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 능력이 부족하거나 귀찮은 부분은 ai(제미니 2.0 플래시 씽킹 01-21)에게 쓰게 했고 빨간색으로 표기함.
솔로몬과의 왕권 경쟁에서 밀려난 아도니야는 선왕 다윗의 후궁이었던 아비삭과 자신의 혼인을 허락해달라고 요구하다가 죽임을 당했다. 구약성경 열왕기상 도입부에 등장하는 그 에피소드를 보고 뭔가 써보고 싶어졌다.
성경에서는 아도니야가 어리석고 탐욕스러우면서 분위기 파악도 못 하는 한심한 인물처럼 묘사되는데 나는 그게 영웅 다윗의 아들답지 않고 굉장히 부자연스럽다고 느꼈다. 그렇게 생각하다보니 건조한 성경 문장 이면에 존재했음 직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떠올랐다.
1. 수넴에서 온 햇살
불세출의 영웅 다윗 왕이 늙어서 기력이 쇠진해지자 신하들은 다윗 할아버지의 이부자리를 따뜻하게 덥혀줄 여인을 선발했다. 수넴의 아름다운 소녀 아비삭이 후궁에 간택되어 예루살렘 성에 입궁한다.
마음씨 착한 아비삭은 존경해왔던 다윗을 가까이에서 모시게 되어 영광스럽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에게 위안을 주고 필요한 존재가 된 점도 기뻤다. 그렇지만 명목뿐인 후궁이 되어 평생을 처녀로 살아가야 할 앞으로의 인생을 떠올려보니 막연하게 먹먹한 감정이 들었다. 그것은 후궁으로 선발된 순간부터 이미 일어난 일이었지만 그녀는 그것을 아직은 먼 훗날의 일로 여기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이 아니라 기분이고 자기 기만일 뿐이란 걸 똑똑한 그 소녀는 잊지 않고 있었다.
아비삭이 탄 가마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성문에 들어섰다. 햇살이 가마의 닫집 틈새로 쏟아져 들어와 그녀의 얼굴 윤곽을 희미하게 비췄다. 가마 문이 열리고 아비삭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숨 막힐 듯한 정적이 흘렀다.
그녀의 눈은 마치 새벽녘 호수처럼 맑고 깊었다. 슬픔과 불안이 어리는 듯했지만, 그 깊이 속에는 꺾이지 않는 고고함과 침착함이 깃들어 있었다. 보는 이들은 그 눈빛에서 헤아릴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엿보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섬세하게 뻗은 콧날은 오만해 보일 수도 있었지만, 굳게 다문 입술은 오히려 연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내면을 드러내는 듯했다. 햇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는 갈색 머리카락은 단정하게 땋아 내렸지만, 가마에서 내리는 순간 살짝 흐트러지며 묘한 신비감을 더했다. 희고 매끈한 피부는 햇빛 아래에서 더욱 투명하게 빛났고, 얇은 비단 옷 아래로 드러나는 가녀린 어깨는 보호본능을 자극했다.
하지만 그녀에게서 진정으로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드는 것은 단순한 아름다움이 아니었다. 기품 있는 자세와 조용한 분위기는 주변 공기마저 정화시키는 듯했고,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듯한 고요함은 보는 이의 마음까지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마치 세상의 풍파를 초월한 듯한 초연함과, 고난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강인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역설적인 매력이었다.
마치 그녀의 내면에 성령이 깃들어 그 신비로움이 외부로 비쳐 나오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것은 흡사 신이 가장 사랑하는 자신의 종, 늙은 다윗에게 베푸는 마지막 축복 또는 선물처럼 보였다.
아비삭은 슬픔과 불안, 경외감과 약간의 호기심이 뒤섞인 복잡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스치는 곳마다 사람들은 숨을 죽였고, 그녀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에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녀는 마치 고요한 폭풍의 눈과 같았다. 겉으로는 잠잠해 보이지만, 그 내면에는 거대한 운명의 소용돌이가 숨겨져 있음을 짐작하게 하는, 강렬하면서도 섬세한 존재감이었다.
아도니야는 그녀의 복잡한 표정 속에서 막연한 불안과 미세한 슬픔뿐만 아니라, 세상의 어떤 화려함으로도 감출 수 없는 고독을 읽었다. 단순히 예쁜 여인이 아니라, 보듬어 주고 싶은 상처와 고뇌를 품고 있는 고귀한 영혼을 발견한 듯한 강렬한 이끌림을 느꼈다.
소년 솔로몬은 낯선 여인의 초월적인 아름다움에 압도당했다. 지금까지 보아왔던 궁녀들과는 차원이 다른, 신화 속 여신과 같은 아우라에 넋을 잃었다.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고, 그녀의 모든 것이 궁금해졌다. 그것은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선,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경배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의 여자에 대해 특별한 감정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생각은 생각일 뿐 그는 아비삭의 신비로운 표정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 한동안 밤늦게까지 잠들지 못하곤 했다.
한편 아도니야는 곧 그녀와 친밀한 관계가 된다. 아도니야는 다윗의 집무실을 자주 방문하며 아비삭에게 꾸준히 호감을 표현했다. 처음에는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고 왕의 안부를 묻는 것이 전부였지만, 점차 궐 밖의 흥미로운 소식이나 자신이 새로 읽은 두루마리 이야기를 들려주며 아비삭의 관심을 끌고자 노력했다. 아비삭은 처음에는 낯선 왕족의 갑작스러운 친절에 경계심을 느꼈지만, 아도니야의 소탈한 유머 감각과 훤칠한 외모, 그리고 무엇보다 존경하는 다윗 왕의 눈매를 빼다 박은 듯한, 다윗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모습에 호감을 느껴 점차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도니야가 방문하는 날이 기다려지고, 그와 함께 나누는 대화 시간이 즐겁게 느껴졌다. 어느덧 아도니야는 아비삭에게 단순한 궐 밖 이야기가 아닌, 자신의 신분과 신앙적 의무에 대한 고민이나 감정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아비삭 또한 그의 진솔한 모습에 마음을 열고 자신의 실존적인 외로움과 불안감을 조심스럽게 내비치기 시작했다. 서로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들이 담긴 감정을 공유하면서 두 사람은 점차 서로의 모든 것을 알아가는 관계로 발전해 나갔다. 둘만 있는 짧은 틈이 생기면 다윗의 눈을 피해 손을 잡거나 가벼운 포옹을 나누는 정도의 스킨십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아도니야는 때때로 진지한 눈빛으로 사랑을 속삭였지만, 아비삭은 아직 위대한 다윗에 대한 존경심과 죄책감 때문에 그의 마음을 온전히 받아들이지는 못하고 혼란스러워했다.
솔로몬은 아도니야처럼 직접적인 호감을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아비삭은 그의 첫사랑이자 짝사랑이 되었다. 그리고 그녀를 점점 더 경험해 가면서 그녀의 따뜻한 성품과 지혜로운 행동으로 그녀는 어린 솔로몬에게 이상화된 여성상으로 자리 잡아 버린다.
아비삭의 입궁 이후 얼마간 시간이 지났다. 그때는 다윗의 인구조사에 대한 신의 징벌이었던 전염병이 발생했던 시절이었다. 아직 솔로몬은 키만 훌쩍 클 뿐인 소년이었다. 수많은 백성들의 무고한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어린 솔로몬을 아비삭은 품에 안아주고 등을 토닥이면서 이렇게 달래주었다.
"왕자님. 주님께서는 자비로우신 분이라고 해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건 공의로운 심판일 뿐이고 우리가 참회하고 있으니까, 주님께선 노여움을 곧 풀어주실 거예요."
아비삭에게 안겨 있던 어린 솔로몬은 몸을 맞댄 그녀의 어깨높이를 보고는 어느덧 자신의 키가 그녀보다 약간 더 커졌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자기도 그녀에게 남자로 보이기 시작하지 않았을까라는 기대를 해본다. 그러나 솔로몬은 역시 아이답게 그녀와의 포옹을 길게 이어가고자 애써 오랫동안 불안한 척한다. 솔로몬은 자기의 쿵쾅대는 심장의 울림을 아비삭이 알아채면 어쩌나 부끄러워했다. 그때 아비삭의 어깨 너머로 아도니야의 모습이 보였다. 형의 얼굴에는 묘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어린 솔로몬은 미소의 의미를 알 수 없었지만, 본능적인 불쾌한 예감을 느끼고 주먹을 꽉 쥐었다. 잠시 후 아도니야가 끼어들었다.
"솔로몬 많이 힘들구나? 그런데 너무 오래 안고 있어서 부인께서 좀 곤란해하시는 것 같아. 이리 와서 이 형님한테도 대신 안겨보거라."
솔로몬은 아도니야에게 안기면서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모처럼 좋았는데 왜 방해하지? 아비삭 누나가 불편해하는지 아닌지를 자기가 어떻게 알아?'라고 생각했다.
2. 죄 많은 여인.
어느 날, 세간에 '죄 많은 여자'로 알려진, 그러나 너그러운 인품과 기품 있는 언행으로 큰 존경을 받고 있는 왕비 밧세바는 자기의 하나뿐인 친아들인 어린 솔로몬을 데리고 성벽 위를 거닐었다. 차가운 바람이 두 사람의 옷자락을 스쳤고, 저물어가는 햇빛이 성벽 아래 마을에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밧세바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가늘고 흰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아래 저 집이 보이느냐? 저기가 내가 예전에 살던 곳이야. 폐하와 혼례를 올리기 전, 저곳에서 살았었지. 그때 나는 이미 어떤 군인의 아내였어."
솔로몬은 멋쩍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이 수군대는 걸 들어서 대충은 알고 있어요, 어머니."
왕비는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제 너도 내 뜻을 이해할 나이가 되었으니 말해주마. 내 남편이었던 그 남자는 훌륭한 인품을 가졌던 사람이었어. 그는 나를 사랑했지만 나는 그에게 그다지 끌리지 않았어. 누구나 그렇듯, 가문끼리의 관계로 맺어진 혼인이었고 나는 단지 그 숙명에 따랐을 뿐이야. 하지만 나는 겨우 그 정도 하급 군인의 아내로 내 생을 마치고 싶지 않았어. 어린 시절부터 나는 만나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왕비가 될만할 정도로 예쁘다는 찬사를 늘 들으며 자랐어. 그러다보니 나는 그게 나에게 합당한 자리라고 믿게 되었지."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성벽 아래를 바라보았다.
"저 집 정원이 잘 보이지? 나는 폐하가 성벽을 거니는 시간대를 알아내고는 집 안이 아닌 정원까지 나와서 목욕을 하곤 했어. 아마 폐하 말고도 성안 사람들 여럿이 내 벗은 몸을 봤을 거야. 나는 폐하의 시야에 내 모습이 확실히 들어와야 한다고 바라면서 몇 번이고 옷을 벗었어. 부끄러웠지만 그 모습이면 폐하의 마음을 충분히 흔들거라 확신했고 그게 내가 선택한 길이었어."
솔로몬은 숨을 멈춘 듯 보였다. 그의 눈은 밧세바가 가리킨 집을 향했지만, 그녀의 이야기에 압도당한 듯 초점이 흐려졌다.
지금 들은 말은 솔로몬이 여태까지 알고 있었던 가냘프고 순수하고, 한없이 선하기만 했던 어머니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굳이 그렇게까지요? 지금처럼 되는 게 그렇게까지 절실하셨나요?"
밧세바는 한숨을 쉬며 솔로몬을 살짝 질책했다.
"폐하와 나의 아들인 네가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인데 '굳이'라니? 부끄러운 과거를 들춰가며 너에게 교훈을 알려주려는 이 어미를 모욕하지 말거라. 나는 궁궐에 들어오고 나서 단 한 번도 내 마음 속 깊은 곳에 숨겨 놓은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본 적이 없다. 내 하나뿐인 아들인 네가 다행히 똑똑한 아이로 성장했고, 지금의 너라면 내 이야기를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다고 믿고 이런 말을 하는 거야."
그녀는 눈에 눈물이 맺힌 채로 자신의 첫 아기와 첫 남편 우리아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렇게 폐하와 금지된 사랑을 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 태어나자마자 주님의 징벌로 죽어 버릴 운명이었던 네 친형을 잉태하게 되었지. 그리고 큰 야망을 가진 여자의 남편이었다는 죄로, 누구보다 용감하고 고결한 인품을 가졌던 군인의 목숨이 사라졌어."
왕비는 잠시 말을 멈추고, 성벽 아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 어린 눈물은 죄책감인지, 후회인지, 아니면 단지 바람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다시 단호해졌다.
"명심하거라, 네가 지금 누리는 이 모든 것, 이 성벽 위의 풍경은 누군가의 희생 위에 세워진 거야. 권력과 권세는 거저 얻어지는 게 아니야. 네 앞길을 막는 자는 누구든 치워버릴 각오를 해야 한다. 알겠니?"
솔로몬은 어머니의 눈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눈매와 똑닮은 그 눈빛 속에는 그가 아직 이해할 수 없는 깊은 어둠이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그는 언젠가 그 어둠을 마주해야 할 것임을 직감했다. 그의 손이 성벽의 차가운 돌을 꽉 쥐었고,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알겠습니다, 어머니."
그의 목소리는 또렷했지만, 그 속에는 미묘한 떨림이 담겨 있었다.
밧세바는 고개를 돌려 다시 성벽 아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미소도, 눈물도 없었다. 단지 텅 빈 표정만이 남아 있었다. 성벽 아래, 그녀가 가리켰던 낡은 집은 이제 그림자 속으로 완전히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솔로몬은 그날 이후부터 밧세바에게 원하는 것을 쟁취하는 다양한 방법들과 마음가짐,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을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는 처세법과 화술 등을 배우게 된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깨우치는 천재였던 솔로몬은 어머니의 가르침을 넘어 점차 독보적인 지혜를 갖춘 왕자로 성장해 갔다. 한편 아도니야는 무예와 사냥을 즐기고, 토라와 역사를 공부하고 때때로 아비삭과 그것들에 대한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고 애정어린 교감을 쌓아가며 몇 년의 시간이 흘러갔다. 아도니야는 그동안 몇 번이나 들어왔던 혼담들을 모두 거절했다.
3. 젊은 늑대와 늙은 사자.
그러던 어느날 다윗은 힘든 몸을 겨우 이끌고서 외국의 사신을 맞이하러 연회에 참석했고 아비삭은 다윗의 침소에 혼자 남게 되었다. 아도니야는 그날을 기회로 삼아 마음에 담아둔 말을 고백하기로 했다. 그는 아비삭을 아버지의 침상에 눕히고 키스를 했다. 그리고 그녀의 따뜻하고 가냘픈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아비삭은 얼굴만 붉힐 뿐 저항하지 않았다. 아도니야는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좀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소. 아바마마께서는 틀림없이 나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만고의 영웅이셨지. 하지만 지금은 힘 없고 총기가 흐려진 노인일 뿐이지만... 그대는 아버님에 대한 존경심 너머의 각별한 감정이 있소? 내가 그대를 안았을 때 당신의 가슴으로부터 내게 전달되는 두근거림, 지금처럼 가빠진 당신의 뜨거운 숨결, 저녁놀같이 수줍은 미소, 당신의 이런 모습들을 폐하께서 단 한 번이라도 느끼셨을까? 비록 지금 당신은 폐하께 묶인 몸이지만 아바마마께서 승하하신다면 내가 반드시 당신을 내 여자로 삼겠소. 반대하는 자가 있다면 내 손에 피를 묻히더라도 내가 모두 다 해쳐 나가겠소."
아비삭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맑은 눈물과 함께 긴 저녁 하늘이 그녀의 얼굴에 남아 있었다. 다윗의 품에 안겨서 잠을 자는 그곳에서 그의 아들과 애정 행각을 벌이고 있다는 점에 그녀는 말할 수 없는 죄책감을 느꼈다. 그러나 어쩌면 아도니야라면 늙어 죽은 왕을 평생 그리워하기만 할 뿐인 젊은 후궁이라는 질식할듯한 숙명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해 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도니야는 하루라도 빨리 자신의 계획을 현실로 만들고 싶었다. 한때 어린 아이로만 생각했던 솔로몬은 점차 아버지의 마음에 쏙 들만한 현명하고 듬직한 왕자로 성장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서 양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시점이 되었을 때, 타고 난 천재 솔로몬이 아닌 단지 장자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이 왕위를 이어가기에 가장 적합한 왕자로 인정받을 수 있을지 그는 점차 자신감이 떨어졌다. 그래서 그는 조력자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신하 중에서 자신을 지원했을 때 가장 든든한 힘이 될만한 자가 누구일까 고민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다윗마저도 뜻대로 다루기 어려워했던 백전노장 요압이었다. 왕위 경쟁에서 안정적으로 승리하기 위해서 그의 지원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는 굳게 닫힌 요압의 저택 철문 앞에 섰다. 검은 쇠, 묵직한 침묵. 요새와 같은 철문은 난공불락의 요압, 그 이름 그 자체를 웅변하는 듯했다. 쇠창살 너머, 늙은 사자 요압이 느릿하게 뜰을 거닐고 있었다. 한때 이스라엘을 발 아래 두었던 맹수의 퇴행. 그러나 퇴색한 갈기 아래 감춰진 날카로운 발톱은 여전하리라. 아도니야는 심호흡으로 긴장을 다독였다. 정중한 예를 갖춰 입을 열었다.
"장군, 오랜만에 뵙습니다."
요압은 걸음을 멈췄다. 쇠창살 그림자가 그의 얼굴을 반쯤 가렸다. 매처럼 날카로운 두 눈이 아도니야를 꿰뚫듯 응시했다.
"왕자께서 이 늙은이의 누추한 곳에 무슨 볼일이십니까."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지만, 뼈처럼 단단했다. 황송함 따위는 그림자조차 없었다.
아도니야는 미소 지으려 애썼다.
"장군께 드릴 중요한 말씀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아바마마의 건강이 예전 같지 않으시다는 것을, 장군께서도 모르시진 않겠지요."
요압은 침묵했다. 대답 대신 날카로운 시선이 칼날처럼 아도니야의 속을 파고들었다. 침묵은 긍정도 부정도 아니었다. ‘그래서, 용건이 뭐냐?’ 묵묵한 압박이 철문만큼이나 굳건했다. 아도니야는 망설임 없이 칼날을 들이밀었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왕위를, 계승하고 싶습니다."
숨을 삼키는 순간,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요압, 그는 과연 어떤 패를 쥐고 있을까.
요압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코웃음에 가까운 냉소였다.
"왕자께서 왕이 되시겠다고요?"
경멸과 조롱이 섞인 조소.
"폐하께서는 아직 눈을 부릅뜨고 살아계십니다. 왕자, 지금 하시는 말씀이 반역으로 들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요압의 비웃음은 예상했던 바였다. 아도니야는 속으로 불안을 삼키며, 차분함을 가장했다.
"물론 아바마마께서는 건재하십니다. 하지만 시간은 흐르고, 언젠가는 피할 수 없는 날이 올 것입니다."
잠시 멈칫, 요압의 눈빛을 살폈다. 미동조차 없었다. ‘너무 직설적이었나?’ 아도니야는 전략을 수정했다.
"장군께서는 이스라엘 군대를 수십 년간 지휘해 오셨으니, 왕위 계승 문제가 얼마나 혼란과 파국을 불러올 수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아실 겁니다."
요압의 눈빛에 아주 미세한 흔들림이 스쳤다. ‘통했나?’ 아도니야는 속으로 희미한 희망을 붙잡았다.
요압은 팔짱을 풀었다. 육중한 몸이 천천히 움직였다. 쇠창살 그림자가 걷히고, 요압의 거대한 그림자가 아도니야를 덮쳐왔다.
"그래서, 왕자께서는 그 혼란을 막기 위해 이 늙은이에게 무엇을 해달라는 것이오?"
요압의 눈빛은 더욱 짙어졌다. 꿰뚫어보려는 듯, 집요하게 아도니야를 응시했다. 동물적인 감각, 경계와 탐색, 그리고 미약한 흥미.
아도니야는 드디어 기회가 왔음을 직감했다.
"장군, 과거… 압살롬 형님의 일…."
그 단어에 요압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날카로워졌다. 아도니야는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아바마마께서는 겉으로는 덮으셨지만, 마음속 깊이 앙금이 남아있을 겁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장군께서는 새로운 왕에게 환영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새로운 왕.’ 일부러 그 단어를 강조했다. 요압의 불안, 그의 가장 깊은 곳에 숨겨진 그림자를 건드리기 위해.
요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침묵이 흘렀다. 요압의 뇌리 속에서 과거의 그림자가 되살아났다. 붉게 물든 칼날, 압살롬의 잘려나간 머리, 다윗왕의 싸늘한 눈빛… ‘그때는 정녕 불가피했던 일인가. 폐하께서는 정말 나를 용서하신 것인가?’ 요압은 굳게 다문 입술을 열었다.
"그때는 불가피한 일이었습니다. 반역을 진압하고 잔당들의 구심점을 깨고 이후의 안정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폐하께서도 결국에는 저의 충정을 인정하셨습니다."
목소리는 조금 누그러졌지만, 여전히 날이 서 있었다. 과거의 그림자는 여전히 그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아도니야는 놓치지 않았다.
"물론 장군의 충정은 누구도 의심치 않습니다. 하지만 솔로몬도 과연 그렇게 생각할까요? 솔로몬은 어머니 밧세바 왕비님의 그늘 아래 있다고 들었습니다. 장군께서는 왕비님을 그다지 탐탁지 않게 여기시고 그분에 대한 경멸감을 은연중에 내비치시지 않았습니까? 당사자인 왕비님 역시 자신을 업신여긴 장군을 좋게 볼 리 없을 것입니다."
‘밧세바.’ 그 이름은 요압의 경계심에 불을 지폈다. 밧세바, 교활한 뱀처럼 왕궁을 휘감은 죄 많은 여인. 요압은 밧세바를 경멸했다. 그녀는 자신이 가장 신뢰했던 부하 우리아를 죽음으로 몰고 가게 만들었던 여자였다. 그는 가끔 실없이 아무 의미도 없다는 듯 사람들 앞에서 이런 가시 돋친 농담을 던지곤 했다.
"간음한 년은 돌로 쳐 죽이라는 율법이 있지. 내가 비록 골리앗을 때려 잡은 폐하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소싯적에 무릿매로 돌을 제법 잘 던졌는데 말이야. 요즘은 어디 돌 던질 데가 없을까?"
왕비는 항상 기품이 넘치는 인자한 미소를 띄면서 왕자들을 사랑하고 헌신적으로 왕을 보좌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사람들의 존경을 모아왔지만 요압의 눈에 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여자였다. 솔로몬이 왕이 된다면 자신의 시대는 끝날 것이다.
요압은 다시 침묵했다. 아도니야의 말이 정곡을 찔렀다. 그를 대할 때의 밧세바와 솔로몬의 냉랭한 눈빛과 태도가 떠올랐다. 불안은 이미 그의 뼛속까지 스며들어 있었다. 침묵은 긍정이었다. 아도니야는 속으로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사자가 덫에 걸리기 시작했다.’
아도니야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마지막 미끼를 던졌다.
"장군, 저는 장군을 진심으로 필요로 합니다. 장군의 풍부한 경험과 뛰어난 지략, 그리고 군대에 대한 확고한 장악력은 새로운 왕국에 반드시 필요한 자산입니다. 만약 제가 왕이 된다면 장군께서는 지금보다 훨씬 더 높은 지위와 권세를 누리실 수 있을 겁니다. 아니, 장군의 노고에 합당한 최고의 영광과 안락한 노후를 제가 보장하겠습니다."
약속, 달콤한 속삭임. 요압, 그 늙은 사자는 과연 미끼를 물 것인가.
요압은 아도니야의 제안을 곰곰이 되씹었다. 솔로몬, 밧세바의 꼭두각시 왕. 아도니야, 야심에 찬 젊은 늑대. 선택의 기로, 저울질하는 노회한 눈빛. 요압이 입을 열었다.
"왕자님께서 왕이 되신다면 저에게 정확히 무엇을 약속하실 수 있습니까? 그리고 솔로몬 왕자를 어떻게 제치고 왕위를 차지하실 생각이십니까?"
질문은 날카로웠지만, 어조는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거래, 흥정이 시작되었다.
아도니야는 기다렸다는 듯 미소지었다. 이번에는 망설임 없는, 확신에 찬 미소였다.
"제가 왕이 되면, 장군을 이스라엘 군 총사령관 자리에 영원히 유임시키겠습니다. 군대의 모든 권한을 장군께 맡기고, 왕국 재정의 일부를 장군께서 관리하도록 허락하겠습니다. 왕자 시절부터 누려왔던 저의 사병들을 장군께 예속시키고, 장군의 안전과 노후를 저의 목숨 걸고 보장하겠습니다. 저를 믿고 저와 함께 해주십시오. 장군의 탁월한 직감을 믿으십시오. 분명히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비밀스러운 미소, 능글맞은 자신감. 요압, 이제 당신은 내 손 안에 있다.
요압은 아도니야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아도니야의 눈빛은 굳은 신념과 강렬한 야망으로 불타고 있었다. 노련한 군인 요압은 마침내 결심했다. 천천히, 아주 희미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요압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계산적인 미소, 흥미로운 거래를 발견했을 때 짓는 맹수의 미소였다.
"왕자님. 흥미로운 제안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에게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며칠 시간을 주십시오. 신중하게 고려해 보겠습니다."
요압의 미소는 승낙의 신호였다. 완전한 굴복은 아니었지만, 충분했다. 노련한 사자 요압은 쉽게 꼬리를 내리지 않는다. 하지만 덫은 이미 놓였다. 아도니야는 속으로 승리의 미소를 삼켰다.
며칠 후 요압은 제사장 아비아달까지 설득해서 아도니야의 계획에 합류시켰다. 이제, 왕좌를 향한 게임의 판은 짜여졌다.
아도니야는 이때부터 백성들 앞에서 자신이 왕이라도 된 것처럼 의전을 꾸미고 자신은 전차를 타고 호위병를 50명이나 데리고 다니면서 개선한 왕이라도 되는 듯 화려한 위세를 과시했다. 백성과 신하들이 그를 다음 왕으로 당연히 믿는다면 어렵지 않게 솔로몬과의 왕위 경쟁에서 승리할 것이라는 계산 때문이었다. 다윗은 그의 오만해보이는 행적을 굳이 막지 않았다. 그는 예전부터 일관되게 아들들의 비행을 방치했고 그것은 비극으로 이어지곤 했다. 아버지가 매를 들지 않아서 아들들이 신으로부터 직접 징벌을 받게 된 셈이었지만 의외로 그는 결코 자신의 그런 결점을 고치지 못했다. 아도니야는 자기를 안팎에서 지원할 든든한 천군만마를 얻었고 아버지로부터도 역시 별다른 질책을 받지 않았으나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화려한 행차를 마치고 나서 그는 자기 집 정원을 거닐면서 상념에 빠져들었다.
'권력 투쟁? 형제간의 다툼? 정말 지긋지긋해. 예전에 있었던 형님들의 다툼과 죽음. 특히 압살롬 형님이 저지른 아바마마에 대한 배신과 반역. 모두 끔찍한 참사들이었어. 형님들이 셋이나 있었는데도 결국 내가 장자가 될 거라고 어느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나는 그런 비극을 결코 원치 않아. 야망보다는 행복이 우선이야. 그러나 왕의 여자였던 아비삭 그녀를 내 것으로 하기 위해서 내가 직접 왕이 되는 방법 말고는 확실한 다른 수단이 없어. 그러기 위해선 미리미리 내가 왕권을 계승하는 게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당연한 사실인것처럼 보여져야 해. 폐하께서 아직 살아계신데 이런 불경한 모습을 보이는게 주님과 아버지께 죄스럽고 스스로 너무 부끄럽다. 사람들은 나를 압살롬 형님보다 똑똑하지도 않고 사람들을 이끌리게 하는 매력도 없으면서 권력욕만 넘치는 한심한 왕자로 생각하겠지? 괴롭구나. 왜 나는 어리석게도 그녀를 가지겠다는 욕망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걸까? 어차피 마음만 먹으면 취할 수 있는 예쁜 궁녀들은 많고, 혼인을 간청하는 고관들의 딸들도 많은데...'
4. 영웅은 끝까지 영웅.
한편 노쇠한 다윗은 침실에 누워서 사랑하는 아비삭에게 과거의 무용담을 들려주고 있었다.
"그때 나는 철없는 목동이었을 뿐이었고 멍청하게도 주님을 다소 의심했었어. 바보 같이 무화과만한 돌을 다섯개나 챙겨갔지 뭐니? 하하하. 주님을 믿었다면 하나만으로 충분했단 걸 알았을텐데. 그 첫번째 돌은 주님의 인도를 받고 정확히 그 거인의 투구 사이를 비집고 그의 이마를 부숴버렸어. 그 거인 이름이 뭐였더라... 요즘 들어 예전 기억까지도 가물가물하구나."
"폐하, 거인의 이름은 골리앗이옵니다. 여러 번 들어서 소첩도 이미 알고 있사옵니다."
"아이고, 늙으니 기억력이 나빠져서 여러 번 했던 말을 또 했구나. 미안하다. 하하....그런데 말이야....
이제 나는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구나. 이 늙은이가 죽더라도 너는 절대로 수절할 필요가 없어. 나는 너에게 이미 큰 은혜를 입었다. 너는 비록 명목상으론 내 후궁이지만 어디까지나 순결한 처녀인걸 주님께서도 알고 계시단다. 나머지 인생은 너의 행복만을 위해서 살거라. 상대가 누구라도 좋아. 그게 내 아들 아도니야더라도 말이야."
"폐하... 그런게 아니라..."
"놀라지 말거라. 내가 비록 눈과 귀는 어두워졌지만 아직 바보는 아니라서 대충은 알고 있었어. 네가 원한다면 유언장에 그 이야기를 넣어주마. 다 죽어가는 이 늙은이의 품에 따뜻하게 안겨주며 꽃다운 시절을 흘려보내고 있는 너를 항상 고맙고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단다."
"폐하...소첩은... 소첩은..."
다윗은 아비삭의 곱게 빗은 머리결을 쓰다듬으며 이야기한다.
"뭘 그런 걸로 울고 그러니? 지금부터 네가 잠들때까지 수금을 연주해주마. 진정하고 잘 자렴."
아비삭은 다윗의 연주를 들으며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다. 하지만 눈물이 멈추지 않고 어깨가 계속 들썩이는 것을 본 다윗은 오래 연주를 이어가야 했다. 아름다운 음악 소리가 한동안 방안을 채웠다. 다윗은 악령에 시달리던 사울 왕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그의 옆에서 수금을 연주하던 소년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는 '그때는 손이 떨리지 않았는데, 지금은 손이 떨리니 소리도 구슬퍼지는구나. 저 아이를 위해서 잔잔한 소리를 들려주고 싶었는데.'라고 안타까워했다.
5. 갑작스런 역습.
벌써 자기가 왕이라도 된 듯 요란을 떠는 아도니야와 그를 추종하는 신하들이 점차 늘어나는 것을 보자 밧세바는 큰 위기감을 느꼈다. 비록 어린 시절부터 아도니야를 따뜻하게 대해줬던 자신은 무사하겠지만 물밑에서 왕위 계승을 경쟁하던 솔로몬의 안전까지 보장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밧세바는 고민 끝에 예언자 나단의 집을 방문했다. 나단은 황급히 뛰어나와 엎드렸다.
"왕비께서 이 누추한 곳까지 행차하시다니, 황송할 따름입니다."
밧세바는 나단을 일으켜 세우며 미소를 지었다.
"예언자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나단은 밧세바를 조심스럽게 안으로 안내했다. 낡은 방에는 먼지 냄새와 눅눅한 습기가 가득했다. 밧세바는 불편한 기색 없이 의자에 앉아 나단을 바라보았다.
"예전에 예언자님께서 저에게 해주셨던 말씀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일 때문에 예언자님을 원망했을 거라고 생각하시겠지요?"
나단은 고개를 숙였다.
"왕비마마께 면목이 없습니다."
밧세바는 손짓으로 나단의 말을 끊었다.
"오래 전 일입니다. 이미 주님께서 내 죄를 물으시고 응당한 벌을 내리셨으니, 저는 그 일에 대해 더 이상 아무런 감정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밧세바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어딘가 날카로운 기운이 느껴졌다.
"오히려 저는 예언자님께 감사해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덕분에 제가 얼마나 어리석고 죄 많은 인간인지 깨달을 수 있었으니까요."
나단은 밧세바의 속내를 짐작할 수 없어 불안했다. 밧세바는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지금, 제 아들 솔로몬이 위험합니다."
밧세바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아도니야가 왕이 되려는 역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예언자님도 이미 징후를 느끼셨겠지요?"
나단은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아도니야 왕자님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아직… 섣부른 판단은 금물입니다."
"섣부른 판단이라니요?"
밧세바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지금 당장이라도 아도니야가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올지 모릅니다! 예언자님께서는 대체 뭘 보고 계신 겁니까? 제 아들을… 솔로몬을 지켜주세요! 저에게 남은 희망은 솔로몬 하나뿐입니다!"
밧세바는 눈물을 글썽이며 애원했다.
"예언자님께서 저를 불쌍히 여기신다면… 부디… 부디 저를 도와주세요."
나단은 밧세바의 눈물에 당황했다. 과거 자신의 예언 때문에 아들을 잃었던 여인, 이제 남은 아들마저 잃을까 두려워하는 어머니의 간절한 호소 앞에 나단은 마음이 흔들렸다. 그는 밧세바의 손을 잡고 말했다.
"왕비마마, 진정하십시오. 제가 받은 계시… 아니, 징조를 살펴보면 주님께서는 분명히 솔로몬 왕자님을…."
나단은 말을 멈칫했다. '계시'라고 단정하기에는 아직 모호한 점이 있었다. 그는 말을 바꾸어 에둘러 표현했다.
"현재로서는… 솔로몬 왕자님께 더 호의를 가지고 계신 듯합니다. 하지만 아직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밧세바는 나단의 손을 더욱 세게 잡았다. "그렇다면… 그 '징조'를 확실한 '계시'로 만들어주세요. 예언자님의 능력이면 충분히 가능하실 겁니다.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그렇게 예언해주세요! 저를… 저 불쌍한 어미를 굽어살피소서!"
밧세바는 나단의 손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비록 나이가 들어 과거의 아름다움은 많이 흐릿해졌지만 그녀가 흘리는 눈물에는 거부하기 어려운 호소력이 있었다.
나단은 밧세바의 떨리는 어깨를 바라보았다. 그의 마음속에는 복잡한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과거의 죄책감, 밧세바의 간절한 부탁, 그리고 예언자로서의 소명 의식… 나단은 무거운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왕비마마. 주님의 뜻을… 다시 한번 여쭙고… 왕비마마의 뜻대로…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하지만 결과를 장담드릴 수는 없습니다."
밧세바는 눈물을 닦고 나단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슬픔으로 가득했지만, 그 속에 희미한 희망의 빛이 감돌고 있었다.
"예언자님, 저는 예언자님을 믿습니다."
밧세바는 나단에게 깊숙이 허리 숙여 인사하고 집을 나섰다.
나단은 밧세바가 떠난 자리에 오랫동안 서 있었다. 그의 마음은 무겁고 혼란스러웠다. 과연 밧세바의 부탁대로 하는 것이 주님의 뜻에 합당한 일일까? 혹시 그는 또 다시 잘못된 길을 선택하는 것은 아닐까? 나단은 깊은 고뇌에 잠겼다.
얼마 후 두 사람은 건강이 급격히 나빠진 다윗을 찾아간다. 다윗은 쇠약한 몸을 간신히 일으켜 침상에 기대앉아 있었다. 그의 옆에는 아비삭이 헌신적으로 그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아비삭은 다윗의 손을 잡고 따뜻하게 그의 손등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밧세바와 나단이 침소 안으로 들어서자, 아비삭은 조용히 물러나 섰다.
"부인, 나단, 무슨 일이오? 이 시간에?"
다윗은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밧세바는 침통한 표정으로 다윗의 침상 곁에 무릎을 꿇었다.
"폐하, 아도니야 왕자님의 일 때문에 왔습니다."
다윗의 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아도니야가 또 무슨 말썽이라도 일으킨 것인가?"
"폐하, 아도니야 왕자님이 스스로 왕이 되려 합니다!"
밧세바는 떨리는 목소리로 다급하게 말했다.
"벌써 요압 장군과 아비아달 제사장까지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습니다. 지금이라도 당장 반역을 일으킬지 모릅니다!"
다윗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반역이라니… 내 아들 아도니야가 어찌하여… 어찌하여…"
"폐하, 정신을 차리셔야 합니다!" 밧세바는 더욱 다급하게 말했다. "아도니야 왕자님은 지금 폐하께서 위독하시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리고 백성들을 현혹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왕국이 순식간에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다윗은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아비삭. 내 머리가 너무 혼란스럽구나. 내 손을 잡아다오."
다윗은 아비삭에게 기대려는 듯 힘없이 손을 뻗었다. 아비삭은 다윗의 손을 잡고 그의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
나단이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섰다.
"폐하, 지금은 아도니야 왕자님 때문에 슬퍼하실 때가 아닙니다. 더욱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폐하께서 일전에 왕비마마께 맹세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솔로몬 왕자님을 폐하의 뒤를 이을 왕으로 삼겠다고 주님 앞에서 맹세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나단의 말에 다윗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는 희미하게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려 애썼다. 밧세바가 눈물로 애원하며 솔로몬을 왕으로 세워달라고 간청했던 밤, 그녀의 간절함에 못 이겨 홧김에 했던 약속 같지도 않은 맹세… 하지만 기억은 흐릿하고, 정말 그런 약속을 했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맹세? 내가 언제… 어떤 맹세를…?" 다윗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밧세바를 바라보았다.
밧세바는 눈물을 글썽이며 다윗의 손을 더욱 간절하게 붙잡았다.
"폐하, 기억 안 나십니까? 그날 밤, 저에게 솔로몬을 반드시 왕으로 세우겠다고 굳게 약속하셨습니다! 주님과 저를 증인으로 삼아 맹세하셨습니다! 폐하께서는 거짓말을 하시는 분이 아니시잖아요."
밧세바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단호함이 묻어났다.
나단이 다시 한번 강조했다.
"폐하, 주님의 예언이 이미 솔로몬 왕자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폐하께서는 이미 왕비마마께 맹세하셨습니다! 지금 와서 약속을 어기신다면 주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왕국 전체에 재앙이 닥칠 것입니다!"
나단은 종교적인 권위를 빌어 다윗을 압박했다.
다윗은 밧세바의 눈물과 나단의 엄포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기억은 가물가물하고, 몸은 쇠약해 판단력이 흐려졌다. 정말 맹세를 했던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밧세바와 나단이 저렇게 확신에 차서 말하는 것을 보니, 그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주님의 진노, 왕국의 재앙… 늙고 지친 다윗은 더 이상 모든 것을 꼼꼼히 따져볼 기력이 없었다. 그는 그저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다윗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소… 알겠소… 짐은… 짐은 약속을 지켜야 하겠지. 솔로몬… 솔로몬이 왕이 되어야 하는 것이겠지."
밧세바는 감격에 겨워 눈물을 왈칵 쏟았다.
"폐하, 감사합니다! 정말… 정말, 현명하신 결정입니다!"
나단은 다윗에게 깊이 허리 숙여 경의를 표했다.
"폐하의 뜻을 받들어, 솔로몬 왕자님을 왕으로 세우는 모든 절차를 신속하게 준비하겠습니다."
아비삭은 슬픔과 혼란이 뒤섞인 표정으로 다윗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다윗의 쇠약해진 모습, 밧세바와 나단의 강압적인 태도, 그리고 어딘가 석연치 않은 상황 전개에 불안감을 느꼈다. 하지만 감히 입을 열어 반박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침묵하며 다윗의 손을 더욱 따뜻하게 감싸 쥐었다. 다윗은 허탈한 표정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흐릿했고, 생기 잃은 얼굴에는 깊은 피로감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는 왕위를 넘겼지만, 진정한 평안을 얻지 못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다윗이 결정을 내리자 요식행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예언자 나단, 제사장 사독, 경호대장 브나야는 다윗을 명령에 따라 솔로몬을 노새에 태워 기혼 샘으로 데려가서 기름을 부었다. 그렇게 솔로몬은 신의 인정을 받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6. 덫.
같은 시각, 아도니야는 요압, 아비아달과 함께 왕이 베푸는 의전으로 자신이 이미 왕이라도 된 양 유다 지파의 손님들을 잔뜩 초청해서 양과 소, 살진 송아지들을 잡고 소할렛 바위에서 큰 제사를 벌이고 있었다. 몹시 성대하고 기세가 등등한 게, 마치 대관식을 연상시키는 자리였다. 참석한 사람들은 '아도니야 왕 만세'라고 외치기까지 했다. 그때 아비아달의 아들이 솔로몬이 왕위를 계승했다는 소식을 급하게 가져왔다. 손님들은 모두 뿔뿔이 도망가버렸다. 아도니야는 재빨리 제단으로 달려가서 제단의 뿔을 잡았다. 제단의 뿔을 잡고 있는 동안에는 죄인을 당장 죽이지 않는 관습에 목숨을 의지한 것이었다. 그 소식은 솔로몬에게 전해졌고 솔로몬은 아도니야에게 자신의 뜻을 전했다.
"우리는 피를 나눈 형제다. 당연히 죽이지 않는다. 즉시 나에게 오게 하라."
아도니야는 두려웠지만 시키는대로 했다. 애당초 언제까지 뿔을 잡고 서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도니야는 꼬마라고만 생각했던 솔로몬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용서를 빌었다.
"폐하. 소신이 어리석게도 무모한 욕심을 부렸고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아바마마를 생각하셔서 부디 한번만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의 죽음은 상관없으나 당신의 아들끼리 죽고 죽이는 모습을 또다시 보시고 상심하실 모습을 상상하니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솔로몬은 자애로운 밧세바의 온화한 눈매를 닮은 그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일어나시오. 형님. 모르고 한 일이니 없던 일로 하겠소. 앞으로 조심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앞으로 왕권에 도전하는 짓을 한다면 그때는 반드시 법률에 따라 처결할테니 부디 자중하시오."
아도니야는 연신 감사의 절을 하고 동생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고는 물러난다.
솔로몬이 즉위한 지 얼마 후 다윗은 세상을 떠났다. 양치기로 태어나 파란만장한 삶을 거치며 이스라엘을 다스린지 40년. 이스라엘 역사에 다시 없을 영웅은 그렇게 떠나갔다.
밧세바는 다윗의 장례가 끝나자 아비삭을 불러 그녀를 위로하고 한가지 제안을 했다.
"선왕 폐하께서 승하하시고 나서 자네가 얼마나 상심이 크고 불안을 느끼고 있는지 나도 잘 알고 있네. 궐 안의 여인에게는 역시 의지할 남자가 필요해. 다행히 나에겐 내 아들, 폐하라도 남았지만 아무도 없는 자네는 선왕 폐하를 잃은 상실감이 더 각별하겠어. 자네는 비록 선왕 폐하와 같은 침대를 썼지만 몸을 섞지는 않았잖아. 자네가 순결하단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 하지만 이대로 살면 처녀로 늙어 죽을 수밖에 없어. 그래서 말인데, 자네, 우리 폐하를 어떻게 생각하나? 폐하라면 명목상이었만 그래도 왕의 여자였다는 신분을 가진 자네와 맺어지더라도 아무도 트집 잡을 수 없을거야."
아비삭은 곤란해하며 대답했다.
"형님, 충고는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폐하께서는 저에겐 의지할 수 있는 남자라기보단 단지 착하고 귀여운 동생 같은 분이신걸요. 그리고 저는 아직 선왕 폐하의 사랑과 은혜를 잊지 못하고 있어요. 정말 죄송해요. 아시다시피 저는 수넴에 있는 가족들과 교류가 끊겨서 형님을 어머니처럼 믿고 의지하고 있어요. 호의를 거절했다고 부디 절 미워하시지는 말아 주세요."
밧세바는 평안한 미소를 지으며 아비삭을 따뜻하게 포옹하고 다독여줬다.
"미안해 할 것 없네. 어차피 강요할 수 있는 일도 아니잖은가. 괜한 소릴 해서 오히려 내가 미안하네."
아비삭의 거절을 받은 밧세바는 다음날 솔로몬을 찾아가서 아비삭을 왕비로 삼을 것을 권했다.
"폐하. 외람되오나, 폐하께서는 부정한 여인인 나, '밧세바로부터 태어난 차남'입니다. 그 점 때문에 폐하는 왕권이 완전히 자리잡기 전까지는 종종 정통성에 대한 불경스런 도전을 받게 되실 겁니다. 신하들도 장자가 아닌 폐하께 아직은 완전히 충성하고 있지 않습니다. 폐하의 친형은 이 어미의 죄를 이유로 아기 때 주님께서 목숨을 거두어 가셨지만 아무도 그 아기를 동정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부정한 여자이지만 어미로서 폐하는 반드시 지켜낼 것입니다."
밧세바의 깊은 눈동자는 눈물이 맺혀서 더 반짝거렸다.
"폐하께서는 누구도 흔들 수 없게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서 선왕께서 남기신 유산을 빠뜨리지 말고 모두 계승하셔야 합니다. 그 중에서 가장 강력한 것은 선왕의 온기와 숨결이 베여있는 성궤와 같은 존재, 아비삭 바로 그 아이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는 한눈에 봐도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아비삭으로부터 주님의 축복을 느낍니다. 지혜로운 폐하께서 설마 아직까지도 모르실 리는 없겠지요? 나는 그 아이가 좋고 더 가까이 하고 싶습니다. 그 보석같은 아이가 30년 정도 일찍 태어났더라면 아마 나따위는 왕비가 될 기회 조차도 없었겠지요."
밧세바는 솔로몬의 귀에 대고 조그맣게 속삭인다.
"네 어미이자 수 십 년간 궁중 생활로 닳아빠져버린 늙은이로서 권하는 거란다. 아비삭 그 귀한 아이를 네가 반드시 취하거라."
솔로몬은 자신의 어머니를 빼다 박은듯 한 눈매로 빙긋 미소 지으며 느긋하게 대답했다.
"평생을 인내하며 살아오신 어머님 답지 않은 말씀이시군요. 선왕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그 후궁을 아들이 취하는 것은 뒷말 좋아하는 사람들의 맛있는 간식거리가 될 겁니다. 아바마마의 것은 제가 모두 물려받았으니 굳이 따로 취하고 말고에 의미가 있을까요? 상자에 보관중인 보석을 주머니로 옮겨담는 건 급한 일이 아닙니다. 언젠가 적당한 기회가 찾아올테니 조금만 기다려보세요. 너무 조급해 하실 것 없습니다."
아도니야는 솔로몬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겨우 목숨만 부지했지만 모든 일의 원인이었던 사랑하는 아비삭에 대한 마음을 버릴 수는 없었다. 그가 비록 장자이면서도 왕이 되지 못했지만 아비삭만 곁에 둘 수 있다면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다윗이 죽고 나자 아비삭은 비교적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침상을 따뜻하게' 하는 본업이 없어졌고 후궁이라는 신분만 남았을 뿐 사실상 은퇴에 가까운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얼마 간 시간이 지나자 아도니야와 아비삭은 자유롭게 전보다 농밀해진 둘만의 행복한 밀회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부적절한 관계로 보일 수는 있었지만 죄책감은 없었다. 아비삭이 다윗으로부터 자신에 대한 수절은 필요 없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아비삭은 아도니야와 마주보고 누워 있다 보면 연인의 눈을 바라보는 설렘과 존경하는 다윗의 눈을 들여다 보는 것 같은 편안함을 함께 느꼈다. 그러나 이런 충만감으로 가득찬 관계는 여전히 금지되고 비밀스런 사랑이었고, 언제 깨져도 이상할 것 없는 불안한 행복의 나날이었을 뿐이었다.
아도니야는 아비삭에게 떳떳함과 안정감을 선물하고 싶었다. 그는 현재의 행복에 도취되어 자기가 왕좌에 오르는 것과 아비삭을 사랑하는 게 불가분의 관계라는 생각이 고정관념에 불과한 게 아니었을까라는 의문을 느끼게 되었다. 따져보니 아비삭이 더이상 왕의 여자가 아니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그는 후회했다. 애당초 그렇게 생각했으면 될 일이었는데 당시엔 왜 자기가 직접 왕이 되어야만 그녀를 가질 수 있을 거라고 믿고 무리한 행동들을 벌였던 것이었을까? 너무 절실하게 바랐던 바람에 자신의 총기가 흩어졌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도니야는 고민 끝에 밧세바를 찾아가기로 했다. 밧세바는 왕실의 내부적인 모든 일에 대한 최종적인 결정권이 있는 왕실의 최고 어른이었다. 그는 밧세바에게 진정성있게 간절하게 부탁하면 자신의 사심 없는 진심이 통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에게 밧세바는 항상 헌신적이고 친절한 새어머니였다. 과거의 과오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무자비한 비난을 당했던 가련한 여인이기도 했었지만 올바른 처신으로 끝내 존경받는 왕비로 거듭난, 본받을만한 어른이었다. 이제는 자신 역시 과거의 그녀처럼 사람들의 미움과 경계를 받게 되었단 점에서 새어머니로부터 전에 느끼지 못했던 동질감을 느꼈다. 특히나 그의 시각에서 새어머니는 오직 사랑만을 위해서 사람들의 비난과 신의 징벌을 기꺼이 감내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사랑에 대한 자신의 절실함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동감해 줄 것으로 기대했다. 게다가 이미 자신은 솔로몬과의 권력 투쟁에서 처참하게 밀려난, 한가하고 초라한 왕자일 뿐이기 때문에 자신의 요청이 왕에 대한 도전으로 곡해되어 자신을 치는 칼로 되돌아 올 거라고 볼만한 이유도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밧세바를 찾아갔다.
"어마마마. 고민거리가 있어서 이렇게 찾아뵙습니다."
"어서오세요. 왕자. 나에게 무슨 하실 말이라도?"
"어머님의 아들, 저 아도니야는 아바마마께서 남기신 유산 중에 탐나는 것이 없습니다. 왕위를 탐냈던 죄인인 저를 너그럽게 용서해주신 폐하의 은혜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한가하고 풍족한 왕자로서의 생활에 지금도 충분히 만족합니다. 다만 외롭게 궁중에 갇혀 지낼 아비삭이 항상 눈에 밟힙니다. 그녀가 반드시 평생 궁궐안에 갖혀서 지내야 할까요?"
"아비삭이요? 하긴 그 아이는 한때 왕의 여자가 되었다는 죄로 처녀로 늙게 생겼군요. 나도 아름답고 사랑스런 그 아이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답니다."
"그래서 말씀인데, 이건 어마마마께만 말씀드리는 비밀입니다. 사실 아비삭과 저는 서로 연모하는 감정이 있습니다. 아바마마께서도 승하하셨으니 이제 잠자리를 따뜻하게 데워주는 원래의 쓸모가 다한 아비삭을 해방시켜주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하지만 제가 이런 요청을 드리는 것이 폐하의 권위에 대한 반역으로 오해를 받을까 걱정이 됩니다. 폐하는 제 아우이지만 저는 폐하의 충성된 신하로 남고 싶습니다. 그래서 어마마마께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렇게 부탁을 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 점은 염려하지 마세요. 폐하께서는 주님으로부터 지혜로움을 선물받은 분이시랍니다. 왕자님께서 별다른 야망이 없다는 점은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실 겁니다. 내가 폐하께 왕자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폐하의 어미로서 부탁을 드려볼게요. 왕자님의 눈은 선왕의 눈매를 꼭 빼다 박았습니다. 그런데 선왕께선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쳐도 그런 겁먹은 눈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좋은 소식이 있을테니 너무 걱정말고 마음을 편하게 갖고 기다려보세요."
"정말 감사합니다. 어마마마.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아도니야가 어린 시절부터 보아왔던 밧세바는 따뜻하고 포근한 모습 뿐이었다. 그는 밧세바의 포근한 외피 안에 단단하고 차가운 강철이 있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이전에는 아비삭에 대한 성급한 욕망 때문에, 그리고 이번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절박한 처지 때문에 아도니야의 사리분별력이 또다시 흐려져 있었던 셈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미움과 질시를 받았던 죄 많은 여자, 밧세바의 생존 전략은 누구에게나 너그럽고 따뜻한 여인처럼 보이는 것이었고 지난 세월을 견뎌낸 그녀의 인내가 마침내 가장 큰 결실을 맺는 순간을 맞이했다.
'자애로운' 밧세바는 물고기의 입질을 느낀 낚시꾼이 낚시대를 낚아채기라도 하는 듯 서둘러 그 기쁜 소식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아들 솔로몬에게 알렸다.
"폐하. 아도니야 그 미련한 것이 아비삭을 달라더군요. 호호호. 발정이라도 난 걸까요? 아니면 그 옛날 사울 왕처럼 악령이라도 든 걸까요? 이건 주님께서 지혜로운 폐하께 주신 기회입니다."
솔로몬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어머니, 형님께서 별다른 욕심을 부리지 않고 계시단 걸 저도 압니다. 이제 와서 힘도 세력도 떨어져 나간 형님을 굳이 제거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바마마의 유지를 받들어 요압 그자를 반드시 죽여야합니다. 마침 형님께서 좋은 명분을 선물하신 셈이군요. 어머니 말씀대로 성궤와 다름없는 그녀를 요구한건 형님의 진심과는 상관없이 명백한 실책이었습니다. 납작 엎드려 사시겠다고 해놓고 왜 그러셨을까. 형님에게 칼을 대는 게 마음이 편하진 않지만 요압을 죽인 후에 동요하는 세력들의 구심점이 될 수 있는 불안 요소를 남겨놓을 수는 없지요. 그리고 아비삭은 얼마 전에 어머니가 하셨던 말씀대로 저의 영광을 드높일 전리품으로 삼겠습니다. 그래야 형님에게 왕의 여자를 탐한 죄를 물을 수 있게 될테니까요. 형님은 본의 아니게 저에게 최고의 선물을 하신 셈이군요."
그날 바로 솔로몬이 보낸 강직한 경호대장 브나야가 아도니야를 끌어내서 처형장으로 끌고 갔다. 브나야는 아도니야에게 그의 죄상이 적힌 왕의 명령서를 읽어줬다.
"이보게 브나야 장군. 이게 폐하의 명령이라고? 믿을수가 없군. 폐하를 만나게 해주게. 아니 어마마마를 만나고 싶네. 마지막 부탁이니 제발 어마마마를 불러주게. 그런다면 죽더라도 아무도 원망하지 않겠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 내막을 까마득히 몰랐던 아도니야는 단지 뭔가가 오해가 있다고 생각했다. 분명 새어머니와 솔로몬이 자신의 진심을 이해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두 사람 중 누구에게라도 자신의 결백과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더 정확하게 밝힐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브나야가 보낸 전령이 밧세바가 쓴 편지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신하의 몸으로 왕의 여자를 탐하고도 살아 남겠다는 생각을 하다니 참 뻔뻔스럽군요. 폐하가 즉위하셨던 날 폐하의 앞에서 무릎꿇고 했던 맹세는 다 잊었던거요? 겨우 그런 어리광이나 부리려고 날 부른건가요? 비록 내가 직접 가진 않았지만 편지로라도 내 뜻을 전했으니 누구도 원망하지 않겠다는 약속은 지키시오. 왕자."
아도니야는 그동안 역사를 공부해왔지만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이민족과의 투쟁을 중심으로 한 것과 신의 영광에 대한 내용일 뿐이었다. 그가 보아온 역사는 모세와 여호수아, 그리고 12명의 사사들이 외부의 적들을 물리친 이야기이지 왕국적 수준의 내부적 정치 갈등과 그에 따른 바람직한 처신을 배울 만한 내용은 아니었다. 그는 왕위 경쟁에서 탈락한 자가 올라서는 칼날의 날카로움을 무디고 부드러운 것으로 오해했고 혈육의 정이라는 장화를 신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그 위에서 안전하게 거닐 수 있을 거라 오판했다. 그는 그 날카로운 칼날에 스스로 베어짐으로서 후손들에게 새로운 역사적 교훈을 제공하게 된 셈이었다.
아도니야가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요압은 집을 나와 성막으로 뛰어 들어갔다. 성막에서 제단의 뿔을 잡고 있는 늙은 사자 요압의 손은 땀으로 축축했다. 그 뿔을 잡고 있는 순간만큼은 죽음을 모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따라온 브나야를 올려다보았다.
"브나야... 제발... 나에게 왜 이러는 건가? 우리는 평생을 함께... 사선을 넘나든 전우가 아닌가! 자네의 등을 노리던 적을 내 창으로 꿰뚫었던 그날을 잊었나?"
요압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알고 계시겠지만 조금 전에 아도니야 왕자님도 제 손으로 처리해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대장군께 개인적인 감정은 없습니다. 폐하의 뜻입니다. 더 이상 저항하지 마십시오. 어서 그 뿔을 놓고 순순히 폐하의 칼을 받으십시오."
브나야의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했다.
"그럴 리 없어... 폐하께서... 내게 이럴 리가 없어. 나는 평생 선왕 폐하를 위해 목숨을 바쳐 헌신했어. 폐하께서 이 늙은이를 이렇게 핍박하실 리 없어. 분명 뭔가 잘못된 거야. 미안하지만... 옛정을 생각해서 폐하께 다시 한번 확인해주겠나? 폐하께 정식으로 재판을..., 아니... 폐하의 얼굴을 보고 직접 말씀이라도 들어보고 싶네."
노장군 요압은 애원하듯 말했다. 그의 눈빛은 절박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브나야는 묵묵히 솔로몬을 찾아갔다. 잠시 후, 브나야는 굳은 표정으로 성막으로 돌아왔다. 요압은 여전히 뿔을 움켜쥐고 있었다. 제단의 뿔은 그의 땀으로 번들번들해졌다.
브나야는 요압에게 정중하게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는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지혜로우신 폐하께서 이렇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브나야의 칼날이 섬뜩한 쇳소리를 내며 허공을 갈랐다. 순식간에 요압의 손목이 잘려나갔다. 뿔을 붙들고 있던 힘없는 손이 바닥에 툭 떨어지고, 잘린 단면에서 붉은 선혈이 뿜어져 나와 신성한 제단을 붉게 물들였다. 그 피는 마치 새 시대를 여는 제물처럼 보였다.
"다른 손으로는 뿔을 잡지 마십시오. 장군께 불필요한 고통을 더 이상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브나야는 낮고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칼을 들어 잘린 손목을 붙들고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던 요압의 목을 베었다.
7. 텅 빈 예쁜 상자.
아도니야의 소식을 전해들은 아비삭이 처형장으로 달려왔다. 시신은 아직 따뜻했다. 그녀는 피투성이가 된 아도니야의 시신을 끌어안고 절규했다.
" 왕자님!!!... 굳이... 왜 그런 요청을 하셨나요?...아아아, 사랑하는 아도니야,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란 말인가요? 하늘에 계신 선왕 폐하. 이렇게 당신의 아들이 또다시 비명에 당신의 품으로 갔습니다. 선왕 폐하... 존경하는 임금님...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 저에게 지혜를 나눠주세요."
아비삭은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솔로몬은 아도니야의 죽음을 확인하고 아비삭을 달래기 위해 처형장을 찾았다. 아비삭은 아도니야가 흘린 피로 범벅이 되어 차가운 목소리로 솔로몬에게 말했다.
"선왕께서는 저에게 선택권을 주셨어요. 선왕께서 저와 폐하의 손을 잡고 마지막에 하신 말씀을 잊은 건가요? 유언장에도 적혀 있지 않나요? 왜 이렇게까지 하신건가요? 왜요? '너의 가문에 칼이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주님의 저주를 직접 실현하셔서 주님의 충실한 종으로서 의무를 다하신 건가요? 그 순진하고 따뜻했던 소년은 어디로 갔나요? 폐하, 저는 살아갈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주신 쓸모는 선왕을 보좌하는 것으로 이미 끝났습니다. 저는 선왕의 마지막을 가장 가까이서 모셨던 몸입니다. 왕국의 위엄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부하를 시키지 말고 선왕의 아들이신 폐하께서 직접, 쓸모없어진 이 몸을 베어서 세상에서 없애주세요."
솔로몬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따뜻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선왕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다고? 금시초문이군. 위대하고 지혜로우신 선왕께선 당신께서 가지신 모든 것을 내게 물려주셨소. 선왕의 유산을 승계하는 것은 그대 역시 내 사람이라는 뜻이오. 아버님께서 남기신 유언장에는 그대에 대해 이렇게 적혀 있었소. '가장 지위가 높은 내 아들이 나의 후궁인 순결한 처녀 아비삭과 혼인하는 것을 허락한다.'라고. 그런데 그 사람이 형님은 아니었지. 확인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보여주겠소. 그건 그렇고, 그대가 이렇게까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니 짐의 마음 역시 찢어지는 것 같소."
그 말을 듣고 아비삭은 경악했다. 다윗이 유언장을 작성할 당시에 지위가 가장 높은 아들은 장자인 아도니야였다. 그러나 솔로몬이 즉위한 이후부터는 그렇지 않게 되었다. 아비삭과의 결혼을 요구한 아도니야의 행위는 장자인 아도니야 자신이 왕위를 계승한 아우 솔로몬보다 높다는 도발로 받아들일 명분을 제공했던 셈이었다.
솔로몬은 아도니야의 피가 잔뜩 묻어있는 아비삭을 껴안고 그녀의 등을 토닥여줬다. 아비삭은 소름끼치는 솔로몬을 밀어내려고 죽기살기로 발버둥쳤지만 그는 팔에 힘을 단단히 주며 놓아주지 않았다.
"그대는 인간 중에서 가장 존귀한 왕인 짐의 소유요. 게다가 그대는 짐에게도 매우 각별한 의미가 있는 사람이니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시오. 그대가 짐에게 화가 단단히 난 것 같으니 오늘은 이만 물러나겠소. 위로에 능한 사람들을 몇 명 붙여줄테니 한동안 마음을 진정시키고 나서 다시 봅시다."
솔로몬은 텅 빈 집무실로 돌아왔다. 아직도 손끝에 남은 아비삭의 싸늘한 감촉, 귓가에 맴도는 그녀의 절망적인 외침이 짓누르는 듯했다. '수십 번 상상해봤지만 아무렇지 않을 것 같았는데...' 입술을 깨물었다. 예상보다 훨씬 강렬한 죄책감과 혼란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비록 태연한 척 했지만 솔로몬은 이제 막 청소년 티를 벗은 갓 스무살 젊은이일 뿐이었다. 문득 아버지 다윗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다윗은 임종을 앞두고 솔로몬을 불렀다. 다윗은 침상에 누워 솔로몬과 아비삭의 손을 잡고 힘겹게 마지막 말을 이어갔다.
"나는 오늘까지인가 보다. 너에게 부탁할 게 있다. 네 형 아도니야를 진심으로 용서해 주거라. 나는 아이들을 버릇없이 키웠어. 그러다보니 정말로 없었어야 했을 일들을 참 많이도 겪었지. 그게 네 어미와의 문제 때문에 생긴 주님의 징벌이라고 수군대는 사람들이 많은 거 나도 안다. 하지만 사람들이 쉬쉬하며 비난하는 그 일이 없었다면 가장 빛나는 아들, 너를... 그 일이 아니었다면 너를 얻을 수 없었어. 그래서 나는 그 일을 참회하지만 후회하지는 않아. 네 형 아도니야가 저지를뻔 했던 그 일도 사실 그 아이의 잘못이 아니다. 혼내지 않고 애들을 감싸기만 하면서 잘못 가르친 이 아비의 죄가 크니까 부디 네 형을 불쌍하게 여겨다오. 그리고 요압 그자를 반드시 죽여라. 그자는 지나치게 잔인해서 무고한 사람들을 수없이 죽였다. 왕이 바뀌어도 그런 악한자가 계속 권세를 누린다면 백성들이 새 왕인 널 미워하게 될 거다. 그자가 필요한 시대는 이제 끝났다. 그리고 가여운 우리 아비삭에 대해서도 유언장의......"
다윗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솔로몬은 고뇌에 빠질수록 아버지의 목소리가 더 생생하게 들리는 듯했다. 무거운 발걸음은 저절로 어머니의 처소로 향했다. 어머니라면 이 혼란스러운 마음을 이해하고 해답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밧세바는 솔로몬을 따뜻하게 맞이하며 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폐하, 힘들어 보이시는군요."
솔로몬은 어머니의 품에 기대어 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의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어머니, 제가, 제가 무슨 짓을 한 걸까요?"
밧세바는 솔로몬의 등을 토닥이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폐하. 왕은 원래 외로운 자리입니다. 선왕 폐하께서도 수많은 고뇌 속에서 힘든 결정들을 내리셨습니다. 폐하께서는 오늘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셨을 뿐입니다. 힘들 때마다 그날 성벽 위에서 어미가 했던 말을 떠올리세요."
밧세바는 잠시 멈추고 솔로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아비삭 그 아이는 이 어미가 잘 돌볼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곧 폐하께 다시 돌려보내 드리겠습니다."
열흘 동안 아비삭은 물만 겨우 넘기며 꺼져가는 등불처럼 눈물만 흘렸다. 실낱같은 희망조차 보이지 않는 깊은 절망 속에서, 그녀는 오직 아도니야만을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을 극심한 고통에서 해방시켜달라고 신에게 기도했다. 솔로몬과 밧세바의 지극한 돌봄이 효과가 있었는지 아니면 기도에 대한 신의 응답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열흘째 되던 날, 아비삭은 마치 언제 슬펐냐는 듯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솔로몬에게 안겼다. 그녀의 미소는 누구나 감탄할 만큼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예전과 같은 깊이를 알 수 없는 호수 같은 눈빛과 신비하고 고혹적인 느낌은 사라져 있었다. 마치 성령은 떠났지만 화려한 외형만 유지하고 있는 성궤를 연상시켰다. 지혜로운 솔로몬은 아도니야의 처형 이후에 자기가 동경하고 갈망해왔던 "그 아비삭"을 얻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는 걸 이미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는 영혼이 빠져나간 그녀라도 가지고 싶었고 실제로 그렇게 소유했다. 그러나 그런 대안적인 애정에서 그는 별 다른 해갈을 얻지 못했다. 냉정히 생각해보면 세상에 아름다운 여자는 많고 "그 아비삭"이 아닌 뭔가가 빠져나가버린 아비삭은 가장 존귀한 왕의 지위에서라면 얼마든 대체가 가능한 존재였다.
아비삭이 솔로몬에 처음으로 안기고 난 지 일곱 달 반이 지났을 때 아비삭은 다윗의 눈매를 빼다 박은 듯한 건강한 딸을 출산했다. 솔로몬은 찜찜한 마음이 앞섰지만 사람들 앞에서는 과장된 웃음을 보여주며 유난히 큰 목소리로 "사랑하는 내 딸"이라고 외쳤다. 그러면서도 딸의 이름은 아기의 첫번째 생일 때 선물하겠다며 지어주지 않았다. 다윗 같은 눈매와 아비삭의 아름다움을 물려받은 건강하고 귀여운 그 아기는 혼자서 뒤집기를 성공했던 다음 날 아침 요람에서 싸늘하게 식은 채로 발견된다.
솔로몬은 이후에 700명의 왕비와 300명의 후궁을 거느린다. 그럼에도 솔로몬은 아비삭이 그의 마음 속에 만들어 놓은 조그만 생채기에서 번져나가기 시작한 갈증과 공허감을 끝내 채울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