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에서 압사당한 사람들을 사망자로 부르는 게 맞을지 희생자로 부르는 게 맞을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단어의 정확한 뜻을 음미하기 위해서는 한자를 볼 필요도 있다. 그 단어를 이루고 있는 한자가 다른 단어에서 어떻게 쓰이는지를 살펴보면 그 단어의 뜻을 보다 깊게 이해할 수 있다. 다만 희생이라는 단어는 예외다. 희생 두 글자 모두 한자 1급 수준의 난이도인데 각각 그 한자가 사용되는 단어는 사실상 희생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희생 희', '희생 생'이므로 한자를 알더라도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찾아본 희생의 뜻은 다음과 같다.
1. 다른 사람이나 어떤 목적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 재산, 명예, 이익 따위를 바치거나 버림. 또는 그것을 빼앗김.
2. 사고나 자연재해 따위로 애석하게 목숨을 잃음.
3. 천지신명 따위에 제사 지낼 때 제물로 바치는, 산 짐승. 주로 소, 양, 돼지 따위를 바친다.
희생자가 아니라 사망자라고 해야 한다는 사람은 희생의 뜻을 1, 3번만 알고 2번은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는 입장이다. 희생자로 불러야 한다는 사람은 사전에 2번의 뜻도 있으니 희생자로 부르는 게 맞다고 주장한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알립니다'(공지사항)에 2014년 11월 10일에 작성된 "2014년3/4분기수정내용공개"(직접 링크 주소 못 가져옴) 게시물을 보면 희생자에 2번 뜻이 추가된 것은 2014년 3/4분기인 것을 알 수 있다. 링크가 되지 않으므로 게시물에 첨부된 pdf를 직접 올려본다
2014년은 세월호 사건이 있었던 해이다. 세월호에서 사망한 사람을 희생자라고 불렀을 때, 죽은 것은 애석하지만 타인을 위해서라거나 올바른 가치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것도 아닌데 희생자라는 표현이 적절한가라는 작은 논란이 있었던 기억이 난다. 국립국어원은 '자장면', '북엇국', '바라요' 같은 사소한 사안들에는 꽤나 완고했다. 약소국 컴플렉스가 있는지 피동형이 더 어울리는 표현까지도 무리하게 사동형으로 순화하려 들고 '닭볶음탕'이나 '우리나라'에 집착하기도 했다. 한편 장본인과 주인공을 문맥에 맞지 않게 쓰거나 '얇다'와 '가늘다'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처럼 잘못된 표현이 널리 쓰이고 있으면 국민들을 가르쳐서 바로잡고자 하기도 했다. 그러나 평상시와는 다르게 '희생자'에 대해서는 가르치려 들거나 완고하지 않았고 오히려 단어의 뜻 자체를 순순히 바꿔버렸다. '희생자'의 정의를 바꾸고자 하는 사회적 압력을 견디기는 어려웠던 모양이다. 표준국어대사전 희생자 항목의 2번 뜻이 삽입된 당시의 배경을 고려한다면, 국어사전에 기재된 정의를 근거로 사고로 목숨을 잃은 사람을 희생자라고 칭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순환논법에 불과하다. 특정한 목적을 위해 사전의 내용까지 바꾸는 것을 보면, 정확하게 매치되지는 않지만, 얼핏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이나 1984가 연상된다.
사망자는 희생자를 포함하는 개념이고 죽은 사람을 낮추는 의미가 없기 때문에 사망자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모르겠다. 멋대로 개정한 사전에 수록된 의미를 따라 희생자라고 부르더라도 죽은 사람의 명예는 조금도 올라가지 않는다. 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단지 애석하다는 뜻만 추가될 뿐이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거나 어떤 목적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 재산, 명예, 이익 따위를 바치거나 버린 사람에 대한 1차적인 감정은 존경과 경외감이다. 그리고 자기가 희생에 의한 수혜자라면 그 희생자에게 미안하고 고맙다고 느끼게 된다. 미안하고 고마운 사람이기 때문에 사망자라는 가치중립적인 표현은 배은망덕한 것이 된다. 예컨대 6.25 참전 국군 사망자보다는 6.25 참전 국군 희생자가 적절한 표현이다.
사고로 죽은 사람을 사망자가 아니라 희생자라 부르면 그 죽음의 목적성이나 이타성 여부와 상관없이 사전상 1의 의미도 같이 연상될 수 있다. 사실은 동음이의어에 불과하지만 같은 표기를 쓰기 때문에 은연중에 미안하고 고마운 의미가 스며들어 그 죽음은 얼렁뚱땅 도덕적인 우위를 얻을 수 있게 된다. 그 죽음의 부수적 효과로 수혜를 받는 사람은 희생자라는 표현을 통해 죽음의 권위를 높여 자신의 이익을 더 키울 수 있다. 그런 사람은 '희생'이라는 표현에 대해 표면적으로 2번 뜻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1번의 뜻으로 받아들이며 이익을 향유하면서 고인에게 고마워할 것으로 짐작된다.(타인의 마음을 정확히 읽을 수는 없으니 그렇게 짐작을 할 뿐) 타인의 죽음을 자신의 이익으로 악용하는 사람이 있다면 희생에 대한 그들의 관점은 자신들이 겉으로 내세우는 2번은 당연히 아니고, 1, 3중에서는 1번보다 3번 뜻에 가깝다고 짐작된다.(타인의 마음을 정확히 읽을 수는 없으니 그렇게 짐작을 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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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생각을 해보니 세월호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은 희생자가 맞다. 해운사의 탐욕, 선장 및 일부 승무원들의 태만과 어리석음 때문에 희생 당했기 때문이다. 국어사전의 1번 뜻으로도 충분했는데 무리하게 2번 뜻을 삽입한 것은 어리석은 결정이었다.
이태원 압사 사건도 조사가 진행되면서 경찰의 실책이 사건의 원인 중 한가지로 지적되고 있다. 경찰의 실책이 죽음의 원인으로 인정된다면 목숨을 잃은 사람은 희생자로 부르는 것이 옳아 보인다. 여기도 국어사전의 2번 뜻은 불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