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휘력과 한자

낙서 2021. 11. 29. 12:28

요즘 젊은 세대의 어휘력이 떨어진다는 기사를 종종 접하곤 한다. 그 원인으로 한자 교육이 부실하기 때문이란 진단이 나오기도 한다. 한자를 많이 알면 얼핏 어휘력 향상에 도움이 되기는 할 것 같다.  80년대 까지만 해도 한자를 모르면 신문이나 책, 공문서 등을 읽을 수 없는 경우가 많아서 생활에 실제 불편이 따랐다. 어쩔 수 없이 한자를 알아야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기 때문에 한자에 익숙한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다만 예전 기억을 떠올려 보면 학교에서의 한자 교육은 한자를 익혀서 국어 능력을 향상시키기는 것이 아니라 한문학 교육이었다. 한시나 고전문학을 원문 그대로 능숙하게 읽는 것과 현대 국어를 잘 이해하는 것은 별 상관이 없는 것 같은데 학교의 한자교육이 부실해서 젊은이들의 어휘력이 떨어졌다고 단정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 같다.

 

책을 보다가 '공천'이라는 단어가 눈에 띄였다. 한자로 '공'은 알지만 '천'은 읽지도 쓰지도 못한다. '공천'을 어떻게 읽고 쓰는지도 모르고 사전에서 찾아본 적도 없지만 그 뜻은 잘 알고 있다. 누적된 경험으로 '공천'이란 단어를 어디에 쓰는지를 자연스럽게 알게 된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뜻은 정당에서 선출직 후보자를 내는 것이고 사전에서의 뜻도 다르지 않다. 기본적인 뜻을 알기 때문에 여기에 어떤 한자가 쓰였는지도 짐작할 수 있다. 공은 "공공"이란 단어에서 가져온 것일테고 "천"은 천거, 추천에서 가져왔을 것으로 짐작했는데, 사전을 찾아보니 맞는다.

 

한자를 쓸 줄도 읽을 줄도 모르지만 공천이란 단어의 뜻을 알거나 이해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오히려 언어생활로 누적된 경험 없이 公薦이라는 한자만 봤다면 '공적으로 추천한다'는 뜻으로만 해석될 수 밖에 없다. 공기업, 준정부기관의 임원은 '임원추천위원회'(이 역시 한자로 읽거나 쓸 줄 모르고 처음 보는 단어지만 뜻을 아는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의 추천을 받아서 임명된다. 공기업 임원은 공적으로 추천되지만 이를 '공천'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비슷한 예로 '구독'의 뜻을 한자로만 해석하면 '사서 읽는 것'이다. 그러나 유튜브 채널을 subscribe하는데는 돈이 들지 않고, 우유를 subscribe한다고 해서 우유를 읽는 것은 아니다.

 

이렇듯 한자를 많이 알면 처음보는 단어도 얼마든지 그 뜻을 알 수 있다는 식의 만능론에는 한계가 있다. 일상 생활로 만들어지는 언어 감각과 가끔씩 사전을 찾아보는 습관이 있다면 적절한 어휘력 유지에 굳이 한자가 필요하지는 않는 것 같다. 복잡한 한자를 읽고 쓰는 것 보다는 어떤 발음은 어떤 의미를 가진 한자에서 왔다는 것을 아는 정도면 충분하다고 보인다. 꽤 오래전부터 실생활에서는 발음만 알면 한자키를 누르는 것만으로 한자의 뜻을 알 수도 있고, 읽을 수도 쓸 수도 있게 되었다.

 

한편 한자가 필요한 영역이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개념에 대해서는 한자를 이용하면 간편하고 경제적으로 단어를 만들어낼 수 있다. 한자의 조어능력은 뛰어나다. 그러나 일단 만들어진 단어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는데 한자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한자를 읽고 쓰는 능력을 교육하는 것은 어떤 개념을 단어로 만들어내는 학자나 저술가들에게는 필요하지만 일반 대중에게는 그리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Posted by 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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