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매드사이언티스트가 불교를 접했다가 매우 큰 감명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깨달았다고 여기면서 보살행을 실천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누구나 부처가 될 불성은 있다고들 하지. 하지만 사람들의 근기는 모두 달라서 불성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카르마를 축척하기만 하는 사람도 무수히 많은 건 사실이야. 이해하기 쉽게 수치화시켜서 예를 들면 그런 사람들은 이번 생에는 누적 카르마 100 다음 생에는 104 그다음 생에는 113 이런 식으로 쌓기만 해서 결코 0으로 만들지 못해. 카르마로 형성된 자기의 기존 습관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야. 알코올 중독자가 술이 나쁘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술을 마셔대면서 점차적으로 몸이 망가지다가 죽는 것과 같지. 그런 사람은 불성이 있다지만 이론적으로 영원히 윤회에서 벗어날 수 없어. 알코올 중독자는 그의 자유 의지만 믿고 술 마실 자유를 존중해 주기보다는 적극적인 도움이 필요해. 물론 불교 경전에서는 모든 사람이 부처가 될 수 있다고는 하지. 그런데 그런 경전들에 따르면 수천억 번 이상의 윤회를 통해서야 달성이 가능하다잖아. 그 기간 동안에 그들이 겪을 고통의 총량을 생각하면 나는 그들에 대한 무한한 연민을 느낀다. 어차피 수 천억 번 죽어야 달성이 가능한 것을 나는 단 한 번의 죽음으로 사실상 똑같은 결과를 만들어줄 수 있다. 나는 대자대비심을 발휘하고 싶다. 이런 사람들까지 모두 영원에 가까운 윤회에서 구해내주는 것이 나만 할 수 있는 궁극의 대자대비 보살행이지.
이런 생각 끝에 그는 미니 블랙홀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그가 생각한 미니 블랙홀의 장점은 이렇다. 미니 블랙홀은 빛에 근접한 속도로 지구를 집어삼킨다. 그런 와중에 모든 사람은 원자를 넘어 입자 단위로 분해된다. 통각의 전기 신호가 뇌에 전달되기 전에 뇌가 사라지기 때문에 인간들은 죽으면서도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일반적인 경우는 업에 의해 새로이 오온이 재조합되는 게 맞는데 그의 방법은 업의 씨앗이 심길 밭 자체를 소멸시키는 방법이다. 생식 행위를 할 인간이 모두 없어져서 새로운 인체의 생성이 불가능해진다. 그렇게 카르마가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인간들은 윤회에서 벗어나게 된다. 세상을 순간적으로 증발시킬 수 있다는 현대 과학 이론을 부처님 시대에는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부처님은 오직 업의 씨앗을 소멸시키는 해탈만을 윤회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으로 보았을 뿐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카르마가 남아 있어도 윤회가 중지될 수 있다는 것을 당시 지식 수준의 한계로 부처님은 상상하지 못했을 뿐이다. 블랙홀을 생성해서 가장 먼저 죽을 사람은 그것에서 가장 가까이 있을 자기 자신이다. 그 계획이 타인에 대한 일방적인 학살이라기보다는 자신의 희생도 포함된 대승적인 결정이라고 그는 믿었다.
그는 미니 블랙홀 생성기를 마침내 개발해냈고 버튼을 눌렀다. 그가 버튼에서 손을 떼면 미니 블랙홀이 생성되고 지구는 순식간에 사라지게 되는 상황이다. 그가 정해놓은 암호문을 입력하면 버튼 누름을 취소할 수 있다. 그는 버튼을 놓기 전에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보기로 한다.
질문자 1:
당신의 주장에 따라 블랙홀을 만들면 인간도, 축생도는 확실히 없어질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당신이 없애지 못할 지옥, 아귀, 수라, 천상도에서 윤회하게 될 텐데 쓸데없는 일을 시도하시는 거 아닌가요? 그리고 지옥, 아귀, 수라에서 공덕을 쌓아서 인간도로 오게 될 존재들의 기회를 빼앗는 것이잖아요. 그러지 마세요. 그리고 육신은 없지만 정신이 고통을 당할 수도 있잖아요?
답변 1:
육도는 인간의 삶의 양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의미도 있고 한편으론 질문자님이 말씀한 대로 우리가 실제 사는 세계와 별개의 차원처럼 받아들여지는 면도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라면 제가 생성할 블랙홀로 모든 인간이 사라지니까 다른 도에서 태어나는 점에 대한 우려는 무의미합니다. 그러나 이는 질문자님의 우려와는 관계가 없는 내용이니 의도하신 내용에 대한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현재 인간도에서 살고 있던 사람이 이번생에 특별한 카르마를 만들지 않았다면 인간도에서 윤회하게 됩니다. 물론 이번 생에 죄를 지은 사람이라면 아귀, 수라, 지옥 특별한 공덕을 쌓은 사람은 천상도로 갈 수도 있겠지만 대체로는 인간도에서 윤회할 예정일 것입니다. 인간도에 맞는 업을 가진 존재가 인간도가 아닌 곳에서 태어나는 것은 애당초 자신의 카르마에 정확하게 맞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불가능합니다. 부실 대학교가 폐교하면 주변의 다른 대학에서 학생들의 편입을 의무적으로 받아주긴 합니다. 그러나 육도 윤회는 누군가에 의해서 관리되는 것이 아니라 인위성 없는 자연스러운 섭리입니다. 윤회는 섭리에 따라서 정확히 자신의 업에 따라서 발생합니다. 예를 들어 인간도가 없어졌다고 해서 인간도에 윤회해야만 할 업이 천상도나 수라도로 가는 것은 업의 원칙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이코노미석이 오버부킹 되었다고 비즈니스석으로 옮겨주는 건 항공사에서나 어울리는 일입니다. 오온의 연기로 개체가 만들어지지 않으면 업을 지을 주체가 없어서 새로운 업의 생성이 중단되어 정체 상태가 됩니다. 그러므로 연기의 작용을 감안하더라도 인간도가 아닌 곳에서 윤회할 가능성은 봉쇄되는 것이지요. 한마디 덧붙인다면, 이것은 인간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카르마 때문에 보다 높은 존재가 되지 못하고 축생도에서 윤회하는 동물들에게도 윤회에서 벗어나게 하는 효과가 있어서 매우 큰 은혜가 됩니다.
평소에 염불을 하신 분이라면 아미타 부처님의 극락정토에 가게 될 것입니다. 거기서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두 분의 지도 하에 정정진 하여 진정한 열반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저의 편법보단 전통적인 정도가 좋다는 건 인정합니다. 그러나 굳이 극락정토 아니라도 별 상관은 없습니다. 편법이든 정도이든 어떻게 되든 고통스런 윤회가 반복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지옥, 아귀, 수라에서 공덕을 쌓아서 그곳을 벗어나 인간도에서 윤회를 하게 될 존재들에 대한 연민과 걱정도 사실은 불필요합니다. 그들이 오게 될 인간도가 없어졌기 때문에 그들 역시 윤회에서 벗어나는 효과를 우리와 함께 누리게 됩니다. 그들 역시 저를 원망하기보다는 저에게 감사를 해야 하는 처지지요.
정신적 고통에 대해서도 크게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아트만을 부정합니다. 아트만이 없기 때문에 오온이 연기로 결합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고통을 느낄 주체라고 할만한 것이 없습니다. 아뢰야식이 정신적 고통을 겪을 것이라고 걱정하는 의견도 듣긴 했는데 그건 아뢰야식과 아트만을 혼동한 오해 때문입니다. 오온이 결합하지 않는 상황에서 오온 중 하나인 식에 포함된 아뢰야식이 단독으로 고통을 느끼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메모리 카드에 아무리 많은 데이터가 들어있어도 카드 하나만 가지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질문자 2:
살생은 계율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당신은 불자이기 때문에 살생을 금한다는 계율을 존중해야 합니다.
답변 2:
단지 계율이라는 이유만으로 무비판적으로 따를 일이 아닙니다. 계율이란 해탈을 위한 도구이자 방편일 뿐입니다. 살생이 왜 악인 지를 면밀히 따져봐야 합니다. 살생은 타인에게 고통과 피해를 주고 자신에게 카르마를 쌓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의 행위는 카르마를 쌓더라도 그 카르마가 나에게는 아무런 불이익을 만들지 않습니다. 블랙홀 발생 후에는 오온이 연기로 조합하는 것이 불가능해져서 제가 윤회를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윤회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것은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라 이익을 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피해라고 보는 것 자체가 윤회를 벗어나는 대신에 삶과 윤회를 이어가겠다는 집착이므로 탐진치 중 하나인 어리석음입니다.
그리고 계율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그 맥락을 잘 이해하는 게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불살생 계율을 지키기 위해 승려들은 고기를 먹지 않지만 성장기인 동자승들에게는 신체의 균형 있는 발달이 필요해서 고기나 달걀의 섭취를 허용합니다.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외세의 침략이 있었을 때마다 영웅적인 승려들은 호국 불교라는 기치를 내걸고 적들을 기꺼이 살해하여 나라를 지켜내곤 했습니다. 저의 대자대비한 마음도 맥락상 이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질문자 3:
보살님께서는 결과적인 측면만 보고 타인의 자유 의지를 감안하지 않은 결정을 하려고 합니다.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은 올바른 불자의 자세가 아닙니다.
답변 3
해탈의 관점에서 자유는 목적이라기보다는 수단적인 측면이 강합니다. 기독교와 달리 불교는 자유 의지에 대한 명시적인 언급이 없습니다. 불교는 업에 의해서 나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면에서 다소 결정론적입니다. 그런 카르마를 극복하고 해탈을 이루는 것이 자유 의지의 발현이라고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여러분들을 카르마의 영향에서 해방시켜주려 하고 있습니다.
고통의 바다에서 안정감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고통의 바닷물을 퍼마시는 어리석음을 자유 의지라고요? 그런 건 자유 의지가 아니라 어리석음을 무한히 반복하는 카르마의 또 다른 발현에 불과합니다. 그런 사람을 본다면 강제로라도 바닷물 못 마시게 하는 것이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인간의 도리입니다. 마찬가지로 무명에 따를 자유는 자유가 아니라 그 자체가 카르마입니다. 실체는 카르마인 허울 뿐인 자유 의지에 집착해서 겪게 되는 고통으로부터 어리석은 중생을 해방시키길 주저하는 것은 참된 보살의 자세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 집 앞에 유독 물질이 잔뜩 쌓여있다고 칩시다. 그 혼자서 치우려면 열흘도 넘게 걸리고 건강을 해칠 수도 있습니다. 그는 하루 종일 유독 물질을 치우고 침대에 쓰러져서 저걸 어떻게 다 치우냐, 이러다가 병 생기는 것 아니냐고 한탄을 합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에 보니 누군가 밤새 그 유독 물질들을 다 치워버렸습니다. 그는 윤회의 고통이라는 유독 물질이 없어진 것을 기뻐하는 것이 자연스러울까요? 아니면 유독 물질을 치울지 말지를 결정할 자기 결정권에 대한 침해라고 화를 내는 것이 맞을까요? 어차피 자기 손으로 치울 예정이었으면서 말입니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고 이론상으로만 가능한 억지스러운 인간형이라 별로 설득력은 없습니다. 저는 이렇게 집 앞 유독 물질이 없어졌다고 화를 내는 행위에 대해서 비판을 위한 비판으로 볼 뿐입니다.
한편 당신의 주장은 여태껏 살아왔던 관성대로 윤회를 지속하고 싶은 사람들의 자유만 앞세울 뿐, 저의 결정에 찬성하여 간단히 윤회를 끝내고 싶은 사람의 자유는 제약하는 것입니다. 즉 당신의 주장은 유리한 프레임 선점 시도에 불과했을 뿐입니다.
질문자 4:
수행을 거친 해탈만이 의미가 있습니다. 고통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고통을 통해서 성숙해집니다.
답변 4:
착각을 하신 게 있는데 저는 사람들의 해탈을 하게 돕는 것이 아닙니다. 저의 목적은 해탈 없이도 모든 이에게 윤회에서 벗어나는 대자대비를 선물하는 것입니다.
다만 당신이 수행을 대하는 태도에는 다소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그런 생각은 ‘수행하는 나’라는 아상에 푹 절여져 있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는 게 뿌듯하신가 봅니다. 그러나 수행은 그 자체로 목표가 아닙니다. 수행은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당신과 같은 태도는 수행을 위한 수행을 추구하는 것에 불과하고 목적과 수단을 혼동하는 가치전도입니다. 그렇게 수단에 심취하여 집착하는 태도로는 절대 해탈을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곧 집착이자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 수행하는 자신에게 집착하니까 그 카르마에 의해서 영원히 수행만 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독화살의 비유를 들면서 화살에 맞았을 때는 누가 왜 화살을 쐈는지 화살의 재질이 무엇인지를 따지기보단 화살을 빼는 것이 우선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체개고를 인정하면서도 고에서 즉시 벗어나는데 주저하면서 성숙을 찾는 것은 고통을 즐기는 것으로 보입니다. 성숙은 한번의 생애에서도 수차례 겪을 정도로 흔하고 익숙합니다. 반면에 해탈이란 매우 드뭅니다. 성숙은 흔하고 그것으로 뿌듯함을 느끼기 때문에 그것이 궁극적 목적인 것으로 착각하기 쉬운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해탈을 위한 과정일 뿐입니다.
저는 이렇게 수행에 대한 자아도취 상태로 영원히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무한한 자비심을 발휘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말하는 수행이란 무엇입니까? 무상과 무아를 스스로 깨달을 자신이 없으니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에게 타력이나 구걸하는 사람들에게도 자력 수행을 강조하는 태도를 주장하셨나요? 관세음보살은 그의 능력으로 중생을 서방 정토로 데려가서 구제하면 되고 저는 제 능력대로 어리석은 중생들을 타력구제하면 됩니다.
수행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생각하시는 사고방식은 아마도 이런 이유에 기인한 것 같습니다. 기존에는 윤회를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이 해탈이고 해탈의 유일한 방법은 수행이었습니다. 때문에 오랜 관성으로 인하여 당신은 수행과 윤회의 소멸을 동등한 가치로 착각하신 것 아닐까라고 저는 추측하고 있습니다.
질문자 5:
그건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결과주의이자 목적 만능주의 아닌가요? 보살님께서 그런 비윤리적인 생각을 하시다니 믿을 수가 없습니다.
답변 5: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지적은 어느 정도는 경계할만합니다만 그게 절대적인 기준이 되진 않습니다.
목적과 수단의 무게를 비교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만약 어떤 병사가 전쟁터에서 부상당한 동료 2명을 구조했다고 칩시다. 그는 동료들을 생존시키기 위해서 조금이라도 빠른 복귀를 위해서 무게를 덜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자신과 동료의 군장과 총기들을 모두 버렸습니다. 그리고 두 부상자를 데리고 무사히 부대로 복귀했습니다. 상관은 이 영웅이 자신과 동료의 소총과 군장을 임의로 폐기한 것을 군사 재판에 회부합니다. 군 검찰은 군사 법원에서 이렇게 주장합니다. “그는 두 명의 동료를 구하는 영웅적인 활약을 했습니다. 그의 목적 의식은 숭고했습니다. 그러나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하지 못합니다. 그 과정에서 그가 저지른 것은 중범죄입니다. 적군이 우리의 총기와 장비들를 연구하여 악용할 위험이 생겼습니다. 그에게는 중형 선고가 내려져야 합니다.”
당신은 이런 이야기가 불합리하다고 여기시나요? 저 역시 그렇습니다. 당신은 제 결정에 대하여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말했습니다. 하나씩 따져봅시다. 이야기 속의 영웅적 군인의 목적은 두 명의 동료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었고 그 수단은 자신과 동료들의 장비를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어느 것이 중요한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목적이냐 수단이냐'가 아니라 '어느 것이 더 가치 있는 것인가'였습니다.
제 경우도 목적과 수단을 가치의 측면에서 비교해 보겠겠습니다. 저의 목적은 모든 인류의 윤회를 멈추는 것입니다. 제가 선택한 수단은 모든 인간의 단 한 번의 죽음입니다. 제가 개입하지 않더라도 여러분들 모두는 150년 이내에 어차피 죽습니다. 저의 개입이 없다면 그러고 나서도 인간은 수 천억 번 고통스런 생로병사를 겪게 됩니다. 제 방법은 심지어 고통을 느끼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비교해 보면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지적이 얼마나 덧없는 말인지 실감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다른 예시로 답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당신의 아이가 주삿바늘이 무섭다면서 뇌염 예방주사를 맞지 않겠다고 격렬히 저항합니다. 예방 주사를 맞지 않고 뇌염모기에 물려서 뇌염이 생기면 아이는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 고통 중에는 치료를 위한 수십 대의 주사도 포함됩니다. 저는 아이의 결정을 존중하는 수단을 고수하기 위해 아이의 병을 예방하는 목적을 포기하는 것이 합리적이지도 않고 올바르지도 않다고 생각합니다.
질문자 6:
보살님께서는 어쨌든 엄청난 살상을 하는 것이므로 엄청난 카르마가 쌓이게 될 것입니다. 비록 인간도는 사라져서 윤회를 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당신은 지옥에서 윤회를 하게 될 것입니다.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그런 결정을 하지 말아 주세요.
답변 6:
물론 저에게는 엄청난 카르마가 쌓이게 될 것입니다. 비록 종교는 다르지만 제가 존경하는 예수께서도 인간의 죄를 대속하여 희생을 하셨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을 위해 지옥에 갈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그것이 보살의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미 한번 깨달았고 보살의 근기가 있기 때문에 지옥에서 윤회를 해도 곧 다시 깨닫고 고통받지 않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지장보살님과 힘을 합쳐서 지옥에서 고통받는 많은 중생들을 보다 나은 곳으로 보내는 구제에 힘쓰겠습니다.
요청 1:
어차피 보살님의 마음을 꺾기는 글렀군요. 오늘이 치팅데이인데 치킨 반 마리 먹을 시간이나 주세요. 일주일 간 참느라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저 커플 오랜만에 회포를 풀 시간도 주세요. 그동안 너무 바쁜 일들이 쏟아져서 거의 한 달 만에 만난 거래요.
요청 1에 대한 답변:
고통스러운 세상이지만 즐거운 일이 눈앞에 생기면 충분히 즐기셔야죠. 좋습니다. 넉넉하게 세 시간 드리겠습니다. 다른 분들도 하고 싶으신 게 있으면 그 시간에 얼른 하세요. 그런 욕망도 어차피 집착이고 무명이지만 이제 와서 카르마가 새로 생겨봤자 윤회가 중단되는 여러분의 미래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으니까요.
혹시 여유 시간이 생겼다고 저를 저격하거나 강제로 버튼을 빼앗을 생각은 하지 마세요. 이 기기는 버튼을 눌렀을 때 작동되는 게 아니라 버튼에서 손을 뗐을 때 작동하는 방식이거든요.
그리고 혹시라도 서방 정토로 윤회하고 싶으신 분은 남은 시간 동안이라도 최선을 다해서 염불 하세요. 혹시 모르시는 분들은 따라 해 보세요.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
요청 2:
즐거운 사람만 있는 게 아닙니다. 저는 1시간 후에 태형 집행이 예정되어 있어요. 오늘 집행될 횟수는 4 대라고 합니다. 한 대만 맞아도 피투성이가 되고 잘못 맞으면 불구가 된다고 하던데 너무 무섭습니다. 그냥 지금 버튼을 놔버리시면 안 될까요?
요청 2에 대한 답변:
유감이군요. 그러나 이미 약속을 해버려서 번복하려면 명분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잘못을 저지르고 그에 대한 응보를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기보다는 자신의 고통을 덜기 위해 타인의 마무리 시간을 빼앗으면서 블랙홀을 악용하려고 하는데 저는 그 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 종말의 시간을 앞당기고 사람들과의 약속을 깨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질문자 7:
그런 일방적이고 강제적인 방법 말고 사람들에게 깨우침을 주고 도와서 해탈에 이르게 하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해주세요. 당신은 보살이니까 당신의 능력을 그런 방식으로 발휘해 주세요. 제발.
답변 7:
이미 부처님께서 2500년 전에 말씀과 가르침으로 중생 구제를 시도하셨는데 중생들은 2500년이 지나도록 제자리걸음입니다. 물론 해탈한 극소수의 사람이 있긴 하지만 그런 예외가 존재한다는 이유로 그것이 좋은 방법이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말과 가르침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10년째 다이어트를 하는데 살이 거의 빠지지 않고 있다면 그 방법에 회의감을 갖고 다른 방법을 시도해 보는 것은 당연합니다. 아무 변화도 없이 계속 그 방법에 집착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저는 부처님이 달성하지 못한 모든 중생에 대한 구제를 저만이 할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하여 획기적으로 실현하려는 것입니다. 당신이 원하는 방법은 부처님도 달성하지 못한 비현실적인 이상입니다. 부처님보다 못한 저따위가 부처님의 방법으로 모든 사람들을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질문자 8:
적당히 좀 하세요!
보살이시라면서요? 불법을 따르신다면서요? 중도를 따르지 않으면서도 당신이 보살인가요? 너무 극단적이잖아요. 당신은 지금 세상 모든 중생들의 번뇌를 극도로 끌어올리고 있어요. 이런 게 보살의 길이 맞긴 한건가요? 아이들도 모두 울고 있어요. 내가 보기에 너는 보살이 아니라 제멋대로인 '답정너'식 개자식이야!.
답변 8:
아아.. 그렇군요. 중생을 구제한다는 목표에만 집중하다 보니 잠시 중도를 잊고 있었습니다. 중도는 방편이 아니라 불교의 핵심입니다. 부끄럽습니다.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걱정을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 암호를 입력해서 블랙홀 생성기를 끄겠습니다. 다음에는 극단적이지 않은 다른 방법을 연구해서 다시 뵙겠습니다.
혹시 저를 시한폭탄 같은 존재로 여겨서 해치우고 싶어 하는 분들이 많이 계실 것 같습니다만 저는 괘념치 않습니다. 저는 이미 중생 구제에 대한 서원을 세웠기 때문에 죽더라도 열반하지 않고 다음 생에도 여러분을 고통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노력을 계속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