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게이트

생활지식 2016. 6. 11. 00:12

지혜로운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보내는 47가지 삶의 길잡이라는 책이 있는데 47가지로는 약간 모자라다. 삶의 지혜는 사실 48가지이고 잘 알려지지 않은 그 마지막 덕목은 다음과 같다.


"씨게이트 하드디스크는 돈 주고 살 물건이 아니고, 공짜로 생겼다면 중고로 처분해라. 재앙의 씨앗을 남에게 넘기는 데 죄책감을 느낀다면 없어져도 별 문제 없는 데이터만 보관하고, 소중한 자료는 절대로 씨게이트 하드디스크에 저장하지 말라."


씨게이트 CEO 빌 왓킨슨은 2006년 CNN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솔직해집시다. 우리는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소비자들이 쓰잘떼기 없는 소프트웨어를 더 많이 사고, 야동을 더 많이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물건을 만드는 것 뿐입니다."


얼핏 보기엔 쿨하고 멋지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당해본 사람 입장에선 썩 좋게 생각하기 어렵다.


씨게이트 CEO의 말대로 씨게이트 하드디스크에는 쓰잘떼기 없는 소프트웨어와 야동만 저장하고 중요한 데이터는 타사 제품에 저장해야 한다.


그리고 공상과학소설 같이 인간의 정신을 컴퓨터에 백업할 수 있는 시점이 온다면 씨게이트는 반드시 피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정신을 백업하는데 씨게이트를 사용한다면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미수죄로 기소당할 위험이 있고 내 정신을 백업한다면 갑자기 비명횡사를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여기부터는 주절주절 잡소리들 --------------------


2011년 태국 홍수는 저장장치 시장의 패권이 SSD로 넘어가게 된 추세를 가속화시킨 사건인 듯 하다. 수해를 입은 하드디스크 업계는 공급 부족에 의한 가격 급등을 겪었다. 똑같은 제품의 가격이 며칠만에 2배 넘게 상승했고 공급 부족에 힘 입은 배짱 영업 정책으로 AS기간은 3년에서 1년으로 줄어들었다. 시세가 홍수 전 상태의 가격으로 되돌아가기까지는 5년 정도가 걸렸다. 가격은 홍수 전 수준까지 떨어졌지만 AS기간은 3년으로 회복되지 못하고 2년에 머물러 있다.

역설적으로 제조사들에게 수해는 축복이었고 이전보다 오히려 커진 영업이익을 즐겼다. 일반적으로 컴퓨터 업계에서는 5년이 지나면 하드웨어 성능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가격 역시 크게 떨어지기 마련이나 하드디스크의 가격은 5년 만에 제자리로 겨우 돌아왔고 용량을 기준으로 삼았을 때 성능은 물리적 한계에 도달한 것 마냥 별다른 기술적 발전을 이루지 못했다. 최대 용량의 제품의 용량 자체는 약간 늘어났으나 데이터 집적 기술이 발전했다기보다는 플래터 장 수를 늘린데 불과했다.


1.

비싸고 나쁜 조건이지만 그런 와중에도 하드디스크가 필요할 때는 어쩔 수 없이 구입할 수 밖에 없었다. 2012년 사무용으로 쓸 컴퓨터를 한대 구입했는데 그 안에는 씨게이트 1테라 하드디스크가 들어 있었다. AS기간은 12개월인데 15개월만에 인식 불능 상태가 되었다. 덕분에 그 컴퓨터는 저렴한 구성임에도 비교적 일찍 SSD를 장착하게 되었다.


2.

2012년 집에서 쓸 컴퓨터를 구입하면서 2테라 하드디스크 한대도 주문했고 윈도우는 SSD에 설치하고 데이터 저장용으로만 사용했다. 당시엔 말썽을 일으킨 씨게이트 제품을 아직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굳이 가장 쌌던 WD 제품보다 몇 천원 더 주면서까지 씨게이트를 구입했다. 그런데 3년만에 끼릭거리는 소음과 함께 인식오류가 시작되었다. 검사를 해보니 배드섹터가 8개 생겨있었다. 오류 수정프로그램으로 배드섹터를 잠재우는데 성공했다. 하드디스크는 다시 건강해졌다. 더이상 끼릭대는 소리도 안나고 인식이 끊어지는 일도 없었다. S.M.A.R.T값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1년 쯤 더 쓰다가 인식오류가 생겼고 배드섹터 검사를 해보니 처음 배드가 난 곳과는 한참 떨어진 클러스터에서 배드섹터 한개가 발견되었다. 그 배드섹터는 오류 수정 프로그램으로도 복구할 수 없었고 엑세스를 하는 순간 하드디스크는 인식 불능 상태가 되었다.

사망 직전에 충분히 이별의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대부분의 중요한 자료는 백업하는데 성공했다. 백업을 마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메인보드에서도 인식할 수 없는 코마상태에 빠졌다. 가끔 메인보드에 인식이 될 때는 파티션이 NTFS가 아닌 RAW상태로 잡히고 데이터 복구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손상된 파티션 데이터 복구 기능을 이용해야 겨우 보관중인 파일에 접근할 수 있는 상태다. 코마상태에서 사망에 이르기까지 긴 시간이 남지는 않았을거라 판단한다. 고객이 하드디스크를 사용하는 목적에 대한 씨게이트 회장의 기대에 부합하게 저장했던 그녀들에 대한 기록물들은 하드디스크와 함께 잃게 되었다.

현자타임에 대한 내성이 생기고 때때로 노스텔지어를 겪기도 하면서 몇 년에 한번씩 파일들을 정리하던 습관도 없어져버려서 그녀들이 점유한 공간이 주체할 수 없이 늘어나고 있었는데 씨게이트의 형편없는 품질관리 덕분에 반 강제로 정리하게 된 셈이다. 의자왕은 정말 3000명이 필요했을까? 사비성은 삼천궁녀와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어찌보면 홀가분하다.

새 술은 새 부대에....


3.

2010년에 집에서 쓰는 컴퓨터에 사용할 1.5테라 하드디스크를 구입했다. 당시 2테라는 너무 비쌌고 1.5테라가 가격대비 성능 측면에서 가장 무난했었다. 1.5테라 하드디스크는 씨게이트 제품밖에 없었으나 이 때는 씨게이트 하드디스크가 별다른 문제를 일으켜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별 생각없이 구입했다. 당시는 SSD가 보급되지 않은 시기라 이 하드디스크에 윈도우 설치 파티션을 잡아서 설치했다. 2013년 RMA 기간인 3년을 거의 꽉 채워갈 때 쯤 이유없는 블루스크린이 뜨기 시작했고 윈도우를 재설치해도 마찬가지였다. 하드웨어 문제로 파악하고 컴퓨터 전반에 관한 검사들을 하니 하드디스크 앞부분에 있던 배드섹터를 발견했다. 수입사에서는 RMA를 대행해줬고 3주 쯤 지나서 라벨에 Repaired라는 단어가 인쇄되어 있는 하드디스크를 받게 되었다.


4.

RMA로 교환받은 그 하드디스크는 순수 데이터 저장용으로만 사용했고 초기 설치시 백업 복구를 한 것 이외에는 무리하게 부하를 걸어봤던 적이 없다. 3년 후 특별한 자각 증상은 없었으나 이상을 일으킬 시기가 된 것을 우려하여 다시 검사를 하니 배드섹터가 2군데 잡혀있었다. 경악스러웠던 점은, 하드디스크가 완전히 새 것인 상태에서 복사해 넣고나서 한번도 플레이해보지조차 않았던 mp3 파일들이 위치한 클러스터들에서 배드섹터들이 생겼다는 점이었다. 오류 수정 프로그램으로 임시 치료를 해 놓은 상태이나 앞서 겪었던 2테라 하드디스크의 사례를 봤을 때 남은 수명은 1년 미만이라 예상한다.





2010년 이후 총 5대의 씨게이트 하드디스크를 경험했는데 4대가 문제를 일으켰고 이들 중 3년 넘게 살아남은 제품은 없었다. 아직 문제를 일으키지 않은 1대 역시 아직 3년 미만 사용중이다. 다른 물건들과 비교했을 때 곧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시한부라 봐도 무리가 없다. 10년 쯤 사용중인 WD 500기가 하드디스크가 아직도 팔팔한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하드디스크가 돌연사 하는 이유는 씨게이트만의 문제가 아니라 하드디스크가 예전보다 대용량화 되면서 내구성이 나빠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씨게이트 대체용으로 구입했던 HGST와 도시바 하드디스크는 아직 사용한지 충분히 오래되지 않아서 내구성이 씨게이트보다 나은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사례에서 통계적으로도 씨게이트 사망률이 타사보다 월등히 높은건 사실이고, 씨게이트에 합병된 퀀텀 돌연사도 겪어봤기 때문에 뽑기 실수보다는 씨게이트 자체의 문제로 판단하고 있다.




----------------------------------2017.5.28 추가------------------------------------------


16년 6월에 배드섹터 발견되어 고쳐가며 쓰던 하드디스크 사망이 확정되었다.

3~4달에 한번씩 배드섹터가 200개 정도 추가 발생하다가 더 이상 고쳐지지 않는 시점이 왔고 충분한 이별의 시간을 가진 후 코마상태에 빠졌다.


R

I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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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아니고 별드라이버로 분해해보니 플래터가 4장이나 된다. 거울같이 반사가 잘 되고 생각보다 가볍다.

1500이니 당연히 500짜리 3장일줄 알았는데 그걸 4장으로 구성하다니 역시 씨게이트는 기대 이상을 보여준다.


10년 이내에 씨게이트를 구입할 일은 없을 듯하지만 아직 통제범위 내에 남아있는 씨게이트가 한대 더 있어서 긴 악연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2019.1.25 추가-------------------------------


몇 달에 한번 켜는 컴퓨터에 장착해놨던 마지막 씨게이트 1.5테라에서 딸깍소리가 났고 회생 불가능할 정도로 많은 배드섹터가 검출되었다. 긴급 조치 후 살릴 수 있는 데이터를 백업하고 나면 이것으로 씨게이트와의 악연은 끝이다.

Posted by 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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