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산상 설교 중 마태복음 5장 28절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는 이미 그 마음으로 여자를 범하였다는 내용이다. 예수가 직접 한 말이기 때문에 다른 해석의 여지가 없는 극도로 엄격한 기준이다. 단지 그런 마음이 든 것은 엄밀히 따져보면 율법을 어긴 것도 아니고 악한 의도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흉측한 외모를 가진 사람을 보면 반사적으로 거부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성적이고 선량한 사람이라면 순간적인 자신의 태도를 반성하고 그에게 편견 없는 태도를 가지려고 노력을 하게 된다. 마태복음에서 죄라고 매도한 본능적인 끌림은 불완전한 육체와 감정을 가진 인간으로서 무의식적인 반응에 불과하다. 오히려 그런 음욕이 있었음에도 실행에 옮기지 않은 자제력은 죄보다는 오히려 미덕에 가깝다. 단지 음욕만으로 지옥에서 고통을 받게 된다면 기왕 음욕을 느낀 김에 그것을 실행이라도 하고 지옥에 던져지는 게 덜 억울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이렇듯 도덕적 결단과 자제심은 칭찬받아 마땅하지만 예수는 이것조차 죄로 보았다. 누구보다 사랑과 용서를 강조하는 예수인데도 왜 그랬을까? 

문제의 핵심은 대속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예수가 우리의 죄를 대속했다는 주장에 대해서 양심적이고 선량한 비기독교인은 "나는 어차피 죄가 없기 때문에 용서받아야 할 것도 없고 은혜를 입었다고 할 만한 것도 없다"라고 반박할 수 있다. 그런 주장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죄의 개념을 광범위하게 설정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계획도 실행도 없는 다만 통제 불가능한 생물적인 충동 그 자체까지도 죄로 규정한 것으로 보인다. 인간은 물적인 육체가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죄의 기준을 엄격하게 설정하면 마음먹기에 따라 누구든 죄인으로 만들 수 있다. 예를 들어 너는 네 몸 하나를 건사하기 위해서 수 억 개의 밀알이 생명으로 피어날 가능성을 해쳤다라고 몰아붙일 수도 있다. 기독교와 구약 신앙을 공유하는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기독교와 달리 아담과 하와에 의한 원죄가 현재의 인간에게 유전된다고 보지 않는다. 그 두 종교는 원죄와 함께 예수의 대속 역시 인정하지 않는다. 반면 기독교는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어야 예수의 대속과 구원이 의미가 생기기 때문에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는 원죄라는 개념이 필요했던 걸로 보인다.

기독교의 원죄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첫째는 하와와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사실이 대대로 후손들을 죄인으로 만든다는 관점이다.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죄로 인해 죄인이 된다는 것은 현대적인 관점에서는 합리적이지 않아 보인다. 구약과 신약이 쓰여진 고대 사회에서는 어떤 사람이 잘못을 저질러서 노예가 된다면 그의 자손들도 대대로 노예가 되는 것은 흔한 일이었기 때문에 이런 관점이 힘을 얻은 것 같다. 5세기 신학자 펠라기우스는 이에 반대하다가 이단으로 몰려 정죄되었다. 이렇듯 원죄가 후손에게 유전된다는 이론은 그 자체의 합리성보다는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권력에 의해 결정된 측면이 있다.  그러나 현대적인 문명인중 다수는 그런 옹졸한 신에 대해 별다른 존중과 존경을 느끼지 못한다. 편의를 위해 이후 이 관점을 "뒤끝 심한 신 이론"이라고 칭하겠다.

로마서 5장과 아우구스티누스, 아퀴나스의 해석은 뒤끝 심한 신 이론의 입장을 따른다. 그런데 허락 없이 과일을 따먹은 그 하나의 행동으로 수천 년간 대를 이어서 후손에게까지 죄가 있다고 가스라이팅을 하는 것은 일반적인 인간이 가지는 관용과 품성 정도라도 취하지 않을 옹졸함이다. 공의롭다고 알려진 신이 그럴리는 없기 때문에 이 이론은 설득력이 강하지 못하다.

 

또 다른 관점은 선악과를 따먹은 행위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서 신과의 연결이 끊어지고 죄를 저지르기 쉬운 상태에 놓여졌다는 관점이다. 이후에 이를 "신과의 단절 이론"으로 명명하겠다.
이 입장에서 원죄란 선악과를 따먹은 게 아니라 그로 인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서 신과 연결이 끊어지고 죄를 저지르기 쉬운 숙명에 처한 인류의 상태를 의미한다. 즉 누구든 죄를 짓지 않고 사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너는 틀림없이 죄인이다라고 일방적으로 선언하는 것이다. 높은 가능성을 실제 발생한 사실로 받아들이는 셈이다. 어떤 고결한 인격자가 있어서 마치 부처나 예수처럼 실제로 살면서 단 한 번도 죄를 짓지 않았다고 치자. 그는 신과 연결이 끊어져서 죄와 유혹에 쉽게 노출되는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어려운 성취를 달성해 냈다. 신과의 단절 이론에 따르면 그는 그럼에도 죄인이다. 잠재적 범죄성향과 실재하는 범죄자를 구별하지 못한 것인데 현대적 관점에서는 일종의 망상 장애로 보일 수 있다.


또한 신과의 단절 이론에는 자체적인 모순점이 있다. 하와는 신과의 연결이 끊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도 신의 명령을 어긴 죄를 저질렀다. 하와는 단지 뱀에게 속을 만큼 순진했고 호기심을 견디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녀가 죄를 지은 이유는 순진함과 자유의지 때문에 죄를 저지르기 쉬운 상태가 된 것이지 신과의 단절 때문이 아니었다. 하와는 오히려 선악과를 먹지 않았기 때문에 뱀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것일 수 있다. 결과적으로 하와가 죄를 짓게 한 속성은 신이 하와에게 스스로 부여한 것이었다. 즉 신과의 단절이 아닌 신과의 연결이 오히려 죄를 부추긴 측면이 있다.

정리하자면, 공의로움이라는 신의 속성을 고려할 때는 신과의 단절 이론이 그나마 설득력이 있지다. 그러나 그 이론은 예시로 든 하와의 사례처럼 자체 모순이 발견된다는 단점이 있다. 한편 신이 공의롭다는 명제를 포기하는 문제가 있지만 이론 자체의 내부적 완결성 측면에서는 뒤끝 심한 신 이론이 오히려 나은 면도 있다.

다만 뒤끝 있는 신 이론을 따를 경우 인간의 죄에 대해 신이 용서할 윤리적 정당성이 있는지를 의심할 여지가 생긴다. 그 이론이라면 신은 자비롭고 공의롭다기보다는 옹졸하고 뒤끝이 심한 존재라서 인간에 대한 도덕적인 우월성이 보장되지 않는다. 어떤 포악한 왕 앞에서 어떤 신하가 기침을 한다. 왕은 기침을 한 신하를 무엄하다고 꾸짖으며 벌을 내리려고 하다가 갑자기 변덕스러운 자비심이 생겨서 용서를 한다. 이런 사례에서 왕이 용서를 할 수 있었던 근거는 그가 높은 도덕적 지위를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권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옹졸하고 뒤끝 심한 신의 용서는 윤리적인 용서라기보다는 권력적인 용서에 불과해진다.

 

이렇듯 원죄는 깊게 파고들수록 자체적인 모순점이 많아지고 신의 거룩함이 감소되는 추론으로 연결되는 위험이 있다. 그리고 원죄론의 공통적인 문제 중 하나는 아무리 깨끗하게 살아도 죄인에 불과하므로 사람들은 무결한 삶을 추구하기보다는 적당히 죄를 저지르다가 나중에 한꺼번에 용서받는 길을 선택할 유인이 생긴다는 점이다.

대속은 사랑과 희생이라는 교리의 핵심이기 때문에 쉽사리 포기할 수는 없다. 다만 대속에 합리성을 부여하기 위해 원죄론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유대교와 이슬람교에서는 발생하지 않는 신학적 도전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굳이 원죄까지 끌어오지 않더라도 인간은 이미 많은 죄를 지으며 살아가는 존재다. 굳이 아담과 하와를 들먹이며 신을 속좁은 존재로 격하시키지 않더라도 충분히 대속을 설명할 수 있다. 그 방법은 신앙인 스스로 비 신앙인에 비해 높은 도덕적 기준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증명하면서도 위선과 가식이 느껴지지 않는 수준에서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칭하면서 사람들에게 높은 윤리적 경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Posted by 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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