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6장에는 예수가 한 말 중에 유난히 난해한 내용인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가 등장한다. 그 내용을 간추리면 이렇다. 어느 부자의 재산을 횡령하던 재산 관리인(청지기)이 주인에게 덜미가 잡혔다. 주인은 그를 해고하겠다고 하며 그동안 작성했던 장부를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경제적 기반을 잃은 청지기는 다른 사람에게 빌붙을 구실을 만들기로 했다. 그 방법은 채무자들을 불러서 그들이 주인으로부터 진 장부상 빚을 문서를 위조해서 줄여주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채무자들에게 잘 보여서 그들에게 의지하기로 했다. 그걸 보자 주인은 청지기가 지혜롭게 행동한다면서 흐뭇해했다. 예수는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고 그 재물이 다 떨어지면 그들을 영원한 처소로 삼으라고 말한다. 그리고 세상의 자녀들이 빛의 자녀보다 자기들끼리 거래하는 데는 더 슬기롭다고 평한다. 그러고는 작은 일에 충실해야 중요한 일에도 충실하고 큰 일을 맡길만하다고 말한다. 또 재물과 신을 한꺼번에 섬길 수 없다고 말한다.

 

예수가 해왔던 비유들은 모두 직관적이고 이해가 쉬운데 청지기의 비유만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횡설수설하는 것 같아 보인다. 게다가 내용 자체도 표면적으로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자기 이익을 챙기는 것을 권장하는 모습처럼 보여서 상당히 부조리해 보인다. 예수는 왜 그런 이질적인 비유를 했을까? 어쩌면 예수가 마태복음 13장 10-17절, 마가복음 4장 10-12절, 누가복음 8장 9-10절의 내용을 실천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나는 아직 청지기의 비유에 대해서는 만족할만한 신학적 해설을 접하지 못했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내가 직접 분석하여 스스로라도 만족할만한 해석을 도출해보고자 한다.
전통적인 해석으로는 주인이 청지기의 영리한 태도에 만족하는 것을 보면서 지혜로움의 긍정적 측면을 강조한 것으로 본다. 그리고 문서 위조로 빚을 탕감한 배임을 어려운 사람 돕는 선행이라며 피상적이고 억지스러운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시대적 맥락을 봐야 한다면서 청지기 해임이 종말을 상징하고 심판에 대비한 신속한 조치의 필요성이라는 해석도 접했다. 하지만 그런 해석들은 예수가 뱉어낸 단어들의 표면적 의미에 억지로 딸려가는 것일 뿐 비유의 핵심을 놓치고 있는 것 같다는 우려를 느끼게 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영리하게 군 것을 주인이 칭찬한다고 해석해서 신의 주권에 대해 피조물로서 횡령과 배임을 지혜롭게 저질러보라는 뜻일까? 아니면 배임이건 횡령이건 가난한 사람에게 이익이 되기만 하면 무조건 칭찬받아야 한다는 뜻일까? 최후의 심판대에 오를 순간을 앞두고서 횡령과 배임을 저지르는 과감함을 빛의 자녀가 배우라는 뜻인가? 애초에 그 종말도 청지기 스스로 초래한 죄 때문인데 거기에 죄를 더 얹으라는 뜻인가? 얼핏 생각하기에도 단편적인 억지 해석이고 비약이다.

 

기존의 해석대로 정말 그렇게 받아들이고 지혜롭게 불의를 저지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천국의 비밀과는 확실히 멀어질 것 같다.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비유의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수긍할만한 진리를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청지기란 주인의 재산에 대한 관리권을 위탁받은 사람이다. 아마도 주인으로 상징되는 신으로부터 생명과 삶을 받아서 살아가는 모든 인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청지기의 비유는 16장 8절 중간인 "그가 슬기롭게 대처했기 때문이다."에서 끝난다. 비유가 끝난 16장 8절의 후문에서 예수가 말한 빛의 자녀들이란 신을 섬기는 사람들을 세상의 자녀는 신앙이 없는 사람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이야기에서 청지기가 처음부터 선택했어야 할 최선의 길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횡령과 배임이 아닌 충실한 재산 관리였다.

주인은 청지기의 행동이 지혜롭다고 칭찬했지만 그것은 기왕 벌어진 횡령과 해고에 대한 청지기의 사후 대처를 평가한 것일 뿐이다. 그가 다른 사람의 빚을 깎아주는 것에 대해 주인이 추가적으로 그를 추궁하거나 처벌하지 않고 칭찬을 한 것은 주인이 매우 관대한 성격이기 때문일 뿐 그 청지기가 정당하다는 뜻은 아니다. 주인은 비록 청지기를 해고했지만 청지기를 증오하여 그가 곤궁에 빠지거나 파멸하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그러지 않았다면 청지기가 새로 저지른 잘못에 대해 또다시 추궁하고 처벌했을 것이다. 오히려 그가 파멸적 미래를 앞둔 절박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안간힘을 써서 그런 파국을 피한 것을 다행이라고 여기고 그의 약삭빠름을 칭찬한 것이다. 율법대로 한다면 출애굽기 22장과 레위기 6장에 따라 청지기가 횡령하거나 배임한 돈의 20%를 할증하여 갚게 하거나 또는 2~5배로 배상하게 할 수 있었지만 주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는 주인으로 비유된 신의 자비와 긍휼을 상징한다.

 

청지기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채무자의 빚의 일부를 탕감해 줬다. 청지기와 채무자의 우정은 의롭거나 신실한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금전적 이익에 기반한 것이다. 청지기가 채무자로부터 받을 수 있는 호의의 한계는 그가 탕감해 준 빚인 올리브기름 50말, 밀 20 섬일 뿐이다. 게다가 청지기의 빚 탕감 조치는 청지기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시점에서는 이미 과거의 사건일 뿐이다. 채무자가 앞으로도 빚을 탕감해 줄 권한을 잃은 청지기를 충실하게 대할 이유는 없다. 따라서 주인을 배신한 빚 탕감으로 청지기는 영원한 처소와 우정을 얻을 수 없다.

 

어떤 목회자는 1세기 당시 유대인들의 경제적 관습과 청지기의 권한을 감안해야 한다면서 청지기가 탕감해준 몫이 주인의 것이 아니라 청지기에게 돌아가는 인센티브일 것이라는 해석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청지기가 얻을 수 있는 호의의 한계가 올리브기름 50말 밀 20섬임은 변함이 없다. 그 해석에 따르면 청지기는 확실한 자기 몫을 불확실한 타인의 호의에 대한 기대로 변환했기에 지혜롭다기 보다는 어리석은 일을 한 셈이다. 그렇게 해석하면 그를 지혜롭다고 칭찬한 주인의 뜻에도 어긋난다.

 

청지기의 빚 탕감으로 주인의 사회적 평판을 올려줘서 주인이 그를 칭찬했을 것이라는 해석을 하는 목회자도 있다. 이 역시 논리적이지 못하다. 주인의 평판이 올라가려면 빚 탕감 결정은 주인이 한 것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청지기는 단지 실무를 수행한 것에 불과하게 된다. 그렇다면 왜 채무자가 청지기에게 좋은 마음을 가지고 해고된 그를 위해 처소를 제공할지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그밖에 이 청지기의 해고를 죽음과 최후의 심판에 대한 비유로 보고 그 대비하라는 가르침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죽음과 심판은 신의 계획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고 청지기의 해고는 순전히 그가 저지른 죄 때문에 일어났다는 점에서 논리적 층위의 차이가 생긴다. 이렇듯 기존의 대안적 해석들은 피상적이고 핵심에서 벗어나있거나 비유의 전체가 아닌 일부만 선택적으로 가져와서 설명하려는 면이 있다.

 

예수는 청지기가 주인과의 관계가 끊긴 상태에서 챙겨둔 돈을 일시적이고 한정된 것으로 봤다. 제자들에게 불의하게 모은 재산을 이용해서 친구들을 사귀고 돈이 떨어지면 그들을 영원한 처소로 삼으라고 말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 실제로 그렇게 해보려고 시도하면 채무자는 청지기에게 영원히 머물 수 있는 곳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 뿐이다.

청지기(인간)가 필요로 하는 영원한 처소는 불의하게 맺어져서 이익이 없어지면 관계도 끊어질 채무자(돈)가 아니라 주인(신)뿐이다. 이 비유의 경우에는 청지기가 먹고살기 위해서 자신이 저지른 마지막 배임까지도 용서해 준 관대한 주인 앞에서 엎드려서 진심으로 참회하고 용서를 구해서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진정으로 지혜로운 행동이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고 영원한 처소를 얻으란 말의 진짜 의미는 채무자에게 더러운 돈을 뿌려서 인심을 사라는 뜻이 아니다.

 

여기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사귀라고 한 대상인 친구는 누구일까? 살펴보았듯 채무자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채무자를 소거하면 이야기에서 남는 사람은 주인 밖에 없다. 단지 소거법만으로 친구가 누군지 정하는 게 의심스러울 수 있다. 그런데, 마치 퍼즐 조각이 맞춰지기라도 한 듯, 누가복음 12장 4절, 요한복음 15장 15절에서 예수는 제자들을 종이 아닌 친구로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 따라서 부정하게 얻은 재물을 주인에게 돌려줌으로서 신뢰와 우정을 되찾으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고 이야기의 맥락에 맞는 귀결이다.

 

'친구'의 헬라어 원전은 단수가 아닌 복수의 의미가 있다고 하여 '친구'를 주인으로 보는 해석에 논란을 제기할 여지는 있다. 하지만 채무자를 친구로 대치하는 건 앞서 살펴보았듯  논리적으로 성립할 수가 없다. 채무자와의 관계는 일시적이고 불안정하며, 영원한 처소를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친구'로서 사귀는 대상의 방향성을 채무자가 아닌 주인을 중심으로 이해하고, 재물을 주인을 위해 사용하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보자.

 

주인, 즉 신은 마태복음 22장 37-40절에 따라 이웃을 사랑하는 행위가 곧 자신의 명령에 따라 재물을 사용한 것으로 여길 것이다. 또한 예수는 마태복음 25장 45절에서 "여기 이 사람들 가운데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하여 이웃 사랑이 신에 대한 섬김과 맥락을 같이 한다는 점을 밝혔다.

 

따라서 청지기는 재물을 비록 불의한 방법으로 얻었더라도, 주인의 뜻에 따라 그것을 이웃들을 위해 쓰며 그들을 '친구들'로 삼아, 궁극적으로 신에게 순종하는 이웃사랑에서 신에 의한 구원인 '영원한 처소'를 얻는다. 이는 기존 해석대로 배임을 통해 채무자에게 몸을 의탁한다는 비현실적인 방법이 아니라, 주인을 통해 이웃들을 사랑하여 친구로 삼는 길로 가는 지혜로운 선택을 보여준다. 어쩌면 그 수혜자들 중에는 채무자가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채무자에게 뇌물처럼 찔러준 게 아니라 주인을 통해서 베푼 것이라면 이웃으로서 친구들에게 사랑을 나눈 것이 된다. 여기서 이웃 사랑은 '구원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주인, 즉 궁극의 친구인 신과의 관계 회복에서 흘러나오는 열매다.

 

다만, 비록 예수가 자신을 친구라고 부르길 허용했지만 그래도 신에게 친구라는 표현을 적용하는 게 불경스럽다고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경우에는 이런 해석도 가능하다. ‘친구들’은 주인이 아니라 이웃(특히 가난한 이들)이며, ‘그들이 너희를 영접한다’는 말은 이웃의 환대를 통해 드러나는 신의 환대를 가리킨다. 즉, ‘주인께 먼저 돌려드리고 관계를 회복한 뒤, 주인의 뜻대로 이웃에게 나눔으로 친구를 사귀라’는 흐름으로 읽을 수 있다.

 

예수의 말을 계속 따라가보자. 빛의 자녀들은 불의한 청지기로 대표된 세상의 자녀만큼 슬기롭지 못하다. 신에게 신실하게 의탁하면 청지기처럼 절실하게 머리를 짜내거나 부지런을 떨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빛의 자녀도 나태함에서 벗어나 세상의 자녀들이 일상을 열심히 살아가는 태도와 열정을 배워야 한다. 그런 열성과 치열함으로 빛의 자녀들이 신을 섬기면 신은 그들에게 더욱 큰 몫을 위임할 것이다. 작은 일에 충실해야 큰 일도 충실하기 때문이다. 다만 예수는 제자들에게 세상의 자녀들이 돈을 좇는 정도로 열정적으로 신을 섬기되, 돈과 신을 동시에 섬길 수는 없으니 신을 선택하여 빛의 자녀로 남기를 권한다.

 

정작 이 가르침이 가장 필요했을,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은 이 비유를 비웃었다. 그들에게 신앙과 돈은 동시에 추구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신명기 28장에 따르면 신을 따르면 재산이 풍부해지고 신을 멀리하면 가난해지기 때문에 돈이 많은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가난이 불순종의 가능성을 내비치는 것일 수 있었다. 예수는 그 점을 꿰뚫어 보고 그들에게 천국에 간 거지 나사로와 지옥에 간 부자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들의 영적 각성을 촉구했다. 청지기처럼 열심히 사는 그들이 빛의 자녀가 된다면 영성적인 잠재력이 상당하여 그들에게 중대한 사명을 위임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들을 향한 예수의 설교를 듣고도 바리새파 사람들의 별다른 반응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들은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죄 사함을 받는데 실패한 것 같다. 예수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청지기와 관련된 긴 이야기를 횡설수설하는 헛소리로 여기고 귀 기울일 가치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에 예수의 제자들은 이 비유를 듣고서 곧장 무슨 의미인지 몰랐더라도, 언제나 진리만 말하는 자기의 스승이 헛된 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믿고서 진지하게 묵상하여 스스로 깨달았을 것이다. 아니면 예수에게 직접 물어서 정확한 뜻을 이해하고 천국의 비밀에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서게 되었을 것이다.

 

예수를 성경으로만 만날 수밖에 없을 훗날의 사람들을 위해서 루카는 누가복음 19장에 힌트를 마련해 뒀다. 19장에는 10 므나의 비유가 나온다. 신을 섬기는 사람의 지혜와 노력을 상징하는 이야기로 16장 청지기의 비유와 통하는 면이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 예수를 존경한 세관장 삭개오의 사연이 제시된다. 그는 예수를 보고 싶었지만 키가 작아서 군중 속에 둘러싸인 예수를 볼 수 없었다. 그는 뽕나무 위에 올라가서 예수를 보고 싶은 심정을 절실하게 표현했고 그것이 예수를 만족시켰다. 그리고 누가복음 18장 22절에서 예수가 부유한 관리에게 전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고 했던 소문을 들었는지 삭개오는 예수가 입을 열기 전에 자신의 재산 중 절반을 바치겠다고 선수를 쳤다. 세관장은 당시 '불의한 재물'의 상징과 다름 없는 세리들의 수장이라는 의미가 있었다. 그는 불의한 재물을 친구들, 즉 이웃을 위해서 사용했다. 예수는 이를 기쁘게 받아들여 재산의 전체가 아닌 절반만 헌납하는 것으로도 그에게 구원을 약속했다. 루카는 신앙심이 깊지만 청지기처럼 영리하게 처신하는 빛의 자녀로서 바람직한 롤모델을 세관장 삭개오로 제시한 것을 보인다.

 

이렇듯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는 결국 우리에게 보다 절실하고 지혜롭게 신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의 깊은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때로는 이 비유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청지기의 행동을 '사람을 위한 선행'이라는 피상적인 틀에 맞추거나(그것이 누구의 재물이며 어떤 방식의 위함인지를 충분히 따지지 않고) 단어의 표면적 의미에만 집중하여 비유의 복잡한 맥락과 아이러니를 놓치는 해석을 접하기도 한다. 이러한 아쉬운 모습을 마주할 때, 예수가 왜 '빛의 자녀'들이 '세상의 자녀'들처럼 좀 더 '슬기로워져야'한다고 말했는지 더욱 실감하게 된다. 어쩌면 법조인의 논리적 분석력, 역사학자의 맥락 이해, 문학가의 텍스트 해석 능력과 같은 '세상의 지혜'를 겸손히 배우고 활용하는 자세가, 빛의 자녀들이 성경의 진리를 더욱 깊고 책임감 있게 탐구하며 그 '슬기로움'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는 신앙의 본질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맡겨진 진리를 더욱 분명하게 이해하고 실천하기 위한 노력이다. 궁극적으로 이 비유는 우리에게 신실한 믿음과 더불어, 현실 속에서 신의 뜻을 분별하고 효과적으로 실천하는 '절실함과 지혜'를 함께 갖추어 신과 이웃을 섬기라는 강력한 도전을 던져주고 있다.

Posted by 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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