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장, 선악과 에피소드는 인간이 한 일이 비해 신이 과하게 분노하는 것처럼 보이는 측면이 있다. 단지 명령을 어긴 것이고, 그 내용도 겨우 과일을 하나 따서 먹었을 뿐인데 그렇게나 자비롭다는 신이 자기가 사랑한다는 인간에게 어마어마한 저주를 퍼붓는 모습을 보인다. 기존의 신학이 이 문제를 해명하는 자유의지, 불순종, 계획된 섭리 정도로 신의 격한 분노에 공감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아 보인다.
일단, 뱀에게 속은 하와의 입장을 생각해 보자. 신이 과일을 먹으면 죽으니까 먹지 말라고 인간에게 명령했다. 그런데 그 시점까지는 죽음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아서 하와는 죽음이 뭔지 몰랐다. 그리고 하와가 죽음이 무엇인지를 알았더라도 선악과나무 옆에 있던 생명나무의 열매를 아담이 따서 죽어가는 하와에게 먹여주면 별 탈 없이 지나갈 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와는 누군가가 자신에게 사실이 아닌 것을 말할 수 있고 그것을 믿었다는 이유로 자기에게 해악이 돌아올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에덴동산의 모든 생명체들은 신이 직접 만든 피조물이고 하와에게는 형제자매와 다를 바 없는 존재들이었다. 과일을 먹어도 죽지 않는다는 뱀의 유혹은 하와가 처음으로 경험한 거짓말이었다. 하와가 뱀을 믿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하느님이 규칙을 바꾸셨나 보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하와는 우선 자기가 과일을 먹었다. 뱀의 말대로 죽지 않았고 눈이 밝아졌다. 하와가 보기에 뱀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한 셈이었다. 그리고 하와는 선악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자기 기준에서 봤을 때 벌거벗음을 부끄러워하게는 되었지만 선악과를 먹은 행위가 죄라는 자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랬기 때문에 아담에게도 먹어보길 권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선악을 알게 된 아담 역시 벌거벗음을 부끄러워했을 뿐이다. 아담은 신에게 과일을 먹은 사실을 숨기거나 사과하거나 변명하려고 하지 않고 자기가 했던 그대로를 담담하게 말했다. 기존 신학은 선악과 사건에 대해 신과 동등한 존재가 되겠다는 오만함을 지적한다. 그러나 선악 구분도 못하고 뱀에게 속기나 하는 하와를 지나치게 악의적으로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분명히 뱀은 하와에게 눈이 밝아진다고만 말했을 뿐 다른 추가적인 효능에 대해 말한 적은 없다. 아담과 하와는 눈만 밝아졌을 뿐 신과 같이 천지를 창조하거나 세상의 질서를 관장하는 존재가 될 수 없었다. 사랑하는 대상과 닮고 싶어 하는 건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아담과 하와의 행위는 엄마가 즐겨 쓰는 안경을 안경집에서 꺼내서 다리를 펴고 자기 콧등 위에 올리고는 거울을 보고 미소 짓는 어린아이 정도를 연상하는 것이 오히려 어울린다.
이렇게 하와나 아담에게 감정을 이입하여 생각해 보면 신의 분노는 지나쳐 보이는 면이 있다. 신은 초월적 존재이기 때문에 신을 인간화 해서 상상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 신학의 주류적 태도다. 그러나 창세기 3장의 신은 유달리 과도할 정도로 인간적인 감정을 드러냈다. 따라서 창세기 3장에 한정해서는 신에게 인간의 심리를 분석하는 방법을 적용해 보면 선악과 이야기에서 기존 방법들로는 발견하지 못한 또 다른 층위의 의미를 해석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성경에서 신이 아담에게 왜 그렇게까지 화가 났을까를 감정적인 측면에서 찾기 위해 생각해 보다가 이런 추측을 해보게 되었다. 인간은 단지 명령을 어겼다기보다는 신의 역린을 건드린 게 아닐까?
신이 왜 그렇게까지 화를 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인간이 저지른 일에 대한 포커스를 신에 대한 불순종 말고 행위의 내용, 즉 선악과를 먹은 것에 옮겨볼 필요가 있다. 선악과를 먹고 인간에게 선악을 구분하는 능력이 생기고 눈이 밝아지면 신이 인간에게 새로운 걸 가르쳐줄 만한 것이 크게 줄어든다. 게다가 인간은 신의 가르침이 맞는지 틀린 지까지 자기가 기준을 세워서 판단하고 평가하려고 들게 될 것이다. 그러면 신은 자신에 대한 인간의 존경을 유지하기 위해 인간의 눈치도 봐야 하고, 신경 쓰이는 일이 많아질 것이다. 문득 나는 어떤 기괴한 일본 비주류 영화에서 창세기 3장의 신으로부터 발견되는 특이한 정서를 느꼈다.
일본 핑크 무비 프랜차이즈 중에서 완전한 사육이라는 시리즈물이 있다. 그중 2004년에 발표된 6편, 붉은 살의라는 영화의 중반부까지의 내용을 대략적으로 설명하겠다. 유명하지 않은 영화이기 때문에 지나치게 간략화하면 이 글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적절히 설명할 수 없다. 따라서 영화의 내용에 대해서는 다소 분량을 배정할 수밖에 없다.
강력 범죄를 저지른 남자 주인공은 경찰과 빚쟁이들을 피해서 산속을 헤매다가 어떤 외딴집으로 숨어 들어갔다. 그런데 그 집에는 어린 시절에 납치를 당해서 성인이 될 때까지 감금되어 살고 있는 젊은 여자와 그 여자가 소녀였을 때 유괴를 한 변태 중년 남자가 함께 살고 있었다. 유괴범은 아침이 되면 산 아래 마을로 내려가서 허드렛일로 생계를 이어간다. 유괴범은 여자가 어린 시절부터 "집 밖은 위험만 가득한 무서운 곳이니까 절대로 밖에 나가지도 말고 누가 집에 오더라도 기척 하지 말고 숨어있으라"라고 세뇌시켰다. 때문에 그 유괴범이 신체적으로 구속하지 않았는데도 여주인공은 집 바깥의 사람들이 무서워서 탈출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유괴범이 그녀를 납치한 이유는 성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성기능 장애 때문에 그녀와 직접적인 성행위를 하지는 못했다. 대신에 그는 어린 시절부터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그녀를 어린아이처럼 대하면서 가스라이팅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만의 성적인 쾌락을 즐겨왔다.
유괴범이 집을 비운 시간에 남주인공은 조심스럽게 여주인공에게 접근해서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곧 그들은 성관계를 가졌고 여주인공은 그렇게 성에 눈을 뜨게 되었다. 여주인공은 유괴범이 정상적인 성기능이 없어서 변태적인 행동들을 해왔다는 점을 눈치채고 그를 우습게 여기기 시작했다. 그런 태도는 유괴범을 비웃는 그녀의 표정으로 드러나게 되고 그는 그런 웃음을 보자 격하게 화를 내면서 그녀를 전기충격기로 위협했다. 글의 주제와 상관없는 뒷 내용들은 생략하겠다.
신을 변태나 찌질이로 몰아가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다만 강렬한 비유를 위해 그 영화의 캐릭터들을 활용했을 뿐이다. 어떤 범죄자의 뒤틀린 정서를 보여주는 영화에서 창세기 3장이 연상된 포인트를 설명하자면 이렇다. 유괴범이 여주인공에게 영원한 순진함을 원했듯이 신은 인간에게 선악을 구분할 능력이 없기를 바랐다. 그녀가 성에 눈을 뜨고 나서 자신과 정상적인 성관계를 가질 수 없는 그를 비웃기 시작했듯, 인간들도 선악에 눈을 뜨고 나서 선악의 잣대로 신을 평가하면서 신에게 미묘한 경멸감을 드러냈을지 모른다.
예를 들어서 아담이 이런 식으로 생각한 걸 신이 읽었을지도 모른다.
"하느님은 왜 자기와 동등한 신과 같은 높은 존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이렇게 작은 동산을 만들어놓고 보잘것없는 우리랑 노시는 거지? 혹시 자기보다 훨씬 약한 존재하고만 어울릴 수밖에 없을만한 사정이 있을까? 혹시 당신께서 직점 만드신 우리 같은 미물들 말고는 사랑을 받을 만한 상대를 찾지 못하신 걸까?"
혹은 인간이 벗은 몸을 옷을 만들어서 가린 행위 자체에서 신이 신체적 또는 도덕적 수치심을 느꼈을 수도 있다. 이건 신이 옷을 입고 있었을 때와 벗고 있었었을 때 각각의 경우에 따라 신이 느낀 수치심의 내용이 달라진다.
만약 신이 옷을 입고 있었다면, 인간이 무화과잎으로 몸을 가린 것을 보고 이렇게 생각했을 수 있다.
"남자와 여자(아직 아담과 하와라는 이름 없었음)는 그동안 왜 나만 옷을 입고 자기들만 부끄러운 곳을 드러내게 하고 생활하게 했을지를 의심하고 있겠구나. 마치 나에게 음흉한 관음증이 있는 걸로 나를 오해하고 있을지도 몰라. 내가 도덕적 존재라는 진리를 의심게 될지도 몰라. 그런 거 아니라고 대놓고 지금 상황에서 굳이 해명하기도 애매하고 어떡하지? 이것 참 난처하게 되었구나. 그냥 혼내고 내쫓아버릴까?"
신이 옷을 벗고 있었다면, 이렇게 생각했을 수 있다.
"남자와 여자는 지금 자기 몸에 부끄러운 곳이 있다면서 가리고 있다. 그 말은 나를 보면서도 내가 부끄러움도 모르고 가리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나를 업신여기고 있겠구나. 이것 참 민망하게 되었구나. 괜히 내가 창피해진다. 내가 완전한 존재라는 진리를 의심하게 될지도 몰라. 앞으론 나도 옷을 입어야겠다. 아니면 시각적으로 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목소리랑 계시만으로 소통하는 방법도 있지. 그리고 나에게 수치심을 심어준 저 놈들을 멀리 쫓아내야겠다."
영화에서 유괴범은 그녀의 비웃음에 화를 내며 그녀를 전기충격기로 위협했다. 성기능 장애라는 자신의 깊은 콤플렉스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신은 인간이 선악을 구별할 수 있게 된 점에 극도로 분노를 표출하면서 인간들을 에덴동산 밖으로 추방했다. 그리고 인간이 절대로 영원한 생명을 가질 수 없도록 생명나무 주변에 케루빔(한국어 성경으로는 '그룹', 세라핌 바로 아래의 고위 천사 등급)을 세워 지키게 하고 회전하는 불칼까지 배치했다. 눈이 밝아진 존재가 영원히 산다면 자신을 더 집요하게 관찰하고 그렇게 생긴 의문에 대해 더 따지고 들 텐데 신에게는 그것이 별로 겪고 싶지 않은 일이었을 것 같다. 애초에 선악과 나무도 그렇게 지켰으면 상호간에 얼굴 붉힐 일이 없었을 것이다. 전지하고 자비롭다고 알려진 신 답지 않은 뒤늦은 조치였다. 두 이야기는 캐릭터의 거룩함 측면에서 큰 차이가 있지만, 무지하고 순수했던 피지배적인 존재가 지배자의 실체를 알아가는 것에 대한 권력자의 불안과 분노를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자녀가 어린아이였을 때 부모는 자녀에게 무엇이든 자신의 가치관을 주입할 수 있다. 그러나 자녀가 어느 정도 성장하여 스스로 생각할 수 있게 되면 그것이 불가능해진다. 때때로 이전에 주입했던 가르침에 대한 도전까지 받게 된다. 신은 인간의 성장을 원치 않았고 영원히 아기처럼 보호해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인간이 선악과를 먹어서 눈이 밝아지면서 신의 그런 바람을 좌절되자 신은 인간에게 그 즉시 힘든 노동과 출산의 고통 같은 어른의 책임을 지우게 된 것 같아 보인다.
한편, 일반적으로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자녀가 자기보다 나은 사람이 되길 바란다. 신은 인간을 사랑한다지만 신이 인간에게 바라는 것은 부모가 자식에게 바라던 것과는 반대인 것으로 보인다. 신은 인간이 지나치게 똑똑하거나 큰 성취를 이루는 걸 꺼렸다. 신의 그런 성향은 바벨탑 이야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진정으로 인간을 자녀로 여긴다면 인간의 발전과 성장을 진심으로 응원해야 할 것 같은데 신이 보여준 태도는 마치 견제나 통제가 필요한 노예를 대하는 주인의 태도를 연상시킨다. 종교인들은 바벨탑 이야기에 영감을 받았는지 과학, 특히 생명공학과 인공지능의 발전에 대하여 신의 영역에 대한 침범을 운운하며 반대하는 입장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하와와 아담 대신에 이들이 에덴동산에 있었다면 그들은 강렬한 복종심으로 뱀을 처단했을 것이다. 뱀을 죽이는 것은 신이 내려준 금지사항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랬다면 우리는 꽤나 맹한 상태로 편안하게 인생을 즐기고 있었을지 모르겠다. 어쩌면 그들은 유감스럽게도 세상에 너무 늦게 도착한 '신의 보물들'인 것 같다.
하지만 기왕에 신으로부터 미움받고 쫓겨났으니 한탄을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자유와 해방감을 마음껏 즐겨 보는 게 추방당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