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복음서를 순서대로 읽고 예수의 부활을 4번, 승천을 3번 연달아 보고 난 이후에 사도행전을 들어가면 기분이 각별해진다. 예수의 부활에서 느껴졌던 감동이 이어지고 마치 대작 영화의 스핀오프를 보는 것 같은 기대감이 생기기 때문이다. 초반부에 사도들이 각자의 역할을 담당하고 성령을 맞이하는 등 후일담들이 이어지고 마음이 훈훈해진다. 그러다가 갑자기 응?? 하는 찜찜한 장면이 나온다.

 

사도행전 5장에 등장하는 아나니야와 삽비라(사피라) 부부의 죽음은 전후 정황상 살인 사건일 가능성이 엿보인다.
사건의 경위는 이렇다. 교회 공동체에 속하게 된 부부는 교회의 규칙에 따라 자기 소유의 재산을 모두 처분하여 사도에게 바쳐야 했다. 그런데 그 부부는 땅을 판 돈의 일부만 바치고 나머지는 사적으로 보관했다. 남편 아나니야가 사도들에게 돈을 바칠 때 베드로는 거짓말로 일부를 숨긴 점에 대해 그가 신을 속이려 한다면서 질책했다. 그랬더니 아나니야는 쓰러져서 죽었다. 젊은이들은 서둘러서 아나니야를 싸서 땅속에 묻었다. 3시간 정도가 지나도록 돈을 바치러 간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부인 삽비라도 베드로를 방문한다. 베드로는 땅을 판 돈이 그게 전부냐고 물었고 그렇다고 삽비라가 대답을 하니 성령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질책을 했다. 삽비라도 남편처럼 그대로 쓰러져서 죽었다. 젊은이들은 곧장 삽비라를 남편 아나니야 옆에 묻었고 사람들은 큰 공포에 빠졌다.

 

사도행전을 쓴 루카는 그 부부가 죽은 원인을 명시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언뜻 보면 마치 성령의 심판 같아 보인다. 하지만 잘 따져보면 살해의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위대한 기록자 루카가 거짓말을 썼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실제 일어난 일 중에서 안 쓴 부분이 있는 걸로 보일 뿐이다. 일단 그가 돈의 일부를 숨겼는지 여부를 아는 데는 성령의 능력까지 필요하지가 않다. 그 땅의 규모와 소출을 안다면 시세를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저 정도의 땅이면 금화 200개는 충분히 가져오겠군"이라고 기대했는데 그가 금화 162개만 가져왔다면 정말 판 돈을 다 가져온 게 맞는지를 추궁해 볼 수 있다.

 

아나니야가 건강이 나쁘거나 유독 멘탈이 약하거나 죄책감을 과하게 느끼는 사람이라면 베드로의 질책을 듣고 놀라서 죽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부인 삽비라까지 똑같은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한 건 의미심장하다. 우연이라기에는 확률상 지나치게 희박해 보이고 죽음의 의도성을 의심하게 한다. 더구나 부인 삽비라를 향한 베드로의 말이 굉장히 쎄하다. "그대의 남편을 묻은 사람들의 발이 막 문에 다다랐으니 그들이 또 그대를 메고 나갈 것이오." 그녀의 운명을 자기가 결정하는 듯한 태도이고 마치 사형 선고처럼 보인다.

 

드라마 수리남에서 황정민이 연기한 전요환 목사가 연상된다. 내가 상상한 가상의 장면이다. 전목사는 자기를 속인 신도의 머리에 권총을 대고서 이렇게 욕설을 한다. "주님의 심판이다. 이 개 쉐끼야." 곧 총구는 불을 뿜고 피해자는 바닥에 쓰러진다. 목사의 범죄자 부하들은 그 시신을 메고 나가서 숲 속에 묻어 버린다.

 

부부를 향한 베드로의 질책은 실제 있었던 사건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일어났을 수 있는 이런 사실은 굳이 기록하지 않았을 수 있다. 몇 분 후에 시신을 메고 나갈 그 청년들이 뒤에서 아나니야와 삽비라의 머리를 돌로 내려치거나 칼로 경동맥 절단 또는 가늘고 질긴 끈으로 목을 조르거나 갑자기 목을 비틀어서 꺾어버리는 등 방법으로 그들 부부를 즉사시킨다. 그렇게 베드로의 질책을 듣던 그 순간에 그들은 쓰러지게 된다. 그렇게 살해하는 장면은 생략하면서, 그들이 죽은 결과만 기술한 것은 엄밀히 말해서 거짓말은 아니다.

 

이런 의심을 하게 된 이유는 이렇다. 그 교회는 사람이 죽었는데 부인 삽비라와 다른 가족에게 알리지도 않고 제대로 된 장례 절차도 없이 즉시 서둘러서 아나니야를 암매장했다. 더운 지방이라서 시체가 일찍 부패하여 전염병이 염려되었을 것이라는 핑계는 무의미하다. 시체가 부패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부인은 겨우 3시간 후에 왔는데 이미 그때는 일당이 남편을 땅에 묻어버린 후였다. 성경에서 볼 수 있는 당시의 장례는 사람이 죽자마자 쫓기듯 땅에 묻는 것이 아니었다. 몸에 기름을 바르고 하루 정도 충분한 애도 시간을 가진 후에 묻었다. 매장하기 전 애도하는 그 시간 동안 엘리야, 엘리사, 예수, 베드로는 죽은 사람을 살려내기도 했다. 헌금을 하러 간 남편을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아서 세 시간 이후에 부인이 확인하러 왔는데 부인도 역시 죽었고 그녀 역시 남편 옆에 별도의 장례 없이 즉시 암매장되었다.

 

신도가 죽자 서둘러서 은폐하듯 그대로 땅에 파묻어버리는 건 일부 사악한 사이비 종교에서나 벌어질법한 일인데 그런 일이 초기 교회에서 실제로 일어났었던 셈이다. 성경의 텍스트 자체에는 성령이 살해했다는 표현이 없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신이 사람을 죽일 때 행위의 주체를 신이라고 뚜렷하게 밝혀왔다. 불길로 나답과 아비후를 삼킴. 신이 웃사를 침. 밧세바의 아기를 침 등등 그 예시는 많다. 그들을 성령이 죽였다는 직접적 표현을 차마 쓰지 못한 건 성령을 모욕하는 건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는 예수의 생전 경고(마태복음 12:31-32, 마가복음 3:28-29, 누가복음 12:10) 때문인 것 같다. 사도행전에서는 그들이 성령을 속였다는 말만 있고 그로 인해 마치 그들을 성령이 죽였을 것 같다는 암시만 넌지시 던졌을 뿐이다.

 

삼위일체 교리에 따르면 성령은 곧 예수다. 예수는 사랑과 용서를 강조해 왔고 심지어 간음을 저지른 여자까지도 별다른 이유 없이 용서했다. 그러나 참회할 기회도 주지 않고 돈 문제로 그 부부를 즉시 살해한 건 예수의 가르침과도 정면으로 어긋난다. 게다가 예수는 바리새파, 사두개파 사람들에게 돈 좀 그만 밝히라고 항상 경고해 왔다. 따라서 그 부부의 죽음을 성령 탓으로 떠넘기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과 모순되고 성령에 대한 모욕이 될 수 있다. 어쩌면 성령을 욕되게 하기보다는 차라리 사도들을 의심하는 해석이 더욱 신앙심에 충만한 태도일 수 있다. 당시 사람들은 이 사건으로 큰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신앙심의 원천이 예수가 추구했던 신에 대한 사랑과 순종에서 공포로 변질되어 버린 것이다. 게다가 베드로는 자신에 대한 거짓말을 성령에 대한 거짓말로 확대 해석하여 자기에게 성령의 권위가 있다는 듯 스스로를 신격화하려고 했다는 의심을 사게 한다.

 

같은 사건이 현대에 벌어졌다면 신문 사회면에 이런 내용이 나왔을 것이다.
신흥 종교에 빠진 부부는 재산을 갈취당하고 사망하여 암매장당함. 경찰은 사건 경위 파악 후 용의자들에게 구속영장 청구.
유가족과 이웃의 인터뷰. "세상에, 집안 대대로 물려받은 그 귀한 땅을 팔아서 바친다고 하더라니까요. 완전히 종교에 미친 것 같았어요. 기어코 이렇게 일이 터져버렸네요."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제1583화: 그날, 신흥 종교 교단에선 무슨 일이 있었나?

 

이런 의심이 들지 않게 하려면 성경의 내용이 이랬어야 했다.
남편 아나니야가 죽었다. 사도 또는 다른 신도가 부인인 삽비라에게 급하게 달려가서 이렇게 말한다.
"방금 부군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주님을 앞두고 거짓말을 하셔서 아마도 성령께서 심판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면 부인이 울음을 터뜨리며 베드로에게 이렇게 간청한다.
"베드로 님께서 성령께 기도를 드려서 제 남편을 살려내실 수는 없을까요? "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한다.
"한번 시도는 해보겠지만 성령께서 직접 징벌하신 사안이라서 아마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당신 부부는 왜 거짓말로 하느님을 속이려 하신 겁니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회개하고 참회하시기 바랍니다. 부인을 위해서 저도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그러고는 남편 아나니야의 장례를 정상적으로 치른 후 부인이라도 참회하고 살아남았어야 그나마 믿을만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부부는 처형당하듯 죄다 똑같은 방식으로 이상하게 죽어버렸고 재산도 모두 빼앗겼다.

 

이런 생각에 이르면 사도행전 1장에 제시되었던, 별생각 없이 지나쳤던 가룟 유다의 최후에 대해서도 섬찟한 느낌을 받게 된다.
베드로는 난폭한 자였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그는 예수를 체포하러 온 율법학자 일당들과 싸우다가 말고라는 사람의 귀를 칼로 잘라버렸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는 그 행위에 대해 칼을 쓰는 사람은 칼로 망한다라고 꾸짖었다. 그러나 그의 폭력성을 억제하던 예수가 사라지고, 율법학자들의 의도가 자신들에 대한 단순한 견제를 넘어 살의에 이르렀다는 점을 예수의 처형으로 실감하자 그는 더욱 공격적으로 변했을 수 있다.

 

가룟 유다의 최후는 성경에 관심 없는 사람에게 조차도 익숙할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그 경위는 마태복음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는 예수가 유죄 판결을 받자 율법학자들에게 받은 은 30개를 성전 안에 던지고 목을 메어 자살했다. 자살한 위치가 성전 근처였는지 명기되진 않지만 율법학자들은 그의 시신을 발견했다. 그들은 유다가 던졌던 은 30개로 밭을 사서 피의 밭이라고 이름을 짓고는 유다를 거기에 묻었다. 마태는 12 사도 중 한 명이었고 배신자 유다의 죽음을 그렇게 묘사하여 나머지 사도들의 품위를 지켜냈다. 가룟 유다의 최후는 신앙의 측면에서 상당히 중요한 주제였는데도 나머지 복음서들에서는 의외로 모두 침묵을 지키고 있다. 마태는 이어서 율법학자들이 예수의 부활에 대한 증언을 듣고도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그것을 은폐하고 왜곡했다고 기록했다. 이런 점들로 보아 사람들이 제기할만한 신앙적 의심 가능성에 대해 적극적으로 방어하고자 했던 마태의 태도를 짐작해 볼 수 있다.


한편,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사도행전 1장 버전에 따르면 유다는 예수를 판 돈으로 산 밭에서 배가 터지고 창자가 쏟아져서 고꾸라져서 죽었다고 표현되어 있다. 사도행전을 쓴 루카는 누가복음에 그 내용을 굳이 넣지 않았지만 사도행전에서는 맛디아(마티아)가 배신자 유다의 자리를 이어받은 경위를 기록해야 했기 때문에 유다의 최후를 넣었어야 했던 것 같다. 그 밭은 피의 밭이라 불렸고 그 일은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이 다 안다고 했다. 마치 대중을 향해서 자신들에게 저항하지 말라는 무언의 경고를 보내는 멕시코 카르텔의 잔인한 처형과 처참하게 훼손시킨 사체를 전시하는 행태가 연상된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유다는 공동체의 재정을 담당했는데 예수 일행의 공금을 횡령하기도 한 것으로 나온다. 그는 그렇게 돈에 미쳐서 심지어 예수까지도 팔아 버렸다. 돈을 원인으로 한 아나니야와 삽비라 부부의 의문스러운 최후를 감안해 본다면 유다의 배를 터뜨리고 창자를 쏟게 한 원인은 베드로를 비롯한 신앙 공동체의 일원들의 보복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의심을 해보게 된다. 어쩌면 예수를 체포해서 살해했던 바리새파, 사두개파 같은 기득권 세력들이 더 이상 사도들을 전면적으로 억누르지 못했던 이유가 교단의 악명 높은 잔인함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멕시코 카르텔을 비판하거나 억제하려는 시도는 개인적 관점에서는 말벌집을 건드리거나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쥐와 같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딱히 아쉬울 게 없는 처지였던 배부른 율법학자들 중에서는 그럴만한 배짱을 부릴 만한 사람이 없었던 것 같다.

Posted by 누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