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욕망이 무한하다는 미신은 경제학의 근본 전제조건이다.
욕망이 무한하다는건 국민학교 바른생활 교과서로 주입교육을 받았다. 내용은 대충 이렇다. 남자아이가 주인공이다. 이름은 기억안나니 그냥 철수라고 하자.
철수가 어딘가 목적지로 걸어가고 있었다. 걷다가 자전거를 타고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랬더니 자전거가 생겼다. 자전거를 타고 신나게 달리는데 언덕이 나왔다. 언덕 오르기가 힘이 드니까 오토바이를 타고 싶다고 생각했다. 오토바이가 또 어디선가 나왔다. 오토바이로 달리다가 자동차가 타고 싶어져서 탔고 나중엔 비행기가 타고 싶어져서 탔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고 인간의 욕망은 이렇게 끝이 없다는 교훈을 주입받았다.
어린 아이가 오토바이와 자동차를 운전했다는게 신기하긴 했으나 그 교훈이 너무나도 타당해보여서 당연히 받아들이고 내면화 했다.
몇 년 후에 태권도장 사범께서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원산폭격하고 있으면 깍지 끼고 엎드려 뻗치고 싶고 깍지 끼고 엎드려 뻗치면 주먹 쥐고 엎드리고 싶고 주먹 쥐고 엎드리면 주먹 펴고 싶고 주먹 펴면 일어나고 싶고 일어나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고 자려고 하면 여자친구랑 자고 싶다고.
대충 수긍은 했지만 어린 나이라서 어차피 자면 누가 옆에 있든 모를텐데 여자친구가 있든 말든 무슨 소용인가 의아했었다. 사범님이 말씀하신 의미를 알기까지는 몇 년이 걸렸다. 어린 시절이라 그 몇 년이 꽤 오랜 세월처럼 느껴졌다.
여기서 의문의 제기해 본다.
비행기 이후에는 뭘 원하나요, 철수군? 공항에서 내려서 원래 목적지까지 가려니까 자동차가 또 필요하지요?
여자 친구랑 같이 잤는데 그 이후엔 뭘 원하십니까, 사범님? 담배 드릴까요? 요구르트는 냉장고에 있습니다. 담배는 제가 금방 사다드릴 수 있고, 그 이후엔 뭐가 필요하시죠? 만사가 귀찮고 집에 가서 쉬고 싶다고요?
욕망이 무한하단 말은 욕망을 제대로 끝까지 채워보지 못한 사람들이 갖는 미신 아닐까?
모르니까 '모르는 것'으로 분류했다.
---------2020년 실제 사례 추가---------
소니 MDR 1A라는 헤드폰을 중고로 구입한 지 1년 정도가 지났다. 권장소비자가격은 30만원 정도인데 후속 제품이 나왔고 사용 기간도 길어서 7만원에 구할 수 있었다. 이 물건에 처음 관심을 갖기 시작하게 되었던 곳은 교보문고 핫트랙 매장에서였다. 꽤나 예전 일인데 그 때는 1R이라는 이전 모델이 전시되어 있었고 나는 MP3플레이어에 번들로 받은 오픈형 이어폰인 도끼2와 MX400 정도에 만족한 상태였다. 책 구경하러 광화문 교보문고에 갔다가 고가의 헤드폰들이 청음할 수 있게 전시된 것을 보고 호기심에 이것 저것 물건들을 접해보게 되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은 번들 오픈형 이어폰으로는 결코 경험할 수 없었던 머리를 울리는 강력한 저음이었다. 그러나 저음 때문에 전반적인 음이 둔탁하게 느껴지는 바가 없지는 않았다. MP3플레이어로 청음했던 당시에 가장 마음에 들었던 물건은 소니의 1R과 모델명이 페라리 T350이었다. 저음이 강력했지만 나머지 음들도 당시 시용중이었던 이어폰에 비해 섬세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둘 다 30, 40만원 정도의 가격표가 붙어 있었다. 더 비싼 모델도 있었지만 mp3플레이어의 앰핑 능력이 부실했던 탓이었는지 비쌀수록 좋은 건 아닌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었다.
꽤 괜찮은 첫인상이었고 그 이후 후속 제품으로 1A가 출시되었다. 리뷰들을 보니 1A에서 크게 발전했다는 평이 중론이었다. 전시도 널리 되어있던 물건이라 들어볼 기회가 많았다. 핸드폰 출력으로는 다른 더 비싼 헤드폰들과 비교해도 밀리는 점을 느낄 수 없었다. 그리고 다른 제품을 청음하는데 레퍼런스 역할을 하기도 했었다. 아는 음색이고, 어디에나 있기 때문에 비교하기가 쉬었다.
여러 매장들에서 청음을 하다가 ATH-M40X라는 물건을 중고로 구입했다. 신품가가 11만원인데 9개월 쯤 쓴 물건을 8만원에 구입했으니 가격 방어는 잘 되는 가성비 제품이었다. 그 물건의 단점은 기본 케이블이 3미터이기 때문에 휴대하면서 들으려면 AS센터에서 짧은 케이블을 18,000원에 별도 구입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전반적인 음질 자체는 마음에 들었다. 기존 장비로 안들리던 소리가 들리는 것은 재미있기도 했다. 그러나 중고음에서 느껴지는 뭔지 모를 거친 질감이 거슬렸다. 처음에는 제품 고장 아닐까 의심하여 전시장을 방문하여 같은 제품을 청음해보기도 했었는데 원래 그 제품의 특성이었다. 아마도 브랜드 특유의 착색이 아닐까라는 짐작도 들긴 하지만 확실하진 않다. 물건에 불만이 있어서인지 종종 청음 매장을 방문하곤 했고 그 때마다 1A를 접했고 레퍼런스로 사용했다. 그 물건에 대한 나의 태도는 공손찬 휘하의 조운을 바라보던 유비의 마음과 비슷했다. 갖고는 싶은데 기회가 없었달까. M40X는 2년 정도 사용하다가 XBA-A3라는 비싼 이어폰을 구입한 이후 사용 빈도가 떨어져서 새로 구입한 케이블을 포함하여 7만원에 팔았다. 마음에 드는 이어폰을 구입한 이후 만족감을 확실히 하기 위해 가끔 청음매장을 방문했고 만족감을 재확인하곤 했다. 그러다가 매장에서 전시된 낡아빠진 1A를 발견했다. 같은 회사의 제품이고 권장소비자가격이 10만원 정도 낮기 때문에 음질 차이가 궁금해져서 비교 청음을 해 봤다. 헤드폰과 이어폰의 체급 차이는 확연했다. 그래서인지 한 때 잊고 지냈던 조자룡을 향한 애틋함이 되살아났다. 중고매물을 찾기 위한 습관적 검색을 시작한 지 몇 달 후에 동네 근처서 7만원짜리 매물을 구입할 수 있었다. 싼 편은 아니고 평균적인 시세였지만 쉬운 직거래가 가능해서 반가운 매물이었다. 최근 출시되는 스마트폰들이 이어폰 단자를 없애기 시작하면서 무선이 대세가 된 시대이긴 한데 알리익스프레스에서 짧은 케이블을 구입해서 블루투스 리시버와 연결하면 무선 제품 비슷하게 사용할 수는 있다는 점도 지름의 포인트가 되었다.
현재 구입 후 1년이 지났지만 M40X를 보유중이었던 2년과는 달리 다른 제품에 대한 관심은 전혀 생기지 않고 있다. 이어폰과 헤드폰에 대한 욕망은 무한하지 않고 딱 여기까지인 것 같다. 그것이 욕망의 유한성인지 때문인지 예민하지 못한 청력 때문인지는 확실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