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계율은 일반적으로 성욕을 강하게 경계한다. 그러나 계율이 자위행위까지 금지하는지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불교의 계율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행의 방편이며, 핵심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 등의 번뇌를 줄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위행위가 이러한 번뇌를 증가시키는지 감소시키는지는 개인의 수행 정도와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불교에는 음행을 하지 말라는 계율이 있다. 적절한 수준의 자위행위 조차도 음행으로 볼 수 있는지를 따진다면 그것이 반드시 계율에 어긋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극단을 피하는 중도적 관점에서 수행에 바람직한 측면도 있다.
예컨대 끊임없는 망상으로 참선 수행에 어려움을 겪고 고통받는 경우, 차라리 자위행위를 통해 마음을 비우고 다시 수행에 집중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일 수 있다. 욕구를 최소한으로도 해소하지 못하면, 그 욕구는 점점 커지고 결국 집착으로 이어져 기괴한 형태로 변질될 수 있다. 자위행위를 억지로 참는 건 건강에도 해로울 수 있다는 점도 문제가 된다. 과도한 금욕은 심리적 측면에서는 스트레스와 불안을 증가시키고 수면저하를 초래한다. 신체적으로는 전립선염 위험을 증가시키기도 한다. 그렇게 정신적, 신체적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참는 것은 수행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집착으로 볼 수 있고 극단이라서 중도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불교는 모든 욕망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고 따라서 성욕을 초월해야 하는 한다는 주장이 가능하다. 하지만 인간은 육신을 가진 존재라서 깨달음을 얻기 전에 생물학적인 욕구에서 자유로운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런데 계율에서는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람이 지킬 수 있는 덕목이 아니라 이미 깨달은 사람이라야 할 수 있는 일을 규정한다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알묘조장이라는 한자성어를 연상시킨다. 그것은 맹자에 나오는 이야기로 자신의 벼가 다른 사람의 벼보다 늦게 자라는 것 같아서 자기 벼를 잡아당겨서 키를 키우려고 한 이야기다. 벼는 일시적으로 키가 큰 것처럼 보였지만 다음날 모두 말라죽어 버렸다. 마찬가지로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 깨달은 사람의 행태를 강요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고 원인과 결과를 거꾸로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
수행자가 중도를 지키며 절제된 자위행위를 하는 것은 마치 금연을 위해 금연초를 활용하거나, 마약 중독 치료를 위해 약물을 단계적으로 줄여나가는 것과 유사하다. 예를 들어 각자의 신체상태나 연령에 따라 하루에 한 번 하루에 두 번 이틀에 한번 같이 적절한 빈도와 횟수를 개인별로 정하고 절제해서 시행하는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만약 수행자가 해탈하여 욕망을 초월하는 단계에 도달하면 성욕을 억압하는 계율이 없더라도 자연스럽게 자위행위를 멈추게 될 것이다.
물론 자위행위에 의한 번뇌 해소는 일시적이라는 지적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배고플 때 밥을 먹어서 굶주림에서 벗어나는 것도 일시적이다. 일시적이라는 이유로 그 가치를 폄하하는 것은 성급한 태도라 할 수 있다. 먹는 것과 성의 문제에 다른 잣대로 판단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예컨대 어떤 승려가 전국으 채식 맛집을 찾아다느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그가 더 맛있는 공양 연구를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팔정도의 정명에 해당하는 수행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미식을 즐기기 위해 전국의 채식 맛집을 찾아다닌다면 이는 먹는 쾌락에 대한 집착이므로 중도에서 벗어난 행위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자위행위를 하는 것이 육체적으로 견디기 힘든 강렬한 성욕을 완화하는 최소한의 피난처를 만드는 의미를 넘어서 기구를 사용하거나, 매번 새로운 사람이나 더 자극적인 장르의 사진이나 영상을 찾는 것은 육체적 쾌락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질 수 있어 중도적 관점에서 바람직하지 않다.
단순히 심심하다거나 쾌락에 대한 집착 때문이 아니라 밀려오는 성욕으로 고통스러워할 때 자위행위를 통해 이를 해소하는 경우를 떠올려보자. 기왕 하는 거라면 말초적 쾌락에 집착하거나 별 생각 없이 행하기보다는 정념과 정정 수행에 활용할 수도 있다. 단순한 배설을 넘어 자위행위를 해면서 매 순간에 집중하여 "나는 어떤 감각을 느끼는가? 그것이 번뇌를 어떻게 소멸시키고 있는가?" 와 같은 문제를 알아차리며 정념 수행을 한다. 마치 승려가 차를 우려서 마실 때 찻잎의 모양과 색깔 크기, 우러나는 차가 따뜻한 물에 번져가는 모양과 색깔의 변화에 집중하며 그 향을 음미하고 맛을 즐기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시원하게 성욕을 배출한 후에는 맑아진 정신 상태가 온다. 속칭 '현자 타임'이다. 청정해진 정신으로 '이번에 느낀 쾌락의 실체는 무엇이었는가?' 같은 문제를 순수하고 충실하게 반추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무아와 무상의 의미를 되새기며 정정 수행에 매진을 하는 것이다. 이는 밀려오는 성욕을 억지로 참아내느라 정신 에너지를 소모하면서 전전긍긍하는 상황보다 훨씬 쉽게 삼매에 들게 하는 효과가 있다. 이렇듯 말초적인 즐거움 자체에만 탐닉하지 않고 적절한 수준에서 매 순간의 감각에 집중하고 알아차리고 그것의 본질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욕심과 성냄 어리석음에 매몰되지 않고 지혜를 계발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는 적절한 수준 자위행위라면 이는 중도의 실천으로 볼 수 있으며 수행에 오히려 이로울 수 있다.
자위행위가 번뇌 해소에 도움이 되는지 수행에 도움이 되는지 아닌지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개인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사안이기 때문에 이를 일률적으로 금지하는 계율은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기보다는 중도라는 보다 근본적인 관점에서 재고할만하다. 따라서 어떤 불교 수행자가 자신의 행위가 중도에서 벗어나지 않는 방법이라는 자각을 가지고 절제하여 행한다면 그는 더 이상 불필요한 죄책감에 시달릴 필요가 없다. 이렇게 살펴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막연한 죄책감이 든다면 스스로 이렇게 되물어보자. 나는 이 중에서 어떤 태도에 가까운가?
"열반을 하면 윤회가 끊겨서 다음 생애가 없어지는거고 그 즐거운 성관계와 자위행위를 못하게 되는거잖아. 그런 즐거움을 포기하기는 싫다. 나 열반 안 한다." 이런 생각이 든다면 극단이고 집착이다.
"열반을 하면 윤회가 끊겨서 다음 생애가 없어지고 성관계와와 자위행위의 즐거움을 더이상 느낄 수 없게 된다고? 그런 건 생리적인 문제에 불과한 거고 내가 생명체라서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일 뿐이지. 윤회가 끊긴다면 그런 걸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잖아. 그런 것에 연연하는 것은 마치 교도소 출감일 다음 날 예정된 특식을 먹지 못해서 안타까워 하는 태도나 다름없어. 나는 그런 것에는 전혀 집착하지 않는다." 이런 태도는 중도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복잡하지 않은 사안에 대해서는 별다른 숙고 없이도 직관적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할 수가 있다. 불교에서는 때때로 이것이 중도로 구현되기도 한다. 불교의 교리를 처음 접한 사람은 그것을 적용해 볼만한 충분한 사례들을 아직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을 일단은 언어적인 법칙으로 받아들인다. 그들 중 일부는 그 법칙을 극한으로 몰아서 얼핏봐도 부당해 보이는 생각에 이를 때까지 사고를 전개한 후 그것이 불교의 교리에 합당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모든 것은 고정된 실체가 없기에 궁극적으로 나와 너는 같다는 공사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나와 너는 같고 네 물건 역시 고정된 실체가 없으니 내가 가져가서 사용하겠다. 그러나 그것을 내것이라고 주장하지는 않겠다. 어차피 나 역시 공한 존재인걸. 그리고 너는 이 물건을 소유했다는 집착을 버리는 게 공사상의 실천이니까 나의 행동에 대해 너무 화내지 말거라. 성냄은 번뇌의 근원이기도 하니까"라고 주장할 수가 있다.
이런 경우에 사람들은 그것이 직관적으로 옳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느끼고 그것이 언어적으로는 불교의 교리에 어긋나지 않아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중도를 벗어난 것이기 때문에 틀렸다고 지적할 수 있다.
반대로 그 사람이 너와 나는 하나라고 말하면서 자기의 물건을 상대에게 줬다면 논리적으로는 동일하면서 행동의 방향만 반대로 되었음에도 공을 이해하고 자비로 실천한 모범적 사례라고 여겨졌을 것이다.
결국은 같은 논리 구조임에도 그것이 옳으냐 그르냐는 중도에 합당한지에 따라 판단이 갈리는데 중도인지 판단 여부는 도덕적 직관의 영향을 받는다. 일부 교단에서 자위행위를 일괄적으로 금지한다. 그러나 그러한 계율은 그것이 만들어진 특정 시대에 통용되던 도덕적 직관에 의한 것일 뿐이고 제행무상에 따라 언제든 그 타당성을 재고할 수 있다. 만약 그것이 팔정도 수행의 일환이라기보다는 자위행위 자체를 무조건 부도덕이라고 여겼던 특정 시대의 도덕관에 불과한 것이라면 현재 시점에서는 오히려 그 계율이 중도에서 벗어난 것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