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불교의 윤회 개념
한국에서 '윤회'라는 개념은 불교를 통해 널리 알려져 있다. 이로 인해 윤회가 불교에서 기원한 것이며, 불교의 교리를 완결성 있게 하기 위해 고안된 개념이라는 흔한 오해가 존재한다. 그러나 실제로 윤회는 불교가 창시한 개념이 아니며, 불교의 교리는 기존에 존재하던 윤회의 의미를 오히려 축소시켜 번뇌를 극복하려 한다.
불교는 '나의 영혼이 어딘가에서 다시 태어난다'는 직관적인 윤회의 관념과는 다른 방식으로 윤회를 설명한다. 불교는 윤회를 영혼의 환생이 아닌 '무아'의 관점에서 업의 연결과 인과응보의 원리로 설명한다. '무아'란 영원불변하는 자아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 속에 있다는 불교의 핵심 교리이다. 많은 불교 재가 신자들은 현생에서의 해탈을 출가자에게나 어울리는 높은 목표로 보고, 내세에 좋은 곳에서 태어나는 보다 쉬운 목표를 지향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는 윤회를 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속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불교 교리와 상충하는 셈이다.
윤회라는 개념은 석가모니가 창시한 것이 아니라, 석가모니가 살던 시절에 이미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세계관이었다. 전통적 윤회관에 따르면, 선업을 쌓으면 내세에 나와 동일성을 가진 영혼이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고, 악업을 쌓으면 나쁜 환경에서 태어난다. 이러한 원리에 따라 베다, 우파니샤드 등 힌두교 경전에서는 영원불변하는 자아인 아트만이 육체를 바꿔가며 윤회한다고 설명한다. 즉, 전생과 현생, 내세의 '나'는 아트만이라는 동일한 실체를 공유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현재 하는 선업은 미래의 “나”에게 주는 선물이 된다.
그러나 불교는 아트만과 같은 영원불변하는 자아를 부정하며, 물질(색), 감각(수), 지각(상), 의지(행), 의식(식)을 의미하는 오온의 연기와 상호작용으로 자아가 형성된다고 본다. 불교는 윤회를 아트만의 윤회가 아닌 업의 윤회로, 그리고 인과응보의 원리가 작용하는 과정으로 해석한다. 즉, 내가 쌓은 업장은 나와 동일한 영혼을 가진 존재에게 상속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존재의 형성에 영향을 미치는 인과 관계의 씨앗이 된다.
유식불교에서는 과거의 행위가 마음에 잠재적인 경향(훈습)으로 남아 다음 생에 영향을 미치고, 모든 경험과 정보가 저장된 심층 의식(아뢰야식)이 다음 생으로 이어진다고 설명한다. 비유하자면, 나는 전생에 작성된 아뢰야식이라는 노트를 이어받았고, 살아가면서 체험한 훈습으로 그 노트에 기록을 이어간다. 내가 죽으면, 그렇게 기록된 노트는 내세에 오온의 상호작용으로 생성된 또 다른 존재에게 넘어간다. 불교의 해탈은 이 노트를 넘겨받는 주체가 나와 동일하지 않다는 점, 즉 무아를 깨닫는 것이며, 또한 그 노트에 적힌 내용, 즉 아뢰야식의 번뇌를 수행을 통해 소멸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아트만이라는 연속된 실체가 잠재된 기억을 가지고 윤회한다는 힌두교의 윤회관과는 명확히 구분된다.
석가모니는 윤회로 인해 발생하는 영원히 지속되는 번뇌에서 벗어나는 길을 제시했다. 윤회 자체를 부정했다면 이러한 번뇌는 발생하지 않았겠지만 당시 윤회는 마치 만유인력의 법칙처럼 절대적인 진리로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석가모니는 이 문제를 윤회의 틀 안에서 다뤄야만 했고 그 해결책으로 무아를 도입한 것이다.
불교의 윤회를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해 이런 예시가 가능하다.
젊어서 가난했지만 열심히 노력해서 큰 재산을 이룬 노인이 있다. 젊어서는 고생만 하다가 늙어서야 겨우 달성했다.
그는 별다른 호사도 누려보지 못하고 죽었는데 다행히 그의 자식과 손자들이 재산관리를 잘해서 날려먹지는 않았다.
그가 죽고서 그를 구성했던 오온은 흩어졌다. 새로운 오온이 그의 아뢰야식에 훈습된 업에 따라서 재조합되어서 그의 증손자가 형성되었다.
그의 아뢰야식을 바탕으로 형성된 그 증손자는 그가 벌어놓고 자식과 손자가 유지한 막대한 재산으로 호사를 누리며 살아간다.
또한 그의 아뢰야식에 쌓인 업 덕분에 근면하게 돈을 버는 습관도 남아있다.
두 인격은 별개이고 자아의 연속성은 없다.
그러나 업을 이어받았다는 면에서 그에서 그의 증손자로의 이어짐을 불교에서는 윤회라고 본다.
죽기 직전의 그의 입장에선 이렇게 한탄할 수는 있다.
"젠장 나는 죽을 고생으로 이룬 재산으로 정작 호사를 부리지 못했지만 내 윤회의 결과인 증손자녀석은 즐거움을 누리게 될거야. 그게 나라는 자아가 느끼게 되는게 아니라니까 시셈이 나는군. 잘 살아라. 사랑하는 증손자 녀석아..
어차피 나에 대한 이런 집착이 있으니까 윤회를 피할 수 없는 거겠지.. 큭큭큭."
2. 무아와 허무 그리고 중도
현대 사회는 과거에 비해 무상과 무아를 보다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좋은 환경이 되었다. 현대인은 물질 문명과 사회 제도, 가치관 등의 급격한 변화를 몸소 겪으면서 무상에 대해 어렵지 않게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윤회에 대한 믿음이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선택사항이 되었다는 점 역시 무아의 이해에도 영향을 미쳤다. 즉, 윤회를 부정하면서 죽으면 그만이라는 주장에 쉽게 동조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런 관점에서 석가모니를 본다면 윤회라는 기존 세계관을 존중하면서도 무아를 통해서 죽으면 그만이라는 뜻을 간접적으로 전하고자 한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내세에 존재하게 될 것은 “나”가 아니라 나의 업에 의한 인과의 결과물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즉고가 영원히 지속된다거나 현세의 내 잘못 때문에 미래의 “나”가 고생을 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이는 윤회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해탈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는 동시에, 윤회라는 개념 자체에 얽매이지 않는 사고방식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만약 윤회라는 믿음 체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애초에 벗어나야 할 굴레도 없을 것이며, 해탈은 더욱 자유롭고 가벼운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따라서 윤회를 인정하지 않는 현대인은 무아를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현대에는 무상과 무아의 이해가 상대적으로 용이해져서 과거에 비해서는 해탈에 대해 이미 절반 이상 먹고 들어가는 셈이다. 하지만 윤회의 개념과 그것에서 파생되는 효과를 여전히 무시할수만은 없다.
윤회는 전통적으로 삶의 허무함을 극복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기능해 왔다. 고성제에서 고통의 종류를 정리한 8고와 고통의 성격을 정리한 3고에는 허무를 포용할 수 있는 개념이 포함되어있지 않는다. 윤회를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허무는 잘 느끼기 어려운 유형의 번뇌였기 때문일 것이다. 윤회를 믿는 사람들은 삶의 고통과 상실에도 불구하고 다음 생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윤회를 믿지 않는 현대인들은 삶의 유한성을 자각하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하는 과제에 직면한다. 그러나 그 과제를 해결하는데 실패하면 허무가 찾아오게 된다.
그리고 내세를 부정하더라도 인과의 원리는 여전히 작용하여, 나의 업은 내세 뿐만 아니라 현세의 나에게 되돌아온다. 업은 다양한 방향의 인과관계로 퍼져나가지만 좁게 보더라도 내가 한 행동이 원인이 되어 어떤 결과로 나에게 되돌아오는 경우도 있고 나의 행동이 습관이 되어 계속 반복될 수 있다. 그런 점은 현세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번뇌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이러한 업장을 소멸시켜서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그렇다면 현대인들은 어떻게 불교의 가르침을 활용하여 해탈을 하고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질까? 윤회를 인정하든 하지 않든 불교의 가르침인 중도의 실천을 통하면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중도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양 극단에 치우치지 않으면서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 모두를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삶의 덧없음과 고통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삶의 기쁨과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균형잡히고 초월적인 시각을 통해 허무함을 줄일 수 있다. 또한 과거에 대한 후회나 미래에 대한 불안에 사로잡히지 않고, 현재에 집중하는 삶을 강조한다. 현재에 충실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갈 때, 허무함을 느낄 여유가 줄어들고 삶의 만족도가 높아질 수 있다.
중도를 실천하려면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자비와 이타심이 필요하다. 타인을 위한 봉사와 나눔을 통해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고, 허무함을 극복할 수 있다.
이렇듯 윤회에 대한 믿음과 관계없이, 불교의 중도 수행은 현대 사회에서도 개인의 고통과 허무를 극복하고 진정한 행복을 찾는 길을 제시할 수 있다.
부록: 팔정도 수행과 허무 극복 (제미니 1.5 프로)
1. 정견(正見): 바른 견해는 세상과 삶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통해 허무의 근원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준다. 특히 연기와 무아에 대한 이해를 통해 삶의 본질을 꿰뚫어봄으로써, 허무함의 근원적인 원인을 제거하는 데 도움을 준다. 삶의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영원불변하는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연기와 무아의 진리를 이해하면, 세상에 대한 집착과 헛된 욕망에서 벗어나 허무함을 줄일 수 있다.
2. 정사유(正思惟): 바른 사유는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생각을 통해 허무함에서 비롯되는 부정적인 감정을 극복하는 데 도움을 준다. 감사하는 마음, 타인에 대한 연민, 미래에 대한 희망 등 긍정적인 생각을 꾸준히 함으로써, 허무함에서 오는 우울감이나 절망감을 극복하고 삶의 활력을 되찾을 수 있다.
3. 정어(正語): 바른 말은 진실하고 따뜻한 말을 통해 자신과 타인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허무함에서 오는 고립감을 줄여준다. 험담이나 거짓말을 삼가고, 진심 어린 칭찬과 격려를 통해 타인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사회에 긍정적인 에너지를 전파함으로써, 허무함에서 오는 고립감을 해소하고 공동체 의식을 함양할 수 있다.
4. 정업(正業): 바른 행위는 윤리적인 행동을 통해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고, 허무함에서 오는 무기력함을 극복하는 데 도움을 준다. 자신의 재능을 활용하여 타인에게 도움을 주거나, 사회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삶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고 허무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
5. 정명(正命): 바른 생계는 정당하고 윤리적인 방법으로 생계를 유지함으로써, 삶의 안정감을 높이고 허무함을 줄여준다. 타인을 착취하거나 환경을 파괴하는 직업을 피하고, 자신의 능력을 통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함으로써, 삶의 안정감을 확보하고 허무함을 예방할 수 있습니다.
6. 정정진(正精進): 바른 노력은 끊임없이 수행하고 정진함으로써,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고 허무함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길러준다. 명상, 요가, 독서 등 자신에게 맞는 수행 방법을 통해 꾸준히 정진함으로써, 마음의 힘을 키우고 삶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내적인 힘을 기를 수 있다.
7. 정념(正念): 바른 마음챙김은 현재 순간에 집중함으로써, 과거에 대한 후회나 미래에 대한 불안에서 벗어나 허무함을 줄여준다. 일상생활에서 숨쉬기, 걷기, 식사 등 모든 행동에 집중함으로써, 과거의 후회나 미래에 대한 불안에서 벗어나 현재 순간의 삶에 충실할 수 있다.
8. 정정(正定): 바른 선정은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집중력을 높임으로써, 깨달음을 얻고 허무함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개발하는 데 도움을 준다. 명상 등을 통해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집중력을 높임으로써, 삶의 본질에 대한 통찰력을 얻고 허무함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