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늦가을부터 조금씩 성경을 읽어가고 있다. 구약은 다 읽었고 얼마 전 신약 중 복음서와 사도행전까지 다 읽었다.
구약을 읽으며 느낀 것은 예상을 뛰어넘는 신의 잔혹성이었다. 구약의 신이 잔인하고 성마른 존재라는 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어서 어느 정도 각오는 했지만 막상 직접 읽어보자 상상했던 이상이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에서 보여준 예수의 사랑과 희생으로 그런 어두운 과거가 세탁되고 사람들의 존경과 믿음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라 예상했다. 그래서 복음서에서 보이는 예수의 감동적일 모습에 대한 기대가 컸다. 그러나 복음서를 모두 읽고 나서 보니까 그런 기대가 깨져버렸고 나는 당혹감을 느꼈다. 예수는 야훼의 어두운 과거를 지우고 사람들과 화해하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육체에 갇혀서 힘을 억제당한 야훼의 모습에 불과한 존재로 보였기 때문이다.

복음서는 세 파트로 나눠져 있다. 첫째는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올바른 삶의 자세, 둘째는 당대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봉사, 셋째는 예수의 신성과 신앙심에 대한 강조다. 

첫째 파트에 대한 소감이다. 예수는 산상설교와 평지설교에서 사람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줬다. 대체로 구약의 율법과 연결되어 있어 차별성이 크지는 않지만 마음속까지 깨끗할 것과 원수조차도 사랑하라는 높은 윤리 기준이 특징이다. 이 부분에서 나는 실망을 느꼈다. 내가 구약의 신이 위선적이라고 느낀 포인트는 사람들에게 윤리적인 율법을 주기만 했을 뿐 스스로 그러한 윤리성과 관대함을 보이지 않고 정작 자기는 사람들을 죽이고 용서에 인색했다는 점이다. 그럴듯한 말만 앞세우면서 사람들에게 그것을 지킬 것을 강요할 뿐 정작 신 스스로는 끔찍한 일만 벌여왔다는 점에서 그 율법의 윤리적 가치를 높게 볼 수 없었다. 마치 1984의 빅브라더가 스스로는 사람들을 착취하고 괴롭히고 감시하면서 피지배자들에게는 '서로를 신뢰하고 사랑합시다'라는 위선적인 캠페인을 하는 느낌이었다. 말씀 그 자체로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감흥도 줄 수 없다.  기독교를 탄압했던 바울이 개심하여 예수의 뜻을 따르게 된 이유는 예수의 가르침 그 자체가 아니라 예수의 음성을 직접 들었던 신비 체험 때문이었다. 

예수가 구약의 신과 차별화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가르침을 스스로 실천하는 모습을 보였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마태, 마가, 요한복음에서 원수를 사랑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 대신에 자신의 뜻에 따르지 않는 바리새파, 사두개파 율법학자들에게 끊임없는 저주를 퍼부어댔을 뿐이었다. 예수는 최고의 언변을 자랑하고 신의 권능을 쓸 수 있는 존재였음에도 말씀으로 자신을 반대하는 자들을 전혀 설득하지 못했고 단지 비난하고 정죄만 했을 뿐이었다.

 

굳이 따지고보면 율법주의자들도 희생자들이었다. 그들이 엄격한 원칙에 집착하게 된 것은 신이 스스로 자초한 면이 있다. 신은 엄격한 원칙을 지키지 않은 나답과 아비후를 태워 죽였고 웃사를 때려 죽였다. 제사장이 아닌 왕이 직접 번제를 올렸다는 이유로 사울을 저주했고 파멸시키기도 했다. 그런 역사가 있는데 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이 어떻게 엄격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비록 문학적 상상에 불과할 수 있겠지만 종교적 감동을 주기 위한 측면에서 나이 든 율법학자와 논쟁을 하다가 그가 소변을 보는데 어려움을 겪는 것을 알아차리고 전립선 비대증 치료를 해 주는 장면이라도 있었으면 훨씬 나았을 것 같다. "너의 몸에 든 병은 쉽게 고칠 수 있었지만 마음을 잠식한 병을 고치기는 불가능하구나. 그건 나 혼자의 힘으로 되는 게 아니라 너도 나에게 마음을 열어야 가능한 일이다." 이 정도 대사도 같이 넣어주면 설득력도 있고 사람들에게 전하려는 메시지도 더 뚜렷해졌을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라는 가르침은 훌륭하지만, 예수가 다른 사람의 원수를 대신 용서하는 모습은 기괴한 면이 있었다. 요한복음 8장의 간음한 여인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율법학자들이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려 간음 현장에서 붙잡은 여자를 끌고 왔다. 간음의 상대인 남자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이 간음 사건에서 피해자는 누구인가? 간음의 당사자가 처녀와 총각이라면 피해자가 없는 범죄였다. 그러나 만약 피해자가 있는 사건이었다면 피해자는 간음한 남자의 아내였다. 간음한 남자가 유부남이었고 그의 아내가 남편과 간음한 여자를 처벌하려 돌을 들고 나온 상황을 가정해 보자. 예수는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라고 했고,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이 지은 소소한 죄들에서 죄책감을 떠올리며 던지기를 망설였을 것이다. 주위 사람들이 돌을 내려놓고 떠나자, 그녀도 분위기에 휩쓸려 억울한 눈물을 삼키며 원수를 용서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만약 그 상황에서 혼자서 돌을 던졌다면 그녀는 표독스러운 살인자로 낙인찍히게 될 것이었다. 예수의 용서는 일견 지혜롭거나 성스럽게 보일 수 있었지만, 이런 가정 하에서는 정작 상처받은 이에게는 또 다른 강요가 되었을 수 있다

누가복음이 그나마 좋았던 이유는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가르침을 예수 스스로 어느 정도 실천하는 모습이 조금이나마 담겼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 누가복음의 예수만이 신에게 인간이 무지로 저지른 일이니 용서를 할 것을 간청한 장면이다.(누가복음 23:34) 마태, 마가복음에서는 신에게 왜 자신을 버리느냐고 절규했고 요한복음에서는 "다 이루었다"라는 말로 예언서에 적힌 메시아의 의무를 완수했음을 말했다. 예수는 누가복음 덕분에 자신의 쉽지 않은 가르침을 실천했던 것을 보여 줄 수 있었던 셈이었다. 한 가지 흠이라면 죽기 직전에 자기에게 좋은 말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십자가에 매달릴 정도로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강도를 천국으로 데려갔다는 점이다.
그밖에 제사장 종의 귀를 치료해 준 일도 그런 사례에 넣어볼 여지가 있을 것 같다. 예수를 잡으러 온 율법학자 일당과 예수의 제자들이 싸우다가 어떤 종의 귀가 칼에 잘렸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베드로가 말고라는 종의 귀를 잘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마태복음에서는 귀를 자른 제자에게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꾸짖어서 싸움을 멈추게 했다. 오직 누가복음에서만 그 불쌍한 종의 귀를 예수가 치료해 줬다. 귀 접합의 가치는 외과 수술이 발달한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은혜였다. 다만 말고는 단지 주인이 시키는 대로 일을 했던 종일뿐 그가 진짜 원수였는지에 대한 문제가 남아서 완전히 들어맞는 사례인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둘째 파트도 실망으로 이어졌다. 어떤 사람의 진정성을 보기 위해서는 말보다는 행동을 보는 것이 정확하다고 한다. 예수의 삶을 대변하는 것은 그가 사람들을 상대로 늘어놓은 말이 아니라 그가 행한 일들이다. 예수는 많은 사람들을 도우며 살아갔다. 내가 당대에 이스라엘에 살았더라면 아마 나 역시 예수를 섬겼을 것 같다. 치료가 불가능한 사람들의 병을 별다른 대가도 없이 고쳐주고 귀신을 쫓아내면서 입바른 말도 하고 다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비록 짧은 시기에 좁은 지역에서 활동한 것에 불과하지만 사람들을 도운 예수의 행적만큼은 높게 평가할 수밖에 없겠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런 호의적인 마음은 요한복음 9장에서 깨져버렸다. 요한복음 9장에는 실로암 못에서 눈을 뜬 맹인 이야기가 나온다. 선천적으로 앞을 볼 수 없었던 맹인을 보고 제자들이 그 이유를 궁금해하자 예수는 "하느님이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이는 자신의 신성을 드러내는 퍼포먼스를 보이기 위해 한 사람의 수십 년 동안 어둠 속으로 밀어 넣었다는 의미이다. 그런 관점을 연장하면, 예수가 보여줬던 병자들에 대한 치유 역시 신이 하는 일들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라고 해석될 여지가 크다. 즉 사람들을 도운 진짜 이유는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권능을 과시하기 위해서였을 수 있다는 뜻이 된다. 그렇게 해석되니 예수에 대한 존경이 다시 한번 꺾이게 되었다. 심지어 요한복음 11장에서는 자신의 제자인 나사로가 아파서 죽게 생겼는데도 죽은 사람을 살리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 이틀 동안 기다렸다가 출발을 했다. 그 꾸물거림으로 나사로는 말 못 할 육체적 고통과 심지어 한 번의 죽음까지 감내해야 했다.

병자들을 치유하는 것으로 세상에 자신의 신성을 알리고자 했던 예수의 의도는 요한복음 10장 21절에서 그 성과가 드러난다.
“이 말은 귀신이 들린 사람의 말이 아니다. 귀신이 어떻게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할 수 있겠느냐?” 

만약 내가 당시에 예수에게 치료를 받았던 사람인데 예수의 그 말을 들었더라면 이렇게 생각했을 것 같다.
"나는 치유를 얻었고 당신은 영원히 기록되고 찬양받을 영광을 얻었군. 좋은 거래였다. 잘 지내시길..."


셋째 파트인 자신의 신성을 강조하면서 사람들에게 자신에 대한 신앙심을 가질 것을 주장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지적하겠다. 그의 신성이 과연 그를 존경해야 할 이유가 되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해 볼 수 있다. 신성으로만 보자면 제우스도 신성은 있다. 하지만 그것을 이유로 사람들이 망나니 같은 제우스를 존중하지는 않는다. 비슷한 잣대로 예수를 평가해 보겠다는 것이다.

예수는 끊임없이 제자들을 도구적인 가치에 치중해서 바라본 면이 크다. 인간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대한 것이기 때문에 칸트의 정언명령에 충실하지 못했던 처신이라고 볼만하다. 대표적인 게 소금의 비유, 므나의 비유, 달란트의 비유등이다. 또한 인간을 위해주는 척하면서 자신을 목자 인간을 양에 비유하곤 했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인간이 양을 키우는 이유는 양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양이 필요해서다. 털을 깎고 젖을 짜다가 목을 따서 살해하여 잡아먹는 것이 그 목적이다. 심지어 양의 내장으로 콘돔을 만들기까지 한다.

양은 순하고 통제에 잘 따른다는 특성이 있다. 이와 반대되는 성격을 가진 가축이 염소다. 염소는 독립성이 강하고 드세서 통제가 어렵다. 마음먹고 절벽을 타고 도망가버리면 잡아올 수도 없다. 예수는 마태복음 25장에서 양은 오른쪽에 세워서 천국으로 보내고 염소는 왼쪽으로 세워서 지옥에 보내겠다고 말했다. 양과 염소의 차이는 자신을 얼마나 잘 따르고 있는지 여부이다. 그 내용은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이 목마를 때, 굶주릴 때, 갈 곳이 없을 때, 헐벗을 때, 병들어 있을 때, 옥에 갇혔을 때 도와줬는지 여부다. 얼핏 보기에는 선함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엄격히 따져본다면 그렇지만은 않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나는 야훼가 싫고 예수는 사기꾼이야. 선행은 나 혼자의 힘이면 충분해"라고 말하고 다니면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면서 평생을 보낸다고 치자. 이 사람은 예수의 기준으로는 불순종한 염소이고 지옥행을 피할 수 없다. 순종하는 양이라면 그가 착한 사람이라 선행을 하는 게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에 순종했기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고 용서하며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결과가 만들어졌을 뿐이 되는 것이다. 즉 사람들을 돕는 이유가 자신에 대한 순종 때문인지 여부로 양과 염소를 구분한 것이다.

그가 순종을 강요하는 정도는 가족에 대한 의무조차도 등한시하게 할 정도로 크게 선을 넘었다. 마태복음 10장 34-37절 누가복음 14장 26절에 따르면 신앙을 위해서 가족 간 불화가 일어나도 감내해야 한다. 마태복음 19장 29절, 마가복음 10장 29-30절은 신앙 때문에 가족이나 재산을 버린 사람들에게는 더 큰 보상이 있을 것이라고 약속한다. 앞으로 더 많은 보답을 받기 위해서 가족을 버리라는 뜻이다. 죽은 자녀 대신에 더 예쁜 새로운 자녀를 받고 기뻐하는 냉혈 동물 욥이 연상된다. 가족들을 모두 지옥에 보내고 나만 천국에 가면 기쁠까? 그리고 뭐가 그리 급한지 누가복음 9장 59-62절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거나 가족에게 작별 인사를 하겠다는 요청조차 뒤로 미루고 즉시 전도에 매진해야 함을 보여준다. 엄청 급한 일이라도 있을 것 같았지만 2천 년이 지나도록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고 있다. 아버지 장례 정도는 치르고 신앙생활에 복귀해도 충분히 여유가 있었을 텐데 뭐가 그렇게 급했을까? 그리고 가족까지도 버리고 혼자라도 구원을 받겠다고 아등바등 대는 이기적인 인간이 되기를 명령하는 종교에서 어떤 선함을 찾을 수 있을까? 작은 일을 잘해야 큰 일도 잘한다는 누가복음 16장 청지기의 비유가 생각난다.

실로암 맹인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요한복음 9장 39절부터 41절까지의 내용을 정리하겠다. 예수는 심판하기 위해서 못 보는 사람을 보게 하기 위해서 왔다고 했다. 그리고 보는데도 믿지 못하면 심판을 받는다고 했다. 애초에 오지 않았으면 심판이나 정죄당할 일이 없었던 셈이었다. 예수는 이렇게 염소의 감은 눈을 강제로 뜨게 하고는 지옥으로 끌고 가게 했던 셈이다. 앞서 제시했던 누가복음 23장 34절에서 예수는 자기를 십자가에 매달고 조롱하는 사람을 용서해 달라고 성부에게 기도하면서 저들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른다고 두둔했다. 그러나 그의 사역은 모두 예수가 누구인지 사람들에게 스스로 적극적으로 알린 것이었고 그렇게 강제로 눈 뜨임을 당한 많은 염소들이 심판대에 오르게 되었을 것이다. 

예수는 무슨 말을 해도 자신을 무시하거나 가짜 메시아로 몰고 가려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그들을 끝까지 설득하고 끌고 가기보다는 염소로 규정하고 버리는 쉬운 길을 선택한 것 같다. 염소가 파마를 한다고 양이 될 수 있는 게 아니고 양이 털 깎고 수염을 기른다고 염소가 되는 것도 아니다. 염소와 양의 비유는 신의 은총을 받을 사람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후대 신학자들의 예정론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런 시니컬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신기하게도 나는 예수의 부활을 다룬 복음서 끝부분에서 미묘하게 감동을 느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는데 나름 분석을 해보겠다.

나는 신앙심이 없어서 예수의 대속에 대해서는 불확실한 것으로 생색을 내는 신도들의 일방적 주장으로만 받아들였다. 내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에게 느낀 감정은 감사보다는 연민이었다. 비록 시대와 문화의 차이가 크지만 내 관점에서 예수의 십자가형은 표현의 자유를 모르는 야만인들에 의한 잔혹한 폭력과 살인이었다. 예수의 부활은 그런 부당한 폭력을 당한 그에 대한 연민을 다소 덜어줬다. 그리고 부활 이후에 예수가 제자들을 만나고 그들에게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장면에서 안타까웠던 마음이 풀렸기 때문에 그 점을 감동으로 느낀 것이 아닐까라는 자체 진단을 해봤다.
어쩌면 단지 믿지 않는 수준을 넘어 살짝 삐딱한 사람의 마음까지도 살짝 흔들 정도의 문학적 매력이 있기에 성경은 오랜 기간 신자들에게 감동과 경건함을 선사하는 텍스트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Posted by 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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