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한교(破閑敎)

낙서 2025. 3. 29. 01:19

이 글에서 다루는 종교는 기독교를 오마주하여 만들어진 상상 속의 DIY 종교다. 종교의 이름은 파한교이고 신의 이름은 야후이다.

파한교 성경은 기독교 성경 중 구약과 복음서, 사도행전이 합쳐진 형태로 구성되어 있는데 신과 메시아의 이름을 제외한 모든 글자가 같다.

성경 이외의 내용으로는 삼위일체론과 자유의지론을 채택했다.

이 글은 종교의 내부적 모순을 최소화하고자 하는 파한교 특유의 교리에 따라 작성된, 파한교 권위자의 유출된 비밀 노트 중 일부이다.

다소 논쟁적인 내용을 담은 이 노트는 자신만의 신앙관을 확립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파한교 신도들에게 믿음의 디딤돌이 될 수 있다.

 

 

1. 파한교의 기본 교리

1) 신의 영광과 인간의 오만

야후가 세상과 인간을 창조한 이유에 대해서 신이 스스로의 영광을 드높이기 위해서였다는 오해가 있다. 그러나 이는 자체 모순적이다.
일단 야후는 무한한 존재이고 세상과 인간은 유한한 존재다.
세상 모든 사람과 생명체를 합쳐봤자 유한하다. 세상 모든 것이 유한하다.
한편 인간과 대장균 한마리를 비교해보자. 둘은 비교할수 없이 큰 규모의 차이를 보이지만 그래봐야 유한과 유한의 비교에 불과하다.
반면 신과 세상은 무한과 유한의 비교이기 때문에 신의 입장에서 세상이란 인간이 본 대장균 한마리보다도 못한 존재다.
만약 어떤 인간이 자기 창자 안에서 살고 있는 대장균의 100억마리의 찬양을 받는다고 그의 생활에 조금이라도 영향이 있을까?
다만 현미경으로 그 찬양 장면을 관찰할 때 도파민이 제법 분비되기는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무한한 신이 유한한 인간 따위에게 찬양을 받는다고 신의 영광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야후는 인간으로부터 무엇을 요구하지 않는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야후에게 아무런 외부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하다. 다만 야후는 인간이 하는 행동을 보면서 스스로 내적인 만족을 찾을 뿐이다.


완전한 존재가 외부에서 재미를 찾는다는 점이 논리적이지 않아 보인다는 지적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다음과 같이 반박이 가능하다.

기독교 신학의 관점에서는 완전한 신이 사랑과 선함을 위해서 인간을 창조했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그 점에 대해서는 크게 유효한 신학적 비판은 없었다. 다시 말해, 완전한 신이 뭔가를 필요해서 창조한 것이 모순적으로 보인다는 비판 자체가  이중잣대다. 단지 새로운 관점에 대한 비판만을 위해서 완전성에 대한 정의를 자의적 기준으로 그것에만 극단적으로 설정하여 적용한 것에 불과하다. 그런 기준으로는 신에게 외부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신의 완전성을 해치는 것이 된다. 완전함의 개념을 존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해야 함으로 정의한다면 완전한 신이 자신에게 포함되지 않는 외부세계를 만드는 행위 자체가 논리적으로 성립할 수 없게 되어 모든 창조를 부정하게 되는 결과로 이어진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우는 격이다.

 

하지만 빈대 같은 "재미"를 잡기 위해서 지른 불은 안타깝게도 선과 사랑과 계획만 태울 뿐 불로부터 유유히 빠져나가는 "재미"를 잡을 수가 없다. 신의 완전함이란 신의 속성이다. 그런데 재미는 속성이 아니라 감정이다. 재미는 외부의 자극과 내부에서 만들어지는 생각에 의하여 만들어진다. 창조 전 시점에서는 신 홀로 존재하기 때문에 외부적 자극이 존재하지 않는다. 외부 자극과 그에 대한 경험도 존재하지 않으니 생각이란 것은 오로지 "나"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아무것도 없는 절대적 무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신은 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재미라는 감정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특정 시점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감정은 일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신이 노여운 감정을 느낄 수 있다고 해서 항상 노여운 상태는 아니고 마찬가지로 재미를 느낄 수 있다고 항상 재미있는 상태인 것은 아니다. 또한 노여움이나 질투 역시 불만족이자 결핍을 의미하는데 그런 모습 때문에 신의 완전함을 의심하는 시선은 없었던 것 같다. 신이 그런 감정을 표출하는 장면을 보고 싶다면 성경, 특히 모세 오경 부분을 펴보면 된다.



2) 존경받지는 않지만 숭배받는 신.

파한교의 가장 차별적인 특징은 신이 선한 존재라는 근거 없는 확증 편향으로부터의 탈출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간들이 신은 선하다고 설레발을 치는 장면은 많지만 의외로 신이 스스로를 선하다고 선언하는 장면은 없다. 그나마 비슷한 건 출애굽기 34장 7절인데 내용은 이렇다.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며, 악과 허물과 죄를 용서하는 하나님이다. 그러나 나는 죄를 벌하지 않은 채 그냥 넘기지는 아니한다. 아버지가 죄를 지으면, 본인에게 뿐만 아니라 삼사 대 자손에게까지 벌을 내린다.”(새번역) 
성경 안에서 빈번하게 펼쳐지는 연좌제 처형과 신에 의한 대량 살상은 대부분 이 구절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신은 전지하고 전능한 존재다."라는 선언은 사실 명제다. 진위를 따져볼 수 있는 명제이고, 그것이 참이라고 밝혀진다면 누구도 부정할 수 없게 된다.
반면에 "신은 선한 존재다."라는 선언은 사실 명제가 아니라 가치 명제다. 즉 신이 선한 존재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주관적인 문제이고 사람마다 다른 결정을 내릴 수 있다. 파한교는 성경에서 보여지는 신의 다양한 행적들을 통해 신이 전적으로 선하다 믿음에 동의하지 않는 독자적인 교리를 확립하게 되었다.

사람들의 숭배를 이끄는 것은 능력이고 존경을 이끄는 것은 선함이다.
무능하고 돈도 못벌고 머리도 나쁘고 언변도 서투른 지인이 있다고 치자. 그 사람을 능력적인 면에서는 종합적으로 평균에 크게 하회한다. 하지만 그가 비록 능력은 부족하지만 근면하고 없는 돈을 자기보다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여가 시간에는 노인과 고아들을 위해 봉사하는 모습을 평생동안 일관되게 보여준다면 그를 함부로 무시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존경하는 마음을 품게 되기가 쉽다. 하지만 자기보다 틀림없이 객관적으로 모자란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그를 숭배하기에 이르지는 못한다.

성경에 등장하는 신은 일반적으로 선하다고 알려져있으나 앞서 예를 든 선한 지인에 비해서 진정으로 선하다고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전지함과 전능함은 그를 숭배하게 한다. 그리고 그런 존재는 악하기보다는 선해야 인간에게 유리하다. 따라서 신이 선하다라고 규정하는 것은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라보다는 그랬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투사한 것에 불과할 수 있다. 만약 전지하지도 않고 전능하지도 않은 어떤 사람이 자신보다 훨씬 미약한 생명체, 예를 들어 개미들을 죽이고 가끔 설탕가루와 빵가루를 뿌려주면서  자신을 믿고 따르라고 요구하면 개미 입장에서는 그를 떠받어야 할 두려운 존재로 여길 것이다. 그러나 그와 동등한 능력을 가진 타인의 시선에서는 그가 상당히 한심스러워 보일 것이다.

 

비슷한 예로는 전근대 한국인들의 호랑이 숭배를 들 수 있다. 호랑이는 인간 입장에서는 대응하기가 어려운 압도적인 힘을 보이는 맹수다. 호랑이는 인간과 가축을 잡아먹는 존재인데 상대하기가 워낙 어렵다보니 퇴치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산신령의 현신이나 산군(산의 왕) 같이 신격화하여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는 선하지 않은 신의 숭배가 충분히 가능하다는 근거로 내세워 볼 수 있다. 한편 호랑이는 강하고 대적하기에 까다로운 맹수일 뿐 신과 달리 전지전능하지 않아서 사람들은 호랑이를 영험한 존재로 추앙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호랑이 사냥을 하기도 했다. 심지어 호랑이를 잡기 위해 착호갑사라는 특수부대를 두기까지 했다. 신 역시 전지전능하지 않아서 사람이 효과적으로 공략할 수 있었다면 사람들이 스스로의 안전을 위해 두려움을 주는 신을 호랑이처럼 처단하려고 들지 않았을까?

 

 

2. 신의 지루함을 달래줄 게임

 

야후가 세상을 만들고나서 신이 느낀 감정은 지루함이었다. 세상을 만들 때의 몰입은 그에게 즐거움을 주었으나 창조를 마치고 나서는 다시 아무런 변화 없는 일상이 지속되었다. 세상 자체가 애초에 자기가 설계한 것이라서 딱히 궁금할 것도 없고 전능한 존재인 그에게 도전적인 일 역시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야후는 최초로 재미를 느낄만한 사건을 맞이한다. 그것은 자기의 명령만 따를 것이라 믿었던 인간들이 자기의 지시를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었다. 야후는 자신의 예상을 깨버린 그 사소한 사건에 재미를 느끼고 다행이라 생각했다. 신은 겉으로만 인간에게 과하게 화내는 척을 하면서 인간을 에덴동산 밖으로 방사했다. 그렇게 신의 샌드박스는 에덴동산에서 세계 전체로 훨씬 거대해졌다. 그리고 퍼져 나가는 인간을 관찰하면서 그들의 예측 불가한 행동들을 즐겨온 것이다.

 

카인이 아벨을 살해했을 때 야후는 또다시 예측 못한 흥분감을 느꼈다. 그는 럭비공 같은 카인을 통해 큰 재미를 얻고 싶었기에 그를 보호하기로 했다. 그래서 카인에게 표식을 주고 그에 대한 보복을 방지했다. 카인과 그의 동생 셋은 자녀를 낳아서 대를 이어갔다. 그들은 장수를 누리며 딱히 부족함 없이 세상을 살면서 자연스럽게 신을 찬양하는 존재가 되었다. 여기서 신은 또다시 지루해졌다. 이지 난이도로 게임을 하다가 불감증에 빠진 것이다. 신을 지루하게 만든 것은 피조물로서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죄악이었다. 야후는 인간을 만든 것을 후회하다가 게임을 리셋해보기로 결정했다. 그는 너무 악하지도 그렇다고 지나치게 선하지도 않은 노아라는 사람을 발견하고는 방주를 만들 것을 명령했다. 그러고는 노아의 가족들을 제외한 모든 인간을 물로 쓸어버려서 세상을 초기화했다.

 

파한교에서는 야후가 노아의 방주에 동물들을 태우게 한 이유를 다양한 생물의 종을 보전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에서 뿌리를 내려야 할 노아의 실행력을 테스트하기 위한 것일 뿐으로 해석한다. 노아가 알지 못했던 나머지 동물들은 홍수 기간 중에 야후가 별도로 보호하다가 제자리에 돌려놨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남극에는 펭귄이, 북극에는 북극곰이, 호주에는 캥거루와 코알라가 아메리카에는 퓨마와 재규어, 버팔로가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 것으로 보아서 기존에 불신자들이 유치하게 제기하곤 했던 노아 이야기의 물리적 가능성에 대한 문제를 변증한다.

 

지나치게 편한 플레이가 재미를 없앤다는 점을 알았게 되었기에 야후는 그동안의 규칙을 바꿨다. 신은 별로 훌륭한 인간은 아니었던 노아를 완악하게 하여 자신의 아들 함에게 저주를 내리게 한다. 노아의 저주로 함의 후손들은 다른 형제들의 종이 되어 버렸다. 그렇게 부당한 불평등이 대를 이어 발생했고 인간 세상은 홍수 전보다 흥미롭고 다이나믹해진다. 야후는 이것을 미리 계획했었고 앞으로는 세상을 리셋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확신을 가졌던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홍수가 끝나자마자 노아와 그 자식들에게 앞으로는 홍수를 일으키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었다.

 

그러나 그 인간들은 늘 그랬듯 신의 은혜에 감복하여 하늘에 닿을 듯한 바벨탑을 만들어서 또다시 신을 찬양했다. 자신의 게임이 또다시 노잼화 되는 걸 극히 꺼렸던 야후는 사람들의 언어를 서로 다르게 하여 그들을 흩어지게 했다. 야후에 대한 찬양은 각 민족별로 파편화되어 잊혀졌고 모든 민족은 각각의 신을 믿게 되었다. 드디어 신이 원하던 게임의 판이 깔렸다. 이미 재미있는 일들이 끊임없이 벌어질 판이 깔렸기 때문에 인간들이 바벨탑보다 더 큰 건축물을 짓든, 사악한 만행을 저지르든 야후는 더이상 인류를 멸망시키거나 언어를 더욱 파편화시킬만한 이유가 없어졌다.

 

신은 이제부터 아브라함과 욥 같은 별볼일 없는 세력을 가진 부족장들과 접촉하여 도전적인 신앙 게임을 시작하기로 했다.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같은 거대 세력으로 플레이를 하는 것은 도전적인 재미를 거의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신은 아브라함과 욥을 시험하게 되었다.

 

우선 아브라함에게는 할례를 요구해봤다. 가장 수치스러운 곳에 극심한 고통을 강요해본 것이다. 마취도 소독약도 예리한 칼도 없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정말 그가 시킨대로 해버렸다. 심지어 하루만에 자기뿐 아니라 수백명이 넘는 자기의 종들까지 단숨에 처리해버렸다. 언뜻 자비로운 인상과 언행에 착각하기 쉬웠지만 사실 그의 과거를 보면 그는 한 성깔 하는데다가 종들에게는 꽤나 무서운 주인이었다. 그는 그의 종들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 같다.

"야!! 내 말대로 표피만 조금 벗길래? 아니면 너와 네 아들의 가죽으로 네 딸이 무두질을 하게 해볼까?"

그의 종들은 엉엉 울면서 "어떡하겠어? 위에서 까라면 까야지"라고 가혹한 현실을 받아들였다. 야후는 놀랐다.

"어라? 시킨다고 저걸 정말 하네?"

그러자 야후는 선을 살짝 넘겨보기로 했다.

"네 아들을 번제물로 바쳐라"

그러자 아브라함은 살짝 눈이 돈 상태가 되어 정말로 아들에게 칼을 가져다 대려 했다. 신은 당황해서

"아니다. 그만하자. 네 복종심 충분히 알았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저런 캐릭터라면 틀림없이 게임을 재미있게 풀어갈 수 있을 거라 보았다.

 

야후는 욥도 시험했다. 자신의 충실한 종 사탄을 시켜서 그의 모든 재산을 빼앗고 하인과 자녀들을 모두 살해했다. 그리고 그에게 병까지 줬다. 욥은 자신의 처지에 절규하고 신에게 의문을 표하면서도 신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다만 그가 자신의 고난의 원인에 대해서 신에게 던진 의문에 대해 야후는 "너를 어느 정도까기 괴롭혀도 네가 신앙을 유지할 수 있을지 알고 싶었어."라고 사탄과의 대화에서 드러냈던 본심을 그에게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야후는 욥에게 "꼬우면 네가 신 하든가!"라고 윽박을 지르다가 슬그머니 그에게 빼앗아 간 것들을 돌려줬다.

 

애초에 신은 어떤 규칙을 따를 필요도 없고 피조물에게 해명을 해야할 이유도 없는 절대자였다는 점을 욥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욥은 빼앗긴 재산의 2배와 새로운 자녀 10명을 받았다. 그가 사랑했던 옛 자녀들 10명은 누구보다 독실했지만 끝내 '사망의 권세'를 극복하지 못했다. 욥의 후손들은 신에게서 떠나버렸다. 지나친 신앙심은 신의 관심을 끌어 예상하지 못한 불행을 가져올 수 있다는 선조의 사례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후 야후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 서자 이스마엘, 이삭의 아들 에서는 버리고 에서로부터 이삭의 장자권을 가로챈 야곱의 후손들만 컨트롤하기로 했다.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았던 야곱과 그의 아들들은 확실히 그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한 만족스런 유닛들이었다. 장기적인 재미를 위해 이스라엘 민족을 고난으로부터 벗어나는 서사가 필요하기 때문에 야후는 야곱의 아들들을 이집트로 보냈다.

 

400년동안 야곱의 후손들이 고통을 당하자 야후는 드디어 때가 왔다고 판단하고 모세를 보내서 그들을 이집트로부터 탈출시키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집트가 히브리인을 순순히 풀어주면 재미가 없기 때문에 파라오의 마음을 완고하게 했다. 그리고 고집을 부리는 파라오를 모시고 있는 불쌍한 이집트인들을 상대로 도파민이 넘칠 법한(신에게 호르몬이 있을지는 분명치 않음) 각종 기행들을 벌이면서 히브리인들을 가나안으로 빼냈다. 그리고 가나안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죽이거나 내쫒고 히브리인이 정착하게 했다. 이때 이집트인들의 장자 살해나 가나안 원주민들의 간난아기까지도 죽여버리는 사탄도 절래절래하는 명장면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바다도 가르고 해와 달의 운행도 정지시키는 이벤트들을 벌이면서 히브리인들을 포함한 다양한 민족 사람들의 피로 목욕하며 천지 창조 이후 최고의 재미를 만끽했다.

 

재미를 위해 약한 민족을 선택해서 플레이했지만 멸망해버리면 그것 역시 즐거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야후는 그들을 단단하게 묶어줄 율법을 내려주었다. 율법이 없다면 안그래도 약한데다가 12지파로 나눠지기까지 했던 이스라엘 민족은 쉽게 와해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야후가 내려준 율법은 매우 엄격하고 까다로운 것이었다. 마치 수산물 운반용 수조 안에 상어 한마리를 넣어서 다른 생선들이 긴장을 풀지 못하게 해서 전체 생존률을 높이는 것과 같은 기능을 했다.

 

그리고 야후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편안해지면 다른 신을 믿고, 고난을 주면 신앙이 단단해지는 것을 패턴을 파악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지속적으로 고난을 주고 몇몇 예언자들을 골라서 구원에 대한 계시를 종종 내렸다. 애초에 몸이 편하면 구원을 하든말든 별 관심이 가지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그렇게 인간을 구원에 집착하게 하여 단지 찬양만 하는 단편적인 존재보다 한층 흥미롭게 만들어서 그들을 관찰했다.

 

 

* 쉬어가는 페이지: 야후와 대면했던 사람들과의 인터뷰 (예전에 썼던 글 재활용)

 

1) 하와의 고백

 

왜 선악과를 먹어서 이런 말썽을 일으켰느냐고요? 저는 공허했어요. 저의 삶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아담의 즐거움을 위한 도구였을까요? 하느님의 창작욕을 충족시킨 인형이었을까요? 맨날 똑같은 일만 반복되는 에덴동산이 편하긴 했어요. 하지만 제가 얼마나 오래 전부터 그 곳에서 지냈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아요. 저는 그게 영겁처럼 느껴졌어요. 그리고 그런 아무런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삶이 앞으로도 영원히 지속된다는 게 숨이 막혔어요. 그런데 하느님이 선악과를 가리키시며 말씀하셨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라고요.

저는 솔깃했어요.

'죽는다고? 바라던 바네. 그리고 나 뿐만 아니라 아담도 이런 삶에서 해방시켜주자.'

 

하지만 저는 당장 그러질 못했어요. 애정을 받으면서도 죽음을 갈구하는 제 마음을 알면 하느님이 얼마나 상심하셨을까요? 저는 그 삶이 지겹고 허무했지만 그래도 하느님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지금도 제 마음은 변함이 없어요. 그래서 선악과를 차마 먹지 못했어요. 그러던 어느날 뱀이 나타났어요. 뱀은 저를 유혹했죠. 뱀은 저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 선악을 알게 되지만 절대로 죽지 않는다고 거짓말을 했어요. 고맙게도 저에게는 좋은 핑곗거리가 생긴 거였어요. 비록 그때는 지금보단 순진했지만 그래도 저는 하느님의 모습을 본따서 만들어진 하느님의 딸 같은 존재예요. 미물인 뱀이 하는 얕은 거짓말 따위에 순순히 넘어갈 리 없잖아요? 저는 당연히 뱀보단 하느님을 믿었어요. 반드시 죽을 것이었죠. 그러나 저는 그깟 뱀의 유혹 따위에 넘어가는 어리석은 여자인 척 하면서 선악과를 먹고 아담에게도 먹였어요. 그이의 공허한 눈빛을 보니 그도 내 마음을 이미 다 알고 있는 것 같았어요.

 

선악과를 먹고 나니 영생이 사라졌다는 점이 직감적으로 느껴졌어요. 그리고 성적인 욕구가 생겨났죠. 죽는 존재는 후손을 만들기 때문인가 봐요. 그이의 몸이 전과는 확실히 다르게 보였는데 처음 경험해 본 이질적이고 설레면서 웬지 모르게 좋은 느낌이었어요. 가슴이 콩닥 콩닥 거렸어요. 심장이 가슴에 있다는 걸 알게 된 날이었죠. 아담 역시 저와 마찬가지였어요. 다만 그이는 저와는 달리 자신의 신체에 눈에 확 띄는 특별한 변화 때문에 어쩔 줄 몰라했어요. 무화과 잎으로 가려보겠다고 혼자서 허둥대는 모습이 좀 귀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해서 도움을 줬죠. 그렇게 저도 같이 무화과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서 입었어요. 정말 오랜만에 환하게 웃었던 날이었고 그 기억을 떠올리면 지금도 미소가 지어져요. 그런데 그 큰 게 겨우 무화과 잎으로 가려지겠어요? 하느님께 당연히 들켰죠. 그러더니 죽기 위해서 그걸 먹었다는 제 속내를 모르신 척하고 눈감아 주신 건지 정말로 모르셨던 건지 다행히 하느님은 슬퍼하시기보다는 화를 내시더군요. 그 분에게 슬픔을 드린 게 아니라서 지금도 저는 그 때의 제 결정에 만족해요.

 

아담은 그때 하느님께 이렇게 대답하며 제 탓으로 돌렸어요.

"하느님께서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좀 섭섭했지만 그를 이해해요. 딱히 틀린말은 아니었으니까요. 나중에 물어보니 그이는 저처럼 충분한 각오를 해왔던 건 아니었다고 하더라고요. 인자하신 모습만 보이시던 하느님이 화내시는 모습을 처음 보니 온몸이 얼어붙었고 아무 말이나 하게 되었고 그냥 그 순간에서 도망치고 싶었다고요. 뱀도 저희와 같이 벌을 받았어요. 거짓인 걸 뻔히 다 알면서도 거절하지 않아서 벌어진 일이라 약간 미안하기는 했지만 자업자득이죠. 어쨌든 뱀은 저를 속여서 곤란에 빠뜨리려고 한 거잖아요. 나중에 뱀에게 정확한 사정을 말해주니 뱀은 저를 더 미워하게 되었어요. 저도 뱀이 싫어요.

 

그건 그렇고 선악과를 먹으면 곧 죽는 줄 알았는데 그 후에도 꽤 오래, 몇 백 년을 더 살게 된다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어요. 그리고 에덴동산에서 쫒겨나게 될 줄도 몰랐죠. 기대하지 않았던 변화가 두려웠지만 그래도 홀가분했어요. 그렇게 저희 부부는 에덴동산에서 해방되어 진정한 자유를 얻고 그 대가인 시련을 감당하게 되었어요.

시련은 예상했던것 보다 훨씬 가혹했었죠. 그 중에서 가장 큰 시련은 큰 아이가 자기 동생을 죽이고서 우리 곁을 떠나버린 일이었어요. 차라리 의미없던 과거의 삶을 영원히 연명하는게 낫지 않았을까 라는 후회가 들 정도였었죠. 그 날만큼은 하느님께서도 직접 죄인인 저를 위로해주시며 또다른 아이를 가지게 해 주셨어요. 앞으로 또 무슨 일이 생길지 제 아이가 어떤 일을 겪게 될지 솔직히 두려워요. 하지만 후회하지는 않아요. 저희는 어떻게든 살아갈테고 하느님이 저희를 버리시진 않을테니까.

 

 

2) 욥의 솔직한 심경

 

나는 하느님을 경배하네. 그분은 나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 가신 후에 2배로 되돌려주셨지. 정말 은혜로우신 분이야. 내 딸 사라, 요안나, 마리아를 압사시키시고서 훨씬 더 예쁜 여미마, 긋시아, 게렌합북으로 보상해주셨지. 나는 많은 재산과 예쁜 딸들이 생겨서 너무 기쁘다네. 젖니가 빠진 걸 재미있어하며 혀를 내밀면서 자기 아랫니가 빨갛게 됐다고 웃던 내 막내딸 마리아의 마지막 모습이 갑자기 생각나는군. 그 아이는 무너진 나무 기둥에 깔려서 컥컥 소리를 내고 울면서 내가 구해주길 기다린것 같았어. 나는 최대한 빨리 달려갔지만 도착했을 땐 이미 늦었었지. 마리아는 눈물을 너무 많이 흘렸던지 눈물흘린 자국만 보이고 더이상 눈물을 흘리지는 못하더군. 나를 보면서 뭐라고 말하는 것 같았는데 그 아이 목이 짓눌렸는지 그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어. 입술 모양을 봐서는 아마도 "아빠 살려주세요" 였던것 같아. 너무 늦게 도착한 나와 내 하인은 힘을 합쳐서 죽기 살기로 기둥을 들어올렸어. 그 때 다친 내 어깨 인대는 아직도 회복되질 않고 있지. 그리고 의사에게 가려고 마리아를 들쳐 업었어. 하지만 그 아이는 입으로 피를 토해내더니 숨을 쉬지 않았어. 차라리 내가 죽는게 나을거라고 느꼈지. 나는 마리아가 흘린 피가 잔뜩 묻은 내 옷을 찢으며 재를 덮어쓰고 짐승처럼 비명을 질렀어. 사라는 시신 자체를 찾지 못했고 요안나는 머리가 함몰된 걸 보니 다행히 즉사해서 고통 없이 간 것 같더군.  하지만 하느님은 자비로우신 분이야. 나는 여미마, 긋시아, 게렌합북을 받았잖아. 하하하하하.

 

내가 이렇게 하느님이 아이들을 새로 주신 것에 대해 기뻐하고 주기적으로 감사를 표해야 먼저 간 내 딸 사라, 요안나, 마리아를 하느님이 더 이상 괴롭히지 않고 자애롭게 보살펴주실거야.그리고 나는 아이들에게 하느님을 반드시 충실하게 경배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어. 너희의 신앙심이 하느님의 의심을 살 정도로 애매하다면 너희는 언제든지 너희의 죽은 언니, 오빠, 형, 누나들 같이 하느님이 하시는 시험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이지.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재빨리 모래 바닥 위에 이런 글자들을 급하게 휘갈겨 쓴 후에 곧바로 문질러서 지워버린다)

"사실은 이런 방법을 써서 그 미친 신으로부터 도망치라고 가르치지."

 

 

3. 최고의 꿀잼 유닛, 다윗

 

1) 사울의 즉위와 몰락

 

모세부터 여호수아 시대까지 한바탕 피칠갑을 즐기던 야후는 드디어 히브리인의 정착을 허락했다. 그렇게 이스라엘의 사사 시대가 시작되었다. 주변 민족들은 끊임없이 소소한 병력으로 이스라엘을 괴롭혔고 그때마다 야후는 영웅 유닛인 드보라, 삼손, 입다 같은 사사를 생산했고 적을 방어하면서 재미를 느껴왔다.

 

그러던 어느날 인간들이 사사 사무엘을 통해서 야후에게 왕을 요구했다. 야후는 처음에 시큰둥했다. 자신과 인간들 사이에 왕이 끼어들면 어떻게 컨트롤할까, 그리고 왕노릇 할만한 인간이 있을까라는 두가지 문제가 걸렸기 때문이었다. 인간들의 요구가 거세지자 그는 당시 이스라엘 사람 중에서 그나마 쓸만했던 사울을 왕으로 지명했다. 사울이 딱히 마음에 들지는 않았기에 그는 제대로 된 왕을 한번 만들어보기로 결정했다.

 

사울이 즉위한지 9년 쯤 지났을 무렵 야후는 드디어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다윗을 이새의 아내에게 잉태시킨다. 사울은 다윗이 왕위를 받을때까지만 왕위를 지키고 있으면 될 뿐이었다. 다만 다윗이 왕위를 이어받을 명분이 필요했다. 그래서 야후는 사울이 지키기 어려운 여러가지 명령을 내렸다. 사울이 이를 지키지 못하자 사무엘을 시켜서 사울의 폐위를 선언하게 했다. 하지만 사울은 신앙심을 잃지 않고 회개하여 끊임없이 용서를 빌었다. 하지만 다윗에게 왕위를 이을 명분을 주기 위해서 야후는 그의 회개와 참회를 끝까지 외면했다. 사울이 딱히 더이상 잘못을 저지르지 않자 모세 시절에 파라오에게 그랬듯 악령을 보내서 사울의 마음을 완악하게 했다. 악령에 시달린 사울은 각종 악행을 저질렀다. 사울이 저지른 악행이 쌓일수록  다윗이 왕위를 이을 명분은 더 높아졌다. 그러나 선량한 다윗은 사울을 차마 죽일 수 없었다. 그러자 야후는 블레셋군을 보내서 사울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다윗이 왕위 계승을 거부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다윗이 존경했던, 왕위 계승권 1순위인 고결한 요나단 왕자도 함께 죽게 했다.

 

 

2) 베레스 웃사

 

사울이 죽자 다윗은 곧 외적을 물리치고 소소한 내전을 거쳐서 사울 가문으로부터 왕위를 넘겨받았다. 한숨 돌린 다윗은 바알라 사람 아비나답의 집에서 20년간 보관 중이던 야후의 거처, 성궤를 자신의 성으로 모시기로 했다. 성궤를 우마차로 나르다가 덜컹임 때문에 성궤가 바닥에 떨어질 지경이 되자 아바나답의 아들 웃사는 손으로 성궤의 낙하를 막았다. 야후는 웃사의 더러운 손이 자신의 집에 닿는 것에 짜증이 나서 웃사를 쳤다. 웃사는 죽었고 다윗은 화를 냈다. 역겨운 존재인 웃사가 감히 성궤를 만져서 죽음을 자초한 것에 대한 화인지 아니면 겨우 그런 일로 사람을 죽인 야후에 대한 분노인지는 분명치 않다. 다윗은 그 자리를 '베레스 웃사'라고 이름을 지어서 웃사의 죽음을 사람들에게 기억하게 했다. '베레스 웃사'라는 명칭에서 조리돌림의 대상이 웃사인지 신인지는 다윗 자신과 야후만이 알 뿐이었다. 그러고는 성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지 않기로 하고 오벳에돔이라는 사람에게 맡겼다. 야후는 '어쭈, 이자식 봐라? 지금 나 한 방 먹은 건가?'라고 생각했다. 역시 자신의 마스터피스답게 다윗은 예측하기 어려운 재미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야후는 자신에게 큰 즐거움을 선사할 다윗을 가까이에 두고 싶었다. 다윗을 다시 유인하기 위해서 야후는 성궤를 보관하던 오벳에돔에게 축복을 내렸다. 성궤의 축복에 대한 소식을 들은 다윗은 마음을 고쳐 3개월 만에 성궤를 자신의 성으로 옮기기로 결심한다. 이번에는 수레를 쓰지 않고 사람들이 직접 어깨에 메고 날라서 화를 피했다. 성궤가 자신의 성 안에 들어오자 다윗은 저질 댄스를 추며 기뻐했다. 웃사의 죽음을 이유로 성궤를 유기하듯 남에게 위탁했던 점에 대한 신 앞에서의 참회라는 의미가 섞여 있었던 일종의 똥꼬쇼였던 셈이었다. 다윗의 아내 미갈은 남편의 속도 모르고 그 모습을 우습게 여겼다. 이는 다윗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고 미갈은 다시는 다윗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3) 밧세바

 

미갈은 졸지에 생과부가 되었지만 다윗은 아쉬울 게 없었다. 그에게는 수많은 사랑하는 여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떤 여자든 그의 마음에 든다면 그는 거리낌없이 취했다. 간음하지 말라는 율법을 어기지 않기 위해서 왕비나 후궁의 숫자를 늘리면 될 뿐이었다. 다윗은 자신의 부하 장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에게 반했고 그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우리아는 전쟁중인 적의 손을 빌려 제거되었다. 야후는 그의 만행에 경악했지만 어렵게 얻은 꿀잼 유닛을 포기할 수 없었다. 죄에 대한 벌로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첫번째 아기를 쳤다. 아기는 며칠 앓다가 죽었다. 다윗은 아기가 앓고 있을 때는 식음을 전폐하고 신앞에서 참회했지만 아기가 죽자 아무렇지 않게 일상으로 복귀했다. 그러면서 의문을 표하는 신하들에게 기왕 죽었고 운다고 살아 돌아오냐는 식으로 대답했다. 야후는 괜히 애먼 아기만 죽인게 아닐까 찜찜해졌다. 언제나 큰 재미를 가져다주는 다윗은 용서하면서 또다른 흥미로운 이벤트를 징벌처럼 마련했다. 그 내용은 예언자 나단을 통해서 전달되었던 것들이었다.

"영영 네 집안에서 칼부림이 떠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너의 집안에 재앙을 일으키고, 네가 보는 앞에서 내가 너의 아내들도 빼앗아 너와 가까운 사람에게 주어서, 그가 대낮에 너의 아내들을 욕보이게 하겠다." 

 

우선은 다윗의 아들들인 암논, 압살롬의 골육상쟁이 벌어졌다. 그리고 압살롬의 반란과 그의 흉악한 만행으로 야후의 모든 저주는 실현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했지만 야후로서는 상당히 흥미로웠던 이벤트였다. 압살롬 역시 아버지를 닮아 야후의 총애를 받기에 충분한 재능이 있었지만 판이 너무 커져 버려서 두 사람을 모두 살릴 수는 없었고 야후는 둘 중 다윗을 선택해야 했다. 이후에도 저주는 끝나지 않아서 아도니야, 솔로몬 사이의 골육상쟁도 있었으나 압살롬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시시하게 끝나버렸다. 야곱 이상으로 최고의 재미를 선물했던 피조물, 노쇠해진 다윗에게 야후는 젊고 아름다운 수넴 여인 아비삭을 마지막 선물로 보내줬고 그녀는 마지막 순간까지 다윗을 정성스럽게 모셨다.

 

 

4. 다윗 이후의 이야기

 

1) 교활한 솔로몬

 

야후는 자신의 최애작이었던 다윗의 왕위를 승계한 젊은 솔로몬을 흐뭇하게 지켜봤다. 솔로몬은 때로는 지혜롭게 때로는 무자비하게 자신의 권력을 구축하고 외교 관계를 탄탄히 만들어가고 있었다. 야후는 자신의 또다른 최애가 될 솔로몬을 만나기 위해 그의 꿈속을 방문했다. 솔로몬은 야후에게 선과 악을 구별할 능력을 달라고 간청했다. 야후는 약간의 찜찜함과 큰 호기심을 느끼고 이렇게 생각했다.

'오호!! 선과 악을 구별하겠다고? 역시 하와의 후손 답군. 혹시 나까지 판단하려고 들지 않을까? 그런다면 정말 재밌어 지겠는걸...'

 

하지만 야후는 이런 속내를 숨기고 지혜로움을 선택한 솔로몬을 칭찬했다. 솔로몬은 야후의 축복을 받아들이고 처음으로 그 능력을 발휘하다가 혼란에 빠졌다.

"뭐야? 주님이 선하지 않다고??? 혹시 그 꿈은 계시가 아니라 개꿈이었던 걸까?"

 

솔로몬의 현명함은 곧 그것이 개꿈이 아니었음을 알아차리게 했다. 그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내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 웃사라는 사람이 주님께 맞아죽은 적이 있었다고 했고 아버지께서는 베레스 웃사라는 기록을 남기셨지. 좀 이상한 사건이지만 굳이 더 따지고 싶진 않아. 그리고 나 대신 주님의 손에 죽어 준 불쌍한 내 형, 그 아기에게 무슨 죄가 있었던걸까? 그리고 인구조사를 하고 나서 전염병으로 죽어버린 7만 명이나 되는 나의 백성들은?"

솔로몬은 자신의 후손들을 속내를 알 수 없고 음침한 구석이 있는 야후를 떠나 더 선한 신의 품으로 인도하는 걸 자신의 사명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하지만 옹졸한 야후의 심기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은 자신 뿐만 아니라 민족 자체의 자멸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솔로몬은 자신의 거짓된 충성심을 야후에게 충분히 보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성전을 지어서 야후의 성궤를 모셨다. 그리고 잠언과 전도서를 썼다. 당시에 찬양을 극도로 재미있어 했던 야후조차 닭살이 돋는다고 손사래를 치게 할 법한 아가서까지 써냈다. 이 정도까지 했으니 솔로몬의 신앙심을 의심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교활한 솔로몬의 지혜는 철두철미했다.

 

노년이 되자 솔로몬은 자신의 사명을 스리슬쩍 시작했다. 다양한 민족들로 구성된 자신의 700명의 왕비와 300명의 후궁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락한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에 다양한 종교들이 유입되게 했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야후에 대한 신앙은 점차 옅어졌다. 그녀들이 도입한 신들 중에는 가짜 신이 많겠지만 그 중에 몇몇은 실제 신성 있는 신이 있을 거라 판단했다. 그리고 다양한 신들의 보호를 받는다면 야후의 손길로부터 무사히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다. 하지만 솔로몬은 한 가지 간과한 게 있었다. 모세 시대에 이집트의 수많은 신들이 야후 앞에서는 어떠한 힘도 쓰지 못했다는 점을. 그리고 실제로 야후만이 유일한 신이고 다른 모든 신들은 가짜 우상에 불과했다는 점을 솔로몬은 몰랐었다. 다만 솔로몬은 특유의 지혜를 발휘해서 야후가 화를 내기에 애매한 지점까지만 선을 넘지 않고 절묘한 줄타기를 성공적으로 이끌어왔다. 그러나 솔로몬의 후손들은 지혜의 상징이라 할만한 그와 같은 운용 능력이 없었다. 솔로몬이 죽자 이스라엘은 야후의 진노를 받고 남북으로 분열되었다.

 

 

2) 거대 제국들의 침략

 

세월이 흐르고 인류의 문명이 점차 발달하자 야후에게는 재미있는 구경거리들이 크게 늘어났다. 세계 각국에서는 중앙 집중 권력체제를 앞세운 거대 제국들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가나안 촌동네에 이런저런 좁쌀영감 같은 간섭을 하는 것보다는 거대 제국을 이끌어가는 인간을 관찰하는데서 야후는 더 큰 재미를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아합과 이세벨 같은 흥미로운 인물이 나타나거나 엘리야와 엘리사 같은 특별한 선지자의 요청이 없다면 이스라엘에는 별다른 간섭을 하지 않는 시기를 보내게 된다. 직접 돌봐주던 야후의 손길이 끊기자 자연스럽게 유대인들의 신앙도 점차 약화되어갔다. 아모스 같은 영성 높은 예언자들만이 군중을 상대로 신실한 신앙의 중요성을 외칠 뿐이었다.

 

한동안 세계 각국 인간들의 역사를 흥미롭게 구경하던 야후에게 어느날 긴급한 기도가 들어왔다. 거의 잊고 지내고 있었던 유다 왕국에서 히스기야 왕과 예언자 이사야가 제발 살려달라고 간청한 것이었다.

 

히스기야왕은 신흥 강국 앗시리아에게 조공을 바치며 최대한 비위를 맞추고 있었으나 앗시리아는 유다 왕국을 점령하고자 했던 것이었다. 야후는 이스라엘 민족을 책임지겠다고 약속을 해놓고는 사태가 그렇게 커질 때까지 유대인들을 방치했던게 민망해졌다. 야후가 관심있게 지켜본 앗시리아의 전력을 감안했을 때 유다 왕국이 그들과 맞붙는 것은 자살이나 다름 없었다. 야후는 충성스런 종 히스기야를 위해 천사를 보내서 앗시리아군을 치게 했고 18만 5천명의 앗시리아 군인들이 전사했다. 궤멸적 타격을 입은 앗시리아는 철군했고 그렇게 한동안 유다 왕국은 안정을 찾게 되었다. 야후는 일단 급한 불은 껐지만 야후는 이런 직접적인 대규모 개입이 옳은 것이었는지에 대한 회의감을 느꼈다. 자신이 일으키는 기적은 국제 정세에 주요 변수가 되어 제국들의 행보를 관전하는 재미를 크게 떨어뜨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앞으로는 더 이상 그런 거대한 초자연적 현상을 벌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과거에 요나를 통해 재미삼아 니느웨를 협박했던 것 같은 사건을 종종 일으키다보면 또다시 그 옛날의 바벨탑 같은 게 다시 만들어질 수도 있을 일이었다. 야후는 이후 자중하게 되었다.

 

한동안 불안한 평화가 이어졌다. 히스기야는 죽고 그의 늦둥이 아들 므낫세가 왕위를 이어받았다. 야후는 히스기야와 달리 신앙심을 찾을 수 없는 므낫세왕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촌동네 이스라엘은 이미 그의 큰 관심사가 아니었다. 야후는 므낫세와 별다른 소통 없이 그의 치세를 방치했다. 므낫세가 천수를 다하고 죽자 손자 요시야가 왕위를 이어받았다. 요시야는 할아버지 므낫세와는 달리 매우 독실한 신앙인이었다. 그는 므낫세가 망쳐버린 성전을 정화하고 백성들을 야후 신앙으로 다시 이끄는 개혁을 단행했다. 하지만 그런 움직임은 고루하고 따분해 보였을 뿐 야후의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야후는 빠르게 돌아가는 당시의 국제 정세를 탐닉할 뿐이었다. 마침 신흥 강국 바빌론에 의해 앗시리아가 위기에 처했고 앗시리아는 이집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집트 파라오 네카우 2세는 군사를 이끌고 앗시리아를 도우러 출병했다. 야후는 3개의 제국이 맞붙는 빅매치를 볼 생각에 손에 땀을 쥐고 있었다. 야후가 네카우 2세의 병력이 가나안 땅을 지나고 있는 모습을 주시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가 귀여워하는 얼굴이 나타났다. 난데없이 사랑하는 요시야 왕이 난입한 것이었다. 야후는 당황해서 "어? 네가 여기서 왜나와? 얼른 돌아가라. 그러다가 다친다."라고 말하고자 했으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랜 침묵 끝에 수 십년만에 처음으로 내리는 계시였는데 그 내용이 겨우 '도망가라'는 의미라서 말을 꺼내기가 쑥스러웠다. 그래서 요시야에게 직접 전하지 못하고 아쉬운대로 네카우 2세에게 대신 계시를 내렸다.

"이집트군을 그냥 지나가게 내버려두라고, 내가 시켰다고 요시야에게 전해다오. 그는 정말 좋은 왕이니까 안다쳤으면 좋겠다."

네카우 2세는 야후가 시킨대로 했지만 요시야는 이를 자신의 신앙에 대한 조롱으로 받아들였다. 젊고 용감한 요시야는 더욱 거세게 맞서 싸우다가 므깃도에서 전사했다. 향년 39세. 야후는 비록 따분했지만 누구보다 깊은 신앙심을 보였던 요시야의 요절을 애석하게 여겼다. 그리고 앞으로는 체면을 따지지 않고 반드시 믿을만한 사람에게 명확하게 계시를 내리겠다고 결심했다.

 

이후에도 국제 정치를 분석하는 야후의 취미는 지속되었고 그는 바빌론이 패권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야후는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자신의 국제 분석을 알렸다. 예레미야는 유다 왕국의 친 이집트 정책을 폐기하고 바빌론에게 저항하지 말 것을 꾸준히 설파했다. 그러나 그의 예언은 무시되었다. 요시야 왕이 죽은 지 20여 년이 지났을 당시, 예레미야는 유다 왕국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에게 바빌론에 항복하라는 야후의 계시를 간곡히 전했다. 하지만 당시 유다 왕국 신하들 사이에는 친 이집트파가 득세하고 있었고, 시드기야가 그들을 설득하여 바빌론에 항복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러한 유다 왕국의 친 이집트적 행보는 바빌론 느부카드네자르 2세의 침공 명분이 되었다. 결국 시드기야는 느부카드네자르 2세를 상대로 무의미한 항전을 하다가 끔찍한 최후를 맞이했다. 야후는 생각보다 잔인했던 처형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결과적으로는 귀찮은 혹이 하나 떨어진 셈이었다.

 

 

5. 파한의 강림과 부활

 

1) 야후의 게임 참가

 

야후는 점차 이스라엘에 대한 관심이 멀어졌다. 그래도 유대인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을 수는 없어서 그들과 다소 거리를 두면서 예언자들을 통해서만 간간히 계시를 내리며 그들의 신앙의 명백이 끊기지 않을 정도로만 관리했다. 다니엘과 말라기를 마지막으로 야후는 세상을 한동안 방치했다. 제국들의 운명을 관전하는 것도 계속 보다 보니까 그게 그놈 같아서 시큰둥해졌다. 일종의 권태기에 들어섰던 셈이다.

 

그러다가 야후는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보는 것이 하는 것보다 재미있을 수는 없다는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야후는 자신이 만든 게임 속 세상을 직접 체험해보기로 결심했다. 야후는 아브라함에게 소돔의 멸망을 예고했을 때처럼 완성체로서 하늘에서 그대로 내려오는간편한 강림 말고, 기왕이면 인간의 탄생부터 온전하게 경험해보고 싶었다. 야후는 천사를 시켜 신실한 처녀 마리아와 약혼자 요셉에게 수태 고지를 하고는 그녀의 몸에 파한으로 잉태되어 아기의 형상으로 세상에 강림했다. 성모가 된 마리아는 야후의 안목대로 정말로 훌륭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었고 파한의 인격 형성에 큰 기여를 했다.

 

인간의 몸에 스스로 갇힌 파한은 어린시절 두뇌 발달이 아직 덜 형성되어서 온전한 사고에는 제한이 있었다. 어느날 어린 파한은 장난 삼아 물을 펄펄 끓여서 집 근처에서 발견한 개미집 입구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그것은 개미에게는 노아의 홍수이자 소돔과 고모라의 불기둥을 섞어 놓았다고 볼만한 끔찍한 재앙이었다. 자비로운 성품인 마리아는 그 장면을 보고 기겁을 했다. 야후의 아들답게 역시 아버지를 똑같이 닮아서 나르시시스트나 싸패가 아닐까라는 의심이 들었다. 어린 시절에 일찌감치 사회화를 하지 않으면 인간의 육체라는 제한에 갇혀 사는 아들이 장차 힘든 삶을 살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마리아는 파한을 집으로 데려와서 매로 훈육을 했다. 똑똑한 아이였던 파한은 엉엉 울면서 깨달았다. 불필요하게 잔인한 일을 재미삼아 벌이는 것은 나쁜 짓이구나. 그리고 육체를 가진 존재는 이런 하찮은 회초리만으로도 울음을 터뜨릴만한 아픔을 느끼는구나. 이런 식으로 인간을 몸소 체험하면서 파한은 인간의 고통에 대해 전과 다른 공감과 연민을 알게 되었다.

 

파한은 자라면서 자신의 신성을 점차 깨닫고 신으로 지냈던 과거에 대한 기억을 되찾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어린 파한은 친구들과 돌을 던지면서 놀다가 옆구리에 돌을 맞았다. 옆구리에는 시커멓게 멍이 들었고 파한은 너무 아파서 울음이 터뜨렸다. 마리아는 파한을 달래주면서 정성스럽게 사랑스런 아들의 상처를 치료해줬다. 성모의 품은 포근하고 따뜻했고 파한은 어머니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체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린 파한은 육체적 고통을 뼛속까지 느끼고 결심했다. "돌로 쳐죽이라는 내 율법은 인간에게 너무 가혹한 것이었구나. 나는 비현실적인 율법들을 완화하고 진정한 율법으로 완성해야겠다."

그러다가 자신의 소중한 곳을 보고서 이런 생각을 했다.

"아이고 아브라함이 내 말 잘 듣는지 확인하려고 그냥 한번 시켜본건데 얘네들은 2천년 가까이 아직도 이걸 하고 있었구나. 나중에 율법을 새로 완성해서 선포할 때 이런 거 안해도 된다고 알려줘야겠다."

 

 

2) 강림한 김에 메시아까지

 

파한이 어느 정도 자라자 요셉은 파한에게 먹고 사는 방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파한이 목수일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었다. 요셉은 언제든 살던 곳을 떠나도 다른 고장에서 쉽게 자리를 잡을 수 있는 뛰어난 목수였다. 요셉은 때로는 엄격하게 그러면서 자상하게 파한에게 자신의 기술을 전수했다. 파한은 요셉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의 사랑을 체감하게 된다. 그러다가 옛 기억이 떠올랐다. 야후는 자신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이유로 자신에게 평생 충성을 바쳤던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를 불로 삼켜버린 적이 있었다. 인간의 몸으로 불이 얼마나 뜨거운지를 이미 체감했던 파한은 과거의 기억에 괴로워했다. 자신의 신경질 때문에 아들을 둘이나 잃은 아론이 얼마나 극심한 마음의 고통을 느꼈을지 공감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에 대한 원망을 일절 하지 않았던 아론의 신앙심에 그는 놀라움을 넘어 경외감까지 느꼈다. 이렇게 파한의 마음에는 점차 인간에 대한 사랑과 감탄 그리고 연민이 쌓여갔다. 또한 욥이 돌려받지 못했던 그의 죽어버린 10명의 자녀들을 얼마나 그리워하고 가슴앓이를 했을지에 대해서도 상상해 봤다. 재미삼아 만들어 본 인간은 더이상 그에게 유닛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다. 인간은 자신처럼 웃고 울고 배우고 사랑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런 인간에게 자신은 어떤 존재였단 말인가? 그런 생각 끝에 파한은 이런 결심을 하게 된다.

"내가 과거에 예언자와 선지자들에게 종종 희망을 잃지 말라면서 계시를 주곤 했던 그 '메시아'라는 존재, 기왕 강림한 김에 내가 직접 그 역할을 제대로 해봐야겠다. 누굴 보내도 내가 직접 하는 것만큼 잘 할 수는 없겠지."

 

조금 더 나이가 들자 다른 유대인 소년들과 마찬가지로 파한은 토라를 배우게 되었다. 거기에는 야후 자신이 수천 년 전부터 모세 시대까지 저질러왔던 수많은 학살과 가혹한 처분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파한은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자기가 아무리 가혹하게 굴어도 인간은 아무런 대항도 하지 못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인간들은 잔인한 야후의 행적을 기록으로라도 남겨서 잊지 않고자 했었다. 겉으로는 야후를 더욱 진심으로 섬기자는 뜻을 나타냈지만 파한은 야후의 가혹한 처분에 대한 인간들의 원망과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인간들은 그것을 단지 한 번 읽는 정도로 끝내지 않고 외우고 필사하기까지 했다. 파한은 천 년 전에 다윗이 남겼던 '베레스 웃사'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성경은 야후의 손에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 각각의 '베레스 웃사'들의 집약체였다. 그것이 다윗 혼자만의 것으로 보였을때는 '이 자식 봐라? 재밌네.'라고 넘길 수 있었지만 그것들이 모여 방대한 경전의 형태를 갖추자 파한은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기가 힘들었다. 철없던 시절 저지른 잘못된 행동이 유튜브에 박제되어 10억 뷰를 찍은 것을 뒤늦게 발견한 상황과 같았다. 그것은 참기 힘든 부끄러움이었지만 아픔을 통해 파한의 신격을 크게 성장시켰다.

 

목수로서 평범한 인생을 보내고 있던 파한은 서른살이 되자 계획했던 대로 세례 요한을 만나서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받자 비둘기가 날아들었고 하늘에서 파한을 자신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야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동안 봉인했던 신성을 해제했다. 파한은 방금 되찾은 신성을 시험해보기 위해 광야로 나섰다. 그리고 마귀를 소환하여 자신에게 몇 가지 테스트를 해보게 했다. 파한은 어렵지 않게 마귀의 테스트를 통과했다. 이제 사람들에게 자신의 가르침을 퍼뜨릴 준비가 끝난 것이었다. 

 

드물게 사탄이 자신의 모습을 명확하게 드러낸 기회를 놓치지 말고 사탄을 따라가서 인터뷰해보자. 같은 피조물 처지이면서도 도대체 왜 인간을 그토록 괴롭히는지에 대해서.

"욥기 1장하고 2장에 충분히 설명되어 있었는데 아직 안보셨습니까? 저는 틀림없이 위에서 시키는 대로만 할 뿐입니다. 저는 인간처럼 주님으로부터 자유의지를 받지 못했다고요. 더 할 말 없어요. 가세요. 씨발, 그만 좀 하고 가라고!!! 주님께서 허락하시질 않으니 성질대로 확 때릴수도 없고, 미치겠네..."

 

 

3) 파한의 사역

 

파한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면 좋을까 고민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해봐도 기존의 율법만 잘 지키면 딱히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실상을 보니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율법은 이스라엘 민족의 단결과 생존을 위해서 까다롭게 만들어진 면이 있었다. 율법은 수조 속 물고기들을 더 많이 살리기 위해 투입한 상어같은 역할을 해야 했다. 그런데 정작 파한이 경험해보니 율법이 사람들을 살리기보다는 오히려 고통스럽게 물어뜯는 게 현실이었고 파한은 이에 진저리를 쳤다. 그래서 기존의 율법을 간소화하여 사람들의 부담을 덜어주면서도 영적으로 더욱 충만한 세상을 만드는 방법을 고민했다. 결론은 진실한 마음과 사랑이었다.

 

파한은 사람들을 상대로 산 위에서 그리고 산 아래서 설교를 했다. 크게 간소화된 기존 율법을 중심으로 사랑과 진정정을 강조한 새로운 가르침이었다. 파한은 사랑의 범위를 크게 늘려 심지어 원수까지 사랑할 것을 가르쳤다. 그리고 오른 뺨을 맞으면 왼 뺨까지 내밀라고 했다. 그리고 사악한 마음은 실행되지 않고 생각만 하더라도 죄악이라 하면서 정결한 마음을 가질 것을 요구했다. 그러다보니 진실한 마음보다는 까다로운 형식을 앞세우며 그것으로 자신들의 권위를 높이는 율법학자들과의 충돌은 필연적인 결과였다.

 

파한은 안식일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내세우는 자들에게는 생명 우선의 원칙으로 반박했고 까다로운 식생활 율법을 강요하는 자들에게는 신이 만든 것 중에 부정한 것은 없다고 받아쳤다. 하지만 말씀만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고 가르침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파한은 기적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로 했다. 파한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기 시작했다. 질병 뿐만아니라 귀신과 마귀가 들린 사람들도 만났다. 귀신과 마귀는 파한의 정체를 알아보고 그에게 대적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마치 왕자를 만난 충직한 군인처럼 순순히 그의 명령에 따랐다. 파한이 명령하면 마귀와 귀신은 자신이 붙든 사람을 괴롭히는 일을 즉시 중단했다.

 

파한은 까다로운 율법을 내세우며 사람들을 괴롭히는 율법주의자들을 상대로 자신이 완성한 새로운 율법을 따를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들은 기득권을 결코 놓으려 들지 않았다. 그들은 파한에게 항상 시비를 걸곤 했다. 한번은 파한이 "당신은 마귀의 왕인 바알세불의 힘으로 마귀를 내쫒고 있다던데?"라는 질문을 받았다. 실제로 바알세불은 야후의 현신인 파한의 명령에 절대 복종했다. 파한은 마음 속으로 "저 자식이 어떻게 알았지?"라고 생각했지만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다. "집안 사람끼리 그렇게 분열하여 싸우면 망할텐데 그런게 가능한 방법이겠냐?" 대답을 들은 율법학자가 "그거 짜고 치는거 잖아? 누굴 바보로 알아?"라고 반박하려고 하자 파한은 신성을 발휘해서 질문자가 더이상 말하지 못하게 입이 열리지 않게 했다. 파한의 제자들은 이것을 파한이 논쟁에서 승리한 모습으로 기록했다.

 

파한은 자기의 가르침이 단지 '말씀'으로만 남으면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전해지지 않을 것이라는 염려를 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자신의 신성을 강조하여 말씀에 권위를 부여했다. 하지만 그런 전도 방식은 가짜 선지자를 조심하라는 예레이먀, 에스겔, 미가 같은 과거 선지자들의 경고와 충돌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파한에게 가짜 메시아가 아님을 증명하라고 요구하곤 했다. 그러다보니 점차 가르침보다는 자신의 신성을 강조하고 기적을 보이는 활동에 치중하게 되는 문제가 생겼다. 그런 활동을 이어갈수록 파한의 추종자는 늘어났지만 반작용으로 그에게 반대하는 율법학자들의 의심과 증오심도 점차 커져갔다. 그러다가 결국 그들은 조그만 구실이라도 생기면 파안을 제거하겠다는 결심에 이르게 된다.

 

 

4) 원수를 사랑하라

 

파한은 복음을 전파하다가 한가지 한계점을 느꼈다. 자신의 가르침인 원수까지도 사랑함을 실천하는 것이 자칫 사람들에게 잘못된 윤리관을 심어줄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는 항상 자신을 찾는 사람들의 병을 고치고 가난한 사람을 도왔기 때문에 율법학자들 말고는 서로가 적대한다고 볼만한 자가 없었다. 율법학자들의 교리적 도전에 대해서 사랑으로 반응을 하는 것은 자칫 그의 가르침이 율법학자의 논리에 논파 당한 것이라는 오해를 살 수 있었다. 그래서 파한은 자신의 뜻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포용하기보다는 성전 정화처럼 폭력으로 대하거나 바리새파, 사두개파 사람들처럼 악담과 저주로 대응하곤 했다. 그럴수록 원수를 사랑하라는 자신의 가르침은 점점 아무도 지키지 못할, 모순되고 공허한 선언처럼 되어버렸다.

 

고민 끝에 파한은 결국 어려운 해결책을 찾았다. 오른 뺨을 맞으면 왼 뺨도 내밀듯 자신을 제거하려는 율법학자들의 폭력에 맞서지 않고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이 그 방법이었다. 그렇게 죽음을 맞이하면서 자신을 비웃는 사람들과 인류의 죄를 대속하고 사람들을 용서함으로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자신의 가르침을 극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그 계획이었다.

 

자신은 메시아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에 그 계획은 예언서에 나온 방법대로 실행되었어야 했다. 나무에 매달리는 것, 즉 당시의 방법으로는 십자가형이 적절한 방법으로 보였다. 그는 이후 제자들에게 자신이 십자가를 지게 될 것임을 종종 말하곤 했다. 바리새파와 율법학자들이 그에게 돌을 던질 때는 유유히 빠져나갔지만 자신을 십자가에 매달려고 드는 율법학자 일당에게는 제자들의 거센 저항을 만류하면서 순순히 체포당해 줬다.  천사를 불러서 그들을 모두 쉽게 물리칠 수 있음에도 그렇게 순순히 그들의 폭력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파한은 가룟 유다가 돈 몇푼에 자신을 파는 것을 알면서도 용인했고 그를 미워하지 않으면서 친구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몸으로 그것을 감당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일지 알았기 때문에 체포되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길 수 없을까라고 기도하며 번민에 빠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계획한대로의 길을 가기로 했다.

 

파한은 자신을 체포한 율법학자들과 로마 병사들이 자신을 조롱하고 학대하는 것에도 전혀 저항하지 않았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박혀 매달리면서, 자신을 해치는 자들을 위해 "저들을 용서하소서"라고 말하며 그들을 용서했다. 그리고 그들의 죄를 대속함으로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자신의 가르침을 최종적으로 실천했다.

 

 

5) 파한의 부활

 

십자가 앞에는 성모 마리아가 눈물을 흘리면서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아들의 죽음을 현실로 감내하고 있었다. 파한은 안타깝게 자신을 바라보는 제자들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이 분이 너희의 어머니시다."

 

파한은 언젠가 성모가 형제들을 데리고 설교 중인 자신을 만나러 먼 길을 왔던 날이 기억났다. 그때 어머니를 따뜻하게 맞이해주지 않고 외면하면서 다른 사람과 똑같이 취급했던 게 후회되었다. 눈물로 범벅된 어머니의 얼굴이 부쩍 늙고 피로해 보였다. 파한은 못박힌 자신의 손과 발에 난 구멍만큼이나 마음속에 생긴 빈 곳이 아팠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않게 되뇌었다. 

'천국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나의 어머니.'

 

파한이 십자가에 매달린 직후부터 자신의 계획대로 인류의 죄를 대속하고 있었다. 파한이 목이 마르다고 말하자 그를 지켜보던 사람이 해면에 신 포도주를 적셔서 우슬초 가지 끝에 매달아서 파한의 입에 가져다 댔다. 길게 이어졌던 대속을 모두 마친 파한은 해면이 머금은 포도주를 한모금 삼키고 "다 이루었다."라고 말한 후 숨을 거두었다. 전 인류의 농축된 죄성으로 인해 그가 사망에 이른 것이었다.

 

파한의 시신은 요셉이라는 부자가 마련해 준 돌무덤에 안장되었다. 파한은 자신이 짊어졌던 죄악들을 모두 극복해내고 3일 후에 부활했다. 파한은 천사를 시켜 무덤의 돌문을 열게 하고는 제자들을 만나러 길을 나섰다. 부활 후 승천하기 전 40일 동안 파한은 여러 제자들을 만났고 그들에게 자신의 가르침을 세계 각지로 전파하라는 사명을 전하고 그들에게 기적을 일으키는 힘까지 나누어 줬지만  끝내 성모를 찾지는 않았다. 다시 한번 어머니와 포옹하고 어머니가 차려 준 식사를 하고 싶었지만 사랑하는 노모가 감당해야 할 눈물겨운 이별은 한 번으로 충분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부활을 보고 더 이상 어머니가 자신을 마리아의 아들 파한으로 여기지 않고 야후의 아들로 신성시하여 자기 앞에 무릎을 꿇게 되는 상황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파한이 승천한 후 마리아를 어머니처럼 모시고 있던 파한의 제자들은 그 소식을 성모에게 전했다. 성모는 아들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조용히 미소지었다.

 

파한의 몸을 통해서 인간의 삶과 고통과 사랑을 깊이 체감했고 대속을 통해서 모든 인간들의 죄악을 완전히 체득한 야후는 전보다 인간을 더욱 잘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신으로 거듭났다.

 

 

6. 마무리

 

1) 야후의 근황 및 인간들을 향한 인사

 

성도 여러분. 여기까지 잘 따라와주셨습니다. 오늘 새벽에 주님이신 야후께서 저에게 계시를 내리셨습니다. 이어지는 글은 주님께서 여러분들께 전하시는 말씀을 제가 기억나는 대로 옮겨 적은 것입니다.

 

파한의 승천 이후 2천년 정도 기적도 없었고 내가 너희에게 계시도 거의 주지 않고 있었지. 굳이 찾아보자면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내 애제자 사울, 그리고 콘스탄티누스랑 잔다르크 정도가 있겠구나. 아마 너희는 내가 너희들에 대한 관심을 끊었다고 생각하고 있을거야.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아. 나는 너희들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큰 재미를 느끼고 있단다. 특히 파한의 몸으로 인간의 여러가지 측면들을 체득해서 너희를 볼 때 새로운 관점이 생겼고 감상 포인트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크게 늘어서 아주 만족하고 있어. 너희들이 알기 쉽게 설명해 보자면, 자기가 시를 써 본 사람은 다른 사람이 쓴 시도 더 풍부하게 감상할 수 있다고 비유할 수 있을거야.

 

내가 승천하고 나서 너희들은 그리스 인간들의 이상적인 신관을 굳이 나에게 적용하려 애를 썼더구나. 나를 전지하고 전능하고 전선한 존재로 왜곡하는 걸 구경하는 건 정말 재미있었다. 그러고는 천 년 가까이 나를 숭배한다는 걸 명분으로 너희들끼리 치고 받는 걸 관전하는 것도 정말 흥미로웠어. 그리고 제멋대로 만들어낸 허수아비를 "신"이라고 부르면서 준엄한 표정으로 감히 나를 정죄하겠다거나 내가 없다거나 죽었다며 날뛰는 얼간이들을 보면 웃음이 빵빵 터지고 했지. 어쨌든 재미는 있었으니 지옥에 보내진 않았어. 너희의 문명이 발전하면서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광대들이 워낙 많아지다보니 재미를 위해서 과거처럼 내가 직접 나설 필요가 없어졌다.

 

그리고 너희가 과학을 발전시켜서 내가 만들어 놨던 수수께끼를 하나씩 풀어 가는 모습도 아주 흥미로웠다. 너희가 만유인력을 발견한 걸 봤을 때는 '제법이군' 하면서 대견하게 웃었지만 그 본질인 상대성 이론을 생각보다 일찍 알아차린 걸 보고는 솔직히 놀랐다. 데코레이션으로 대충 만들어 놨던 달에 굳이 찾아가서 직접 발자국을 찍는 모습, 최근에는 내가 꽁꽁 숨겨놓은 입자들을 하나씩 발견하는 걸 보면서 내가 좀 더 어려운 문제를 냈어야 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하곤 했다. 요즘은 너희가 어떻게 기후 위기를 헤쳐나갈지를 보는 게 나의 주요 관전포인트야.

 

요즘은 주로 뭐 하고 지내냐고? 네 인스타 비공개 게시물 염탐...은 농담이고, 넷플릭스 드라마들하고 유튜브를 보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지. 너희들의 상상력을 감상하는 건 정말 재미있더라. 특히 오징어게임에서 게임 호스트 오일남이 재미를 위해서 직접 게임을 체험한 건 마치 내가 파한으로 강림했던 일을 연상시키더구나. 오일남은 나랑 다른 방식으로 기훈의 죄를 대속하고 부활했는데 얼마 못버티고 결국 죽어버렸지. 큭큭큭.

 

가끔 기분 내킬 때는 너희가 천재라고 일컫는 인간들에게 성령으로 영감을 주기도 하고, 때때로 파한과 전혀 닮지 않은 몸으로 강림해서 맛집을 탐방하기도 하고, 힘들게 걷고 있는 할머니의 짐을 들어주기도 하지. 요즘은 cctv가 많아져서 성육신보다는 성령으로 활동하는걸 선호해. 쓸데없이 너희의 비싼 카메라를 망가뜨리는 게 싫어서지. 그리고 때때로 이렇게 얼빠진 놈들이 나에 대해 제멋대로 쓴 이런 글들을 킥킥대면서 읽기도 해. 너희들은 근거 없이 나를 낡아빠진 고대의 신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던데 사실 나는 이렇게 그 시대에 맞춰서 지내고 있어.

 

내가 창조를 한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너희들 덕분에 나는 한시도 심심할 틈이 없었어. 너희는 내가 부여한 사명을 완벽히 수행하고 있는 셈이지. 무한한 절대자이자 창조주인 내가 항상 지켜보고 있으니까 행복하게 그리고 무엇보다 재미있게 잘 살아라, 사랑하는 나의 하찮은 피조물들아.

 

 

2) 맺음말: 파한교를 믿는 형제님과 자매님들을 위한 당부.

 

지금까지 일개 피조물 입장에서 그 분의 행적을 추적해보았습니다. 보셨다시피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따로 바라시는 게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애초에 그 분의 것이고 우리의 모든 것은 그 분의 것입니다. 당신 자체와 당신이 가진 것 역시 그 분의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께 무언가를 드리고 싶어서 당신의 것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 줄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그 분의 오른쪽 주머니 안의 동전을 그 분의 왼쪽 주머니로 옮기는 것처럼 무의미합니다. 무한한 존재인 그 분에 대한 하찮은 우리의 찬양은 원칙적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다만 가끔씩 그런 한없이 가벼운 우리의 찬양을 주님께서 흥미롭게 받아들이실 때가 있을 뿐입니다.

 

물론 지금껏 들려드린 이야기가 절대자 창조주의 품격에 걸맞은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한한 주권자인 그 분의 의도와 행적이 옳거나 정당한 것인지를 판단할 능력과 자격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다만 주님께서 재미있어 하실 만한 모습을 그 분께 보여드리는 것만이 그 분의 호기심으로 태어난 피조물로서 우리의 유일한 사명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래서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자유로운 상상과 창의력을 발휘하여 주님의 은혜에 보답할만한 즐거운 삶, 혹은 그렇게 사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삶을 살아 주시길 성도 여러분들께 당부 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께서 반드시 주의하셔야 할 게 있습니다. 우리를 만드신 야후님과 기독교의 창조주이신 야훼님을 혼동하시면 절대로 안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위대한 창조주 야후와 다르단 이유로 야훼를 믿는 분들을 폄하하거나 적대하시면 안됩니다.

 

야후는 재미있는 일이 있을 때 내뱉는 감탄사이고 파한(破閑)은 심심함과 무료함을 없애기 위해 어떤 일을 하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께서 성도님의 고난과 고통이 아닌 보람과 행복에서 그 분의 즐거움을 발견하게 되시길 기원합니다.
아멘.

Posted by 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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