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에 대한 책을 보다가 흥미를 느끼게 된 인물이다.
이원수는 율곡 이이의 아버지이자 신사임당의 남편이다.
4남 3녀의 아버지인데 자녀 중 선(종9품 남부참봉), 이(문묘 배향), 우(정3품 군자감정) 3명이나 과거에 급제했고 장녀는 작은 사임당으로 불린 화가 이매창이다. 급제자 명단에 없는 차남 번(璠)은 정5품 통덕랑을 제수받지만 거절(은덕불사)했다. 아마도 대가 제도(당상관의 정원이 차서 승진을 못한 경우 가족이나 친척에게 직책 없는 품계를 주는 것)를 통해 동생 율곡의 덕을 보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4형제는 각각 죽곡공파, 정재공파, 문성공파, 옥산공파의 파조가 된다.
뛰어난 부인과 자녀들을 두었지만 정작 이원수 자신은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었다. 이원수의 장인 신명화는 진사였고 강릉의 유지였다. 그는 가장 사랑하는 딸, 신사임당을 삶의 마지막까지 강릉에서 곁에 두고 싶었다. 명문가 출신이지만 별 볼 일 없는 재주를 가진 이원수는 신명화의 데릴사윗감으로 적합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신명화는 딸의 결혼 몇 달 후 사망한다. 신사임당은 강릉에서 아버지의 3년상을 치른 후 시집인 파주와 강릉을 왕래한다. 홀로 된 친정어머니를 돌봐야 했기 때문이다. 강릉까지 왕래가 어려워서 중간 지점인 평창에 거처를 마련해서 몇 년 살기도 한다.
이원수는 과거는 볼 때마다 낙방을 했는데, 수험기간이 길어져서 지쳤는지 공부에 그다지 열의는 없었던 걸로 전해진다. 부인은 그런 남편을 여러 방법으로 닦달하곤 했다. 그는 부인으로부터 공부를 위해 10년간 별거를 요구받기도 했다.
상처하기 1년 전인 50세에 그는 조운선을 관리하는 종5품 수운판관 직책을 음서로 맡게 된다. 당시 권신이었던 당숙 이기의 입김이 작용했을 거라는 평가가 따른다. 신사임당이 남편에게 이기와 너무 가까이 지내면 안 된다는 충고를 했고 이원수가 이를 받아들여 훗날 화를 면했다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와는 상반되는 행보다. 어쨌든 그 1년은 아마도 평생 유일하게 부인에게 떳떳한 남편이었던 시절이었을 것 같다. 다만 부부는 별거 중이었고 수운판관을 하면서 자기보다 20살 어린 권씨라는 주막집 주모를 첩으로 들이게 된다.
신사임당은 죽기 전에 남편에게 자기가 죽더라도 절대로 재혼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그는 부인이 죽자 첩 권씨를 집안으로 들이게 된다. 권씨는 서모가 되었으나 나이가 어려서 맏아들 이선과 또래였고 뼈대 있는 집안의 기품에 맞지 않는 행실로 가족들과 불화를 일으킨다. 귄씨의 등쌀과 어머니를 잃은 슬픔에 어린 율곡은 금강산으로 출가를 했는데 이원수는 천재였던 아들을 찾아가서 과거를 보라고 설득해서 하산시킨다.
이원수는 수운판관 이후에는 내섬시와 종부시 주부, 사헌부 감찰(종5품→종6품 강등?→정6품)에 역임했고, 신사임당이 별세한 1551년 5월 15일로부터 정확히 10년 후인 1561년 5월 14일에 사망한다.
훌륭한 아들 덕분에 훗날 종1품 숭록대부 의정부 좌찬성에 증직된다.
신사임당은 당대에도 명성이 높은 화가였고 이원수는 부인의 작품들을 손님들에게 보여주고 자랑하는 것을 좋아했다. 율곡 이이는 아버지에 대해 "진실하고 정성스러운 데다 꾸밈이 없으며, 너그럽고 검소하여 옛사람과 같은 풍모가 있다."라고 평했다.
이원수는 어떤 마음으로 일생을 살아냈을까에 대한 호기심이 상상력을 자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