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입학 예비소집 때 나는 약간 놀라 있었다. 얼굴에 엄청나게 큰 흉터가 있는 아이를 봤기 때문이다. 나는 일찌감치 내 자리를 찾아서 앉아 있었는데 그 아이가 내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저 녀석이 제발 내 옆에 앉지 않기를 바랬다. 어린 내 눈에는 그 아이가 괴물로 보였기 때문이다. 다행히 바로 옆에 앉지는 않고 한 두 칸 정도 띈 자리에 앉았다. 괴물의 옆자리에 앉은 다른 아이를 측은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저 녀석과 같은 반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실제로 6년 내내 그 아이는 나와 같은 반이 된 적이 없다. 그래서 그 아이에 대해 아는 게 많지는 않다.
저학년 때 그 아이는 따돌림을 당했다. 가끔 형들에게 별 이유 없이 얻어맞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비뚤어지지 않았고 좋은 성품을 유지했다. 괴물 취급을 받다보면 괴물이 되기 쉬워지는데 실제로 그렇게 되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자 애들은 그 아이가 괴물이 아니라고 알게 되었고 그 아이를 친구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나는 그 아이와는 한 번도 말을 섞어본 적은 없지만 그 무렵에는 나 역시 예전에 느꼈던 혐오를 반성하고 있었다.
요즘은 '알고 보면 나쁘지 않은 사람'에 대한 혐오와 '알고 보니 나쁜 사람'에 대한 혐오를 같은 범주로 묶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 보니 혐오라는 단어 자체도 마치 절대악인 것처럼 오염이 되었다.
근거 없는 혐오를 물리치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혐오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정확한 정보 제공이다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특성이 정말 나쁜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혐오의 대상에 대해 제대로 알려고 하는 노력은 혐오에 정당성을 줄 수도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