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과의 왕권 경쟁에서 밀려난 아도니야는 선왕 다윗의 후궁이었던 아비삭과 자신의 혼인을 허락해달라고 요구하다가 죽임을 당했다. 구약성경 열왕기상 도입부에 등장하는 그 에피소드를 보고 뭔가 써보고 싶어졌다.
성경에서는 아도니야가 어리석고 탐욕스러우면서 분위기 파악도 못하는 한심한 인물처럼 묘사되는데 나는 그게 영웅 다윗의 아들답지 않고 굉장히 부자연스럽다고 느꼈다.
그렇게 생각하다보니 건조한 성경 문장 이면에 존재했음직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떠올랐다. 하지만 예언가 나단, 대장군 요압, 제사장 사독, 아비아달, 경호대장 브나야 등등 워낙 다양한 인물들이 나와서 그 인물들 각각에게 생명력을 넣어주고 그럴듯한 대사를 만들기는 상상만으로도 어질어질하다. 그리고 내용도 자세히 파고 들면 각종 암투들이 오고간 정치적인 이야기일 것이라서 내가 다루기에는 상당히 벅찬 주제로 보였다. 그래서 그 내용들 중 필수적인 인물들만 모아놓고 글쓰는 재미가 가장 좋을 것 같은 맛있는 부분만 골라서 초안을 써봤다.
쓰는 동안 나름 즐거웠지만 '입다와 라헬'처럼 완성된 이야기로 끌고 갈만한 에너지는 없었다. 완성된 외피를 갖추기 위해서 재미는 없으면서도 다루기는 어려운 부분을 기어코 채워넣으려고 끙끙대는 건 투입 노력 대비 쾌락이 크게 떨어지는 강박이 될 것이었다. 굳이 완성을 하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몇 시간 정도 쓰는 동안 재미있었으니까 만족한다.
불세출의 영웅 다윗왕이 늙어서 기력이 쇠진해지자 신하들은 다윗 할아버지의 이부자리를 따뜻하게 덥혀줄 여인을 선발했다. 수넴의 아름다운 소녀 아비삭이 후궁에 임명되어 예루살렘 성에 입궁한다.
아비삭은 존경하는 다윗을 가까이 하고 그로부터 지혜로운 말들을 듣게 되는 점을 영광스럽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에게 위안을 주고 필요한 존재가 된 점도 기뻤다. 그렇지만 평생을 처녀로 살아갈 인생을 떠올리보니 약간의 막막함을 느꼈다. 그것은 현재 이미 일어난 일이었지만 그녀는 그것이 아직은 먼 훗날의 일로 받아들이려는 착각 또는 자기 기만에 빠져 있었다.
아비삭이 입궐했을 때 또다른 두명의 남자가 넋을 놓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명은 그녀보다 3살 많은 아도니야. 또 한명은 그녀보다 어린 소년이었던 솔로몬이었다.
아도니야는 가마를 타고 성문 안으로 들어오는 그녀의 복잡한 표정에서 그녀가 느끼고 있던 막연한 불안과 미세한 슬픔을 읽었다. 그는 단지 예쁘기만 한 다른 궁녀들에게서는 보이지 않는 기품있고 묘한 매력을 풍기는 그녀에 대한 연민과 연정을 느낀다.
솔로몬은 낯설지만 아름다운 연상의 여인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을 느낀다.
아도니야는 곧 그녀와 친밀한 관계가 된다. 아버지의 집무실에 들를때마다 그녀와 눈을 맞추고 가끔은 다윗의 눈을 피해 사랑의 말을 건네고, 손을 잡거나 가벼운 포옹을 한다.
솔로몬은 직접적인 호감을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아비삭은 그의 첫사랑이자 짝사랑이 된다. 그리고 그녀를 알아가면서 그녀의 따뜻한 성품과 지혜로운 행동으로 그녀는 어린 솔로몬에게 이상적인 숭배의 대상이 된다.
다윗의 인구조사 때문에 전염병이 발생한 당시 솔로몬은 키만 훌쩍 클 뿐인 소년이었다. 수많은 백성들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어린 솔로몬을 아비삭은 품에 안아주고 등을 토닥이면서 이렇게 달래준다..
"왕자님. 주님께서는 자비로우신 분이라고 해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건 공의로운 심판일 뿐이고 우리가 참회하고 있으니까 주님께선 노여움을 곧 풀어주실 거예요."
어린 솔로몬은 그녀와의 포옹을 이어가고자 애써 오랫동안 불안한 척 한다. 그때 아도니야가 끼어든다.
"솔로몬 많이 힘들구나? 그런데 너무 오래 안고 있어서 부인께서 좀 곤란해 하시는것 같아. 이리와서 이 형님한테도 대신 안겨보거라."
아비삭을 포옹하면서 하는 아도니야의 대사.
"그대는 솔직해 질 필요가 있소. 아바마마께서는 틀림없이 나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만고의 영웅이셨지. 하지만 지금은 힘없고 총기가 흐려진 노인일 뿐이고. 그대는 아버님에 대한 존경심 너머의 각별한 감정이 있소? 내가 그대를 안았을 때 당신의 가슴으로부터 내게 전달되는 두근거림, 지금처럼 가빠진 당신의 뜨거운 숨결, 저녁놀같이 수줍은 미소, 당신의 이런 모습들을 폐하께서 단 한번이라도 느끼셨을까? 비록 지금 당신은 폐하께 묶인 몸이지만 아바마마께서 승하하신다면 내가 반드시 당신을 내 여자로 취하겠소. 반대하는 자들은 내 손에 피를 묻히더라도 모두 다 쳐내겠소."
아도니야의 독백
"권력 투쟁이라면 지긋지긋해. 예전에 있었던 형님들의 다툼과 죽음. 압살롬 형님이 저지른 아바마마에 대한 배신과 반역. 모두 끔찍했어. 나는 그런 걸 결코 원치 않아. 야망보다는 행복이 우선이야. 그러나 왕의 여자였던 아비삭 그녀를 내 것으로 하기 위해서 나는 왕이 되는 방법 말고는 다른 수단이 없어. 그러기 위해선 미리미리 내가 왕권을 계승하는 걸 기정사실화 해야 해. 폐하께서 아직 살아계신데 이런 불경한 모습을 보이는게 주님과 아버지께 죄스럽고 스스로 너무 부끄럽다. 아아 괴롭구나. 왜 나는 어리석게도 그녀를 가지겠다는 욕망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걸까?"
아비삭에 대한 다윗의 대사
"그 때 나는 철없는 목동이었을 뿐이었고 멍청하게도 주님을 다소 의심했었어. 바보 같이 무화과만한 돌을 다섯개나 챙겨갔지 뭐니? 하하하. 주님을 믿었다면 하나만으로 충분했단 걸 알았을텐데. 그 첫번째 돌은 주님의 인도를 받고 정확히 그 거인의 투구 사이를 비집고 그의 이마를 부숴버렸어. 그 거인 이름이 뭐였더라... 요즘 들어 예전 기억까지도 가물가물하구나. 어쨌든 나는 재빨리 그 거인이 찬 칼로 그의 목을 베어버렸지. 뭐라고? 이미 여러 번 했던 말이라고? 지겨웠을텐데 미안하구나. 늙으니까 기억력이 나빠져서 했던 말을 또 했구나...하하....그런데 말이야....
이제 나는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구나. 이 늙은이가 죽더라도 너는 절대로 수절할 필요가 없어. 나는 너에게 이미 큰 은혜를 입었단다. 너는 비록 명목상으론 내 후궁이지만 어디까지나 순결한 처녀인걸 주님께서도 알고 계시단다. 나머지 인생은 너의 행복만을 위해서 살거라. 상대가 누구라도 좋아. 그게 내 아들 아도니야더라도 말이야. 놀라지 말거라. 내가 눈과 귀는 어두워졌지만 아직 바보는 아니라서 대충은 알고 있었단다. 네가 원한다면 유언장에 그 이야기를 넣어주마. 다 죽어가는 이 늙은이의 품에 따뜻하게 안겨주며 좋은 시절을 흘려보내고 있는 너를 항상 고맙고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단다."
밧세바와 아비삭의 대화.
"폐하께서 승하하시고 나서 자네가 얼마나 상심이 크고 불안을 느끼고 있는지 나도 잘 알고 있네. 궐 안의 여인에게는 역시 의지할 남자가 필요해. 다행히 나에겐 내 아들, 솔로몬이라도 남았지만 자네는 상실감이 더 크겠어. 자네는 비록 폐하와 같은 침대를 썼지만 몸을 섞지는 않았잖아. 자네, 우리 솔로몬 폐하를 어떻게 생각하나? 그 얼굴만 잘난 아도니야보다 왕위를 계승하신 폐하께서 자네의 배필로 훨씬 낫지 않겠어?"
"형님, 충고는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폐하는 저에겐 의지할 수 있는 남자라기보단 단지 귀여운 동생 같은 분이신걸요."
솔로몬에게 말하는 밧세바의 대사
"폐하. 외람되오나, 폐하께서는 부정한 여인인 나, '밧세바로부터 태어난 차남'입니다. 그 점 때문에 폐하는 종종 정통성에 대한 불경스런 도전을 받게 되실 겁니다. 폐하의 친형은 이 어미의 죄를 이유로 아기 때 주님께서 목숨을 거두어 가셨지만 아무도 그 아기를 동정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부정한 여자이지만 어미로서 폐하는 반드시 지켜낼 것입니다."
(잠시 눈물을 흘림)
"폐하께서 스스로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선왕께서 남기신 유산을 빠뜨리지 말고 모두 계승하셔야 합니다. 그 중에서 가장 강력한 것은 선왕의 온기와 숨결이 베여있는 성궤와 같은 존재, 아비삭 바로 그 아이입니다. 네 어미이자 수십년간 궁중 생활을 한 닳아빠진 늙은이로서 권한단다. 아비삭 그 아이를 네가 반드시 취하거라."
밧세바와 아도니야의 대화.
"어마마마. 고민거리가 있어서 이렇게 찾아뵙습니다."
"어서오세요. 왕자. 저에게 무슨 물어보실 일이라도?"
"어머님의 아들, 저 아도니야는 아바마마께서 남기신 유산 중에 탐나는 것이 없습니다. 왕위를 탐냈던 죄인인 저를 너그럽게 용서해주신 솔로몬 폐하의 은혜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한가하고 풍족한 왕자로서의 생활에 지금도 충분히 만족합니다. 다만 외롭게 궁중에 갇혀 지낼 아비삭이 항상 눈에 밟힙니다."
"아비삭이요? 하긴 그 아이는 한때 왕의 여자가 되었다는 죄로 처녀로 늙게 생겼군요. 나도 아름답고 사랑스런 그 아이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답니다."
"어마마마께만 말씀드리는 비밀입니다. 사실 아비삭과 저는 서로 연모하는 감정이 있습니다. 아바마마께서도 승하하셨으니 이제 아비삭을 해방시켜주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하지만 제가 그런 요청을 드리는 것이 폐하의 권위에 대한 반역으로 오해를 받을까 걱정이 됩니다. 폐하는 제 아우이지만 저는 폐하의 충성된 신하로 남고 싶습니다."
"그 점은 염려하지 마세요. 폐하께서는 주님으로부터 지혜로움을 선물받은 분이시랍니다. 왕자님께서 별다른 야망이 없다는 점은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제가 왕자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폐하의 어미로서 좋은 말로 부탁드려볼게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정말 감사합니다. 어마마마.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아도니야의 부탁을 전달한 밧세바와 솔로몬의 대화.
"폐하. 아도니야 그 미련한 것이 아비삭을 달라더군요. 호호호. 발정이라도 난 걸까요? 아니면 그 옛날 사울 왕처럼 악령이 든 걸까요? 이건 주님께서 지혜로운 폐하께 주신 기회입니다."
"어머니, 형님께서 별다른 욕심을 부리지 않고 계시단걸 저도 압니다. 하지만 저는 아바마마의 유지를 받들어 요압 그자를 반드시 죽여야합니다. 마침 형님께서 좋은 명분을 선물하신 셈이군요. 어머니 말씀대로 성궤와 다름없는 그녀를 요구한건 형님의 진심과는 상관없이 명백한 실책이었습니다. 형님에게 칼을 대는 게 마음이 편하진 않지만 불안 요소를 남겨놓을 수는 없지요. 아비삭은 어머니 말씀대로 저의 전리품으로 삼겠습니다. 형님은 저에게 최고의 선물을 하신 셈이군요. 하하하."
처형되는 상황에서 아도니야의 대사.
이보게 브나야 장군. 이게 폐하의 명령이라고? 믿을수가 없군. 폐하를 만나게 해주게. 아니 어마마마를 만나고 싶네. 마지막 부탁이니 제발 어마마마를 불러주게. 그런다면 죽더라도 아무도 원망하지 않겠네.
아도니야가 알고 있는 자애로운 밧세바와 달리 그녀의 영혼은 그리 맑지 못했다. 밧세바는 다윗이 자신을 갈망하게 하기 위해서 다윗이 성에서 내려다 볼 수 있을 만한 곳을 찾아내서 목욕을 했고 그로 인해 남편 우리야를 죽음으로 몰아간 적이 있는 여자였다. 적장자인 자신이 동생 솔로몬에게 왕위를 빼앗긴 결정적인 계기도 그녀가 만들어낸 거짓 때문이었다는 걸 그는 애써 부정하고 싶었다. 오히려 그 점이 그녀의 죄책감을 자극해서 자신에게 활로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순진한 희망마저 품었다.
아도니야의 부탁에 따라 밧세바 등장.
왕의 여자를 탐하고도 살겠다는 생각을 하다니 참 뻔뻔스럽군. 겨우 그런 말을 하려고 날 부른건가?
아비삭이 피투성이가 된 아도니야의 시신을 끌어안고.
" 왕자님!!!... 굳이... 왜 그런 요청을 하셨나요?...아아아, 사랑하는 아도니야,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란 말인가요? 하늘에 계신 선왕 폐하. 이렇게 당신의 아들이 또다시 비명에 당신의 품으로 갔습니다. 선왕 폐하... 존경하는 임금님...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에게 지혜를 나눠주세요."
아도니야가 흘린 피로 범벅이 된 아비삭이 차가운 목소리로 솔로몬에게 말함.
"선왕께서는 저에게 선택권을 주셨어요. 그날 저를 훔쳐보려고 숨어 계시다가 같이 듣지 않으셨나요? 왜 이렇게까지 하신건가요? 왜요? '너의 가문에 칼이 그치지 않을 거'라는 주님의 저주를 직접 실행하셔서 주님의 충실한 종으로서 의무를 다하신 건가요? 그 순진하고 따뜻했던 소년은 어디로 갔나요? 폐하, 저는 살아갈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주신 쓸모는 선왕을 보좌하는 것으로 이미 끝났습니다. 저는 선왕의 마지막을 가장 가까이서 모셨던 몸입니다. 왕국의 위엄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부하를 시키지 말고 선왕의 아들이신 폐하께서 직접, 쓸모없어진 이 몸을 베어서 세상에서 없애주세요."
솔로몬이 따뜻한 목소리로 한 대답.
"선왕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다고 하셨소? 금시초문이군. 위대하고 지혜로우신 선왕께선 당신께서 가지신 모든 것을 내게 물려주셨소. 선왕의 유산을 승계하는 것은 그대 역시 내 사람이라는 뜻이오."
솔로몬은 아도니야의 피가 잔뜩 묻어있는 아비삭을 껴안고 그녀의 등을 토닥여준다. 아비삭은 밀어내려고 발버둥쳤지만 솔로몬은 놓아주지 않는다.
"그대는 인간 중에서 가장 존귀한 왕인 짐의 소유요. 게다가 그대는 나에게도 매우 각별한 의미가 있는 사람이니 스스로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시오. 그대가 짐에게 화가 단단히 난 것 같으니 오늘은 이만 물러나겠소. 내가 위로에 능한 사람들을 몇 명 붙여줄테니 며칠 동안 마음을 진정하고 나서 다시 봅시다."
이후 솔로몬은 700명의 처와 300명의 첩을 거느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 날 이후에 그의 마음 구석에 조그맣게 자리잡게 된 공허감은 끝내 채워지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