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락사 2044년

낙서 2024. 5. 13. 02:23

2044년 봄.

 

1.

서울 xx동 주민센터 복지 2팀

 

엄마요? 지금 요양병원에 누워계신지가 15년이네요.

처음에는 거동이 불편해져서 들어가셨는데 지금은 중증 치매라서 아무도 못 알아봐요. 국민연금이나 건강보험이나 예전처럼 별 도움이 되질 못해요. 그래서 엄마가 요양병원에 계신 게 경제적으로도 꽤나 부담스럽죠.

엄마는 정신이 온전하실 때 "내가 치매에 걸려서 아무도 못 알아보게 된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라고 말씀하시곤 했어요. 보건소에 문의해 보니 안락사법에 따르면 엄마는 신청 자격이 충분하다는 안내를 받았어요. 의료비 문제로 꺼내든 국가적 대책이 노인에 대한 안락사라니, 어찌 보면 명쾌하고 합리적이긴 한데 막상 당사자 입장에서는 선택하기가 간단하지가 않네요.

 

저도 고민이 많아요. 과연 엄마를 이렇게 보내는 게 맞는 건지. 엄마가 원하는 대로 해드리는 거긴 한데 그 말씀이 진심이었을까? 아니면 요양병원에 누워계시다 보니 속이 상하고 미안하시기도 해서 푸념을 하신 걸까 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엄마를 그렇게 보내는 게 내가 편해지려고 그러는 이기심 때문은 아닐까 라는 생각도 하게 되고요.

 

엄마를 보내드리면 나중에 보고 싶지 않겠냐고요? 그렇진 않아요. 이미 몇 년 전에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엄마가 건강하실 때 녹화해 놓은 영상으로 엄마의 아바타를 만들어줬어요. 그리고 엄마의 성격도 똑같이 재현을 해 놨지요. 그래서 내 입장에선 엄마는 매일 만나고 있어요. 그것도 건강한 상태로요. 사람들은 인공지능이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대체할 수 있겠느냐고 처음엔 이런 기술을 폄하했지만 지금은 아무도 그런 비판을 하는 사람은 남아있지 않잖아요. 시대착오적이죠.

요양원에 계신 진짜 엄마는 찾아가도 우릴 알아보지도 못하고 하니까 명절 때나 한 번씩 찾아가서 봐요. 어차피 찾아가도 내가 누군지도 몰라요. 매일 건강한 엄마를 보다가 노쇠하고 정신도 없는 엄마를 보면 마음이 아프고 괜히 찾아갔다는 생각을 매번 해요. 일종의 의무감 때문에 찾아가는 거지 보고 싶어서 찾는 건 아니에요.

 

마음이 착잡해서 신청서는 지금 못 쓰겠네요. 나중에 다시 올게요.

 

 

2.

인천가정법원 사건번호 2043준안3273

 

보건소에서는  제 신청서를 반려했어요. 안락사법 제23조 제3항의 요건에는 해당하지만 안락사위원회의 의견에 따라 거부할 수 있다는 단서에 걸린 거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나는 그만 살고 싶어요. 법정 요건을 충족했는데 위원회의 결정으로 그것을 거부할 수 있다는 점은 부당합니다. 저는 법정 요건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다리 근육 위축 시술까지 받아서 이젠 살아갈 힘이 더 없어졌어요. 왜 국가는 내 결정을 존중하지 않나요? 저는 이제 73세입니다. 간병인 생활은 지긋지긋합니다. 저는 비록 자식은 없지만 그래도 이 정도 간병인 생활이면 저출산 사회문제 극복에 대한 기여를 할만큼 했다고 자부합니다. 아직 평균 수명보다 20살 넘게 어리다지만 내 생각에는 살만큼 살았어요. 국가는 저를 배터리로 여기고 계속 쓰고 싶겠죠. 하지만 나는 이미 방전이 완료된 상태입니다. 게다가 날 억지로 살리더라도 쓸 수 있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아요. 제발 저를 폐기해주세요. 이건 인권 문제입니다. 재판장님. 제발 위원회의 결정을 취소시켜주세요.

 

 

 

 

인공지능의 의견으로는 1. 과 2. 의 주인공이 만나면 더 재미있는 이야기가 만들어 질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는데 나의 빈곤한 상상력으로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는다.

Posted by 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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