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죄돌 2부

기쁨 2025. 8. 14. 13:29

원래 2부로 끝내려고 했는데 여리고 파트가 너무 길어져서 불가피하게 3부로 늘어났다.

 

 

 

2부

 

2-1

 

텅 빈 광장. 리디아는 홀린 듯 다시 그곳으로 걸어 나왔다. 그녀는 그가 마지막으로 글씨를 썼던 바로 그 자리에 섰다. 야고보와 요안나의 죄가 새겨졌던 자리는 이미 그들 스스로가 황급히 문질러 지운 뒤였다. 하지만 예수가 군중이 흩어진 후, 오직 자신을 향하는 듯한 시선으로 썼던 세 번째 글씨는, 아직 흙바닥 위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모든 사람은 구원받을 수 있다."

 

리디아는 그 문장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그러다 황급히 고개를 돌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집으로 도망치듯 돌아왔다.

하지만 그 글씨는 그녀의 머릿속에 불타는 낙인처럼 새겨져,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저녁이 되자, 그녀는 견딜 수 없는 충동에 이끌려 다시 집을 나섰다. 어둠이 내린 성전 뜰. 그녀는 초조하게 그 자리로 다가가, 달빛에 의지해 흙바닥을 살폈다. 글씨는 아직 거기에 있었다. 희미해졌지만, 분명히.

 

그날 밤 이후, 리디아의 시간은 멈췄다. 그녀는 식사도 거의 하지 않고, 방 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잠이 들면 바룩을 덮치던 돌멩이와, 자신의 돌을 대신 맞던 예수의 얼굴, 그리고 흙바닥에 새겨진 그 문장이 악몽처럼 떠올랐다.

밤이 되면, 그녀는 자신의 집 정원으로 장소를 옮겼다. 달빛 아래, 그녀는 마른 나뭇가지로 흙 위에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증오."

썼다가 지웠다.

"사랑."

썼다가 다시 지웠다.

"율법."

그 글자 위를 신경질적으로 문질러 지워버렸다.

증오도, 사랑도, 율법도 그녀에게 평안을 주지 못했다. 오히려 그 모든 것이 뒤엉켜 자신을 질식시키는 독이 될 뿐이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단 하나의 질문만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나 같은 사람도... 정말로 구원받을 수 있을까?'

 

그날 밤도, 리디아는 정원에서 넋 나간 사람처럼 흙바닥만 헤집고 있었다. 그런 딸의 모습을, 아버지는 며칠째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다. 딸의 일로 충격을 받은 그의 어깨는 전보다 훨씬 더 작아 보였다. 마침내 그는 더 이상 지켜볼 수만은 없다는 듯, 딸에게로 다가갔다.

 

"아가."

 

그의 목소리에 리디아는 움찔하며 들고 있던 나뭇가지를 떨어뜨렸다. 그녀는 아버지를 피해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는 딸의 곁에 조용히 앉아, 그녀가 수없이 썼다 지운 흔적들을 바라보았다. 한참 만에 그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나는... 이해할 수가 없구나. 네가 그토록 경멸하며 떠나온 사내이지 않느냐. 그런데 어찌하여... 그 여인과 함께 있었다는 이유로 그들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으려 했단 말이냐. 너의 그 증오는 대체 어디서 온 것이냐?"

 

아버지의 목소리에는 비난보다 깊은 슬픔이 배어 있었다. 그 말에, 굳게 닫혀 있던 리디아의 눈에서 마침내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그녀는 흐느끼며, 처음으로 자신의 망가진 마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증오... 맞아요, 아버지. 저는 그이를 증오했어요. 하지만... 하지만 그건..."

그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이를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이에요."

 

리디아는 오열하며 고백했다.

"그가 로마 군인이 되겠다고 했을 때, 제가 집을 나온 건... 정말 그를 버리기 위해서가 아니었어요. 이렇게까지 하면, 저를 잃기 싫어서라도 그가 그 어리석은 야망을 포기할 거라고 믿었어요. 제가 원한 건 그의 굴복이었지, 이별이 아니었단 말이에요. 저는 매일 밤 그가 저를 찾아와 용서를 빌고, 다시 예전처럼 돌아가자고 말해주길 기다렸어요."

 

그녀의 울음은 절규에 가까워졌다.

"그런데 그는 돌아오지 않았어요. 대신... 대신 다른 여자로 제 빈자리를 채웠어요. 그래서... 그래서 차라리 그 여자라도 없애버리면, 그가 다시 제게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그런 미친 생각을 했던 거예요, 아버지..."

 

딸의 처절한 고백 앞에,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이제야 깨달았다. 자신의 딸이 품었던 것은 단순한 증오가 아니라, 사랑이 갈기갈기 찢겨나간 자리에 피어난 지독한 광기였음을. 한참 후, 리디아의 울음이 잦아들었을 때, 그녀는 흙먼지 묻은 얼굴을 들었다. 그녀의 눈에는 더 이상 증오의 빛은 사라지고, 깊이를 알 수 없는 고요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버지. 저는 떠나려고 합니다."

 

아버지는 놀라지 않았다. 이미 예감했다는 듯, 그의 눈빛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그 나사렛 사람... 예수를 따라가려 합니다."

 

아버지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의 머릿속에 수많은 율법 조항과, 바리새인으로서의 평생의 신념, 그리고 딸의 고통스러운 얼굴이 뒤엉켰다.

 

"그는... 율법을 어지럽히는 자다. 우리와는 길이 다른 사람이야."

 

"네, 압니다."

리디아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저는 평생 아버지께서 가르쳐주신 율법 안에서 살았습니다. 율법은 제게 길이요, 진리였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그 율법은 제 마음의 지옥을 잠재워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제 증오의 불쏘시개가 되었을 뿐입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아버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 대신, 단단한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제 모든 것을 다 보았으면서도, 제게 '나와 함께 떠나자'고 했습니다. 저는 그 길이 어디로 향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대로는, 이 증오와 자기혐오 속에서는 단 하루도 더 숨 쉴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 저에게는 구원이 필요합니다."

 

고백이 끝나고, 아버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일어나 딸의 어깨에 손을 얹고,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나는 평생 율법을 지키는 것이 신의 뜻이라 믿으며 살아왔다. 하지만 그 율법이 내 딸을 죽음보다 더한 고통으로 몰아넣는 것을 막지는 못했구나." 그의 얼굴에 깊은 회한과 무력감이 스쳤다.

 

"나는 네가 가려는 길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마 평생 이해하지 못할 게다. 하지만... 네 아비로서, 네가 그 지옥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그것이 율법을 어기는 길이라 할지라도, 나는 너를 막지 않으마."

 

그는 품에서 작은 돈주머니를 꺼내 리디아의 손에 쥐여주었다. "부디 평안을 찾거라, 아가야."

 

리디아는 아버지의 거칠어진 손을 붙잡고, 그 손등에 이마를 대었다. 뜨거운 눈물이 아버지의 손 위로 떨어졌다. 그것은 한평생 자신을 옭아매던 세상과 화해하고, 새로운 길을 떠나는 한 인간의, 뜨거운 참회의 눈물이었다.

 

다음 날 아침, 리디아는 성전 뜰 근처, 나병 환자들이 모여 사는 구역의 어귀를 서성이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바리새파의 정보망을 통해, 나사렛 예수가 종종 그곳에 들러 병자들을 고친다는 사실을 알아내주었다. 그것이 아버지가 딸을 위해 해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였다. 그녀는 더 이상 값비싼 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먼 길을 떠나는 순례자처럼 수수하고 질긴 옷차림에, 머리에는 두건을 깊게 눌러쓰고 있었다. 그녀는 초조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가 나를 받아줄까. 수많은 의심이 피어올랐지만, 어젯밤 아버지 앞에서 했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멀리서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 중심에, 낯익은 인영이 보였다. 예수였다. 그는 열두 명 남짓의 제자들과, 그를 따르는 몇몇 여인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리디아는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그들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막상 그들 앞에 서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의 등장을 알아본 것은, 여인들 중 가장 앞서 걷던 막달라 마리아였다. 그녀는 며칠 전 성전 뜰에서 자신과 같은 이름을 쓰는 마리아라는 여인에게 기어이 돌을 던졌던 표독한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막달라 마리아의 눈에 경계심이 어렸다. 그녀가 예수의 앞을 막아서듯 한 걸음 나섰다.

 

"무슨 일이세요?" 그녀의 차가운 물음에, 리디아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무리의 가장 마지막에 서 있는 예수의 발 앞에, 아버지가 쥐여준 돈주머니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저는..." 리디아는 마침내 목소리를 쥐어짰다. "저는 갈 곳이 없습니다. 가진 것이라고는 이것뿐입니다. 이 돈으로... 당신의 순례길에 필요한 빵 한 조각이라도 보탤 수 있다면, 부디, 저를... 저를 당신의 무리에 받아주십시오.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허드렛일이라도, 그저 당신의 말씀을 들으며 당신의 길을 따르게만 해주십시오."

 

그녀는 이마가 땅에 닿도록 깊이 엎드렸다. 제자들은 수군거렸다. 저 여자는 며칠 전 선생을 함정에 빠뜨리고, 간음한 여인을 죽이려 했던 바리새파의 여자가 아닌가. 베드로가 나서서 무언가 말을 하려던 순간, 예수가 조용히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예수는 천천히 몸을 굽혀, 엎드려 있는 리디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일어나거라, 여인아."

 

그의 목소리는 따뜻했다. 리디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는 어떠한 비난이나 의심도 없었다. 오직, 길 잃은 양을 발견한 목자의 깊은 연민만이 담겨 있을 뿐이었다.

 

"네가 갈 길은 멀고 험할 것이다. 네가 가진 것을 모두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으냐?"

 

"네." 리디아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녀는 이미 세상에서 가장 소중했던 것들을 모두 잃었고, 또 버렸기 때문이었다.

 

"좋다. 이 돈은 가난한 이들을 위해 쓰도록 하마."

 

예수는 막달라 마리아를 돌아보며 말했다.

"마리아, 이 여인에게 마실 물을 좀 주어라. 오늘부터 우리의 자매가 될 사람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순종하며 리디아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자신의 물주머니를 풀어 리디아에게 건넸다. 리디아는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렇게, 리디아는 더 이상 바리새파 율법학자의 딸이 아니었다. 그녀는 예수의 발치에서 그의 말씀을 듣고, 그의 순례길을 함께하는, 이름 없는 여인들 중 하나가 되었다. 그녀의 구원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2-2.

 

안토니아 요새에 퍼진 소문은 두 가지였다. 보조병 바룩이 유대인 여자 때문에 돌에 맞아 피를 흘렸다는 것, 그리고 지금 그의 몸에는 붕대 하나 없이 기묘한 흉터만 남아있다는 것. 동료들의 경외와 경멸이 뒤섞인 시선 속에서, 바룩은 묵묵히 백부장의 막사로 향했다. 부름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로마 군인이 속주민의 율법 분쟁에 휘말린 것은, 여자 문제보다 더 심각한 죄였다.

 

막사 안, 책상에 앉아 있던 백부장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잘 벼려진 칼날처럼 차가웠다.

 

"네 어리석은 행동 때문에, 바리새인 늙은이들이 아침부터 나를 찾아왔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바룩."

 

바룩은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려 애썼지만,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개인적인 문제에 얽혔을 뿐, 로마의 명예를 더럽힐 의도는 없었습니다."

 

"개인적인 문제?"

백부장은 코웃음을 치며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은 바룩의 온몸을 훑었다. 특히 옷 사이로 드러난 흉터 자국에 시선이 잠시 머물렀다.

 

"네 '개인적인 문제'가 성전 뜰을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네 등에는 돌멩이 자국이 남았다. 그런데 그 상처는 하룻밤 사이에 기적처럼 아물었다고? 네가 무슨 신이라도 되는가, 아니면 저잣거리의 마술사라도 된 건가?"

 

바룩은 입술을 깨물었다. 변명은 무의미했다.

백부장은 다시 서류로 눈을 돌리며,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네 동료 녀석들은 네가 '의리 있는 놈'이라고 떠들더군. 여자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던진 용감한 사내라고. 그들의 탄원서가 아니었다면, 넌 지금쯤 채찍을 맞고 불명예 제대를 했을 거다."

 

바룩의 눈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백부장의 목소리가 다시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 문제는 네 동료들의 의리 따위로 덮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로마는 속주민들의 미개한 관습에 휘둘리지 않는다. 그들의 율법이 아니라, 로마의 법이 이곳을 다스린다는 것을 똑똑히 보여줘야 한단 말이다. 로마 병사가 속주의 미개한 관습과 사소한 충돌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해고당한다면, 제국의 위신이 뭐가 되겠나."

 

그는 깃펜을 내려놓고, 최종 판결을 내렸다.

 

"따라서 너에게 공식적인 징계를 내린다. 보직 해임. 당분간 훈련과 잡역 외에 다른 임무는 없다. 그리고 3개월 감봉. 이의 있나?"

 

"없습니다."

 

바룩은 즉시 대답했다. 십자가형이나 불명예 제대를 각오했던 것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가벼운 처벌이었다.

 

"물러가 봐라. 그리고 다시는 이런 어리석은 일에 네 이름이 들리게 하지 마라."

 

백부장은 손을 휘저어 그를 내보냈다.

 

막사를 나온 바룩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목숨은 건졌고, 군복도 벗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제 요새 안의 유령 같은 존재가 되었다. 동료들은 그에게 '의리 있는 놈'이라는 찬사를 보냈지만, 그 속에는 어리석음을 향한 조소가 섞여 있었다. 그에게 남은 것은, 영웅의 훈장인지 어리석은 자의 낙인인지 분간할 수 없는 '의리 있는 말썽꾼'이라는 기묘한 평판뿐이었다.

 

그의 시선은 안토니아 요새의 성벽 너머, 마리아가 있을 예루살렘의 낮은 지붕들을 향했다. 이제 그녀를 만나, 이 모든 일의 매듭을 지어야만 했다.

 

 

2-3

 

그날의 소동이 멎고 마리아에게도 며칠이 흘렀다. 마리아는 아무도 찾지 않는 시간, 동이 트기 전의 푸른 어둠과 해가 진 후의 붉은 노을 속에서 아네스의 무덤을 찾았다. 그녀는 차가운 흙바닥에 주저앉아, 무덤의 주인이었던 유일한 세상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처음 며칠간은 그저 눈물뿐이었다. 죽음의 공포, 군중의 경멸, 그리고 바룩의 피. 끔찍했던 기억들이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소리 내어 울며, 아네스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불렀다. 그러다 어느 순간, 눈물이 잦아들고 아네스의 마지막 유언이 귓가에 맴돌기 시작했다.

 

‘나는... 아내가 있는 사람이었단다. 나는 결코 순결을 잃지는 않았어. 하지만 아무도 나의 결백을 믿어주지 않았지... 부디 너는... 나를 기억하며 복되게 살아다오, 마리아...’

 

그녀는 아네스의 무덤 앞에서 깨달았다. 결백했던 아네스마저 평생 '부정한 여자'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하고 살았다. 하물며 실제로 죄를 지은 자신은, 이 예루살렘에서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으리라. '간음한 여인'이라는 사람들의 수군거림은, 보이지 않는 돌이 되어 평생 자신을 따라다닐 것이었다.

 

복된 삶. 그것은 무엇일까. 죄의 무게를 짊어진 채, 사랑하는 남자의 곁에서 그의 앞길을 막는 것일까. 아니면, 이 모든 것을 끊어내고 홀로 서는 것일까. 마지막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 흙먼지 위로 떨어졌다. 그녀는 그 눈물 자국을 손으로 가만히 쓸어냈다. 결심이 섰다. 슬픔은 이제 단단한 결의가 되어 그녀의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그날 저녁, 바룩이 마리아의 집을 찾아왔다. 징계를 받은 후 처음이었다. 그의 얼굴은 수척했고, 눈에는 깊은 미안함과 고통이 어려 있었다.

 

"마리아..."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마리아가 먼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놀랍도록 차분했다.

 

"괜찮아요, 바룩. 당신 덕분에 목숨을 구했어요.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

 

"아니, 마리아. 나 때문에... 나 때문에 당신이 이 모든 끔찍한 일을 겪었소. 내가 죄인이오."

 

"아니요."

 

마리아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우리 둘 다 죄인이에요. 그리고 저는... 더 이상 죄를 지으며 살고 싶지 않아요. 아네스 이모는 제게 복되게 살라고 하셨어요. 이모의 삶을 더럽히고 싶지 않아요."

 

바룩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의 눈빛에서, 이미 끝나버린 무언가를 읽었다.

 

"우리는, 여기까지예요, 바룩."

 

"마리아, 제발, 내가 어떻게든 리디아와 이혼하고 내가 당신을 책임지겠소!"

 

"책임요?"

 

마리아의 입가에 희미하고 슬픈 미소가 떠올랐다.

 

"당신은 이미 저를 책임졌어요. 당신 목숨을 던져서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해요. 더 이상 제 삶에 당신을 묶어둘 수는 없어요. 당신에게는 당신의 길이 있고, 이제 저에게는 저만의 길이 있어야 해요."

 

그녀는 작은 보따리 하나를 들어 보였다. 그녀의 모든 것이 담긴, 단출한 짐이었다.

 

"저는 이곳을 떠날 거예요. 아무도 저를 모르는 곳으로 가서, 새롭게 시작할 거예요. 그것이 아네스 이모 앞에서, 그리고 제 자신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예요."

 

바룩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결심은 바위처럼 단단했다. 그 어떤 말로도 돌이킬 수 없음을 알았다. 그는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무력함과 이별의 무게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마리아는 그의 곁을 지나 문을 향해 걸어갔다. 문고리를 잡은 그녀가,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에 아주 잠깐, 이별의 슬픔이 스쳤다.

 

"부디... 강건하세요, 바룩."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 말이었다. 문이 열리고, 그녀는 밤의 어둠 속으로 조용히 사라졌다. 홀로 남은 바룩은, 텅 빈 방 안에서 그녀의 마지막 온기가 사라질 때까지, 석상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사랑도, 구원도, 모든 것이 끝이 났다.

 

 

2-4.

 

그 후, 예루살렘에서 '마리아'라는 여인을 기억하는 사람은 점차 줄어들었다. 그녀의 이야기는 그저, 한때 마을 사람들의 사랑을 받다가 로마 병사와 눈이 맞아 타락하고, 간음하다 잡혀 망신을 당한 뒤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흔한 비극 중 하나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다 이내 잊혀갔다. 그녀의 이후 행적에 대해 알려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비슷한 시기에 여리고에서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예루살렘에서 왔다는 '아네스'라는 이름의 빈털터리 여인이 있었는데, 그녀는 여리고의 번잡한 시장 한구석에서 삯바느질로 생계를 이어갔다. 그녀의 손에서 나오는 꼼꼼한 바느질 솜씨도 훌륭했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끈 것은 따로 있었다. 그녀는 값을 더 받으려 흥정하지도 않았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할 뿐이었다. 그 선량하고 사심 없는 마음이, 그늘진 얼굴에 가려지지 않고 자연스럽게 배어 나와, 척박한 여리고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씩 움직였다.

 

피도 눈물도 없기로 유명한 여리고의 세리장은 우연히 그녀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는 본래 탐욕스럽고 교활한 자였으나, 딱 한 가지 골칫거리가 있었다. 바로 '부당 징수'에 항의하며 매일같이 세관을 찾아와 소란을 피우는 민원인들이었다. 그는 문득 교활한 생각을 떠올렸다.

 

'저 여자의 어수룩하고 선해 보이는 인상이라면, 성난 놈들의 화를 돋우는 대신 가라앉히는 데는 쓸모가 있겠지. 어차피 그깟 돈 세는 일이야 아무나 가르치면 그만 아닌가. 골칫거리 인간들을 잘 달래는 사람은 흔치 않아. 시험 삼아 몇 달 써보다가, 시원찮으면 내쫓으면 그만이다.'

 

그는 당장 사람을 보내, 뜬금없는 제안으로 '아네스'를 자신의 세관으로 불렀다.

 

세리장의 집무실 공기는 오래된 양피지와, 독한 포도주 냄새, 그리고 돈의 차가운 쇠 냄새로 탁했다. 여인은 방 한가운데, 거대하고 위압적인 책상 앞에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책상 뒤에 앉은 세리장은, 마치 시장에서 가축을 고르는 상인처럼 날카로운 눈으로 그녀를 뜯어보았다.

 

"요즘 한 달 벌이가 얼마나 되나?" 그가 다짜고짜 물었다.

 

여인은 잠시 머뭇거리다,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열 데나리온 남짓 법니다."

 

세리장은 코웃음을 쳤다. 하루 먹고살기도 벅찬 돈이었다.

 

"그걸로 끼니나 잇겠나? 마침 내게 아가씨가 필요한 일이 있는데, 내가 매달 서른 데나리온을 주겠네. 우리랑 일해보겠나?"

 

서른 데나리온. 기존 수입의 세 배에 달하는 돈이었다. 여인의 눈이 아주 희미하게 흔들렸다. 그 정도 돈이면, 적어도 굶주림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다.

 

"이름이 뭐지?" 그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아주 찰나의, 거의 알아차릴 수 없는 망설임이 있었다.

"...아네스."

 

"예루살렘은 왜 떠났나?" 그의 질문은 집요했다.

 

"그곳엔... 더 이상 남은 것이 없어서 왔습니다."

 

그녀의 대답은 짧았고, 더 이상 묻지 말아 달라는 무언의 벽이 느껴졌다. 세리장은 만족스러운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가 복잡한 사람일수록, 다루기는 더 쉬운 법이다.

 

"나는 서류 작업이 필요한 게 아니다. 세관의 접수대에 앉아 있을 사람이 필요해. 사람들을 맞이하고, 그들의 불평을 들어주는 일이다. 할 수 있겠나?"

 

물론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그는 불평을 들어줄 사람이 아니라, 불평을 막아줄 '방패'가 필요했다. 사람들은 세금을 낼 때... 감정적이 되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저렇게 슬픔에 찌든 얼굴을 향해서는, 차마 고함을 지르지 못할 터였다. 여인은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은 일이었고, 음식은 음식이었으며, 지붕은 지붕이었다. 그녀에게 선택의 여지란 없었다.

 

"좋다. 내일 동틀 때부터 시작하지."

 

세리장은 이미 흥미를 잃었다는 듯, 다시 눈앞의 장부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자신의 교활함에 만족했다. 그는 단지 쓸모 있는 인간 방패를 하나 고용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직 알지 못했다. 자신이 방금, 자신의 집에 '양심'을 들여놓았다는 사실을.

 

그녀가 세관에서 일한 지 몇 달이 지났다. 그녀는 여전히 말수가 적었고, 슬픔은 희미해졌지만 사라지진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조용하고 진심 어린 친절은, 험악했던 세관의 공기를 아주 조금씩 바꾸고 있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세금을 내기 위해 왔지만, 적어도 그녀의 앞에서는 고함을 치는 대신 한숨을 쉬었다.

 

그날도 그랬다. 남편과 아들을 먼저 보내고 홀로 작은 밭을 일구는 늙은 과부가, 세리장 앞에 끌려와 울고 있었다. 가뭄 때문에 소출이 좋지 않아, 세금을 반도 내지 못한 탓이었다.

 

"제발... 제발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나리. 이 밭마저 빼앗기면 저는 정말 길거리에 나앉아야 합니다. 먹고 살 돈은 남겨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리장은 코웃음을 쳤다. 그는 장부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며 차갑게 말했다.

 

"자비? 할멈, 자비는 빵을 사주지 않아. 율법이 정한 세금을 내지 못했으면, 그에 상응하는 것을 내놓는 게 이치야. 네 밭은 내일부터 내 소유가 될 거다. 그러니 그만 울고 썩 나가봐."

 

노파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절망적으로 오열했다. 다른 서기들은 애써 그 광경을 외면했다. 늘 있는 일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책상 옆에 조용히 서 있던 아네스가, 아주 작고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리..."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세리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뭐냐?"

 

아네스는 앞으로 나서, 자신의 품에서 아주 작고 낡은 돈주머니를 꺼냈다. 그녀가 몇 달간 푼푼이 모은 전 재산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세리장의 책상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이 돈으로 저 분의 세금을 치르겠습니다. 부디 저 분의 밭을 거두지 말아 주십시오. 모자란 돈은 제 다음 달 품삯에서 떼셔도 좋습니다."

 

순간, 방 안의 모든 소리가 멎었다. 노파도 울음을 그쳤고, 다른 서기들도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를 쳐다봤다. 세리장은 평생 처음 보는 기이한 생물이라도 본 듯한 표정으로 아네스를 쳐다보았다.

 

"너, 지금 제정신이냐?" 그가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네가 피땀 흘려 번 돈을, 생판 남인 저 늙은이를 위해 내놓겠다고? 대체 왜? 저 늙은이가 네 어미라도 된단 말이냐?"

 

아네스는 고개를 저으며, 그저 나직이 말했다.

"그냥, 그럴 수가 없어서요. 저 분의 모든 것을 빼앗아버릴 수는 없어서요."

 

'그럴 수가 없다'. 세리장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거래고 계산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이 여자는, 아무런 이득도 없는, 지독하게 어리석고 비논리적인 행동을 하고 있었다. 세리장은 잠시 아네스의 얼굴과 돈주머니, 그리고 멍하니 있는 노파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는 혀를 차며 돈주머니를 집어 들었다. 돈은 돈이었다. 출처는 중요하지 않았다.

 

"멍청한 짓이군. 좋아, 이번만은 네 뜻대로 해주지."

 

그는 장부에 무언가를 휘갈겨 쓴 뒤, 노파에게 소리쳤다.

 

"나가 봐. 그리고 다신 내 눈앞에서 울지 마."

 

노파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아네스에게 몇 번이고 허리를 숙여 절을 하고는,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아네스는 그저 묵묵히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세리장은 다시 장부로 눈을 돌리려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글자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방금 전 아네스의 얼굴과, '그럴 수가 없어서요'라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 말만이 계속해서 맴돌고 있었다. 그는 처음으로, 돈이 아닌 다른 무언가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2-5.

 

'할머니 미담' 사건 이후, 세리장은 며칠간 아네스를 유심히 관찰했다. 저 여자는 대체 어떤 인간인가. 그는 그녀의 모든 행동을 자신의 계산법으로 분석하려 애썼다. '저건 위선이야. 더 큰 것을 얻기 위한 투자일 뿐.' 하지만 아무리 뜯어봐도, 그녀의 행동에서는 어떠한 계산이나 욕심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멍청할 정도로 선량할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아네스가 세금을 대신 내준 그 노파가, 시장 사람들에게 세리장에 대한 험담 대신 아네스의 선행을 이야기하고 다녔던 것이다. 덕분에 며칠간 세관을 찾아와 소란을 피우는 사람이 눈에 띄게 줄었다.

'이거 봐라...'

 

세리장의 머릿속에서 교활한 주판알이 튕겨졌다.

'저 여자의 멍청한 선행이, 골칫거리들을 막아주는 효과가 있군. 그렇다면...'

 

며칠 후, 그의 계산을 시험해 볼 기회가 찾아왔다. 흉년으로 빚을 진 한 젊은 농부가, 세금을 조금만 깎아달라며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애원했다. 평소 같았으면 당장 경비병을 불러 내쫓았을 테지만, 세리장은 문득 접수대에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아네스의 시선을 느꼈다.

그는 속으로 혀를 차며, 난생 처음으로 '자비로운 권력자'를 연기하기로 마음먹었다.

 

"에헴!" 그는 헛기침을 하며, 최대한 인심 쓰는 척 목소리를 깔았다.

 

"보아하니 딱한 사정인 듯하니... 이번 한 번만은 내 특별히 눈감아 주도록 하지. 대신, 다음 수확기에는 반드시 빚을 갚아야 할 것이야. 알겠는가!"

 

그는 그저 이 귀찮은 농부를 빨리 쫓아내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농부는 그의 '자비'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땅에 엎드려 몇 번이고 절을 했다.

 

"감사합니다, 나리! 감사합니다! 나리의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다른 민원인들의 험악했던 얼굴이, 놀라움과 경외의 빛으로 바뀌는 것이 보였다. 며칠 뒤, 시장에서는 '세리장이 사실은 냉혈한이 아니라, 마음만은 따뜻한 사람'이라는 해괴한 소문까지 돌기 시작했다. 세리장은 당황했다. 그는 분명 '선행을 연기'했을 뿐인데, 돌아온 것은 예상치 못한 '평판'과 난생 처음 받아보는 진심 어린 '감사'였다. 그는 막사로 돌아와 혼자 포도주를 마시며 생각에 잠겼다.

 

'이게... 뭐지? 기분이... 전혀 나쁘지가 않잖아.'

 

돈으로 사람을 굴복시켰을 때의 쾌감과는 다른, 아주 미묘하고 따뜻한 무언가가 그의 텅 빈 마음을 간질였다. 그는 여전히 그것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자신은 지금, 평생 걸어온 길과는 전혀 다른, 아주 낯선 길의 입구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 길의 문을 연 것은, 바로 저 조용하고 이해할 수 없는 여자, 아네스였다.

 

세리장은 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변화는 우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서툴고, 종종 우스꽝스러웠다.

어느 날은 가난한 과일 장수에게 세금을 면제해주고는, 뒤돌아서서 "쯧, 내가 오늘 무슨 자선을 베푼 건지. 내일은 두 배로 걷어들여야겠군" 하고 혼잣말을 하다가 아네스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기도 했다.

 

또 어떤 날은, 고아 아이들이 세관 앞에서 배고프다며 소란을 피우자, "시끄럽다!" 소리치며 빵을 던져주더니,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라!" 하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의 행동은 여전히 거칠었지만,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채찍이 아닌 빵이었다.

 

아네스는 그 모든 것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탐욕스러운 세리장이라고 욕했지만, 그녀의 눈에는 다른 것이 보였다. 그녀는 그의 서툰 친절 속에서,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 안간힘을 쓰는 한 남자의 외로운 싸움을 보았다. 그의 거친 말투 뒤에 숨겨진, 어떻게 선행을 베풀어야 할지 몰라 당황하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을 보았다. 그 모습은, 완벽한 선인보다 훨씬 더 그녀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날 저녁, 집무실을 정리하던 아네스에게 세리장이 불쑥 물었다. 그는 책상 뒤 높은 의자에 앉아, 애써 자신의 작은 키를 감추고 있었다.

 

"내가... 우스워 보이나?"

 

그의 목소리에는 자조와 약간의 부끄러움이 섞여 있었다.

 

아네스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나리. 그저, 애쓰시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그 말에 세리장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그때 아네스는 처음으로, 그의 작은 등을 제대로 보았다. 평생을 다른 사람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자신을 더 크고 강하게 보이려고 애썼을 그 외로운 등의 무게가 느껴졌다. 그의 지독한 탐욕과 인정머리 없음은, 어쩌면 세상의 차가운 시선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갑옷이었을지도 모른다. 창가에 선 그가, 나직이 말했다.

 

"사람들이 나를 올려다보게 만들고 싶었지. 그래서 돈을 긁어모았소. 돈이 많아지면, 누구도 감히 나를 내려다보지 못할 테니까."

 

그것은 그녀에게 처음으로 털어놓는, 그의 가장 깊은 속내였다. 아네스는 그의 등 뒤로 다가가, 조용히 말했다.

 

"나리. 저는 나리를 올려다보지도 내려다보고 있지도 않습니다. 저는 그냥 나리를 보고 있을 뿐입니다."

 

세리장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자신의 키나 재산을 재는 저울이 없었다. 그저 한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만이 담겨 있었다. 그는 평생 처음으로, 누군가 앞에서 자신의 작은 키를 감출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그날 이후, 세리장의 태도는 눈에 띄게 달라졌다. 그는 더 이상 아네스를 그저 민원인을 상대하는 방패로만 쓰지 않았다. 저녁이 되어 다른 서기들이 모두 퇴근하고 나면, 그는 아네스를 자신의 집무실로 불렀다.

 

"이리 와서 앉아보게."

 

그는 자신의 거대한 책상 한편을 그녀에게 내어주고, 직접 '돈 세는 일'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로마의 데나리온과 유대의 렙돈, 시리아의 드라크마를 구분하는 법부터, 복잡한 세금 장부를 읽고 정리하는 법까지.

 

처음에 아네스는 주저했다. 그녀는 글자를 겨우 읽는 수준이었고, 숫자는 그녀에게 너무나 낯선 세계였다.

 

"나리. 저는 이런 어려운 일은..."

 

"어렵지 않아."

 

세리장은 의외로 끈기 있게 설명했다.

"이건 로마에서 온 것이니 가치가 가장 높고, 이건 우리 동네에서만 쓰는 것이니 헷갈리면 안 되지. 자, 이 장부를 보게. 이 줄은 밭에서 난 것이고, 이 줄은 가축에게서 얻은 것이야."

 

예전의 그였다면 아랫사람에게 시키고도 남았을 귀찮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제, 서툰 손가락으로 주판알을 튕기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에서, 금화 자루를 세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가 그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작게 고개를 끄덕일 때마다, 그의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졌다.

 

시간이 흘러 그녀가 제법 능숙하게 장부를 다루게 되었을 때, 그는 마침내 결심을 굳혔다. 어느 날 아침, 그는 모든 서기들을 불러 모아 선언했다.

 

"앞으로 모든 장부는, 내가 결재하기 전에 아네스가 먼저 검토할 것이다."

그가 말했다. "만약 자네들 눈에는 합당해 보여도, 아네스가 보기에 부당하다면, 그 일은 다시 가져와야 할 걸세."

 

서기들은 경악했지만, 누구도 감히 토를 달지 못했다. 보잘것없던 예루살렘 출신의 여인이, 세리장에게 직접 돈 관리법을 배우고, 마침내 그의 오른팔이자 '양심을 대변하는 자'가 된 것이다.

 

세리장의 삶은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평화로워졌다. 사람들의 저주 대신 서툰 감사를 받는 날이 늘어났고, 악몽 대신 편안한 잠을 자는 날이 많아졌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를 느꼈다. 아네스가 가져다준 평화는 소중했지만, 그의 영혼 깊은 곳의 공허함까지 채워주지는 못했다. 그는 자신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대체 '무엇을 위해' 변해야 하는지, 그 길의 끝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었다.

 

 

2-6.

 

그러던 어느 날, 시장에서 떠도는 기묘한 소문이 그의 귀에 들어왔다. 갈릴리 출신의 '예수'라는 사내가 있는데, 그가 율법보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가르친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세리나 창녀 같은 죄인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린다는 말도 들려왔다.

 

'이웃 사랑이라...'

 

그 말은, 최근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화두와 정확히 일치했다. 그날 저녁, 그는 집무실에 단둘이 남은 아네스에게 넌지시 물었다.

 

"아네스. 자네는 예루살렘 출신이라고 했지?"

그가 말했다. "요즘 시장에 예수라는 자에 대한 소문이 자자하던데... 그가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혹 기억나는 것이 있나?"

 

그의 질문에, 아네스는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얼굴 위로 아주 복잡한 상념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세리장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길을 찾는 자의 진지한 갈망이 담겨 있었다.

 

아네스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나직이 대답했다.

 

"그분께서는 사람을 함부로 정죄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한 음절 한 음절에 깊은 무게가 실려 있었다.

 

"저 역시... 그분의 말씀을 따르려고 애쓰고 있을 뿐입니다."

 

'사람을 정죄하지 말라.'

 

세리장은 그 말을 곱씹었다. 평생을 사람들의 죄를 헤아리고, 값을 매기고, 그들을 정죄하며 살아온 자신에게는 너무나 낯선 가르침이었다. 그는 비로소 깨달았다. 아네스가 보여준 이해할 수 없었던 모든 선행과 너그러움의 근원이 바로 저 가르침에 있었다는 것을. 그것은 타고난 성품이 아니라, 치열한 의지였다. 그는 예수라는 미지의 인물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동경과 호기심에 휩싸였다.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이런 가르침을 주고, 저 여인의 삶을 통째로 바꾸어 놓았단 말인가. 그는 자신도 모르게, 예수가 여리고에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다. 키가 작은 자신이, 그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실없는 고민까지 하면서 말이다.

 

기다림은 생각보다 길지 않았다. 며칠 뒤, 여리고 전체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나사렛 예수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여리고로 들어온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사람들은 기적을 행한다는 그를 보기 위해, 혹은 병을 고치기 위해, 혹은 그저 유명한 구경거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세리장은 그 소식을 듣고 안절부절못했다. 그는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고 싶었지만, 그의 발목을 잡는 것이 있었다. 바로 그의 작은 키였다. 인파가 구름처럼 몰려들 것이 뻔한데, 자신 같은 단신은 사람들 뒤통수밖에 보지 못할 것이 자명했다.

 

권위 있는 세리장으로서 체면을 지키며 그를 만날 방법은 없을까. 경비병들을 동원해 길을 트게 할까? 아니, 그랬다가는 사람들의 원성만 살 뿐, 그가 가르친다는 '이웃 사랑'과는 정반대의 행동이 될 터였다. 세관의 가장 높은 창가에서 내려다볼까? 그것 역시 오만하게 보일 뿐이었다.

 

그는 평생 처음으로, 자신의 권력과 돈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느꼈다.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아주 어리석고 유치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어릴 적, 친구들과 술래잡기하며 올랐던, 길가의 늙은 뽕나무.

 

'미친 짓이야. 여리고의 세리장이, 체통도 없이 나무 위에 올라가다니. 사람들이 보면 뭐라고 하겠는가.'

 

그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예수를 보고 싶다는 갈망은, 체면을 지키려는 이성을 금세 압도해버렸다. '아네스도 내가 이런 모습을 보면 비웃겠지. 아니, 어쩌면, 애쓴다고 말해줄지도 몰라.'

 

마침내 그는 결심했다.

 

그는 가장 허름한 외투로 몸을 감싸고, 얼굴을 가린 채 군중 속으로 조심스럽게 섞여 들었다. 예상대로, 예수가 지나갈 길목은 이미 발 디딜 틈 없이 꽉 차 있었다. 그는 까치발을 들어보았지만, 보이는 것은 사람들의 등과 머리뿐이었다.

 

그는 주위를 한번 살피고는, 잽싸게 길가의 뽕나무를 향해 달려갔다. 그는 값비싼 옷이 나뭇가지에 긁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툴고 우스꽝스러운 동작으로 나무 위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나뭇잎이 그의 얼굴을 스치고, 거친 나무껍질이 그의 손바닥을 할퀴었다. 마침내, 그는 어른 두 명이 겨우 기댈 만한 굵은 가지 위에 위태롭게 자리를 잡았다. 아래에서는 몇몇 아이들이 그를 발견하고 손가락질하며 킥킥거렸다.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그는 애써 무시했다. 바로 그때였다.

 

저 멀리서부터 인파가 술렁이며, 한 무리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 그가 있었다. 소문처럼 위압적이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그저 평범한 행색의 사내. 하지만 그의 주변에는 이상한 평온함과 권위가 함께 흐르고 있었다.

 

세리장은 숨을 죽이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저 사람이구나. 아네스의 삶을 바꾸고, 내 마음을 뒤흔든 사람이.'

예수는 군중의 환호를 받으며, 묵묵히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러다, 그가 올라앉은 뽕나무 바로 아래에서, 그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마치 처음부터 그가 거기 있는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들어 나무 위를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예수는, 나무 위에 매달린 여리고 최고의 부자이자 죄인을 향해, 온화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 목소리는 나무 아래의 모든 군중이 들을 수 있을 만큼 뚜렷했다.

 

"삭개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서 묵어야 하겠다."

 

 

2-7.

 

삭개오의 집은 여리고 전체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죄인의 대명사였던 그의 집에, 거룩하다는 나사렛 예수가 들어갔다는 사실만으로도 사람들은 충격에 빠졌다. 삭개오는 평생 처음으로, 자신의 부와 권력이 아닌 다른 이유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것이 무엇인지 경험하고 있었다. 그는 허둥지둥 최고의 음식과 가장 값비싼 포도주를 내오라 명했다. 하지만 그의 관심은 더 이상 손님을 향한 과시에 있지 않았다. 그는 그저,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 조용히 빵을 떼는 예수의 모든 행동을, 숨죽인 채 지켜볼 뿐이었다.

 

한편, 부엌과 응접실을 오가며 분주히 손님 시중을 들던 아네스는, 문득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한 여인의 시선을 느꼈다. 예수를 따라온 무리 중 한 명이었다. 뇌리를 스치는 고통스러운 기억. 성전 뜰에서, 자신에게 돌을 던지려 했던 바로 그 여자. 리디아였다. 아네스의 심장이 멎는 듯했다.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다른 곳으로 시선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리디아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해 아네스에게 다가왔다. 두 사람은 응접실 구석, 희미한 등잔 불빛이 닿는 곳에서 마주 섰다.

"저..." 리디아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성전 뜰에서의 그 날카로운 목소리가 아니었다. 순례길의 먼지와 햇볕에 그을린 그녀의 얼굴에는 깊은 평온이 깃들어 있었다.
"이 댁의 일을 총괄하시는 분처럼 보이시는데, 혹시 우리가 만난 적이 있었나요? 예전에 알던 사람과 무척이나 닮으셔서요."

그 질문에, 아네스의 마음속에서 수만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그 순간, 그녀의 시선이 리디아의 겉옷자락에 닿았다. 먼 길을 걸어온 순례자의 옷은 흙먼지로 더러워져 있었고, 특히 밑단은 거친 길에 쓸려 실밥이 터지고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아네스는 대답 대신, 아주 작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인, 옷자락이 많이 상했습니다. 이대로 두면 더 찢어질 겁니다."

리디아는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았다. 아네스는 곁에 있던 작은 의자를 가리켰다.

"잠시만 저기 앉아 기다리시겠어요? 금방 손봐 드리겠습니다."

리디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아네스의 눈을 잠시 바라보다가, 조용히 의자에 가서 앉았다. 아네스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자신의 작업 바구니에서 바늘과 질긴 실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리디아의 발치에, 작은 받침대를 놓고 앉았다. 무릎을 꿇는 것과 같은 낮은 자세였다.

아네스는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바느질을 시작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낡은 천 사이를 오갈 때마다, 너덜거리던 옷자락이 한 땀 한 땀, 단단하고 가지런하게 정리되어 갔다. 리디아는 말없이, 자신의 발밑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그 고운 손가락과, 오직 바느질에만 집중하고 있는 그녀의 정수리를 한참 동안 응시했다. 응접실의 소란스러운 대화 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지고, 두 사람 사이에는 오직 실이 천을 꿰는 소리만이 고요하게 울렸다. 그러다, 리디아의 입가에 자신도 모르게 아주 희미한 미소가 서서히 번졌다.

마침내, 아네스가 마지막 매듭을 짓고 실을 끊었다. 그녀는 손으로 옷자락을 부드럽게 매만져 먼지를 털어냈다.

"다 되었습니다, 부인."

그녀가 고개를 들었을 때, 리디아는 이미 온화한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순간, 응접실에서 삭개오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는 큰 소리로 예수에게 선언하고 있었다.

"주여, 보시옵소서! 제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그 선언은, 더 이상 아네스의 인정을 받기 위한 행동이 아니었다. 예수를 만난 뒤, 자신의 모든 죄를 참회하고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겠다는 진심 어린 결단이었다. 그 모습을 본 아네스의 눈에, 아주 오랜만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마음을 정했다. 그리고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리디아를 향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저는 그저, 이곳에서 어르신을 보좌하는 하찮은 사람일 뿐 예수님을 모시는 분과 인연이 있을 리 없습니다. 사람을 잘못 보신 것 같습니다."

그 대답에 리디아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다시 예수의 곁으로 돌아갔다.

아네스는 텅 빈 그릇을 들고 조용히 부엌으로 향했다. 그녀는 한 남자의 구원을 지켜보며, 비로소 자신의 새로운 삶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Posted by 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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