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 오경을 지나서 현재는 역대기까지 읽었다. 앞서 작성했던 모세 오경에 대한 글과는 달리 웃음기를 빼고 소감을 적어본다.
가장 뚜렷하게 반복되는 특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꾸만 야훼에게서 거리를 두고 싶어 한다는 점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야훼에게 은혜를 입었으면서도 끊임없이 바알이나 아세라, 아스다롯 같은 다른 신을 섬기게 된다. 그것은 마치 중력과 같아서 신이나 선지자들의 의도적인 개입이 없으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다른 신에 대한 신앙에 끌리곤 했다.
유교적 관점에서 사람들은 덕이 있는 자를 따르고 그렇지 않은 자에게는 떠난다. 덕을 유교가 강조하는 "인의예지신"이라는 개념에 한정할 필요는 없다. 덕의 정의를 사람들을 감화시키고 따르고 싶어하게 만드는 도덕적 경지로 보편화하더라도 그 의미가 흐트러지지는 않는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그런 덕성을 보이는 존재에게 자연스럽게 끌리고 존경과 경외심을 품게 된다. 그러나 구약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꾸 신에게서 멀어지려는 경향을 보인다. 이런 사실은 신이 그러한 덕성과는 거리가 있는 존재가 아니었을까라는 의심을 하게 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신으로부터 멀어지려는 본능이라도 있는 것처럼 끈질기게 배교를 하는 실수를 반복했으나 신은 자신을 믿지 않으면 가혹한 벌을 주는 방법을 통해서 결국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을 지켜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재난이 닥치면 그것을 신의 징벌로 받아들이고 신을 다시 섬기곤 했다. 신의 덕성에 감화되어 자발적으로 숭배했다기보다는 벌을 받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섬긴 셈이다. 그러다가도 야훼의 개입이 없으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또다시 바알, 아세라 등 풍요를 약속하는 인자한 신들에게 자연스럽게 끌려가곤 했다. 반면에 이후에 등장한 예수의 가르침은 그 자체의 덕성만으로 사람들의 공감과 자발적인 신앙심을 만들어 냈다. 예수를 따르는 초기 신자들은 신의 처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강제로 신앙을 이어간 것이 아니라 신앙을 박해하는 인간에 대한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예수에게 감화되어 그를 섬겼다.
구약의 신과 인간 사이의 상호작용을 돌아보면 광야를 떠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 제공하거나, 엘리야와 엘리사를 통해서 가난한 여인에게 기름이나 밀가루를 약간 준 것 같은 소소한 은혜도 있었지만 그것은 신의 무한한 권능에 비하면 보잘것 없는 규모였다. 신이 발휘한 권능의 대부분은 파괴적인 일들 뿐이었다. 그리고 신이 친히 인간에게 어떤 지시를 하거나 권능을 발휘하는 사유는 일반적인 도덕의 회복이나 권장보다는 자신에 대한 인간들의 순종 여부에 대한 문제들이 대부분이었다. 신이 이스라엘 사람을 축복할 때는 이스라엘인에게 좋은 것을 베풀기보다는 이집트인, 가나안인, 블레셋인, 아시리아인 같은 이민족을 죽이는 방법을 선택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인을 징벌할 때는 이스라엘인을 죽였다. 신의 특기는 살인과 재앙이었고 신의 개입은 행복보다는 누군가의 죽음과 불운을 의미했다. 바알과 아세라 같은 이민족의 신이 '풍요와 다산의 신'이라면 야훼는 '죽음과 재난의 신'인 셈이었다. 심지어 신으로부터 내려진 소명이 '최대한 많은 수의 블레셋인을 살해하는 것'이었던 삼손 같은 사사도 있었다. 신이 인간에게 베푼 시혜는 자신의 특기가 아닌 분야의 일이었다. 최첨단 화기들로 무장한 특공대원이 피난중인 굶주린 아이들에게 주머니 속에서 건빵과 별사탕 몇 개를 꺼내서 주는 것과 유사한 면이 있다.
애초에 야훼는 아브라함과 언약을 할 때 그의 후손을 번성케 하고 넓은 영토를 줄 것을 약속했다. 즉 아브라함의 마음을 얻기 위해 자신의 적성에 잘 맞지 않는 다산과 풍요라는 컨셉으로 약속을 했던 셈이다. 하지만 이후 유대인의 역사를 보면 그것이 잘 이행된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야훼를 섬기지 않은 주변 민족들인 메소포타미아, 아나톨리아 그리고 심지어 모세 앞에서 신과의 계약을 정면으로 거부했던 이집트가 풍요와 다산의 관점에서는 이스라엘보다 오히려 훨씬 좋은 성과를 누렸다. 차라리 "나를 믿고 섬긴다면 나의 권능으로 너의 적을 모두 살해하겠다."라고 정직하게 계약을 하는 것이 어땠을까? 그랬다면 이스라엘인들이 자신들의 신에게 기대하는 바가 달라져서 풍요를 약속하는 다른 신들에게 현혹되는 일이 크게 줄지 않았을까?
또한 신과의 계약은 불공정한 면이 있다. 인간이 계약을 위반하면 신은 인간에 대한 징벌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신이 계약을 위반하는 경우 인간은 신에게 어떠한 페널티도 가할 수 없다. 인간에게는 다만 신을 떠나는 방법만이 남아있을 뿐인데 그렇게 하면 신은 계약 위반을 이유로 인간에게 해악을 가한다. 또한 신은 시간을 초월한 존재이지만 인간은 짧은 생을 살 뿐이라는 점도 계약의 이행 가능성을 낮추게 한다. 신이 계약에 따른 자신의 의무를 200년 후에 이행한다면 계약 당사자는 어떠한 이익도 없이 신을 일방적으로 섬기기만 해야 한다. 실제의 인간은 민족이나 인류 같은 추상적인 하나의 덩어리가 아니라 한 명 한 명이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개체다. 계약의 상대방인 인간이 신에 대한 의심을 품을 수 없게 하려면 신은 더 부지런했어야 했다. 신은 자신을 섬기지 않는 것을 가장 심각한 악으로 여겨서 가장 가혹한 벌을 내리곤 했다. 달리 말하자면 신이라는 존재가 없어져서 아무것도 섬길 수 없게 되면 가장 큰 죄악 역시 존재할 수 없게 됨을 의미하기도 한다.
구약의 신을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이 자비로운 존재인 것처럼 말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신의 판단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차원의 심오함이 있기 때문에 인간의 관점에서 판단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물론 그럴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런 문제들은 신 혼자만의 계획이 아니라 인간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당사자인 인간도 이해할 수 있는 해명은 필요하다. 신은 인간보다 지적인 역량이 높은 존재일 것이다. 사람이 애견과 소통할 때는 애견에게 사람의 수준에 맞출 것을 요구하지 않고 사람 자신이 개의 지적 수준과 시각에서 애견이 무엇을 바라는지를 알아내려고 한다. 인간이 신을 이해할 수 없다면, 신 역시 애견을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만큼이라도 애정과 참을성을 발휘해서 인간에게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해명을 하는 것이 바람직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단지 인간의 한계 때문에 신의 뜻을 이해할 수 없다는 주장은 무지에의 호소, 신비에의 호소, 입증 책임의 회피이다. 그리고 신은 반드시 선하고 현명한 존재여야만 한다는 확증 편향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막상 성경을 읽어보면 그들의 해명과 달리 신은 별로 자비롭지 않다. 신의 자비라는 것은 은혜라기보다는 괴롭히지 않음을 의미할 뿐이다. 그리고 잘못을 깨우치고 뉘우쳐도 반드시 벌을 내린다. 특히 고약한 것은 그 죄를 저지르지 않은 사람에게도 그 벌이 내려진다는 점이다. 평생 신에게 쓰임을 당하면서도 사소한 실수 때문에 결국 가나안 땅을 밟지 못했던 모세, 황금송아지를 숭배한 죄를 저지른 사람들은 이미 모두 죽임을 당했음에도 그들 주변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평생 광야에서 고생한 이스라엘 백성들, 신에게 진심으로 빌고 회개해도 결코 어떠한 용서도 받지 못한 사울, 다윗과 밧세바의 죄에 대한 징벌로 목숨을 잃은 다윗과 밧세바의 첫째 아기와 아버지의 죄값을 대신 치르게 된 솔로몬을 제외한 다윗의 여러 아들들, 밀곰, 그모스, 아스다롯, 몰록 같은 이민족 신을 숭배했던 솔로몬에 대한 처벌을 대신 받은 솔로몬의 아들들 등등 당장 생각나는 사례들만 나열해도 이렇게 많다. 그 밖에도 다윗이 저지른 인구조사 때문에 전염병으로 목숨을 잃은 7만 명의 이스라엘 사람들 등등 신의 공정함이나 자비로움을 의심케 하는 예시는 그 이후 시대에도 성경에서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그래서인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염병, 기근, 자연재해, 외적의 침입 같은 형태로 집단에게 가해지는 신의 징벌이 얼마든지 죄 없는 자신에게도 옮겨 붙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져서 신을 제대로 섬기지 않는 사람들을 살해하는 식으로 공동체를 정화하곤 했다. 영화 풀 메탈 자켓 전반부에서 "뚱땡이(gomer pyle)"로 불리는 훈련병 때문에 하트먼 상사에게 단체 기합을 받은 게 분했던 동료 훈련병들이 양말에 비누를 넣어서 자고 있던 그를 집단적으로 린치하던 장면을 연상시킨다.
구약의 신은 보편적인 윤리관보다는 자기를 따르는지 여부를 선악을 구분하는 더 중요한 잣대로 여겼다. 예컨대 여호수아 2장에서 창녀 라합은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위해서 자신이 속한 공동체인 여리고의 운명을 적의 손에 넘겼다. 라합은 자기 혼자 살아 남으려고 이웃과 민족을 팔아먹은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그렇게 라합은 다윗의 선조가 되었고 이후 천여년이 지나서 히브리서와 야고보서에서 의로운 사람처럼 평가 받는다. 이렇듯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이었던 구약의 신은 도덕적 관점에서는 같은 시대인 bc 13세기에 존재했던 타 종교의 망나니 같은 신, 제우스에 비해 특별히 고결한 존재로 볼만한 문헌적 근거는 없어 보인다. 다만 야훼 신앙은 종교의 실체를 유지하면서 오래 살아남았고 이후에 예수의 희생과 함께 성숙하고 고결한 교리로 발전되어 사람들의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존중과 숭배를 받게 되었을 뿐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대의 일부 전도자들은 예수의 고매하고 거룩한 가르침을 전파하기보다는 징벌과 잔혹함을 강조하는 구약과 요한계시록을 악용한 공포 마케팅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신앙이란 논리가 아닌 이끌림의 영역이다. 이미 현대적 자유와 평등, 개인의 책임에 익숙해진 계몽된 사람들에게 성경 구절을 그런 식으로 악용하여 위협하는 방식은 적절하지 않다. 사람들은 그런 협박을 유치하다고 여기면서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가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두려움 때문에 신앙을 시작한다고 하더라도 틈만 나면 신에게서 떠나려고 했던 이스라엘 백성 같은 처지가 될 뿐이다. 중요한 건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따르고 싶게 만드는 덕과 매력이다. 구약 시대와는 달리 불신자들에 대한 신의 징벌도 실재하지 않기 때문에 해악의 고지보다는 이끌림과 감화가 훨씬 적합성 높은 전도 방법일 것이다. 따라서 그들을 신앙의 길로 이끌기 위해서는 사랑과 희생을 보여준 예수의 길을 전도자가 스스로 따르는 모습을 보여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느끼게 함이 효과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