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불안한 회의

미디안의 다섯 왕 중 한 명인 수르의 막사 안은 기름진 양고기 냄새와 질 좋은 포도주 향으로 가득했지만, 그 공기의 무게는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밖에서는 바알브올을 찬양하는 악기 소리가 들려왔으나, 연회에 참석한 다섯 왕들, 수르, 레겜, 레바, 에위, 후르의 표정은 장례식장과 다를 바가 없었다.

수르가 들고 있던 황금 잔을 만지작거리기만 할 뿐 입에 대지 않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레겜 왕이 묻어둔 불안을 건드렸다.

"수르, 그대의 잔은 줄어들 기미가 없군. 고기는 식어가고 무희들의 춤은 절정인데, 근심을 내려 놓을 수 없소?"

수르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잔을 탁자 위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붉은 포도주가 탁자 위로 피처럼 튀었다.

"그대는 저 밖의 바람 소리가 들리지 않소? 내 귀에는 바람 소리가 아니라, 수백만 개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오."

"그저 바람소리일 뿐이오."

"이집트에서 탈출했다는 그 거지 떼들을 외면해봐야 소용없소. 아니, 이제는 거지 떼가 아니라 살인귀들이라 불러야겠지."

수르의 눈에 공포와 혐오가 뒤섞인 빛이 감돌았다.

"그놈들은 사람이 아니오. 광야를 40년이나 떠돌면서 독기와 살의만 남은 짐승들이오. 시혼 왕이 어떻게 되었소? 옥 왕은? 그 거인 같은 왕들이, 그 노예 출신 떼거지들에게 하루아침에 목이 잘리고 그 강대했던 아모리와 아산은 초토화되었소. 그놈들은 지나가는 자리의 풀 한 포기 남기지 않고 핥아먹는 메뚜기 떼요."

좌중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모압 왕 발락이 보낸 전령들이 전해준 소식은 그만큼 끔찍했다. 피에 굶주린 60만 명의 장정들. 그들이 지금 미디안의 국경을 향해 방향을 틀고 있었다.

"우리의 칼로는 그들을 막을 수 없소. 아모리와 아산도 막지 못한 것을 우리가 무슨 수로 막겠소? 우리 부족은 멸망할 것이오."

수르의 절망적인 진단에 나머지 왕들도 웅성거렸다. 그때, 상석에 초대 받은 손님이 입을 열었다. 그 주변에서 가장 용하다고 소문난 점술가 발람이었다.

"왕들께서는 정말로 고뇌가 심하시겠습니다. 영광스럽게도 불러주셔서 보잘 것 없는 이 몸이 이곳에 오긴 했습니다만 저 역시 그 점은 마음이 편칠 않습니다."

수르가 물었다. "그대는 모압의 왕과도 만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를 위해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발락 왕께서는 저를 부르셔서 그들에게 저주를 내릴 것을 의뢰하셨습니다. 그렇게만 해준다면 금붙이를 산더미처럼 주겠다고 약조하셨습니다."

수르의 표정이 다소 밝아지는 듯했다. "선생께서 직접 내리신 저주를 받았어도 저들이 저토록 강성한 겁니까? 겉으로는 멀쩡해도 내부는 썩어들어가고 있겠지요?"

"그런 건 아닙니다. 그들은 여호와라는 신의 비호를 받고 있어서 저주를 내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천사를 보내서 저에게 히브리인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된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히려 축복을 내릴 수밖에 없었지요. 저는 금붙이들을 포기하고 빈 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게 위대한 창조주 여호와께서 원하셨던 일이니까요."

왕 중 한사람이 발람에게 억울하고 답답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엄청난 수의 맹수때들이 이제는 막강한 신의 보호까지 받게 되었다는 겁니까? 그리고 그대는 그들에게 축복까지 내렸다고요? 이제 우리는 죽는 길 밖에 남지 않은 것입니까? 저 같은 왕들의 몸은 나무에 매달리거나 머리가 잘려나가 장대에 걸리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까? 그게 저희가 맞이할 수밖에 없는 운명입니까? 저희가 도대체 그들에게 뭘 그렇게까지 잘못했다고 그렇게 되어야만 합니까?"

"그건 피하기 어려운 미래입니다. 그들은 강한 신의 축복을 받았기 때문에 누구도 그들을 싸워서 이길 수가 없습니다. 왕들께서는 그들과 대적하려고 들지 마십시오. 비참한 패배만 있을 것입니다."

"선생께서는 저희들을 희롱하시는 겁니까? 제발 저희들을 불쌍하게 여기셔서 살아남을 구멍을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저희들은 선생을 신뢰하고 존경해서 지푸라기라도 잡아보자는 심정으로 이렇게 모신 것입니다."

또다른 왕이 눈물을 글썽이며 발람에게 매달리다시피 사정했다.

"그러시다면, 이렇게 생각을 해보면 어떻겠습니까? 그들이 여러분들을 적대할 필요가 없는 구도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들과 이곳 미디안 사람들이 친구로 사귀면 어떻겠습니까?"

수르가 발람에게 다가가서 무릎을 꿇고 손을 꼭 쥐고서 부탁했다.

"친구라고요? 선생. 부탁합니다. 제발 그 방법을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저희들이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발람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의 표정에는 여호와에 대한 경외와 두려움이 남아있었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차가운 이성이 감돌았다.

"운명을 바꾸는 것은 칼이 아니라 피입니다. 왕들께서는 칼을 버리고 그들과 피를 섞으십시오."

"피를 섞다니?"

"통혼을 하는 것입니다."

발람의 단호한 목소리가 막사 안을 울렸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의 지도자 모세가 누구의 사위입니까? 그는 미디안의 제사장 이드로의 딸과 결혼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지금도 미디안 사람 이드로를 그들의 장로처럼 존경하고 따릅니다. 그들이 아무리 살인귀라 한들, 자신의 아내가 된 여인의 목을 베겠습니까? 자신의 장인에게 칼끝을 겨누겠습니까?"

왕들의 눈이 크게 뜨였다. 공포에 질려 미처 생각지 못했던, 등잔 밑의 탈출구였다.

"그들은 지금 광야 생활에 지쳐있습니다. 그들에게 따뜻한 잠자리와 가족을 제공하십시오. 모세의 장인이 누리는 그 영광스러운 자리를, 이제 여러분들이 비집고 들어가는 겁니다."

발람은 몸을 앞으로 숙이며, 다섯 수령을 하나하나 눈을 맞추며 쐐기를 박듯 말했다.

"그들의 친구가 되고, 가족이 되십시오. 그리고 살아남으십시오. 살아남는 것만이 강한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여호와를 섬기라 요구한다면, 그리하십시오. 바알브올을 잠시 잊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목이 잘려 나가는 것보다 낫지 않습니까? 신의 이름이 무엇이든, 중요한 건 여러분이 이 땅의 주인으로 계속 숨 쉬는 것입니다."

"선생. 그렇다면 저희들이 어떻게 움직여야 저들의 가족으로 파고들 수 있겠습니까?"

발람의 시선이 조용히 아버지의 잔이 비면 채우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딸, 고스비에게 닿았다. 화려한 장신구보다 더 빛나는 눈동자, 총명함이 흐르는 이마, 그리고 남자를 압도하는 기품. 그녀는 수르가 가장 아끼는 딸이자, 미디안의 자랑이었다. 수르의 눈빛이 흔들렸다.

발람이 입을 열었다.

"칼집은 방패도 막지 못하는 것을 품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 그 야만인들의 심장을 쥘 수 있는 분이 여기 계셨군요. 공주께서 그들의 칼날이 당신의 가족들에게 닿지 못하도록, 그들의 칼집이 되어 보시겠습니까?"

수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버지로서의 본능은 거부하고 있었으나, 겁에 질린 부족장의 본능은 이미 자신의 딸을 저울대에 올려서 가늠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주는 내 심장과도 같은 아이요. 어찌 그 늑대 굴에 보내겠소?"

수르의 말끝이 흐려졌다. 그는 '안 된다'고 단언하지 않았다. 그저 그 결정의 책임을 누군가 대신 져주기를 바라는 듯, 애처로운 눈으로 딸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 눈빛은 명령이 아니라, 물에 빠진 자의 구조 요청이었다.
좌중의 침묵 속에서 고스비가 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녀는 아버지의 그 비겁하고도 간절한 눈빛을 읽었다.

"아버지. 칼집이 되라 하시면 되겠어요. 아버지가 저 흉포한 칼날을 감당하실 수 없다면, 자식 된 도리로 제가 막아드리는 게 맞아요."

나직이 중얼거리는 다른 왕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칼로 뚫을 수 없는 갑옷도, 품 안으로 파고드는 온기에는 무력해지는 법이지."

발람이 미디안의 왕들에게 선언했다.

"위대하신 창조주 여호와께서 제게 명령하셨으니 저는 그들에게 저주를 내릴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께서는 그들을 끌어안는 것 말고는 답이 없습니다. 저는 히브리인들이 여러분들이 호의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히브리인들과 여러분들 미디안 사람들을 모두 축복하겠습니다. 제가 제안한 방법이 성공한다면 나중에 저에게 보답을 하십시오. 실패한다면 저는 발락왕에게 그랬던 것처럼 아무 것도 받지 않고 돌아가겠습니다. 저는 히브리인들과 여러분들 누구에게도 해가 가지 않는 생명의 길을 여러분께 알려드린 것입니다."

미디안의 왕들은 입을 모아서 말했다.

"좋습니다. 우리가 살아남기만 한다면 선생께서 발락 왕에게서 받았어야 할 몫까지 우리가 대신 모두 지불하겠습니다."




1-2. 찜찜한 계획

연회에서 돌발적으로 시작된 임시 회의가 파하고 난 뒤에 수르는 사랑하는 딸 고스비에게 물었다.

"너를 끝까지 지켜줘야 할 아비로서 너에게 면목이 없구나. 힘이 없는게 죄지. 딸아. 네가 이 일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

수르는 딸의 손을 잡고 놓지 못했다. 그의 눈가는 붉어져 있었다.

"아가. 이 못난 아비를 용서해다오."

수르는 고스비의 손등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내가 힘이 더 강했더라면, 우리 군대가 저들을 막을 수만 있었더라면 네가 저 야만인들의 노리개가 될 일은 없었을 텐데. 차라리 내가 죽는 게 낫지."

공주는 울고 있는 늙은 아버지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젖어가는 눈시울을 손수건으로 닦아냈다. 아버지는 '차라리 죽어야 하는데'라고 말했지만, 진짜로 죽을 용기는 없는 사람이었다. 그 나약한 사랑이 고스비를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런 말씀 마세요, 아버지. 아버지가 살아 남으셔야 미디안이 살고, 제가 사는 거잖아요."

고스비는 아버지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천천히, 그러나 단호하게 빼냈다.

"저는 버림받으러 가는 게 아니에요. 아버지가 감당 못 할 그 왕관의 무게를 제가 대신 나누러 가는 거예요."

"공주야."

"울지 마세요. 왕은 우는 게 아니에요. 제가 시므온 족장의 품에 안겨 미디안의 방패가 될 테니, 아버지는 그 뒤에서 제발 살아남기만 하세요. 그게 저를 돕는 길이에요."

그녀의 눈에 맺힌 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늙고 겁 많은 사자를 두고 떠나는 젊은 표범의 서글픈 결기였다.

"아버지는 저보다 왕으로서의 자신과 우리 부족의 안위를 먼저 챙기셔야 해요. 그러니 미안해하지 마세요. 저는 왕의 딸로서 제가 해야할 일을 하러 가는 것뿐이니까요."

고스비는 아버지가 자기를 한번만 더 잡아주길 마음속으로 바랐지만  수르는 끝내 "가지 마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그래서 제가 누구에게 가면 되나요? 저를 가장 비싸게 사줄 사람이 누구죠?"

"우리 영토랑 가까운데 자리잡은 자들은 시므온 지파라고 하더구나. 그쪽을 엮어보면 어떨까 싶구나."

"저는 그 방법이 영 찜찜해요. 아버지도 아시잖아요. 옛날부터 전해져 오던 그 끔찍한 전설, 세겜의 비극 말예요."

"몇 백 년 전 야곱의 아들들이 성 하나를 도륙 냈다는 그 옛날이야기 말이냐?"

수르가 대수롭지 않게 묻자, 고스비의 눈이 서늘해졌다. 그녀는 아버지의 안일함을 깨부수려는 듯, 또박또박 그 참상을 읊었다.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예요, 아버지. 그들의 조상 야곱의 막내 딸 디나가 세겜 추장의 아들에게 강간당했을 때를 기억해 보세요. 그때 세겜 사람들은 사죄의 뜻으로 청혼을 했고, 야곱의 아들들은 '우리와 통혼하려면 남자들이 모두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조건을 걸었죠."

고스비는 마른침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그들은 '약속'을 믿고 가장 약한 살을 베어냈어요. 하지만 남자들이 고통에 신음하며 앓아누워 있을 때, 칼을 들고 들어가 그들의 목을 긋고 성을 약탈한 자들이 누구였나요? 바로 시므온과 레위였어요. 도살자 그 자체였다고요."

수르 왕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고스비는 아버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쐐기를 박았다.

"우리가 지금 하려는 게 바로 그 '통혼'이잖아요. 그 도살자의 핏줄인 시므온 지파에게, 우리가 제 발로 걸어가 똑같은 미끼를 물겠다는 건데, 역사가 반복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나요?"

"하지만 아가, 그때와는 상황이 다르지 않으냐."

수르는 애써 딸의 시선을 피하며 변명하듯 말했다.

"그때야 세겜 놈들이 제 발로 할례라는 덫을 밟았으니 당한 것이고, 애초에 강간이라는 원한이 있었으니 명분도 있었지. 하지만 우리는 그들에게 원한을 살만한 짓을 한 적이 없다. 우리가 먼저 살과 술을 내어주는데 그들이 칼을 들겠느냐?"

"아버지는 너무 순진하세요. 구실은 힘있는 자가 만드는 거예요."

고스비가 답답하다는 듯 소리쳤다.

"할례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우리 남자들이 아파서 누워있든 단단히 방비하든, 그들은 친교를 핑계로 우리 안방에 들어올 거예요. 그러고 나서 힘으로 밀어버리면 그만인 족속들이라고요. 그들의 눈빛을 보셨나요? 굶주린 늑대 같아요. 제가 그들의 가족이 된다 한들 그 늑대들이 제 아버지를 물어뜯지 않을까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세겜에서도 남자는 모조리 죽이고 여자들만 잡아갔어요."

수르는 할 말이 없어진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마지막 제안을 했다.

"그래,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가장 사나운 놈들을 잡아야 한다. 늑대를 잡으려면 늑대 무리로 들어가야 하지 않겠느냐? 내가 알아보니 시므온의 수장 시므리는 지도자 모세에게 깊은 앙심이 있다더라. 네가 그 틈을 파고든다면, 어쩌면 그 늑대가 우리를 지키는 사냥개가 될지도 모른다."

"그래요. 걱정만 하면 뭐 하겠어요? 뭐든 하면서 살 길을 열어 봐야죠. 조금 전에 발람이라는 사람이 우리를 축복해준다고 했으니 시도는 해봐야겠어요. 아버지께서 말씀하신대로 저는 시므온 지파의 족장 시므리에게 접근해 볼게요. 그리고 시녀들을 시켜서 예쁘장한 애들을 모아볼게요. 그 애들과 시므온 남자들을 연결시켜 봐야겠어요."




1-3. 뱀이 가져 온 열매

"어르신. 미디안의 공주라는 여인이 어르신을 뵙기를 청하십니다."

시므온 지파의 수장, 시므리의 천막을 지키는 젊은이가 고스비의 방문을 알렸다.

"미디안의 공주? 곧 죽을 계집이 나를 왜? 부정타겠다. 치워버려라."

"행동에 기품이 있고 얼굴도 제법 반반합니다. 적적하시던 차에 한번 얼굴이나 한 번 보시죠."

"그럴까?  하긴, 죽을 날 받아놓은 년이 굳이 내 장막을 찾았는데, 살려달라고 가랑이라도 벌리러 왔나 보지? 들여보거라."

고스비는 시녀 두 명을 대동하고 장막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옷차림은 전장의 삭막함과는 어울리지 않게 화려했고, 걸음걸이에는 당당함이 넘쳤다. 시므리가 팔짱을 낀 채 그녀를 맞이했다. 그의 눈빛에는 경계심과 호기심이 동시에 떠올랐다.

의례적인 인사가 오가고, 고스비가 천천히 막사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이상하군요. 저는 왕의 막사에 들어온 줄 알았습니다. 깃발의 문양이며, 어르신의 기백이며. 그런데 당신들 사이에서 대우는 왕의 것이 아닌 것 같군요."

"우리는 광야를 떠도는 나그네일 뿐이오. 왕은 없소."

시므리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고스비는 시녀들에게 말했다.

"가져온 걸 놓고 너희들은 자리를 잠시 피하거라."

그러고는 붉은 입술 끝을 살짝 올리며 시므리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단 둘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어르신."

시므리는 주변 사람들에게 손짓을 해서 천막에서 나가서 대기하게 했다. 고스비와 시므리의 밀담이 시작되었다.

"이스라엘에는 엄격한 장자 상속의 법도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야곱의 맏아들 르우벤이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혀 자격을 잃었다면 그 다음 서열인 시므온, 즉 당신들의 조상이 마땅히 장자가 되어야 하지 않나요? 그렇다면 지금 이스라엘을 호령해야 할 주인은 레위의 자손인 모세가 아니라, 시므온의 자손인 당신이어야 할 텐데요."

시므리의 미간이 꿈틀했다. 수백 년간 묵혀온, 아무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던 금기였다.

"이방인이라 족보를 잘 모르는 모양이군. 순서가 그렇다 한들, 하늘의 뜻은 이미 정해졌소."

"하늘의 뜻일까요, 아니면 권력을 쥔 자들이 만든 명분일까요?"

고스비의 목소리가 뱀처럼 시므리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생각해 보십시오. 모세와 아론은 셋째인 레위의 후손들입니다. 셋째가 형님들을 제치고 왕 노릇을 하고, 제사장이 되어 신의 목소리까지 독점하고 있습니다. 억울하지 않으십니까? 르우벤이 아버지를 배신하고 아버지의 첩과 음행으로 질책을 받았을 때, 그 왕관은 땅에 떨어진 게 아니라 당신의 머리 위에 얹어졌어야 했습니다. 모세는 장군의 자리를 도둑질한 것입니다."

시므리의 눈빛이 흔들렸다. '도둑질'. 그 단어가 가슴 깊은 곳에 박혀있던 불덩이를 건드렸다.

"듣고 보니 틀린 말은 아니군. 하지만 그건 다 지나간 역사요. 이제 와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소?"

"역사는 힘 있는 자가 다시 쓰는 법입니다. 그리고 어르신께는 아직 기회가 있습니다. 저희 미디안이 당신들의 잃어버린 왕관을 되찾아드리겠습니다."

고스비가 시녀들이 놓고 나간 비단 보자기를 풀었다. 그 안에는 눈부신 황금 장신구와 향유가 들어 있었다.

"저희는 시므온의 용사들에게 풍족한 물자와 고기, 그리고 지친 마음을 달래줄 아름다운 여인들을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모세가 강요하는 금욕과 배고픔 대신, 왕으로서 누려야 할 풍요를 맛보십시오. 셋째 동생 레위의 눈치를 보는 삶은 이제 끝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시므리는 황금을, 그리고 고스비의 자신만만한 눈동자를 번갈아 보았다. 침이 꼴깍 넘어갔다. 그것은 단순한 재물이 아니라,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를 채워주는 무언가였다. 그는 짐짓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달콤한 제안에는 반드시 독이 있는 법이지. 그래서, 나에게 바치는 이 조공의 대가로 그대들이 원하는 게 뭐요?"

"거창한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방패가 되어 주십시오. 저 미친 살인귀 모세가 제 아버지와 백성들을 해치려 할 때, 당신이 이스라엘의 진정한 장자로서 그 칼을 막아주십시오. 우리는 당신의 백성이 되고, 당신은 우리의 왕이 되는 겁니다. 모세는 우리를 죽이려 하지만, 당신은 우리를 다스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방인들과 섞이지 말라고 엄하게 명령하셨소."

고스비는 시므리에게 바짝 다가가서 그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저희는 이방인으로 죽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들의 신께서 정하신 절차대로 정결례를 마치고 이스라엘의 신부가 되고 싶습니다. 그 간절한 소원을 들어주실 분이 바로 어르신이십니다. 우선은 제가 어르신의 첩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제 시녀들과 백성들 역시 어르신의 백성들을 모시게 하고 싶은데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아름다운 이방 공주의 난데없는 도발에 이미 오래 전에 잃어버렸던 시므리의 욕망이 꿈틀댔다. 느글느글한 만나와 메추라기 냄새만 풍기던 히브리 여인들에게서는 찾을 수 없는 이국적인 공주의 향기가 수십 년 동안 느끼지 못하고 살았던 그 안의 무언가를 열어 젖히고 있었다. 고스비의 숨결이 귓가를 스치자, 귓바퀴에서부터 시작된 전율이 척추를 타고 내려가 40년 묵은 율법의 둑을 단번에 무너뜨렸다. 시므리의 이성은 '안 된다'고 비명을 질렀으나, 그의 손은 이미 억눌려 있던 야수처럼 목줄을 끊어버리고 매혹적인 뱀의 허리를 으스러지도록 끌어안고 있었다.




1-4. 미디안 여인들의 유혹

미디안의 여인들의 손에는 무기 대신 잘 구워진 양고기 접시와 시원한 포도주 병이 들려 있었다. 40년간 말라비틀어진 만나만 씹어먹던 이스라엘 남자들의 코끝에, 기름지고 향긋한 고기 냄새가 뱀처럼 휘감겼다. 여인들은 히브리 남자들에게 손짓했다. 시므온 지파의 젊은 전사가 침을 꼴깍 삼키며 경계심 어린 눈으로 물었다.

"거기는 이방 신의 신전이 아니오? 모세 님께서 절대 가까이 가지 말라고 하셨소."

그의 앞을 막아선 미디안 여인은 까르르 웃으며 전사의 어깨에 자연스럽게 손을 올렸다. 그녀의 손길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햇볕이 이렇게 따가운데 밖에서 놀면 피부가 타잖아요. 어서 들어오세요."

"그래도 이방신의 신전이라 좀..."

"누가 당신더러 우리 신을 믿으래요? 그냥 저희는 당신들하고 친하게 지내고 싶은 거예요. 맛있는 음식이 충분한데 우리만 먹기 미안해서 그래요."

여인은 짐짓 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넌지시 권했다.

"잠깐 저희 바알브올 님하고 인사만 나눠볼래요? 걱정 마요. 섬기라는 거 아니니까. 그냥 우리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친구로서 얼굴만 보라는 거예요. 당신도 우리 아빠한테 인사 정도는 할 수 있잖아요? 당신이 예의를 보여주면, 나도 당신네 천막에 가서 당신의 신께 인사드릴게요. 공평하죠?"

"그저 인사만 말이오?"

"그럼요. 친구끼리 서로의 집을 방문하는 것뿐인데, 그게 무슨 죄가 되겠어요? 자, 이리 와요. 저 안에는 시원한 음료와 맛있는 포도주랑 안주가 있어요. 제 친구들은 안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전사는 망설였다. 하지만 그의 위장은 고기를 원했고, 그의 본능은 여인의 향기를 원했다.

'그래, 절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구경만 하는 건데 뭐. 인사만 하고 고기만 얻어먹고 나오자.'

그 사소한 타협이, 빗장을 여는 열쇠였다. 그가 여인의 손에 이끌려 바알브올의 신전 뜰을 밟는 순간, 등 뒤에서 들려오던 모세의 율법 소리는 축제의 굉음에 묻혀 들리지 않게 되었다. 신전 안에는 고기뿐만 아니라, 제사라는 명분으로 벌어지는 집단 혼음의 열기가 가득했다.

"자, 우리들과 당신들의 신을 위하여 건배! 오.. 우리 신께 일부러 절하실 필요 없어요. 그냥 사이 좋게 건배만 하자는 거예요. 마셔요. 다음에 오실 때는 당신들이 맨날 먹는다는 만나도 가져와보세요. 기름진 꿀과자 맛이라면서요? 맨날 먹으면 물릴것 같지만 우리 포도주랑 곁들여서 가끔 먹기에는 맛있을 것 같아요. 다음번에 꼭이요."

한 모금의 포도주가 들어가자 죄책감은 흐려졌고, 두 번째 잔이 들어가자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잊게 되었다.

Posted by 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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