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핸드폰은 99년 4월에 개통했다. 어필텔레콤이라는 업체에서 나온 어필이란 단말기였다. 아버지가 동네 대리점에서 1만원에 구입해 오셨다. 아버지 명의로 개통했다. 처음엔 학생이 이메일이면 충분하지 무슨 핸드폰이냐고 시큰둥 했었다. 상자에 출고가격 79만원이라고 쓰여 있는데 1만원에 샀으니 횡재했다고 생각했다. 세상 물정을 모르는 착각이었다.  당시 가장 가볍고 작은 전화기를 고르다가 샀다고 하셨는데 어필은 LG텔레콤 전용으로 나온 단말기라서 LG텔레콤을 이용했다. 그 대리점 관계자가 지인이라서 일부러 팔아준 거라는걸 안 건 몇 달 후였다. 이 때 부터 LG텔레콤과의 긴 인연이 시작되었다. 요즘과는 달리 통신사마다 요금에 차이가 있었다. 당시 LG텔레콤이 요금이 가장 쌌기 때문에 인맥이 아니더라도 LG텔레콤에 가입하고 어필 핸드폰을 구입했을 것 같다. 그 때는 비슷한 크기의 애니콜은 많이 비쌌고 싸이언은 가격은 쌌지만 너무 덩치가 컸다. 걸리버나 G2 등 어필만큼 작았던 전화기는 이 폰을 구입했었던 몇 달 이후에 나왔다가 사라졌다. 모델명은 아마도 apc1100이었던것 같다. 배터리는 표준형과 대형, 특이하게도 aaa배터리 3개를 넣어서 전화기에 장착할 수 있는 홀더 1개가 제공되었다. 대형 배터리를 붙이면 베터리가 본체에서 배불뚜기처럼 불룩 튀어나왔다. 어필은 문자함에 확인을 끝낸 문자가 1개라도 남아있으면 화면 상단에 편지봉투 표시가 뜨기 때문에 이미 모든 문자를 읽었는데도 내 폰을 보고 문자를 확인해 보라고 한 친구들이 많았다. 문자를 받고 확인하면 보관하지 않고 바로 지워야 한다는 마인드의 인터페이스였던것 같다. 전화기의 저장 용량이 작아서 문자를 100건밖에 저장할 수 없었으니 그럴 법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새 문자가 오면 편지 봉투가 깜빡거렸다.

기기 상단에는 光PCS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lg텔레콤은 기지국 커버리지가 작아서 기지국을 더 촘촘히 설치를 한다는 광고가 기억난다. 별로 자랑거리가 아닌 것 같은데 그런 걸 자랑처럼 내세우는 게 이상해 보였다.

그 밖에 특별히 기억나는 건 차량용 전용 핸즈프리였는데, 시가잭에 꽂고 지금의 24핀 단자처럼 생긴 핸즈프리 전용단자에 꽂는 형식이었고 가격이 6만원정도 했었다. 핸즈프리를 꽂으면 액정에 손바닥 표시가 떴다. 마이너 브랜드라 핸즈프리 이어셋(당시엔 핸즈프리가 모노) 호환성이 나빴다. 그나마 모토로라용품와 호환되는듯 했으나 가장 중요한 통화버튼은 작동하지 않았다.

기기는 버튼 접촉 불량으로 인한 고장이 잦았다. 테크노마트에 AS센터가 있었는데 수리비는 대체로 5천원내지 1만원 정도 청구되었다.


내 첫 전화기는 고장났고, 수리비가 15만원정도 나와서 갈아타야 했다. 두번째 전화기 역시 어필텔레콤의 apc1000이었다. 두 모델은 플립 모양만 빼고 완전히 똑같았다. 아버지가 전화기를 교체하시고 남는 단말기였다. 두번째 단말기도 결국 버튼 접촉불량 문제가 생겼다.


세번째 전화기는 삼성에서 나온 플립형 전화기였다. 플립이 투명이었고 거기에 스티커 사진을 붙일 수 있었던 모델이었던걸로 기억한다. 두번째 어필 전화기도 기계적 수명을 다 한 상태였다. 삼성 전화기는 이모부가 쓰시다가 공기계 상태로 보관중인 물건이었는데 얻어서 썼다. 배터리 수명이 별로 안남아서 오래 쓰지는 못했다. 문자를 보낼때 주소록을 이용할 수 없어서 상대의 전화번호를 외워야 했었다. 더 나빴던 건 문자 입력이 끝난 후 전화번호를 넣어야 했기 때문에 전화번호를 몇 초 동안이 아니라 정말 외워야 했었다. 이 전화기를 쓰면서 친구 전화번호를 여러개 외울 수 있었다. 삼성의 불편한 인터페이스는 역사가 꽤 긴 편이었던 것 같다.

어필과 삼성 전화기는 모두 우체국 폰 재활용 캠페인 때 처분했다.


네번째 전화기는 모토로라 물건이었는데 무상 임대폰이었다. 애니콜배터리가 수명이 완전히 끝났기 때문이에 새 전화기가 필요했었다. 석촌역 근처에 있던 LG텔레콤 송파센터에서 대여했다. 유선형의 회색과 금색을 섞은 듯한 색의 모델이었는데, 어필 전화기와 기능이나 인터페이스가 거의 같았다. 백라이트 색깔이 7가지나 되어서 취향에 맞게 설정할 수 있었다는게 가장 큰 차이점이었던것 같다. 어필이 모토로라에 합병되었다는 사실은 이 전화기를 쓰면서 알게 되었다. 전에 쓰던 삼성폰과 달리 상대의 전화번호를 문자를 다 찍을 때 까지 외우지 않아도 되어서 좋았다. 애니콜 이외의 폰에서는 당연한 기능이었지만 애니콜을 쓰다가 다시 돌아와보니 정말 편했다.  어필에 사용했던 비싼 시가잭 핸즈프리는 호환이 되지 않았으나 모토로라용 이어셋은 당연히 통화버튼까지 잘 작동했다.


다섯번째는 LG에서 나온 LP2100이라는 모델이다. 스위블방식이라고 폴더를 반쯤 편 상태에서 화면이 180도 회전하고 회전된 채 닫을 수 있는 디자인이었다. 캠코더에 달린 LCD와 비슷한 구조다. 제대로된 듀얼액정 폴더는 너무 비쌌고 차선책으로 저가 모델에 사용된 pmoled화면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스위블형을 골랐던걸로 기억한다. 안테나가 없는것 처럼 보이는 디자인이었다. 메뉴얼을 보니 안테나를 가로로 달고 인테나라고 불렀다. 인테나에는 군청색 LED가 일렬로 5개로 나란히 들어 있었는데 메시지나 전화가 오면 LED가 제법 예쁘게 깜박거렸다. 디자인 때문에 LG에서 디카폰 이라는 과장된 펫네임을 사용했었다. LED후레시가 달린 걸 처음 봤던 폰이기도 하다. 그러나 손전등 기능이 없었고, 촬영시 잠시 깜빡거리기만 해서 활용도가 크지는 않았다. 조도 센서가 달려있어서 어두울 때만 버튼에 불이 들어오게 설정할 수 있었다. 처음으로 단음 벨소리에서 벗어난 모델이기도 했다. 저가 모델들은 벨소리가 40화음이었는데 이 모델은 나름 고급형이라고 64화음이었다. 당시에 유통중이었던 벨소리가 거의 40화음이라서 굳이 64화음이라는게 큰 장점이 되지는 않았다.

첫 칼라 화면 폰이었는데 요즘 물건들과는 달리 백라이트가 꺼져도 액정은 켜지게 설정할 수 있었다. 백라이트가 꺼져도 밝은 곳에서 보면 화면이 보였다.

흑백 액정에 비해서 밝고 큰 백라이트는 손전등 역할을 하기도 했다. 큰 백라이트는 마침 요긴하게 쓴 경험이 있다. 2004년 여름에 설악산을 올라갔다. 새벽차를 타고 속초에 가서 10시 반 쯤 등반을 시작했다. 저녁 5시에 대청봉에 도착한 후 내려가는 길은 금방 어두워졌다. 6시반쯤이 되자 해는 지고 시야는 깜깜했다. 그 전화기 백라이트로 길을 볼 수 있었던 최소한의 빛을 비출 수 있었다. 내가 계속 흑백 플립 핸드폰을 썼더라면 무사히 산을 내려올 수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가끔 들기도 한다.

24핀 TTA충전기를 처음으로 사용한 폰이었다. 그래서 usb로 PC와 연결이 자연스러웠다. qpst라는 프로그램을 제대로 그리고 열심히 이용해 본 유일한 전화기였다. 컴퓨터에서 샷메일로 0바이트 파일을 하나 첨부한 mms를 날린 뒤 그 파일을 다른 파일로 교체하는 식으로 휴대폰 배경화면과 벨소리를 집어 넣었던 기억이 난다.

이 폰을 쓰면서 싸이언을 처음 접했다. 그동안 천지인이 가장 뛰어난 한글 입력 방법이라고 알았는데 이지한글도 쓸만한 방식란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문자를 보낼 때 전화번호를 직접 넣지 않고 주소록을 이용할 수 있었던 첫번째 물건이었다. 전화번호를 일일이 외워서 찍을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에 이 폰을 사용한 이후에 인연을 맺은 사람들의 전화번호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유일하게 큰 돈 내고 산 전화기였다. 번호이동제도가 없던 시절이라 친구들 전화번호는 새 전화기를 살 때마다 바뀌었다. 반면에 난 기존에 쓰던 번호를 지키기 위해서(좋지도 않은 019) 신규가입 대신 항상 기변을 했었다. 그러느라 새제품을 사지 않고 항상 남이 쓰던 전화기나 임대폰을 사용했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제값을 주고 산 전화기였다. 그 당시 기억으로 테크노마트 6층에서 구입했었는데, 정가 31만원을 결제하고 10만원을 현장에서 돌려받았었다.

유일하게 큰 돈 주고 산 나름 최신형 전화기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석달만에 자전거에서 낙하해서 박살이 났다. 저녁 운동으로 자전거를 타고 나섰는데 집에 오니 핸드폰이 없었다. 전화를 걸어보니 어떤 할아버지가 받았다. 다행히 집 근처에서 떨어뜨렸던 건지 집 근처 아파트 관리실에 맡겨 놨다고 했다. 박살난 화면을 보고 허탈해 했었다. 전원은 들어오긴 하는데 배터리가 금방 소모되었다. 비닐옷을 입혀 애지중지 관리해서인지 화면은 깨졌지만 표면은 매우 깔끔했다. 그 이후로 바지 주머니에 핸드폰을 넣고 자전거를 타지 않는다. 잔해는 아직 버리지 않고 잡동사니 상자에 있다.


여섯번째 전화기는 팬텍에서 나온 전화기였다. lp2100이 박살나고 수리비가 9만원이나 한다는 사실에 망연자실 하다가 LG텔레콤 일신여상쪽 직영점에서 임대했다. 모토로라를 빌렸던 석촌역에 있던 센터는 이미 없어져있었다. 이때 당시에는 직영점이 아닌 본사에 문의를 해 봐도 무상 임대폰 물량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하루에 260원 정도를 내고 빌렸다. 팬택도 천지인 방식을 쓴다는것을 알게 되었다. 카메라 안달린 밉지도 곱지도 않은 듀얼 폴더폰이었는데 겉은 흑백 속은 칼라 액정이었다. 겉이 흑백액정이라 전화기를 만지지 않고도 항상 시계처럼 쓸 수 있었던 점과 가볍고 작은건 마음에 들었다. 내 폰이 아니라서 qpst를 연결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일곱번째 전화기는 캔유2였다. 폰을 잘 바꾸는 친구가 있는데 내 가난한 폰생활을 보더니 안쓰는 공기계라고 그냥 줬다. 폴더를 열고 닫을 때 딸깍소리가 났다. 100만 화소 카메라가 달린 당시 최고 화질을 자랑하는 폰이었다. 플래시용 LED가 달려있었는데 요즘 물건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당시로써는 불빛이 꽤 밝았다. LED를 지속적으로 켤 수 있어서 손전등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MP3기능이 있다고 홍보가 되었으나 MP3P는 옵션상품이고 가격이 16만원이나 했다. MP3재생 기능은 옵션품에서 담당하고 전화기는 디스플레이 역할만 했다. 건전지를 넣으면 핸드폰과 연결없이 독립적으로 작동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이미 MP3플레이어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옵션품목을 구입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당시에 그 정도 값이면 더 좋은 사양인 별도의 MP3플레이어를 살 수도 있었기 때문에 옵션품으로의 장점은 없었다.

캔유2는 판매는 팬택에서 했지만 사실 일본산 전화기였다. 그래서인지 24핀 충전기 연결 방향이 반대였다. 충전기에 꽂아 놓으면 충전이 되었는지는 책상 바닥에 반사된 불빛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일제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다른 전화기와 달리 안테나가 왼쪽에 달려있었다. 마음에 들었던건 바깥쪽 액정이 칼라와 흑백을 겹쳐놓은 특이한 구조였다는 점이다. 평상시에는 흑백액정을 시계로 쓰다가 전화나 메시지가 오던지 다른 작업을 할 때는 칼라 액정으로 작동했다.

나름 고가폰을 준게 고맙긴 했는데 모래밭에서 수시로 굴러다녔는지 표면상태가 상당히 지저분했다. 케이스를 갈아볼까 했는데 케이스 값만 15만원이었고 일반 업자에게 도색을 의뢰하면 3만원이 든다고 했다. 지저분한채로 쓰다가 마음에 안들어서 분홍색 매니큐어를 덧칠해서 도색을 해 봤는데 해도 별로 안해도 별로였다. 카메라를 처음으로 유익하게 쓸 수 있었는데, 학생식당들 일주일 메뉴판을 미리 찍어서 그날 밥을 어디서 먹을지 결정할 수 있었다.

LG텔레콤에서 장기 사용자를 위해서 준 상품권으로 추가 배터리를 구입했는데 불량이었는지 배터리 수명이 길지 못했다. 배터리가 하루를 겨우 버틸 때 쯤 친구의 도움으로 기변을 할 수 있었다. 팬텍 제품이었는데도 이지한글을 썼던게 특이했다.

일본산이라서인지는 모르겠지만 qpst는 막혀 있었다.


여덟번째는 캔유2를 줬던 친구가 준 LG LP3000이었다. 피처폰 중에서 만족도가 가장 높았던 전화기였다. LG텔레콤 최초의 mp3폰이었던걸로 기억한다. 용량은 무려 64메가였다. 당연히 마이크로sd슬롯같은건 없었다. 당시 쓸만한 mp3p가 있어서 활용도가 높진 않았다.

카메라는 캔유보다 화질이 좋았고 LG특유의 편리한 인터페이스가 마음에 들었다. 다만 그친구 물건답게 외관이 깔끔하진 못했다. 볼륨줄임 버튼을 몇초간 누르고 있으면 손전등으로 이용할 수 있었는데, 공기계 상태에서는 손전등 기능이 작동하지 않았다.

qpst는 사용할 수 있긴 했는데 벨소리와 화면 각각 한개씩 넣는데 성공한 걸 확인하고나서는 별 다른 흥미를 끌지 못했고 다시 시도하지 않았다.

일부 버튼이 잘 안눌리는걸 제외하고는 매우 만족했었는데 굳이 고쳐보려고 BW100을 뿌린게 실수였다. 자판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를 수도 있단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판이 가라앉고 나서 마이크가 고장났다. 이 때 쯤 LG텔레콤 고객도 다른 통신사로 번호이동이 가능하게 되었다. 내가 내릴 수 있는 선택은 넓지 않았다. 이때 LG텔레콤 장기 고객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캔유2와 이 물건은 집에 놀러온 친척 꼬마들 장난감으로 분양되었다. 캔유와 lp3000은 카메라 촬영시 찰칵 소리가 안나게 설정할 수 있는 거의 마지막 폰이었다. lp3000은 배터리를 4개나 받았는데 3개는 잡동사니 상자에 있다. 그러나 충전 거치대가 없어서 충전을 할 수 없었고 아마도 자연 방전 후 사망했을거라고 생각한다.



아홉번째 전화는 삼성의 B510이라는 모델이었다. 요즘은 24개월 약정을 해야 공짜폰을 구할 수 있지만, 그 때 당시에는 6개월 약정으로도 최고 사양의 전화기를 살 수 있는 기회가 널려 있었다. 당시 어느걸 고를까 고민했던 물건은 엘지의 샤인폰이었다. DMB가 없고 너무 무거워서(120그램) 탈락시켰다. 하지만 SK의 위성DMB는 유료 서비스였고 부가서비스 의무사용 기한이 끝나는 날 바로 해지해서 DMB기능을 제대로 써 보지는 못했다.

번호이동을 할 때 본인 명의가 아니라서 불편했기 때문에 약정이 끝나자 마자 아버지 명의에서 내 명의로 명의이전을 했다. 삼성에서 피쳐폰의 끝장을 보겠다는 컨셉으로 나온 울트라에디션 시리즈였는데 국내에서 가장 얇고 가볍고 기능이 다양한 기기였고 번호이동 기준으로 기기값이 1000원이었다. 정말 신세계였다. 난 그동안 왜 그렇게 궁상맞은 폰 생활을 했던가?

당시로도 정말 드물었던 바형 핸드폰이었는데 무게는 76그람이었다. 플립이 없어서 주머니 속에서 버튼지 잘 눌리곤 했는데 그래서 결과적으론 별 도움이 안되었지만 플라스틱 케이스를 구입했다. 배터리가 겉으로 노출되지 않고 배터리 커버 안쪽으로 들어간 첫번째 폰이었다. 배터리 커버가 너무 뻑뻑해서 쉽게 열기 위해서는 인터넷에서 사용자들의 노하우를 배워야 했다. 한번 배워보니 열기가 쉬웠다.
문자를 보낼 때 기본값으로 뜨는 "연락바랍니다"라는 글귀가 악명높은 skt의 통합메시지인줄도 모르고 삼성이 예전과 달리 센스가 생겼다고 착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카메라 촬영시 LED불이 들어오게 설정하고 진동모드를 하면 찰칵소리를 안내고 찍을 수 있었다.

기능은 많았지만 삼성 특유의 불편한 인터페이스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기술적으로는 LG보다 뛰어나다고 느낄 수 있었다.

sd슬롯이 달린 첫번째 폰이었다. KT모델인 B5100은 2기가까지 인식하지만 SK모델인 B510은 1기가까지만 인식한다고 해서 1기가 메모리를 구입해서 끼워 넣었다. 든든한 용량때문에 사진이나 동영상을 많이 찍을 수 있을까 기대를 했지만 단조로운 생활 패턴상 사진을 찍을 기회는 많지 않았다. 마이크로SD카드를 장착해서 용량이 비약적으로 늘어나고 나서는 유마일 인코더를 이용해서 SKM방식으로 변환을 해서 동영상 앨범 기능으로 핸드폰을 PMP처럼 썼다. 그 때는 제대로 된 PMP가 정말 비쌌다.

이때는 샤인폰을 마지막으로 하여 싸이언에서 LED 손전등 기능이 빠지기 시작했다. 싸이언이 디자인으로만 승부하고 기술적으로 맛이 가기 시작했던 시기가 이 때 쯤 부터였던것 같다. 이 당시 전화기는 기능이 많아 봐야 폰카, mp3, DMB정도였을 뿐인데 LG측에서는 핸드폰 기능이 너무 많고 복잡해져서 LED손전등은 다른 기능과 충돌 때문에 넣을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 선언 이후 싸이언 모델은 LED가 탑재되지 않은 채로 출시되었다. 촬영용 LED가 달려있으면 손전등 기능도 넣어 달라는 고객의 요청이 계속될 거라 예상하고 이를 사전에 차단하고자 하는 의도로 보였다. 심지어 스마트폰인 옵티머스Q, Z, One, Chic까지도 그런 전통을 계승해서 LED없이 출시되었다.

B510은 내가 사용한 전화기 중에서는 USB로 넣은 mp3를 벨소리로 쓸 수 있었던 첫 폰이기도 했다.  정부에서 지정한 24핀 방식에 대항해서 제조사들이 자체 규격을 만들고 젠더를 제공했던 시기였다. 삼성은 20핀 LG는 18핀이었는데 얼핏봐서는 똑같이 생겼으나 끼우려고 하면 안들어갔다. TTA20핀은 나오기 전이었었다. 삼성 20핀 젠더 2개가 제공되었다. 마이크로SD카드를 구입할 때는 mp3용으로도 유용하게 쓸 수 있을거란 기대를 했었다. SKT의 멜론을 통한 한번에 한곡씩 음악 넣게 하기 정책을 보고 푼돈 챙기는 통신사의 횡포란게 이런거구나 라는걸 느끼고 통신사에 대한 구체적인 혐오감을 갖게 했던 폰이기도 했다. 멜론 스나이퍼라는 프로그램도 기억난다. 매크로를 이용해서 여러곡을 한꺼번에 폰으로 넣을 수 있게 한 프로그램이었다. 멜론이 업데이트 할 때마다 며칠 간격으로 따라서 업데이트 했었다. KT 단말기는 KT의 음악사이트 도시락의 포멧인 KMP파일 이외에 삼성 자체 파일 포멧인 SMP를 쓸 수 있었다. 삼성의 싱크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폴더별 관리가 되었으나 SK단말기는 오직 멜론의 DCF형식만 폰으로 전송할 수 있었다. 곡을 폴더별로 넣을 수 없어서 당시로써는 나름 컸던 1기가 메모리는 별 매력이 없었다. 당시 SK텔레콤 이용자들이 공정위에 멜론을 강요하는 SK의 횡포에 대한 제재를 요청했고 공정위는 이를 받아들였으나 SK가 소송으로 공정위 제재를 뒤집었다. 스마트폰 시대인 요즘은 지나간 일이지만 당시에는 SK에 대해 오만 정나미가 떨어졌었다.

캔유2와 LP3000을 꽤 오랫동안 사용했기 때문에 이지한글에 완전히 익숙해져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천지인을 쓰니 이지한글이 훨씬 편리한 입력방식이란 걸 새삼 알게 되었다.

1년 정도 잘 쓰다가 자전거 타고 하남 가던 길에 서하남 인터체인지 근처의 울퉁불퉁한 인도에서 떨어져서 박살이 났다. 자전거 타다가 떨어뜨리면 케이스도 충격 흡수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보도블럭 교체가 예산 낭비라는 지적도 있지만 그 정도로 상태가 나쁜 길은 종종 수리를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 길은 승차감만으로는 자전거를 탄 건지 풍랑을 만난 배를 탄건지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울퉁불퉁했다. 기계가 없어진 것을 알게 된 것은 하남에 도착한 뒤였다. 친구 전화로 전화를 걸어보니 어떤 아저씨가 받았다. 주변 상점들 전화기를 얻어쓰면서 물어 물어 찾아갔는데 전화기는 박살난 상태였고 핸드폰줄로 달아놓은 2만원쯤 충전해 놓은 티머니카드는 없어졌다. LS그룹 취업설명회때 무료로 받은 물건이다. 짜증이 올라왔다. 물론 처음 주운 사람이 티머니만 뺀 후 핸드폰은 그 자리에 버리고, 돌려준 분은 티머니가 빠진 상태로 핸드폰만 주워서 보관했을 수도 있다. 그 분 앞에서 티머니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건 물에 빠진 사람 건졌더니 보따리 내 놓으라는 격이기 때문에 할 수 없었다. 고맙다고 인사는 했지만 고마운 마음보다 씁쓸한 기분이 크게 남았었다. 간단한 사례라도 해야겠다는 처음의 마음은 사라져 버렸다. 그 날 이후로 남방 윗주머니에 핸드폰을 넣고 자전거를 타지 않는다.

잔해는 잡동사니 상자에 남아있다. USB를 연결하기만 하면 아직 전화번호부나 문자 같은 데이터를 꺼낼 수 있을 거다.


열번째는 삼성의 B5100이었다. B510과 통신사만 다르고 기기적으론 같은 물건이었다. 019번호를 지키려면 2G전화기가 필요했었다. 당시 쓸만한 2G전화기가 거의 멸종된 상태였지만 운좋게 가까스로 옥션 1원폰으로 구할 수 있었다. 2년 약정에 위약금 8만원이었다. 처음에는 위성이 아닌 지상파 DMB라서 좋고, 외장 안테나가 기본으로 제공되어 있어서 더 좋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위성DMB와는 달리 집안에서 지상파 DMB 신호는 외장 안테나를 달고도 거의 잡히지 않았다. 위성DMB모델은 굳이 안테나가 필요 없어서 제공하지 않은 것이었다.

KT에서는 문자가 다른 통신사들처럼 80바이트가 아니라 90바이트라는게 신기했었다. 이전에 구입한 마이크로SD카드가 1기가라는게 아쉽긴 했지만 어차피 그 용량도 꽉 채워본 적은 없었다. 그 SD카드는 안버리고 지금도 winpe용으로 활용중이다.

이 물건은 사용할 때는 별로 이야기 거리가 없으나 처분했을때는 약간 사연이 있다. 번호이동 후 중고로 팔아보고자 장터에 내 놨고 몇번의 네고 요청을 받았다. 출시된지는 오래되었으나 2G기기로써는 최고 사양이었고 희소성이 있었기 때문에 가격은 제법 높은 편이었다. 게다가 파손된 B510에 딸린 악세사리까지 포함해서 팔려고 하니 가격을 더 높게 부를 수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KT에서 2G종료 선언을 했다. 아마 2010년 3월 28일이었을거다. 그 이후 기기를 사겠다는 사람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에 대해 KT에 보상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했고 방통위에 민원을 넣었다. 방통위의 중재로 KT 담당자와 KT의 귀책여부에 대한 설전을 한번 한 후 KT측에서 제공한 약간의 보상을 받았다. 보상을 받고 며칠 후 몇만원 낮춘 가격에 폰 매수자가 나타나서 팔렸다. 택배 배송지 주소는 부산이었던 것 같다. 그냥 팔기 찜찜해서 매수자가 2G종료 여부를 아는지 여부를 물어봤는데 상관치 않는다고 했다.


이렇게 마지막 피쳐폰을 떠나 보냈다.


첫번째 스마트폰은 모토쿼티다. 어쩌다보니 피쳐폰은 슬라이드를 한번도 못 써봤는데 아이러니하게 첫 스마트폰은 스마트폰으로는 정말 드문 형태인 슬라이드다. B5100를 이용했던 KT 약정이 끝나는 날 번호이동을 했다. 그간 유지했던 019번호를 버리고 010번호를 받으면서 에이징을 위해 SKT용 번호로 번호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꿨다. 전화번호부에 있는 사람들 중 일부에게 새 번호를 알렸고 그 중 많은 사람들이 내 번호를 변경해서 저장하지 않은 걸로 추정된다. 카카오톡을 주소록과 연동시키지 않기 때문에 내 번호를 가진 사람은 친구추천으로 떠야 하는데 내가 바뀐 새 번호를 알린 사람에 비해 친구추천으로 들어온 사람의 수가 상당히 적었다. 유통기한이 지난 많은 인간 관계가 씁쓸하게 정리되었다.

이 물건은 천원폰도 아닌 마이너스 폰이었다. sk텔레콤 12개월 약정 15만원 위약금이 달린 조건으로 핸드폰을 개통한 대가로 7만원을 주는 업체가 있었다. 이것부터 스마트폰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스마트폰 이전의 전화기가 아니므로 기기의 특징 및 사용 경험에 대해서는 쓰지 않겠다. 12개월 약정을 채우기 전에 다른 전화기를 장만한 후 T에코폰에 7만5천원을 받고 처분했다. 일반적인 중고 직거래보다 높은 가격이었다. 입금이 완료된 때는 SK텔레콤 측에 택배가 도착하고 난 3주 후였다. 약정을 채웠을 때 쯤 T에코폰 시세가 대폭락했다는 점을 기억해 볼 때 적절한 매도 타이밍이었다고 본다. 약정을 채운 날에 맞춰서 MVNO로 번호이동을 했다.


기본료가 상당히 저렴한 MVNO를 알게 된 이후에는 번호이동에 따른 공짜 기기 혜택을 향유하던 잠시 동안의 풍요는 끝나고 또 다시 가난한 폰 생활이 시작되었다. 오랜 경험상 전화기에 돈 쓰는 것 만큼 부질 없는 지출이 없다는 걸 잘 알기에 앞으로 계속 궁상맞게 지낼 듯 하다.

Posted by 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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