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동안 미뤄놨던 영화를 여러편 몰아서 봤다.
미뤘던 이유는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였다.
봤던 영화들을 열거하자면,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멀홀랜드 드라이브, 블루 벨벳, 이레이저 헤드
60년대 프랑스 영화 네멋대로 해라, 플레이타임이다.
멀홀랜드 드라이브나 블루벨벳은 딱히 재미있게 봤다고 하긴 어렵지만 영상미나 배우들의 연기력은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무자비한 혹평은 차마 할 수 없었다. 다만 나머지 영화들은 감상이라 하기엔 총체적 난국으로 느껴질만큼 보는 것이 고역이었다.
스스로 무식을 한탄하며 영화 리뷰들을 찾아보니 포스트모던, 라캉, 정신분석, 네오리얼리즘, 누벨바그 등 현대예술 관련 용어들이 쏟아져 나왔다. 즐기려면 공부를 해야 하거나 공부를 하기 위해서 보는 작품인 듯하다.
그렇다고 해서 리뷰 내용 중에 마땅히 흥미를 느끼거나 동조할만한 부분이 있지도 않았다.
"그래서 어쩌라고?" 내지 "굳이 왜 그래야 하는데?" 정도를 느꼈을 뿐이다.
꽤나 난해하기로 유명한 토리노의 말은 1배속으로 봤더라면 끝까지 보기 어려웠을 것 같은데 빨리감기로는 그럭저럭 볼만은 했다. 감상 후 해설까지 곁들이니 나름 훌륭한 작품이라 인정하게 된 점을 떠올려보면 상당히 대조적이다.
고급 취미를 즐기기 위해서는 익숙해지는 과정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바흐, 베토벤, 쇼팽, 라흐마니노프는 듣다 보면 훌륭한 음악이란 점을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다. 한편 쇤베르크, 프로코피에프는 익숙해질때 까지 여러 번 들어도 즐기기가 어렵다. 그렇다고 쇤베르크의 음악이 바흐 음악보다 고급 취향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현대예술은 태생적으로 고전 예술의 아름다움에 반발하며 새로운 것을 추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이데올로기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없는 자연스러운 즐거움을 느끼기 어려운 것 같다.
즐기기 어려운 음악은 플레이리스트에 남아있기 어렵고 나는 쇤베르크의 음악을 일부러 찾아 듣지는 않는다. 또한 4분 33초동안의 정적을 기다리기보다는 다음곡을 듣는다.
공부해야 즐길 수 있는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서 공부 안하고도 즐길 수 있는 더 훌륭한 작품들을 감상할 시간을 빼앗기는 것이 아깝다고 느껴졌다. 몇 달 전에 30분 쯤 보다가 낙오했던 스토커(1979)가 몸을 베베 꼬면서 끝까지 볼만한 가치가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내 수준에선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빨리감기로 보는 정도가 허세 없이 즐길 수 있는 한계치인듯 하다.
일부 창작자들과 추종자들의 취향은 존중하지만 그런 취향을 내가 따를 필요는 없고 그것이 내 취향보다 우월하거나 고급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우아한 바흐의 선율은 무식이 넘치는 나의 넉두리를 언제나 아버지의 마음처럼 감싸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