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은 아직 욥기를 다 읽기 전에 작성했던 내 이전 글들에서도 여러 번 언급된 인물이다.

얼마 전에 욥기를 다 읽었고 전보다 정확한 분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사람들이 욥기에 대해서 흔히 설명하는 해석과는 상당히 다른 의미를 읽을 수 있었다. 내가 파악한 욥기의 핵심은 욥과 그 친구들, 나중에 끼어든 엘리후와의 신정론적인 논박이 지루하게 이어진 중반부가 아니라 발단과 결말부에 비교적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었다.

 

욥은 신과 사탄이 공인한 의로운 자였다. 하지만 욥기를 읽다 보면 마치 욥이 실은 의롭지 않으면서 자신의 오만으로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기는, 자기 객관화를 하지 못하는 사람인 양 몰아가는 듯한 저자의 태도가 엿보인다. 그 점이 얼핏 보기에는 논리적 일관성이 결여된 허술함으로 보였다.

 

하지만 욥은 틀림없이 신에게 의로운 사람이라는 인증을 받았다. 그의 의로움은 그가 시험을 당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따라서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긴 욥의 메타인지는 매우 정확했다.
그는 확고부동하게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누구 앞에서도 떳떳할 수 있었다. 친구들의 비난에 가스라이팅을 당하지 않았고, 위선에 빠지거나 비굴해지지 않고 자기의 결백에 대한 확신을 당당하게 이어갔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결국 신이 직접 등장해서 욥을 신의 권위로 찍어 눌러버린다. 욥이 의로운 자인걸 신 스스로도 인정했기 때문에 논리보다는 권위를 동원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사람들이 욥기의 의미에 대해 복잡하고 난해한 분석을 하지만 욥기의 저자가 굳이 숨겨놓지 않았던 진짜 메세지는 의외로 단순한 것일 수 있다. 욥기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욥이 당한 고난의 원인에 대해 인간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심오한 신의 섭리가 있을 거라고 지레짐작을 하고 있다. 이는 부조리한 세상을 바라보며 그 이유를 찾기 어려워하는 보통의 신앙인들과 공통된 태도를 상징하는 것 같다. 그러나 욥기의 저자는 욥기의 도입부에서 이미 명백히 답을 알려줬다. 그것은 단지 욥의 신앙심에 대한 신과 사탄의 호기심 충족이라는 매우 단순하고 수준 낮은 동기에서 비롯된 사건에 불과했었다는 점이다. 잠자리 뒷날개 두개를 살짝 뜯어내도 잠자리가 날 수 있을까 라는 어린아이의 순수하고 잔혹한 호기심 같은 것이다. 신과 사탄의 입으로 그 이유가 이미 다 밝혀진 상태에서 이후에 이어지는 욥의 친구들과 엘리후의 논변들은 헛되고 공허한 공상에 불과한 셈이 된다. 

 

어쩌면 욥기의 저자는 신은 무조건 정의롭다는 확증편향을 가지고 신의 모든 행위가 인간의 정의관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여기는 태도를 비판하고자 했을 수 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이해하기 어려운 재난과 부조리 등을 인간의 구미에 맞는 방법으로 신의 의도를 추측하여 끼워맞추려는 시도가 무의미한 헛수고라는 것이 어쩌면 핵심일 수도 있다. 욥기를 통해 신은 비록 불의해보이는 일을 하더라도 인간에게 추궁받지 않는 절대적 존재라는 구분을 확실히 보여준 셈이다.


욥기의 내용을 현대적인 관점으로 신과 인간의 관계가 아닌 인간끼리의 관계로 재구성하여 비유하면 이런 부조리극이 만들어진다.

어떤 건물주가 사업상 가끔 발생하는 껄끄러운 일을 깔끔하게 해결하려고 고용한 해결사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기의 선량하고 성실한 세입자를 자랑했다. 그러자 그 해결사가 이런 의문을 제기했다.
"사장님 말씀이 흥미롭습니다. 그렇지만 만약 그 세입자가 어려운 처지에 빠져도 끝까지 좋은 세입자로 남을 수 있을까요?"

건물주는 그 세입자의 밑바닥 근본적인 사람됨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서 그 해결사에게 가게를 다 때려 부숴보라고 시켰다. 그 와중에 세입자가 자식처럼 생각하던 강아지 10마리도 죽임을 당했고 자신도 폭행을 당해서 입원을 했다.
세입자는 절망했다. 친구들이 병문안을 왔는데, 위로는 하지 않고 악담만 퍼부었다.
"네가 계약 이행을 잘 안 했나 보지.", "계약서에 설비 좀 부숴도 면책이라는 조항도 있는 것 같다", "스스로를 무결한 존재로 생각하는 너의 자기중심적인 성격 자체가 문제다.", "네 강아지들 솔직히 너무 시끄러웠다."등등
이런 식으로 세 명의 친구들은 별다른 근거도 없이 무조건 건물주가 옳았을 것이라는 확증편향에 빠져서 세입자를 비난했다.

세입자는 자기는 계약을 잘 이행했고 아무리 건물주라도 계약을 성실히 이행 중인 자신에게 이럴 수는 없다고 항변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세입자의 의무인 다음 달 월세를 건물주에게 납부할 거고 영업을 이어가겠다고 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한 사람이 그 이야기들을 듣고는 세입자에게 한마디 한다.
그 건물주는 대법원장 출신 로펌 대표인데 아무 법적 근거도 없이 그런 행패를 부렸겠느냐고 건물주를 두둔했다. 그러더니 몇 가지 법률 상식들을 언급하고 "당신은 이런 거 아십니까?"라고 물어보고 세입자가 모르겠다고 하니까 "그것 보세요. 당신은 그렇게 무지합니다. 무식한 사람은 겸손해야 합니다. 당신이 뭔가 잘못 알았겠지요."라고 다시 그를 탓했다.

그때, 폭풍이 불면서 대법원장 출신 로펌대표인 건물주가 병문안을 온다. 건물주는 뜬금없이 세입자에게 그가 당한 피해와는 아무 상관없는 자신의 뛰어난 법률 지식들을 나열하기도 하고 자기 건물의 역사와 그 건물을 지을 때의 설계나 설비의 작동 원리, 심지어 자기가 과거에 판사로서 얼마나 훌륭한 판결을 내렸는지, 변호사로서는 가망 없다고 여겨진 사건을 어떻게 승소로 이끌어냈는지 같은 불필요한 이야기들을 폭풍처럼 숨쉴 틈 없이 늘어놓으면서 너 따위가 뭘 아느냐, 뭐가 그렇게 잘났냐고 야단을 친다. 그리고 꼬우면 네가 건물 짓고 거기서 장사하라고까지 말한다.
세입자는 건물주의 위풍당당한 태도에 압도당해서 아래와 같은 핵심적인 질문을 놓쳤다.
"그거랑 제 가게가 박살 나고 제 강아지들이 죽임을 당한 게 무슨 상관입니까? 그리고 제가 세입자로서의 의무를 위반했습니까? 무식하고 못난 사람은 무슨 일을 당해도 괜찮은 겁니까?"

위세 좋은 건물주는 장광설을 늘어놓고는, "이거면 됐냐?"라고 말하고는 10억 원짜리 수표와 애견샵에서 새로 사 온 강아지 10마리를 던져 주고 떠나 버린다. 건물주는 착해 빠진 세입자가 대법원장 출신인 자기가 쏟아내는 투 머치 토크와 막강한 기세에 순간적으로 눌려버린 덕분에 그로부터 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받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느꼈다. 또한 건물주는 세입자가 당한 재난의 근원적 원인이 자기와 해결사가 세입자의 성실성에 대해 느꼈던 얕은 호기심이었다는 점을 끝까지 숨겨서 자기의 체면을 지켰다는 점에 안도했다. 논쟁의 상대를 혼란에 빠뜨리는 화려한 논변으로 법조계에서 높은 명성을 쌓아올리고 있던 대법원장 출신 로펌 대표 건물주는 순박한 세입자를 잠시 뇌정지에 빠뜨리게 했던 자신의 능수능란한 대화 전략으로 체면이 깎일 수도 있었던 그 순간을 모면했다는 점에 스스로 만족했다. 이미 차고 넘칠 정도의 보상도 쥐어줬으니 세입자가 더 이상 따지려고 들 것 같지도 않았다.
세입자가 건물주로부터 받은 새로 강아지 10 마리 중에서 특히 눈에 띄었던 3 마리의 이름은 각각 여미마, 긋시아, 게렌합북이었는데 너무 예뻐서 동네에 소문이 자자할 정도였다. 세입자는 보상으로 받은 10억 원으로 가게를 대대적으로 수리했고 그의 사업은 이후에 더 번창하게 되었다.

 

욥기의 저자가 말하고 싶었던 점에 대해 앞선 설명을 좀 더 부연해보겠다. 이미 신의 단순하고 잔혹했던 의도를 적나라하게 밝혀놓고 이후에 욥에게 그 이유를 차마 말하지 못하고 윽박만 지르던 신을 보여주면서 욥기의 저자는 아마도 신앙의 절대성에 대한 가르침을 주고자 했던 것 같다. 대법원장 출신 로펌대표인 건물주와 신은 완전히 다른 존재다. 욥기 이야기를 건물주와 세입자로 대체하면 우스꽝스런 부조리극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신이 역사한 일이면 이렇게 희화화할 수 없는 거룩한 이야기가 된다. 그것이 신성의 절대성이다. 욥기의 저자가 사람들에게 충고하고자 한 것은 신의 뜻을 짐작하기 위해 불필요한 망상에 빠질 것 없이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것으로 보인다. 신은 섬김의 대상일 뿐 탐구와 추궁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는 어쩌면 신은 반드시 선해야만 한다는 신정론보다 오히려 더 순수하고 엄격하게 신을 섬기는 자세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런 신앙관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욥은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이민족이다. 우스라고 표현된, 이스라엘과는 다른 지역에서 대를 이어간 욥의 후손들에게 야훼에 대한 신앙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은 그런 무조건적이고 엄격한 신앙심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을 보여준다.

Posted by 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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