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커뮤니티나 sns에서는 기독교의 신을 의심하거나 비판하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신이 악을 없앨 의지가 있지만 능력이 없다면, 이는 신이 전능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신이 악을 없앨 능력이 있지만 의지가 없다면, 이는 신이 선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신이 악을 없앨 의지도 능력도 없다면, 이는 신이 전능하지도 선하지도 않음을 뜻한다.
신이 악을 없앨 의지와 능력을 모두 가지고 있다면: 이 경우 세상에 악이 존재할 이유가 없다.
이 문장들은 그런 사람들이 즐겨 사용한다.
마치 기독교의 신에 대한 비판처럼 읽히지만 사실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의 역설이다.

 

이전까지는 단순히 흥미로운 논변이라고 생각했지만, 최근에는 다음과 같은 의문이 들었다. 에피쿠로스의 논변의 대상이 된 신은 거룩한 존재로 알려져 있는 기독교의 신이 아니라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들만 보여줬던 최고 신 제우스나 아테네의 수호신 아테나 같은 올림푸스 신들이었다. 에피쿠로스는 왜 자신이 알던 그런 신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덕목을 기대하며 신성에 대한 의심을 했던 것일까?

 

고대 그리스인들이 신에 대한 이런 태도를 보인 것은 에피쿠로스 학파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플라톤주의와 이후의 신플라톤주의는 초월적인 "유일자(The One)"를 중심으로 한 형이상학적 체계를 발전시켰다. 유일자는 모든 존재의 근원이며, 완전하고 유일한 존재로 묘사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신을 불변하고 순수한 실현성을 가지고, 완전한 지성으로 끊임없이 사고하는 제일 원동자(Prime Mover)로 보았다. 이것들은 기독교 신학, 특히 스콜라 철학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스토아학파는 우주를 지배하는 이성적 원리인 "로고스"를 신성으로 보았다. 로고스는 우주 전체에 내재하며, 모든 자연 현상을 조화롭게 유지하는 원리이다.

 

이러한 철학적 신 개념의 재구성은 헬레니즘 시대의 혼란스러운 종교적 상황 속에서 더욱 가속화되었다. 올림푸스의 신들은 성격적 결함이 많았다. 난봉꾼 제우스, 질투와 복수에 사로잡힌 헤라를 비롯한 다수의 여신들, 스토커 아폴론, 사기꾼 헤르메스 등등... 헬레니즘 시대에 그리스 철학자들은 이러한 신들을 따르기보다는 더 완전하고 이성적인 신을 찾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완전한 존재에 대한 갈망을 담은 신관은 훗날 기독교 신학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특히 스토아학파가 내세운 로고스는 요한복음의 첫 구절인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와도 연결된다.

 

기독교 신앙에 대해 알기 위해 혼자서 성경을 읽기 시작하다 보면 큰 장벽을 맞이하게 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신앙에 대한 결심은 신이 완전하게 선한 존재이고 전지하고 전능하다는 기대에서 시작되는데 구약은 이미 헬레니즘 시대 이전에 종결된 기록이기 때문이다. 특히 창세기부터 역대기까지 신이 보여주는 행적은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신의 모습인 전지, 전능, 전선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모습이다. 야훼 신앙은 모세와 여호수아 시대인 BC 13세기에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제우스 신앙이 시작된 BC 14세기와 큰 차이는 없다. 그 당시에 야훼는 주변 지역들의 신들에 비해서 특별히 선하거나 그리 자비로운 존재는 아니었다.

 

구약의 야훼 신앙에서도 선함을 추구하는 율법 자체는 존재했으나 거기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다양한 이해관계로 얽힌 많은 사람들이 같이 살아가려면 그 정도 규범은 종교와 상관없이 필수적인 것일 뿐이었다. 또한 그 율법들은 인간에 대한 의무를 지운 것일 뿐 신이 스스로 선행과 자비를 베풀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구약의 신은 은혜나 선행보다는 오히려 가혹한 살육을 주로 보여줬다. 사람을 죽이는 일이라면 온 세상을 물에 잠기게 하거나(창세기), 홍해를 가르고(출애굽기) 해와 달의 운행을 멈출 정도의(여호수아기) 블록버스터급 대규모 기적을 행했지만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에는 우물 위치를 알려주거나(창세기), 만나와 메추라기(출애굽기), 기름과 밀가루를 약간 던져주고 가끔 피부병 환자를 고쳐주는(열왕기) 정도였다.

 

전지, 전능, 전선은 야훼에게 최초부터 있었던 고유한 신성이 아니라 자기들의 최고신 제우스의 행적을 한심하게 바라보던 고대 그리스인들이 보다 거룩하고 섬길 가치가 있는 신을 만들기 위해 도입한 철학적 신관이다. 따라서 구약의 신으로부터 그런 모습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일 수 있다. 제우스 신앙이 현재까지 이어져와서 그런 철학적 신관을 적용받았다면 제우스 역시 기독교의 신처럼 거룩하고 엄숙하고 자비로운 존재가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면서 제우스가 저질렀던 과거의 개차반 같은 행적들로 인해 신학자들은 우스꽝스러운 신정론을 만들어야만 했을 것이다.

 

현대인들은 별다른 의심 없이 전지하고 전능하고 완전히 선하다는 전제로 기독교의 신을 대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런 신관에 성경적 근거는 없다. 성경에서 드러난 신은 인간의 방종을 예상하지 못하고서 인간을 만든 것을 후회했고,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이 10명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굳이 천사를 보내야 했고, 사울의 불순종을 맞이하고는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까지도 후회하기도 했다. 이런 행적들은 전지함을 부정하는 반증이 된다. 또한 신은 출애굽기에서 모든 인간들과 직접 소통하지 않고 70인의 장로들하고만 소통하여 사람들의 불순종을 스스로 초래한 면이 있다. 이는 전능함을 의심하게 한다. 애초에 전능함을 발휘해서 사람들을 한 명씩 케어해 줬다면 사람들의 자유의지를 존중하면서도 그들의 영적 타락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인데 신의 능력상 최대로 소통 가능한 대역폭이 70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신은 특별히 선하거나 자비롭지도 않다. 그는 의례를 잘못 시행했다는 이유로 자신에게 평생 충성했던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를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살해했고, 성궤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선한 마음과 신앙심으로 성궤에 손으로 받친 웃사를 쳐서 죽여버렸다. 그에게 레위지파가 아닌 사람은 살짝 닿기만 해도 불쾌해지는 바퀴벌레 같은 존재였을 뿐이었다. 이렇듯 성경에서 신의 행적을 추적해 보면 전지전능전선은 단지 말뿐이었던 공허한 선언에 불과하다.

 

신은 성경에 근거한 존재다. 성경이 없었다면 사람들이 신의 존재 자체를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신에 대한 관념은 성경 안에서 보여주는 신의 행적들과는 큰 차이가 있다. 신이 어떤 존재인지는 성경을 기반으로 받아들여야지 그것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기 입맛에 맞춰서 왜곡을 하는 것은 신을 부정하는 태도다. 성경에 적나라하게 드러난, 전지하지도 전능하지도 전선하지도 않은 신의 모습 그 자체를 받아들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을 숭배하는 것이 진정한 신앙인의 자세이다. 신은 그 존재 자체로서 무조건적 숭배의 대상이다. 신은 인간에게 유익하거나 필요하거나 본받을만하기 때문에 믿고 따르는 존재가 아니다. 그런 태도야말로 인간의 오만에 불과하다. 성경의 초지일관한 메시지는 "신의 영광을 드높이기 위해 존재하는 인간"이다. "인간을 위한 신의 공의와 은혜"는 신앙의 핵심이 아니라 부수적이고 반사적인 효과일 뿐이다.

 

성경적으로 충실한 신앙의 자세는 욥기에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욥기는 많은 사람들이 완전히 잘못 알고 있는 경전이다. 심지어 부정적인 의미로 실린 "네 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창대하리라"라는 구절을 마치 복음이나 되는 것 같이 인용하는 사람들까지 있을 정도다. 욥기는 살코기보다 껍질이 훨씬 중요한 베이징덕 같은 경전이다. 욥기의 중간에 지루하게 이어지는 세 친구와 엘리후와의 말싸움은 베이징덕의 퍽퍽한 살코기 같은 것이다. 욥기의 핵심은 껍질에 해당하는 시작과 끝에 집중되어 있다. 신과 악마는 욥의 신앙심의 한계가 궁금했다. 그래서 그의 하인을 전부 죽이고 재산을 빼앗고 10명의 자녀들을 모두 죽이고 그를 병에 걸리게까지 했다. 후반부에 가면 욥은 자신에게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한탄하면서 신과 따져보고 싶다고 절규한다. 그러자 신은 친히 등장해서 왜 그에게 그런 고난이 생긴 지 설명을 해주지는 않고 그에게 꼬우면 네가 신 하든가라고 야단을 치더니 병을 고쳐주고 재산을 2배로 돌려주고 죽어버린 자녀들은 새 아이들로 대체해 줬다. 신이 도덕적이거나 논리적인 존재였다면 욥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미안해. 널 이렇게 힘들게 만들어도 네가 신앙심을 유지할 수 있을지 궁금해서 그랬어."

하지만 신은 추궁당하거나 사과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욥 역시 신의 사과를 받을 생각을 하지 않고 순수한 신앙심으로 계속해서 신을 숭배함으로써 진정한 신앙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리스 철학자들이 시도했듯 신을 완전한 존재로 만들고자 했던 초기 기독교 교부 신학자들의 치열한 연구를 보고 신은 이런 기분을 느끼지 않았을까?

 

교부들:
신은 완전한 존재야. 선하고 자비롭고 모든 걸 알고 계시지. 비록 성경에서 개자식 같은 모습을 보이시기도 했지만 그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그분의 섭리가 있었기 때문이야. 신께서 그런 개새끼일리는 없잖아? 그런 개새끼라면 우리가 그런 개새끼를 믿어야 할 이유도 없지. 신은 정말로 거룩한 분이야. 단지 우리의 유한한 능력으로는 무한한 그분의 전체를 완전히 파악할 수 없었고 개자식 같아 보이는 일부만 볼 수 있었을 뿐이야. 그러니까 우리는 직관적으로는 어렵지만 그 분의 진심을 믿어야 해.

 

신:
그만 좀 해. 이 미친놈들아. 이거 찬양하는 척하면서 맥이는 거지? 차라리 대놓고 욕을 하라고. 어우, 씨... 옛날에 벌인 추태가 박제되는 바람에 이게 뭔 쪽팔린 일이람...

그건 그렇고, 나는 기본적으로는 너희가 잘났든 못났든 모두를 차별 없이 사랑하려 노력하고 있어. 그런데 너네는 너희들이 제멋대로 상상한 것만큼 내가 그렇게까지 고결한 존재가 아니면 정말로 날 버릴 거야?

네가 기르는 강아지는 네가 잘났든 못났든 너를 사랑하고 따르는데 나에 대한 너의 사랑은 너를 향한 네 강아지의 사랑보다 못한거야?

Posted by 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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