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인터넷 서점으로부터 메일이 왔다. 조만간 마지막 접속일로부터 1년 정도 시간이 경과하게 되기 때문에 휴면계정으로 전환을 할 예정이고, 휴면 계정으로 전환되기 전에 접속을 하면 2000원 쿠폰을 준다는 내용이었다.

 

책은 거의 도서관에서 빌려 보기 때문에 인터넷 서점 로그인이 뜸하긴 했다. 쿠폰을 준다니 받아야 했고 거기에 쌓여있던 적립금을 더하면 약 3000원 할인된 가격에 새 책을 한권 구입할 수 있는 셈이었다.

 

얼마 전 5.18 단체들이 전두환 회고록 1권에 대해 판매 금지 가처분을 신청했다는 뉴스를 봤다. 그 책의 내용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다. 다만 자신이 연관된 논쟁적인 역사적 사실에 대해 당사자는 어떤 관점으로 기억하고 있을까가 궁금해졌다. 판매금지 가처분 신청에 대한 소식을 몰랐다면 별 관심을 갖지 않았을 책인데, 시기를 놓치면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금서가 될 가능성이 호기심을 자극했기 때문에 쿠폰을 끼고서 굳이 구입을 하게 되었다.

 

책의 내용은 기억나는대로만 간략히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는 박정희를 저격했다. 근처에는 육군 참모총장 정승화가 있었다. 대통령 시해 후 김재규와 김계원 비서실장은 누가 대통령을 저격했는지 숨기려 했다. 김재규는 그날 밤 국무회의를 거쳐 비상계엄 선포를 위해 내각을 긴급 소집했는데 국무위원들은 계엄 선포 사유를 추궁했다. 비서실장은 노재현 국방장관과 육군 참모총장에게 대통령을 시해한 사람은 김재규라고 실토했다. 국방장관은 저자에게 김재규를 체포할 것을 지시했다. 저자는 기지를 발휘해서 사건 발생 후 수 시간 내에 별다른 무력 충돌 없이 김재규를 무장해제 하여 체포하는데 성공했다.

 

보안사령관으로서 대통령 시해 사건을 수사하다보니 육군 참모총장 정승화가 연루되어 있는 듯한 정황이 다수 발견되었다. 김재규가 정승화에게 대통령 유고를 이유로 한 계엄령을 선포 후 계엄사령부를 군사혁명위원회로 전환하여 정권을 잡자고 제의한 것으로 보안사령부는 판단했다.(저자는 이 부분에 대해 지루할 정도로 자세히 설명했다)

그래서 정승화를 체포, 조사해야 했는데 육군 참모총장이자 현직 비상 계엄 사령관인 그의 세력과 대적하는 것이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저자는 '거사' 당일 오후에 선배, 동료 군인들을 모아놓고 설득하여 정승화의 체포를 결정한다. 그리고 대통령 당선인인 최규하의 재가를 받으려 했다. 최규하도 구두로는 찬성했으나 국방장관이 연락 두절되어 부서를 받지 못해서 문서상 허가를 받지는 못했다. 계획이 입 밖으로 누설된 만큼 체포 일정을 지체할 수는 없었다.  1979년 12월 12일에 약간의 무력 충돌 후 정승화를 체포했는데, 그 소식을 들은 김재규, 정승화 라인이었던 장태완 정병주 등이 반발하며 중화기를 동원해 반격하려고 했다. 저자와 동료들은 장태완, 정병주 휘하의 헌병(하나회 아님)을 설득하여 장태완, 정병주를 비교적 어렵지 않게 체포한다. 그 과정에서 대규모 무력 충돌이 일어나지 않은 사실에 대해서는 장태완과 정병주의 부하인 젊은 지휘관들이 올바른 판단을 해서 천만 다행이었다고 여긴다. 이 부분에서 자기가 동료들을 설득하여 그들을 쉽게 체포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대의에 따라 순리적으로 일을 처리했기 때문이라고 자평한다.

한편 정승화 체포에 대한 대통령 재가에 필요한 장관 부서를 회피하기 위해 이곳 저곳으로 피신다니던 노재현 국방장관은 10시간 후에 육군 본부 지하 계단에 숨어있다가 발견된다.

저자는 김재규가 대통령을 저격한 것에 대해 김재규는 대통령을 제거하면 자신이 정권을 잡을 수 있을 거라 착각했다고 주장하며 12.12가 없었다면 김재규는 무죄 또는 사면이 되어 대통령 시해를 면책 받았을 것이라 하면서, 일반 통념과는 달리 12.12는 쿠데타가 아니라 수사기관으로서 피의자를 체포한 사건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복잡한 것을 싫어하는 자기 성격상 쿠데타였으면 일사천리로 집권을 했을텐데 취임까지 10개월이나 걸려 '세계 최장기' 쿠데타 또는 '결과적' 쿠데타라 불렸던 점만 봐도 12.12는 쿠데타가 아님을 알 수 있다고 덧붙인다.

 

간접 선거로 대통령에 당선된 최규하가 12월 21일에 취임한다. 간접 선거였지만 당시 헌법 하에서는 정당성이 있었다. 1980년 연초에 저자는 감금 또는 활동이 제한되어 있던 3김을 방면할 것을 최규하에게 건의했고 최규하는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최규하는 자신의 정권을 과도정부일 뿐 1년 후 쯤 하야하여 대통령을 선거를 통하여 선출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전국 각지에서는 당장 계엄을 철폐하고 정권 이양하라는 시위가 이어졌다. 김재규에 대한 석방 요구도 있었다. 시위가 격화될수록 사회의 혼란은 가중되어 계엄은 더욱 공고해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폭력적인 시위는 경찰력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정도에 이르렀기 때문에 계엄군이 전국 곳곳에 배치되었다. 저자는 대학생들의 거친 시위의 배후에는 그들을 이용하는 정치인들이 있었다고 지적하면서 자신의 권력욕에만 눈이 먼 탐욕스러운 정치인들에 대한 비판을 한다. 이 부분에서 저자는 민주화에 대하여 3김 자신이 집권하는 것을 민주화로 칭한다고 그 의미를 격하시킨다.

 

중앙정보부장 서리 및 보안사령관을 수행하며 북괴가 국내 혼란을 이용하여 5월 경 게릴라전을 통한 남침을 계획 중이라는 첩보를 입수한다. 날로 격화되는 시위로 인한 치안의 악화와 북괴의 위협이라는 안보의 문제를 타계하고자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시키고 국보위라는 통치 기구를 내세우면서 기존 정치인의 활동을 금지하는 5.17 조치를 내릴 것을 대통령에게 건의하여 실행한다.

저자는 5.17 조치에 대해서 국회 해산 같은 무리수보다는 임시적인 정치활동 금지라는 연착륙이 적절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런 조치를 건의했다고 기록한다. 국보위의 활동은 다소 무리가 있었으나 당시로서는 필요한 일이었고 삼청교육대나 공무원 숙정에 대해서는 무고한 피해를 입은 당사자들에게는 아직도 미안함을 느낀다고 소회를 밝힌다. 내 기억으로는 이 책에서 저자가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후회하는 사실상 유일한 부분이다.

 

한편 5.17 조치에 반발하여 발생한 5.18에 대한 진압 과정서 일어난 문제에 대해서는 자기 자신과는 완전히 무관한 일이라고 한발 물러선다. 그러면서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는 적절한 진압 방법이 있었는데 계엄 당국이 그러질 못했던 사실과 그에 대한 적절한 책임자 처벌이 없었던 점을 안타까워한다. 다만 지만원, 김대령 등이 내세운 북한군 특수부대 600명 투입설 등 5.18을 부정하는 주장에 입각해서 김영삼 정부 하에서 있었던 5.18 특별법에 의한 재판 기록 등을 활용하여 사건을 재구성하여 140페이지 정도를 기술한다.

5.18은 자기와 무관하지만 무고한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잘못된 오명으로부터 대한민국 국군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 부분을 정리한다는 뜻을 밝힌다.

 

이 챕터는 그런 목적으로 기술한 만큼, 읽다보면 5.18 단체들이 이 책을 왜 판매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는지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다만 판매금지 조치로 표현의 자유를 막는 것은 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매우 나빠서 '명백한 악당'의 주장을 그대로 믿을 만한 사람은 거의 없다. 게다가 저자의 주장은 사회의 통념과 정면으로 배치되어 해명을 하는 불리한 포지션이다. 따라서 학술적이고 실증적인 반박으로 그 주장을 무력화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런 과정을 공론화하여 거치면서 5.18을 부정하는 전형적인 입장에 대한 반박 자료를 생산하면 5.18을 부정적으로 보거나 과대 평가 되었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그 진정한 의의를 다시 한번 알려 오해를 해소하고 설득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굳이 법적 강제력을 동원해서 그의 입 자체를 막으려 하는 것이 5.18의 숭고한 의미가 훼손되는 것을 막는데 효과적인 방법일까에 대해서 나는 회의적이다.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한다는 중세의 세계관을 믿는 사람은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그러한 주장 자체가 금지되거나 처벌받지 않는다.

5.18의 의미를 부정하는 입장인 사람들은 판매 금지 조치에 대해, 지구가 회전한다고 말하는 것이 처벌 받았던 과거를 연상할 수 있다. 그렇다면 5.18은 더 이상 의문을 제기하면 '이단' 또는 '사문난적'으로 몰려 처벌을 받게 되는 전근대적 성역이 된 것으로 느낄 것이다. 성역이라는 전근대성에 대한 저항감이 생길 수 있다. 그리고 성역을 만드는 사회적 합의의 과정에 자신들의 입장은 전혀 반영되지 않았는데도 그것을 사회적 합의로 인정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가치의 문제가 아닌 사실 자체를 사회적 합의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정당한가라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다.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착각하는 사람에게는 지구가 회전한다고 볼 수밖에 없는 증거들을 알려주면 된다. 5.18에 대한 문제 제기 자체를 금지하고 처벌하기 보다는 지구가 회전한다는 명백한 증거들처럼 반박할 수 없는 확고한 진실을 보급하여 5.18에 대한 오해를 해소하는 것이 5.18의 진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는데 바람직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6.25 북침설을 무력화시킨 것은 국가보안법 및 중앙정보부의 서슬 퍼런 '애국' 활동이 아니라 소련 붕괴 후 공개된 소련의 기밀문서들이었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강제력보다는 진실 그 자체가 설득력이 강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저자는 국가가 공인한 명백한 악당이라는 낙인이 찍혔고, 지난 30여년간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차원의 질시와 모욕을 당해왔다. 세상 사람들이 강하게 비판하는 자신의 행적에 대하여 생의 마지막을 앞두고 자기 나름의 관점을 세상에 해명해보려는 마지막 자기 변호를 굳이 법적 강제력을 이용해서 원천봉쇄 하는 것이 저자의 주장으로부터 5.18의 역사적 의미와 5.18 유족의 명예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었을까? 입은 막지 않되 그 주장이 틀렸다는 이유를 조목조목 반박해여 홍보하는 것이 더 큰 사회적 합의를 이루는데 적합한 방법이라 생각한다.


7월이 되자 최규하는 저자를 불러서 혼란한 조국을 이끌어나갈 적임자는 당신 뿐이라 하면서 정권을 넘겨 받기를 권유한다. 저자는 처음에는 거절하려 했으나 국방장관과 계엄사령관과 상의한 후 무거운 역사적 사명감을 느껴 그 제안을 수락했고 8월에 간접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취임한다.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면서 사심 없이 권력을 주고 받는 묘사는 아름다워 보일 수도 있겠으나 내가 느끼기엔 삼국지에서 조비가 한 헌제에게 선양을 받는 장면이 연상되었다.

 

저자는 최규하가 '퇴임 이후 모든 것은 기록이 남아 있으니 굳이 자신에게 물을 이유가 없다'고 하면서 각종 물음에 대해 입을 닫아버린 이유에 대해서는 대통령 재임 중 있었던 일에 대해 퇴임 후에 소명을 하는 나쁜 선례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한편으로는 그래도 저자가 강제로 정권을 찬탈한 것이 아님을 최규하의 입으로 밝히지 않음을 내심 아쉬워 한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란 말이 있다. 저자가 끝까지 권력을 놓치지 않고 퇴임 후에도 중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입장으로 남았다면 이 책의 내용이 대한민국의 정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역사의 패배자가 되었고, 책은 기존의 통설적 역사 인식에 완전히 반대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통설에 반박하는 내용이다보니 해명해야 할 부분이 많아서 각종 근거 자료들을 제시해야 했고 실제 일어난 사건의 내용에 비해 책의 분량이 많아진 느낌이 있고 그로 인해 간결하고 담백한 문체임에도 가독성이 약간 떨어진 느낌이다.

 

12.12에서 자신의 집권까지의 기간은 각종 오해들이 점철되어 있고 자기는 정권을 잡겠다는 야망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누군가를 강압한 적도 없고, 다만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하다보니 어느 덧 추대되듯 집권하게 되었다고 자평한다. 한국 현대사에 대한 배경 지식이나 다른 자료를 통한 검증 없이 이 책으로만 정보를 얻다보면 저자가 이순신 장군보다는 살짝 아래 등급 정도의 강직한 영웅 같이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저자가 회고하는 1979년 말과, 1980년의 자신은 그런 모습인 듯 하다. 저자가 퇴임 이후 가끔씩 보였던 다소 황당해보이는 발언이나 행동들도 저자의 그런 자기 인식에 비추어보면 제법 일관성이 있는 태도라는 생각도 든다.

 

물론 내가 저자를 옹호하는 건 아니다. 책에는 오해를 빙자하여 끼워 맞춘 듯 한 내용이 제법 많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특히 신군부와 하나회의 활약에 대한 기술이 전혀 실리지 않은 점이라든지, 12.12 때 무력 충돌 과정에서 자기 측 사람들의 인명 피해에 대해서만 설명하고 정승화 측 사상자에 대한 내용은 많이 누락했다는 점에서 자신이 기억하는 사건의 전체를 털어놓는다기 보다는 자기가 말하고 싶은 부분만 말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리고 아무런 사심이 없이 자기 할 일만 해 나가는 저자에 대한 주변 인물들의 오해가(예를 들어 12.12 당시 노재현 국방장관의 피신 등) 너무 많았다는 점도 석연찮다. 그의 기억이 역사적 사실과 일치한다고 가정한다면 착한 주인공의 험악한 인상 때문에 벌어지는 사건들로 이루어진 '엔젤전설'이란 만화가 현실에서 일어난 느낌이랄까... 미심쩍은 구석은 많지만 그래도 나름 재미는 있는 편이라서 역사 소설이라 생각하며 본다면 '나무한테 미안'할 정도는 아니었다.

 

법원에서 판매금지로 결정되면 나름 소장가치는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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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4일 레어템 등극함.
초판 1쇄면 소장가치 면에서 더 좋았을텐데 아쉽게도 2쇄다.

 

2017년 9월 15일
판매 금지일 뿐인데 검색해보니 도서관에서도 사라졌다.
미리 구입해 놓지 않았다면 호기심을 충족할 기회는 아예 없었을거다.
도서관에서 빌려서 보려고 기다리지 않고 굳이 사서 본 게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2019년 7월 13일

정독도서관을 제외한 서울시 모든 도서관에서 판매금지와 상관없는 2, 3권까지도 모두 사라졌다. 2, 3권은 정독도서관 서고에 보관중으로 표시되어있는데 그 조차도 대출 불가 상태로 지정되어있다.

2, 3권의 내용이 궁금하다면 구입해서 읽는 수밖에 없다.

1권 수정판은 현재 절판상태로 구입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수정판도 희귀서가 되어버렸다. 어찌 보면 수정판이 특이한 편집 형태 때문에 더 소장가치가 있을 것도 같다.

Posted by 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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