 깎아봤소. 당신이랑 노는 게 좋아서."
디르사는 그 볼품없는 나무 주사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황금도, 보석도 아니었다. 누구도 시녀인 자신을 위해 시간을 쓰지 않았다. 오직 명령만 내릴 뿐이었다. 그런데 이 우직한 히브리 남자는, 고작 자신과 놀아주기 위해 그 거친 손으로 밤새 나무를 깎았다. 그저 자신과의 시간을 소중히 여긴다는 투박한 증거였다. 그녀의 눈에 맺혀있던 독기가, 아니, 두려움으로 쌓아 올렸던 높은 벽이 소리 없이 허물어졌다.
"바보 같은 사람. 내게 마음을 주지 말아요. 그냥 재미있게 놀기나 해요. 당신이 나에게 진심을 다한다면, 당신네 신이 벼락을 내릴 걸요?"
"상관없소. 내게 벼락을 내린다면, 그건 당신을 만나게 해 준 대가일 테니 달게 받겠소."
그날 밤, 그들은 주사위를 굴리지 하지 않았다. 대신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긴 침묵을 공유했다. 전쟁의 공포, 내일이면 죽을지도 모르는 불안감. 그 속에서 두 사람의 체온만이 유일한 현실이었다. 이스할이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디르사는 이번엔 뿌리치지 않았다.
"디르사. 사실 나는 시므온이 아니라 레위 사람이오. 나는 당신들과 시므온을 정탐하려 왔고, 오늘 밤이 지나면 당신을 다시 못 볼지도 모르오. 어쩌면 적으로 만나게 될 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 마음은 두고 가고 싶소."
마지막이라는 말, 그리고 자신이 적이라는 고백에 디르사의 눈빛이 흔들렸다. 하지만 공포는 아니었다. 그녀는 오히려 슬프게 웃었다.
"상관없어요. 당신이 레위인이든 누구든.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건 적에게 모든 걸 숨김없이 털어놓는 바보같은 남자일 뿐이니까."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이스할의 손을 감싸 쥐었다.
"당신네 신이 벌을 내린다면 같이 받아요. 적의 품에 안긴 여자나, 적에게 비밀을 털어놓은 남자나, 죄인이긴 매한가지니까."
이스할이 천천히 다가가 입을 맞췄다. 디르사는 잠시 몸을 굳혔다가, 체념한 듯, 혹은 간절한 듯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입맞춤은 서툴렀지만 애절했다. 이스할의 손길이 깊어지자, 디르사가 그의 손을 꽉 잡으며 막아섰다. 그녀의 눈에 물기가 어려 있었다.
"후회 안 할 자신 있어요?"
"무슨 뜻이오?"
"레위 사람들은 간음하지 말라는 율법을 목숨보다 중요시한다면서요?"
디르사가 이스할의 가슴을 밀어내며, 젖은 눈으로 애원하듯 말했다.
"저를 안으시면 당신은 율법을 어기는 거예요. 그리고 당신의 율법대로라면, 처녀를 취한 남자는 그 여자를 평생 버릴 수 없게 된다면서요? 이방 계집인 저 때문에, 당신은 평생 족쇄를 차게 될지도 몰라요. 그래도, 그래도 괜찮아요?"
"디르사. 나는 평생 율법에 묶여 살았소. 하지만 오늘 밤, 나는 당신이라는 율법 하나만 지키겠소. 당신이 내 족쇄가 된다면, 기꺼이 평생 차고 살겠소."
그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게다가 난 익숙한 여자가 아니에요. 당신들이 생각하는 그런 음탕한 미디안 여자가 아니라고요. 서툴고, 재미없을 거예요."
그녀는 고개를 떨구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공주님을 모시느라 남자를 알 기회가 없었어요. 당신이 처음이 될 거예요."
그것은 마지막 경고이자, 가장 깊은 고백이었다. 이스할은 숨을 멈췄다. 그녀가 지금 자신에게 무엇을 주려는지, 그 무게가 심장을 짓눌렀다. 그는 그녀의 떨리는 손을 잡아 자신의 심장 위에 올렸다. 디르사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녀는 더 이상 가면을 쓸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이스할을 꽉 끌어안았다.
"안아줘요. 내일 우리의 신이나 당신들의 신에게 죽임을 당하더라도, 오늘 밤은 당신 여자가 되고 싶어요."
그렇게 두 사람의 밤은 시작되었다. 쾌락을 위한 유희가 아니었다. 서로의 존재를 영혼에 새기는, 서툴고도 경건한 의식이었다. 그 밤, 디르사는 처녀성을 잃었다. 하지만 대신 이스할이라는, 죽음조차 갈라놓지 못할 남자를 얻었다. 그리고 이스할은 맹세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이 여자를 지키겠다고. 비록 그것이 신을 속이는 일이라 할지라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