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은 이스라엘 최초의 왕이다. 이스라엘 각 지파의 장로들이 이스라엘에도 왕이 필요하다고 사사인 사무엘에게 지속적으로 요청해서 왕으로 선정된 사람이다. 사무엘이 신에게 왕을 정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신은 "나를 섬기기보다 왕을 섬기고 싶어 하는구나. 맘대로 해보거라"라는 취지의 대답(사무엘기상 8:7)으로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면서 왕으로 사울을 지명했다.(사무엘기상 9:15~17) 신의 미지근한 반응은 어쩌면 영웅 기드온의 아들이면서 세겜의 왕을 자처했던 사악한 아비멜렉이 저질렀던 폭정과 혼란에 대한 부정적 기억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신의 선택을 받은 사울은 나름 훌륭한 왕이었다. 용감하게 적들을 잘 물리쳤고 심성도 곧았다. 그러나 그는 신의 변덕 때문에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 같은 처지가 된다. 사울은 신이 떨떠름한 상태로 지명한 사람이었다. 신에게 사울은 별로 예쁜 구석이 없었다. 신은 한 번만 걸려봐라 하는 태도로 사울의 실책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블레셋의 침공이 있었을 때 사울은 이스라엘의 승리를 위해서 신에게 번제를 올렸다. 사울이 무작정 제사를 지낸 것은 아니고 제사장 사무엘이 오기로 한 날까지 기다려도 오지 않자 어쩔 수 없이 지냈던 것이다.(사무엘기상 13:8~11) 병사들은 공포에 떨었고 리더로서 그는 무엇이든 시도해야 했다. 그러나 사무엘은 마치 관료주의로 똘똘 뭉친 공무원처럼 당신 권한이 아닌 일을 했다고 사울을 비난했다.  사무엘은 신의 이름으로 사울의 폐위 선언을 했다.(사무엘기상 13:14) 잘못의 원인은 늦게 온 사무엘에게도 있었는데 페널티는 온전히 사울이 덮어쓴 것이다. 사무엘이 사울을 진정 원팀으로 생각했다면 신에게 자신의 잘못도 있으니 사울을 용서해 달라고 빌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무엘은 그러질 않고 사울을 포기했다.

 

그러나 현실의 권력이 있던 사울이 폐위 선언으로 권력을 곧바로 잃은 것은 아니었다. 이후 사울은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노획한 전리품을 전부 불태워서 신에게 바치지 않고 일부를 비축한다. 그것은 여호수아기에서 예리코 성의 전리품을 가로챘던 아간의 사례처럼 개인적인 착복은 아니었던 것 같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은 비용이 많이 드는 일이다. 이스라엘은 당시에 철기가 보급되지 않아서 이웃 국가들과의 전쟁은 무척이나 힘겨운 일이었다. 그 전리품은 다음 전쟁에서 곤란을 당하지 않을 대비책이었을 것이고 통치자와 행정가로서 그것을 전부 포기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행위는 신에게 또다시 사울을 몰아낼 빌미를 주게 된다. 사무엘은 또다시 사울에게 폐위 선언을 한다.(사무엘기상 15:26), 사울은 진심으로 간절하게 용서를 빌고 처절하게 사무엘에게 매달렸으나 사무엘은 가차 없이 그를 뿌리쳤다.(사무엘기상 15:28) 신의 대리인으로서는 그랬지만 그래도 사무엘은 인정이 남아있는 사람이었다. 간곡하게 호소하는 사울의 마음이라도 달래주기 위해서 아무 효과도 없는 경배를 드린다.(사무엘기상 15:31)

 

신은 다윗이라는 더 마음에 드는 왕제를 곧 찾아냈고, 사무엘을 시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지명한다.(사무엘기상 16:13) 그때부터 사울의 비극이 시작된다. 사울은 본래 의로운 사람이었다. 사울은 그 외에는 별다른 잘못을 저지르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다윗이 왕이 되는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사울은 악당이어야만 했다. 세겜의 포악한 왕 아비멜렉 때와 마찬가지로, 신은 이번에도 악령을 보내서 사울을 미치게 한다.(사무엘기상 16:14) 잔인한 폭군으로 알려진 사울이 저지른 비인도적인 악행은 모두 신이 보낸 악령 때문에 사울이 미쳐서 저질렀던 것일 뿐 의로운 사람이었던 사울의 자유 의지가 아니었다. 신은 그렇게 다윗의 찬탈에 명분을 심어주고 있었다. 단지 사울이 저지른 죄악 때문에 신이 사울을 버린 것이었다면 사울의 아들이면서 가장 고결한 영혼을 가졌던 요나단에게 양위하게 하는 정도로도 충분히 그 과오를 속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은 자신이 사랑하는 다윗을 왕으로 삼기 위해서 사울뿐만 아니라 어떠한 인격적 결함도 없었던 왕자 요나단까지 죽음으로 몰아간다. 무결한 신앙심과 품성, 혈통적 정당성, 그리고 뛰어난 재능까지 뒷받침되는 요나단이 살아남았다면 다윗을 왕으로 즉위시킬 명분이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다윗 자신부터가 형제나 다름없이 여겼던 존경하는 요나단을 제치고 왕위를 승계하길 거부했을 것이다.

다윗에 대한 신의 사랑은 예사롭지가 않다. 골리앗을 물리치게 해 줬고 사울의 위협으로부터도 보호해 줬고 마침내 왕으로 즉위시켰다. 신은 다윗을 너무 사랑해서 심지어 메시아까지도 다윗의 혈통을 통해서 보낼 작정이었다. 다윗에 대한 신의 무한한 애착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런 가설을 제시해 보겠다. 이스라엘 각 지파의 장로들이 신에게 왕을 요구했을 때 신은 “이미 내가 잘 다스리고 있는데 굳이…”라는 냉담한 모습을 보였다. 신은 당시에 왕으로 쓰기에 마땅한 사람을 아직 마련해두지 않았었다. 그래서 신은 왕으로 쓸만한 사람을 만들 필요를 느끼게 된다. 신은 아담을 만들 때의 집중력을 다시 발휘해서 역대 최고의 마스터피스를 만들어서 이새라는 사람의 가정에서 태어나게 한다. 그 마스터피스는 신 자신의 모습을 빼닮은 남자 다윗이다. 다비드상이 그렇게 완벽한 아름다움으로 묘사되는 이유는 바로 신이 심혈을 기울여서 다윗을 창조했을 것이라는 작가적 상상력이 작용했기 때문일 수 있다. 그리고 신이 가장 정성 들여 만든 인간, 다윗이 왕 노릇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왕 역할을 임시로 맡아줄 사람이 필요했다. 손쉽게 권력을 회수하여 다윗에게 넘길 수 있도록 임시 왕을 맡을 사람은 가장 미약한 지파였던 베냐민 파에서 찾아낸다. 그 임시방편 장기말이 바로 사울이다.

신은 사무엘에게 이새의 아들 중에서 자기의 ‘마스터피스’가 있으니까 그를 왕으로 만들라고 명령한다. 사무엘은 신의 뜻에 따라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의 자격을 부여한다. 그렇게 되자 사울은 이스라엘의 왕이라기보다는 다윗에게 시련을 주어 왕으로서의 자질을 가다듬게 하는 연마석 같은 존재로 전락해 버린다. 사울은 자신이 저지른 과오를 참회하고 신과 사무엘에게 비굴해 보일 정도로 비참하게 빌고 또 빌었지만 아무도 그를 용서하거나 동정하거나 구원하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고통을 당하다가 결국 비참한 최후를 받아들이게 된다. 신의 사랑을 독차지한 다윗은 밧세바 사건 같은 반인륜적인 잘못을 저질러도 참회를 하면 신은 대가를 치르게 하면서 자신의 소중한 자녀인 다윗을 용서했다. 다윗이 저지른 죄의 근원은 아름다운 밧세바에 대한 욕망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말로만 참회를 했을 뿐, 자신의 욕망에 끝까지 충실하여 밧세바를 곁에 두며 여생을 보냈다. 뿐만 아니라 솔로몬은 다윗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다른 신을 섬기는 심각한 배교 행위들에 대해서까지도 직접 처벌받지 않고 솔로몬이 죽고 나서 그의 자식대 가서야 처벌을 실행되었다. 용서받을 아무런 기회 없이 사울에게는 가차 없는 처분을 내렸던 점과는 크게 대조적이다. 

사울은 신에 의하여 이스라엘의 왕으로 지목되지 않았더라면 베냐민 지파의 존경받는 유력자 정도로 행복한 삶을 즐겼을 것이다. 본의 아니게 신과 엮여서 버려지는 카드로서 고통스러운 삶을 감내해야 했던 사울에게 나는 깊은 동정을 느낀다. 다윗은 사울이 신이 보낸 악령에게 시달릴때마다 곁에서 수금을 연주해서 그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줬던 경험이 있다. 아마도 사울은 그때마다 다윗에게 감사를 표하며 자신의 고통과 과거의 잘못에 대한 회한을 말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다윗은 아마도 누구보다도 사울의 고통과 본심을 이해하고 그에 대한 깊은 연민을 느끼게 되었을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다윗은 사울에게 목숨을 위협을 당하는 상황에서 사울을 해칠 수 있는 기회가 몇 차례 있었음에도 차마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 같다.

Posted by 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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