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를 기억하며

낙서 2017. 9. 7. 04:32

10여년 전 쯤 돼지를 키웠다. 잡아먹는 가축인 돼지가 아니라 뚱뚱해서 이름을 돼지라고 지어줬던 수캐였다. 돼지는 우리집에서 수십년간 살아왔던 백여마리가 넘는 개들 중에서 단연 가장 뚱뚱했다. 개로는 드물게 얼굴까지 살이 잔뜩 오른 녀석이었다. 처음 본 사람들은 개가 임신을 했느냐 묻곤 했다.

온순하고 착한 녀석이었다. 부르면 잘 오는데 귀찮게 굴지는 않았다. 땅을 파거나 물건들을 물어뜯는 등 주인이 싫어할만한 짓도 저지르지 않았다. 착해서라기보다는 귀찮아서였을 수도 있다. 덩치는 컸지만 다른 개들을 괴롭히지 않았는데 착해서라기보다 약해서였던 것 같긴 하다.


녀석을 보고 있으면 마치 전생이 인간이었고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듯 보였다. 개밥을 주면 다른 놈들은 급하게 뛰어와서 각자 밥그릇에 머리를 내밀고 정신없이 먹는데 열중했지만 녀석은 그걸 뒤에서 담담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마치 그까짓 개밥 많이 먹어서 뭐하나라고 생각하는 듯 보였다. 다른 개들이 다 먹고나면 천천히 걸어와서 나머지 개밥을 조용히 먹었다. 남기질 않았다. 그까짓 개밥을 먹어서 뭐하냐는 듯 행동했지만 어떤 개보다 많은 양을 먹은 셈이다.

예전부터 개밥은 하루 2번씩 줬는데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부터는 편의를 위해 아침에 많이 한번만 주게 되었다. 개들은 아침에 먹던 밥을 남겨놨다가 점심 저녁에 먹곤 했다. 그런데 돼지는 아침에 다른 개들이 남겨 놓은 그 밥을 혼자 다 먹어 치웠다. 다른 개들은 원치 않는 1일 1식을 하게 되었고 돼지는 점점 뚱뚱해졌다


짝짓기에도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다. 사람이었던 전생을 기억하며 수간을 하기는 싫다고 여겼을까? 가끔 저보다 훨씬 작은 암놈에게도 얻어터지긴 했다. 굳이 개하고 싸우는데 힘을 쓰기 싫었던 걸까? 돼지가 짝짓기 경쟁상대는 아니었지만 다른 힘센 개들은 발정기가 되면 서열을 확실히 알려주려는 듯 돼지를 괴롭히곤 했다.


개로 태어난 것 자체에 무기력을 느낀 듯 보였지만 돼지는 영리했다. 다른 개들이 밥먹는 순서로 기싸움을 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을 때 슬그머니 개밥그릇으로 걸어가서 밥을 먹곤 했다. 다른 개들의 서열 싸움에서는 휘말리지 않으면서도 밥은 가장 일찍 먹는 실질적인 승자가 된 셈이었다. 당시 장기 독재 중이었던 늙은 우두머리 개와 친하게 지내기도 했다. 다른 모든 개들을 핍박하던 늙은이가 유독 돼지하고만 친하게 된 내막을 알 수는 없으나 늙은 우두머리는 은근히 돼지의 뒤를 봐주었다. 나름 훌륭한 정치 수완이었다. 한편 늙은이 개는 나이가 들수록 몸은 쇠약해졌지만 노망이 든 듯 다른개들을 이유 없이 괴롭히기 시작했다. 밥을 못먹게 굴기도 하고 물을 목마시게 하기도 했다. 독재라는 표현을 쓴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 와중에도 돼지는 늙은 독재자 옆에서 편안하게 밥을 먹곤 했다.


압제에 시달리던 다른 개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쿠데타를 일으켜 쇠약해진 늙은 독재자를 집중 공격해서 실각시켰다.  늙은이는 권력은 잃었지만 아직 제 한 몸 지킬 힘은 남아있어서 다른 개들이 함부로 공격하지는 못했다. 여러 놈과 시비가 붙을 때면 자리를 피해버렸는데 여러 놈이 굳이 쫒아가서 공격하지는 않았다. 단독으로 시비를 걸다가 되려 얻어터지는 놈도 있었다.


그러나 권력 판도가 바뀐 이후 힘 센 두마리가 부역자를 처단하기라도 하는 듯 합세해서 지속적으로 돼지를 심하게 물어 뜯었다. 가죽이 벗겨지거나 피에 흥건하게 젖기도 하는 등 심하게 다치기도 했다. 전에는 발정기때만 괴롭혔는데 늙은이가 실각한 이후에 힘센 개들은 습관적으로 돼지를 고문하듯 집단 린치했다. 한번 호되게 물리고 나면 며칠씩 다리를 절곤 했다. 불쌍하긴 했지만 괴롭히는 개들을 묶어놓으면 하루 종일 짓고 울고 큰 소리로 소란을 부려 이웃에게 항의를 받게되는 상황이 되고 돼지가 물린 직후 물어 뜯은 놈을 제법 아프게 두들겨 패도 괴롭힘을 멈추지 않으니 주인으로서 마땅히 보호해줄 만한 방법이 없었다. 돼지가 덩치값을 해서 스스로 저항을 해보길 바랐으나 녀석은 비폭력주의 운동을 실천하기라도 하는 듯 얻어터지기만 했다.


힘 센 개들의 지속적인 괴롭힘에 돼지는 우울증에 빠진 듯 의기소침해졌고 자기를 괴롭히던 개 뿐만 아니라 사람까지도 무서워하게 되었다. 부르면 도망가고 따라가면 히스테릭하게 굴었다. 가죽이 벗겨져서 고깃덩이 같아 보이는 속살이 드러난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또 다시 피를 보는 게 일상이 되었으니 하루 하루가 지옥처럼 느껴졌을 것 같다. 그러던 어느날 대문이 열린 틈을 타서 가출을 한 후 되돌아오지 않았다.


돼지는 우리집에서 수십년간 살아왔던 백여마리가 넘는 개들 중에서 단연 가장 뚱뚱했다. 개로는 드물게 얼굴까지 살이 잔뜩 오른 녀석이었다. 처음 본 사람들은 개가 임신을 했느냐 묻곤 했다. 녀석은 맛있게 생겼다. 그리고 걸음이 아주 느렸다. 그래서 돌아오지 못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돌아와봤자 하루 하루가 지옥이었던 일상은 당분간 계속되었을 것이다. 인간이었던 전생의 기억을 가진 듯 굴었던 놈인데 지난 생의 업보가 많았는지 이번 생은 힘들게 보낸 것 같다.

Posted by 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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