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힌두교의 세계관은 기본적으로 같다. 그것이 석가모니가 살았던 세상을 지배했던 관념이기 때문이다.
힌두교는 세상을 고통으로 가득한 것으로 보고 그곳에서 탈출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종교이다. 그 과정에서 지배 계급의 정당성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탈출을 매우 어렵게 설정했다. 카르마를 없애고 공덕을 쌓으면 승급이 된다. 그런데 겨우 한 두 생애를 잘 살았다고 승급이 이루어지지는 않고 여러 생을 거듭해야 비로소 기회가 생긴다. 그리하여 계급에 따른 차별을 사회적 모순이 아니라 자신이 초래한 문제로 치부하게 만든다.
어렵게 승급에 승급을 거듭해서 본격적인 수행을 할 자격을 얻어야 탈출의 기회가 생긴다. 그 과정에서 억'겁'이라는 무시무시한 시간 단위가 소요된다고 한다.
이런 세계관은 보잘 것 없는 자신의 깨닳음이 대단한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기는 초보 수행자의 교만을 꺾어 주는 용도로는 유용할 수도 있다. 그런 약간의 순기능은 있지만 종교의 목적을 대중의 교화로 삼는다면 이런 세계관은 상당히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
사람은 목표가 너무 어려우면 포기하게 된다. "그렇게까지 해서 꼭 탈출해야 해?"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탈출이 가능다는 믿음으로 도전해보는 극소수의 도전자들을 제외하고는 현실에 안주하게 된다. 고통을 상쇄할만한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탈출하지 않는 이유 중 한가지가 될 수 있다.
예컨대 태어났기 때문에 고통을 겪지만
태어났기 때문에 다양한 종류의 즐거움도 누릴 수 있다는 식이다.
종교가 제시한 이상향을 달성하기가 지나치게 어려울 경우 일반 신자들은 종교가 원래 추구했던 미덕과는 반대 방향을 추구하게 되는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 종교의 본래 목표인 해탈 대신에 고통을 줄이고 쾌락을 늘리려는 현실적 노력에 집착하게 될 수 있다.
고통의 근원이 마음(욕심, 성냄, 어리석음)이라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에 따른다면 고통을 줄이려는 노력은 8정도와 6바라밀이라는 불교식 수행법으로 귀결되므로 불교의 가르침에 충실하다면 이런 세계관을 받아들이더라도 별다른 문제는 없다고 볼 수도 있다.
다만 그러한 수행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힌두교와 공유하는 지나치게 '인색한 세계관'에서 발생하는 부작용이 적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